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323화 (323/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22화

왕국 - Lv.4965 [더 시티즌](4)

[더 시티즌] 공략 준비.

사실 그런 건 필요 없었다.

우리 측에는 신이 셋이나 있다.

이 왕국에 이보다 더 강력한 유배자 전력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고로 준비라는 것은 단지 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한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다르게는 숨길 필요조차도 없었다.

신좌에 앉은 신은 다시 왕국으로 돌아올 수 없다.

그렇기에 죄수라 불리며 그렇기에 유배자들과 신은 어느 정도 대등하게 거래할 수 있다.

신은 수족이 필요하고 유배자는 권능이 필요한 비즈니스 관계.

만약 신이 지상에 존재한다면 성립할 수 없다.

신은 가장 강력한 유배자이며, 그는 그저 힘으로 찍어 눌러 원하는 것을 얻으리라.

죽기 싫다면 따라야 할 뿐인 문제다.

그래서 사실 신을 풀어놓는 행위는 매 회차마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건 게임 시절에도 그랬다.

그때도 왕국의 NPC 유배자들은 신좌 부품의 사용법을 아는 이가 없었다.

정말 드문 랜덤 인카운터로서 [게이머] 태그를 달고 그 사실을 아는 유배자가 존재한다면, 좀 많이 개판이 벌어졌었다.

희우가 거기까지 듣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오빠, 이제 그 게임 시절에라는 말 안 쓴다면서요.”

“헉, 입버릇이.”

내 입을 스스로 때린다. 이건 인식의 문제라기보단 습관의 문제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식으로 분석하는 게 공략에는 유효하잖아!”

“투정이에요! 떽!”

검지를 펴고 내 앞으로 가져다 대더니 저런 소리를 낸다.

그만 우스워져서 웃고 말았다.

“좋네요. 그런 웃음.”

“꾸밈없어?”

“가끔은 그렇게 느낀 적도 있어요. 그거까지 좋았지만, 그래도 이건 제가 어떠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빠의 문제니까요.”

“쓸쓸하다거나 그런 거?”

“그렇지 않았어요?”

사실 잘 모르겠다.

자연의 신의 말대로 나는 이 세계가 온전한 현실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인식의 전환이 현실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내게 주어진 과업은 여전히 존재하며, 나는 앞으로도 미궁을 클리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가 훨씬 더 두려워지기는 했다.

그리고 혹시 동료 누군가가 죽는다면 어떨까라는 두려움도 생겼다.

본래도 두려웠으나.

그것은 조금 다른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그대로였다면 언젠가는 에길 아저씨나 블랑쉐 언니가 슬퍼했을 거예요.”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가는 것이 있다면 오는 것이 있어야 한다.

내 파티원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삶에 충실했다.

그렇기에 단 하나뿐인 목숨으로, 진정 그 삶을 살아가며 미궁의 끝을 보기 위해 나에게 합류했다.

충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그들은 내 말을 따라 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과연 파티원들과 같은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고 있었던가.

그저 클리어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모은 고정 NPC 무리로 보고 있지는 않았는가?

진실이 무엇이건 그들에게는 다음 회차가 없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삶 그 자체의 각오로 나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땠을까?

내가 정말로 파티원이 죽었을 때.

죽은 이에게 바치는 애도를 보낼 수 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그저 클리어가 멀어졌음을 아쉬워했을까?

아이템 하나, 데이터 하나.

단지 그런 것이 지워졌음에 슬퍼했을까?

이 둘은 애초부터 스스로 구분하기 아주 힘든 감정이었을 것이다.

결국은 같은 상실감이니까.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쉽게 속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저번 회차의 내가 그토록 능수능란하게 모두를 통제하면서도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고꾸라진 것은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마도.”

희우가 내 볼을 붙잡고 쭉쭉 늘린다. 어린아이를 혼내듯이 말이다.

“그럴 거예요.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에요.”

그리고는 수줍게 덧붙였다.

“제가 아니게 만들어 줄게요.”

