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324화 (324/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24화

왕국 - Lv.2660 하이랭커 맥(2)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

‘오르골’이라는 코드네임을 쓰는 남자는 꼼꼼했고 가능한 모든 일을 대비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레지스탕스니 뭐니 하는 느낌으로 불만을 가지는 무리들이 있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내버려 두는 것은 어차피 침공으로 밀어버릴 시기가 다가오는 와중, 손수 처리하는 게 수지가 맞지 않아서다.

악룡의 위명에 대한 것도 있다. 뒤늦게 랭커가 된 자들은 모르겠으나 본래 하이랭커였던 이들은 아는 이들도 많다.

애시 당초 드래곤이다.

얼마나 오래 묵었는지 모를 드래곤.

그것만으로도 이미 억제력이 된다.

본인은 거의 아무것도 안 하고 유유자적하게 놀러 다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덕에 ‘오르골’이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전면전을 걸어올 줄은 몰랐군.”

손가락을 책상 위에 리듬감 있게 두드린다.

톡톡 소리와 함께 생각의 속도가 가속한다.

그는 가능한 바깥에서의 삶을 이번 회차에서 구현하려고 했다.

기술만 따지자면 오히려 미궁이 더 우월하다.

마도공학이라는 정체불명의 기술은 단순한 과학의 발전보다 위험하고 끔찍한 것들을 많이 만들 수 있게 했다.

지금도 상공에 떠 있는 위성들을 통해 도시 외부로부터 시작된 파괴를 관측하고 있다.

압도적인 힘이다.

그러나 단순한 하이랭커들도 저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 자신도 마음만 먹는다면 가능하다.

“그러니까 ‘왜?’라는 것인데.”

어렵다.

드래곤을 몰라서 저럴 리는 없다.

그것은 그저 살아온 세월만큼 강해지는 괴물이다.

플레이어블 종족의 정점이자 미궁에 존재하는 무수한 비현실적인 괴수들 중에서도 최고봉인 존재.

굳이 측정해 볼 이유도 없는 힘이다. 이런 파괴 따위는 마음만 먹는다면 온 왕국에 흩뿌릴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이토록 노골적으로 덤빈다는 것은.

“믿는 구석이라도 있겠군.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죄송합니다.”

알파가 고개를 숙인다. ‘오르골’은 고개를 까딱함으로서 그것을 받았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는 있다. 반복되지만 않으면 된다.

“일단은 응전하는 척하며 빠진다. 굳이 싸워줄 이유가 없다. 어차피 우리 손으로 부숴 버릴 도시였거늘.”

“알겠습니다.”

알파가 물러갔다. 속내를 꼭 다 알릴 필요는 없다.

저 아이가 ‘알파’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끊임없이 자신의 쓸모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알아서 처리하겠지.

오히려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위성에 잡히고 있는 소수의 무리가 있다.

바깥에서부터 천천히 조여 들어오고 있는 세 방향으로 공격하는 그룹과는 다른 그룹이다.

어쩐지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주력 공격은 포위하듯 좁혀오며, 내부에 침투한 날렵한 클래스들이 내부를 장악한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어차피 주력 공격은 포위하며 조여오는 쪽일 것이다. [하드스록]도 저쪽에 붙었다고 했던가.

실로 이 왕국에 있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연합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왕국의 지배자를 밀어낼 수 있었다면 진작 그리되지 않았겠는가.

‘오르골’은 이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더 시티즌]은 악룡이라 불리는 남자가 제 편의를 위해 만들어둔 것이다.

기존에 있던 멤버를 ‘오르골’이 정리하는 것마저도 관심가지지 않았다.

‘불행한 사고’긴 했지만 말이다.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되는 부하들이다.

자신의 취급이 그런 것은 영 마음에 들지 않으나.

이럴 경우에 무엇을 하지 못했다고 성질을 부리지도 않는다.

알아서 하시라지.

그런 것보다도.

“블랑쉐…….”

그리운 이름이다.

아련한 울림이다.

그가 가장 아끼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결국 소모품.

마침내 죽었다고 들었을 때, 일말의 아쉬움을 느끼긴 했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더 지나고 미궁으로 유배당했다.

블랑쉐보다 더 뛰어난 복제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한낱 소모품이던 딸은 아쉬움이 되었다.