“으음. 확실히 인망은 나보다 네가 더 있는 것 같지.”

파티원 하나하나의 영입의 과정은 내가 설계하고 성사시켰지만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나인가를 묻는다면 대답하기 힘들다.

그건 사실 우리 서브 리더의 역할이다.

블랑쉐는 희우의 설득에 합류했으며 희우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다.

나에게도 아무런 감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오르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는 그저 또 다른 상관처럼 대할 뿐이다.

에길은 그의 목적을 위해 나에게 합류했다. 하지만 나와 감정적 교류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가 진짜 친우라 여기는 이는 블랑쉐와 제니, 그리고 전사로서의 아서 정도일 것이다.

나에게 바치는 존중이 거짓은 아니되, 친우의 것과 같냐고 한다면 분명히 다르다.

아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수월하게 파티 내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잡았다.

희우의 참모 정도 되는 존재다.

나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니 서브 리더인 희우의 부족한 점을 채우는 식으로 움직인다.

제니 역시 에길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내게도 때때로 의논하고 도움을 구하지만 마인드맵에 관해서나 그럴 뿐, 전사로서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는 결국 에길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도 희우와 미아는 다르다.

가족놀이라고 생각했던 처음에서, 이제는 나도, 이 둘도 서로를 가족이라고 여기는 마음이 분명 있다.

이 관계는 분명히 다른 파티원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만약 희우가 없다면.

그래도 모두 나를 따르긴 하겠지만 파티의 분위기가 이럴까?

아닐 것만 같았다.

“오빠 잘못은 아니에요. 너무 잘하니까. 누군가에게 의지할 필요도 교류할 필요도 없는 것 같으니까 저절로 그렇게 될 뿐이죠.”

“감정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너에게 그래.”

“그럼요. 언제 건 그러세요. 하지만 이제 다른 파티원들에게도 조금 나눠주세요.”

“그렇네.”

그나마 루시는 나를 제대로 봐주었다.

그녀에게 나는 유일한 대전사이며, 가장 흥미로운 파티원이었고, 고참의 고충을 공유할 수 있는 신도였다.

드디어 알 것 같다.

루시가 나와 희우를 보는 그 순간부터 이루어지는 때까지, 계속해서 정을 붙이라고, 연애 같은 거 해버려 하고 말해왔던 이유 말이다.

“거럼요. 사람은 혼자서 완전해질 수 없다구요!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말 몰라요?”

“아니, 그거 유명한 말이긴 한데…….”

“신쯤 되면 그게 보이나 봐요. 오빠에게 그런 게 없었다는 것.”

“그런가. 역시 오래 살면 뭔가가 보이는구나. 너도 보였어?”

“사실 전 안 보였어요. 하지만 막연하게 느끼고는 있었고, 듣는 순간 이해했죠. 오빠는 너무 완벽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때문에 불완전했던 거고요.”

“어려운 말 쓰는구나.”

“공부 열심히 했어요. 이제 돌아가서 시험을 쳐도 올백은 식은 죽 먹기에요.”

그건 아닐 것 같지만 이해는 했다.

자연의 신이 나에게 했던 말.

현실에 도착한 것을 환영한다는 말.

그 말은 나의 모든 태도, 행동, 방식을 지적하고 있었다.

나는 현실을 살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변명하더라도 삶에 진지하지 않았다. 이건 삶이 아니었으니까. 내 삶은 어디까지나 바깥에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누군가가 나에게 왜 미궁을 클리어하려고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항상 대답했다.

내가 게이머니까.

단지 그것으로 설명을 대체하려고 했던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결국 항상 이 세계를 모니터 너머로만 대해왔다.

지금 누가 어째서 미궁을 클리어하려고 하냐 묻는다면 나는 다르게 대답할 것이다.

멀린을 찾는 아서, 발할라를 찾는 에길, 바깥의 여동생들을 구하고 싶은 블랑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제니.

그리고 그 외에도 돌아갈 이유를 가진 무수한 유배자들을 위해서라고.

모두의 기나긴 유배생활을 끝내자.

불안은 없다. 어쩐지 지금은 낙관할 수 있었다.

이 게임이라 생각했던 것의 끝에는, 이 미궁의 끝에는.

틀림없이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삶이란 원래 미지다.

하지만 그것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어렴풋한 기억 속의 기획자 녀석.

이제는 진짜일지 환상인지.

혹은 진실로 신 같은 존재인지 모르겠지만.

그 녀석이 배드 엔딩을 넣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이 미궁을 끝낼 것이다.

모두의 해피엔딩을 위해서.

* * *

블랑쉐는 정서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상태였다.

“오르골, ‘오르골’? 아니, 나는…….”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 모습은 처음 왕국에 도착하고 만난 블랑쉐와 같다.

그러니까 삶을 포기하기 직전이라는 의미다.

어린 시절부터 행해진 세뇌는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트라우마다.

이건 희우가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블랑쉐. 지금 생각해야 할 건 그게 아니야. 가장 처음에 왜 나로부터 저 아이를 구하려고 했어?”

가리키는 방향에서는 희우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블랑쉐를 보고 웃는지 나를 보고 웃는지.

“나는…….”

블랑쉐가 시무룩해졌다.

완전히 무언가 내려놓은 것은 아니다. 조금 혼란스러울 뿐이다.

한 번 했던 각오, 그리고 다시 지웠던 각오.

그것을 되새길 시간이 약간 더 필요할 뿐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네가 붙잡아온 아이를 보러 갈까?”

“아니, 하지만…….”

블랑쉐가 처음에 그렇게 판단했던 이유.

병기로서 길러진 ‘오르골’의 자식들은 모두 소모품이다.

가장 뛰어난 요원인 자신의 복제들을 만들어 자기 대신 사용한다.

블랑쉐가 속했던 국가가 어떤 환경이었는지까지는 모르지만, 그 전력에 의존하는 바가 컸던 모양이다.

그렇게 블랑쉐와 그녀의 형제자매들은 죽어갔다.

삶다운 삶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혹한 훈련, 따라오지 못한다면 살처분.

그런 식으로 살아남아도 끊임없고도 무한한 임무.

그렇게 살아가다가 언젠가는 죽는다.

블랑쉐는 가장 오래 버틴 복제품 중 하나였다.

‘오르골’이 총애할 만큼 말이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마지막은 찾아왔다.

다른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죽음의 순간 이후, 이 미궁에 도달했다.

그 이후는 그녀가 ‘오르골’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블랑쉐는 결단했다.

돌아가 ‘오르골’을 죽이기로.

그러기 위해 튜토리얼을 통과하는 방식 같은 것에 문제가 많긴 했지만, 그만큼 필사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죄는 이 미궁의 모두가 지닌 것이다.

“…….”

묶여 있던 포로는 투지로 불타고 있었다. 언제건 기회만 생긴다면 탈출하거나 역습을 가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보인다.

블랑쉐는 침묵했다.

희우가 말했다.

“전부 왕국의 고아들이더라고요.”

블랑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겠군.”

“마인드맵은 없어요. 다들 여기서 태어난 유배자들의 자식들이에요.”

“그렇겠군…….”

이전 회차의 블랑쉐가 내게 말하길.

복제품을 만드는 기술이 안정화되기 전에는 고아들을 주워 전쟁에 사용했다고 한다.

“진짜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구하는 셈 치고 이렇게 모아 길렀다면 모르겠지만…….”

추적은 어느 정도 가능했다.

그야 우리 쪽에는 신이 셋이나 있다.

일시적인 협력관계에서 신도가 많은 전쟁과 자연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왕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다.

“납치에 더 가깝더군요. 괜찮은 수준으로 실력 있는 유배자의 아이들을 말이죠.”

“고아들은 유전적으로 우수하지는 못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겠지. 그 남자의 방식이다.”

블랑쉐의 목소리에 서늘함이 깃들었다.