미궁의 서버들은 다양하게 발전하지만 마법의 존재로 막히는 것들도 많다.

유전공학이 그렇다.

애초에 인간 외 종족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그런 것을 연구할 가치가 있는가 하면 애매한 것은 사실이다.

그 바람에 ‘오르골’은 또 다른 자신들을 만들어 부릴 수 없다.

쓸 만한 것들을 주워오긴 하지만 꽝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가 가장 사랑하던 딸이 한발 먼저 유배당했음을 알았다.

심지어 왕국에 영원히 박제된 존재로서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음을.

다시 손에 넣으려고 해보았다.

대면한 블랑쉐는 실망스러웠다.

예리하게 벼려낸 날 같았던 날카로움은 왕국에 도착한 후에 금세 무뎌진다.

어딘가를 헤매다가 객사할 뿐인 것을 필요로 할 이유는 없었다.

내 유전자로 만들어져 겨우 그것이냐.

언제고 이겨낸다면 거두어볼 생각이긴 했다.

이번의 블랑쉐는 괜찮은 방향성을 찾아낸 모양이다.

마음이 꺾인 것 같지도 않다.

“좋다. 아주 좋다.”

이미 내놓았던 작품이 스스로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이 마음 또한 좋은 여흥이다.

찾아오겠지. 분명히 나를 찾고 있겠지.

책상을 두드리는 리듬을 더 빠르게 한다.

톡, 톡, 톡.

알파와 블랑쉐.

어떤 딸이 살아남을까?

* * *

레베카는 침울했다.

시티즌을 향한 공격이 시작되는 날까지도 맥에 대한 소식은 없었다.

베티와는 연락이 되었다. 그러나 베티도 맥의 행방은 알지 못했다.

그 유쾌한 총잡이는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 버린 것일까?

마력 탐지를 뻗어본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 공허해진 도시에 잡히는 생물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 많지 않은 것들은 명확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스물이 넘는데.”

레베카의 말에 현재 이 그룹을 이끌고 있는 천사가 대답한다.

“시티즌은 고의로 랭킹에 이름을 올리지 않으려고 든다고 했죠?”

“맞아, 전력이 얼마나 있을지는 몰라.”

“그럼 일단 부딪쳐 보죠.”

레베카는 그 말에 이탈을 위한 마법을 캐스팅했다.

현재 이쪽 그룹에 합류해 있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마법사 둘과 호위인 제니, 블랑쉐, 그리고 저 천사다.

불안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 전력이다.

그러나 이 개개인이 [하드스록]의 소속원을 쓰러뜨렸음을 알고 있다.

아마 이제는 귀여운 제자 역시 레베카가 당해내기 힘들지 모른다.

그래도 정령왕만 없다면.

아직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한숨이 나온다.

천사가 슬쩍 옆으로 다가왔다.

“그 빅맥 아저씨는 무사할 거예요.”

“그렇겠지? 별일 없겠지?”

“베티를 포함해서 에르메스나 로잘린조차 건드리지 않았는걸요.”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여전히 침울하다.

희우는 속으로만 쓴웃음을 삼켰다.

일그림 파티는 모두 서로를 아끼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쪽은 특히 각별하다.

남편이라도 죽은 것처럼 굴고 있지 않나. 숨겨왔던 모양이지만 여기까지 와서는 너무나도 뻔해진다.

“힘내요.”

그래도 이상한 일임은 어쩔 수 없다.

맥이 죽었을 확률은 희박하다. 악룡에게 혼자 도전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렇다고 [더 시티즌]에게 단신으로 맞섰을 리도 없다.

조용히 숨어 있다가 이제 나타나야 옳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빠져나올 수는 있었을 것이다. 베티처럼 길드마스터인 것도 아니고.

고레벨 사수는 엄청나게 빠르니까 작정한다면 충분히…….

그리고 블랑쉐와 흡사한 복장을 한 몇 명이 저쪽에서 포착되었다.

사격이 날아든다. 사선을 감지하고 몸을 빼거나 검으로 튕겨냈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이런 일을 하는 게 점점 쉬워짐을 느끼고 있다.

대부분의 총격은 눈으로 보고 대처할 수 있다.