지금 눈에 적의를 잔뜩 품고 있던 ‘오르골’의 새로운 딸이 순간이나마 주눅이 들 정도였다.

나는 블랑쉐에게 다가갔다.

“하려던 일이 눈앞으로 찾아왔을 뿐이야.”

“원래 하려던 일.”

“그래.”

블랑쉐가 나를 보았다.

그리고 희우도 보았다.

나아가 다른 파티원들이 있는 곳을 본다.

그녀가 짧게.

그러나 간절하게 말했다.

“도와줘.”

“물론이지.”

* * *

이곳에 한 남자가 있다.

오랜 세월 [심연] 속을 헤매어 제법 남아 있던 유배자로서의 기한마저 다 사용해 버린 남자가.

그 남자는 왕국의 [길드석] 이름이 오른 하이랭커였다.

[심연] 깊숙한 곳은 아주 험하지만 목숨을 건다면 살아가지 못할 환경은 아니다.

식량이 떨어지는 일을 대비하여 먹지 않아도 되는 언데드의 몸으로 이곳에 들어왔다.

준 고위 종족급 언데드.

데스 나이트가 안광을 빛내며 걷는다.

지치지도 않으며 먹지도 않는다.

[심연]같은 곳을 헤매고 다니기엔 최적이다.

그에게는 심연에 들어온 목적이 있었다.

왕국의 경영자들을 거꾸러뜨리기가 힘들다면, 적어도 동료 중 하나는 신좌에 있어 이 뜻을 이어나가야 한다.

신좌는 신성불가침의 영역.

도전자가 없다면 영원불멸의 신으로 남아 언제고 그 왕국경영의 순환을 끊을 수 있으리라.

숭고하니 뭐니 하며 포장할 생각 따위는 없다.

그냥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며, 방관하는 기존의 신들에게 거부감을 가졌을 뿐이다.

적어도 신들이 앞장서서 경영자들의 방식에 반대한다면!

제 아무리 침공을 막아서는 것이 힘들다 하더라도 그 때를 늦추며 힘을 모은다면!

온 왕국이 힘을 모아 침공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동료들과 동조하는 다른 랭커들은 그런 현실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들이었다.

긴 여행이었다.

정처도 없다.

그가 목표하는 것은 신좌.

그의 마인드맵의 경향상 마주친다면 전쟁의 신좌일 확률이 높다.

그 무시무시한 옛 신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래서 [심연]을 헤매고 있다.

시간이 뒤틀리며, 경영자들이 통제하지 않는 유일한 [메인 던전]이며, 필요한 만큼 난이도를 조절하며 차근차근 강해질 수 있는 곳.

언제고 찾아올 신좌의 입구를 기다리며 말이다.

죽은 자에게 휴식은 필요 없다.

그의 노력은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전쟁의 신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갈가리 찢겨 사라지는 수도 있다.

그래도 그는 지금도 발걸음을 옮기며 무기를 휘둘렀다.

사선을 다시 몇 번이고 넘나든 후, 데스 나이트는 문득 깨달았다.

어둠만이 감도는 심연에 빛은 귀하다.

불그스름한 불꽃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렁이는 화염 같은 그것은 익히 보아오던 마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신성한 무언가가 그 불빛으로부터 느껴진다.

데스 나이트는 달렸다.

전쟁의 타오르는 붉은 신성이 빛나는 포탈이 아주 멀리 보였다.

이 [심연]의 계층은 너무나도 깊은 곳이며 끔찍하게도 넓다.

저곳까지 도달하는 데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는 입을 열었다.

얼마 만인지 모를 정도로, 어쩌면 언어를 잊을 만큼의 긴 시간 만에 자아낸 목소리가 텅 빈 언데드의 성대를 마력으로 울린다.

[일그림……! 그리고 다른 동료들……! 부디 아직 무사하기를!]

심연의 신이시여. 부디 내게 그대가 가진 시간을 뒤트는 축복을!

내가 아직 늦지 않았기를!

그는 전쟁의 신이 되기 위하여 도전할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