총탄에 반응하긴 아직도 쉽지 않으나 총구의 방향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희우는 날개를 펴고 날아들었다. 급격하게 파고들자 모든 시선이 쏠린다.

그 틈에 뒤편에서 이쪽 사수의 포격과도 같은 사격이 날아들었다.

번쩍이는 쇼크웨이브와 파르스름한 공간이동의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마법이 아닌 장비에 의한 것이다.

추억같이 빛바래게 여겨지는 5층을 떠올리며 희우는 미소 지었다.

그때는 애먹었지만, 이젠 안 통한다.

몸으로 때우고 검을 휘두른다.

저쪽도 암살자거나 사수인 모양이다.

몇몇이 소리 없이 검을 빼 든다.

부딪히는 순간 폭발하듯 밀려 나가 벽에 처박힌다. 그 틈에 옆을 노리고 파고든 녀석에겐 킥을 꽂아 넣는다.

몇 가지 사선이 직감처럼 느껴진다. 신경은 최대로 예민한 상태다.

아마도 날개를 노리고 있다. 한순간 포위당했다. 저쪽도 역시 충분히 빠르다.

날개를 노리는 근거리 총격은 회전하며 쳐내고 몇 발은 그냥 몸으로 받았다.

총기의 위력은 높지만 천사의 내구력도 낮지 않다.

손상을 체크하며 돌격, 그사이에 아군의 엄호사격이 날아들었다.

* * *

총성 한 발에 하나씩.

블랑쉐는 그렇게 되뇌며 자신과 비슷한 복장을 한 남녀들을 쏘았다.

저들도 틀림없이 그녀와 같은 처지겠으나 손대중을 할 수는 없다.

하이랭커는 아니더라도 상위 랭커는 되어 보이는 강력한 집단들이다.

그리고 전원이 그녀가 아는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다.

사격하는 버릇마저도 통제하는 것이 그 남자였다.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이고 있다.

총탄이 날아든다. 스친 것 같은데 뒤편의 빌딩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렸다.

빌딩은 피차 제대로 된 방호물이 되지 못한다.

본격적으로 사격전이 시작되자 사방에 콘크리트 파편과 철근의 조각이 튀기 시작했다.

제니가 입만 벌리고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제대로 된 방어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놀랍게도 저건 효과가 있다.

일종의 방호 패시브가 발동하기 때문에 사격을 효과적으로 쳐낼 수 있다.

그 뒤에 숨은 마법사 둘이서 같이 캐스팅한 마법을 완성시킨다.

블랑쉐는 그것을 보면서도 방아쇠를 당겼다.

히트 스캔이나 다름없는 탄속의 레일건이 천사의 등을 노리던 소년 하나를 날려 버렸다.

죽음은 한순간, 고통을 느낄 새도 없으리라.

겉보기로는 미아보다 몇 살 더 위로 보이지도 않는 어린애다.

마법이 작렬했다.

번개와 화염이 휘몰아친다.

천사는 그것에 휘말려도 된다. 이 정도 마법은 천사에게 아무런 위해를 끼칠 수 없다.

그러나 저 ‘오르골’의 자식들에게는 다를 것이다.

“어렵지는 않네요.”

생존자가 물러갔다.

천사가 돌아와서 몸을 턴다.

마법적 불과 번개 사이를 헤집고 다녔지만 천사의 마법저항력을 제대로 뚫지는 못했다.

그래서 피가 흐르고 있다. 자신의 것보다는 대부분 저기서 죽은 아이들의 것이다.

“그래도 소년병이라고 해야 하나 이걸…….”

“고아들을 주워서 키운다고 하니.”

“고아가 아니면 고아로 만들고 말이죠.”

블랑쉐는 새삼 자신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8년 전만 해도 그녀는 ‘오르골’과 크게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다.

생명은 무가치, 단지 어떻게 자신을 위해 사용 되냐만이 중요.

그러니 거리낌 없이 학살극을 벌였다.

이제는 아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배웠다.

에길이 말해주었으며 옆의 이 귀여운 여동생이 알려주었다.

리더인 오르골 역시 철저하게 행동으로 보여주곤 했다.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과연 황무지를 떠돌며 보낸 8년의 세월이 없어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한번 무너질 뻔한 자아는 재조립되어 정상으로 돌아왔다. 세상을 비관하고 삶을 내던지며 그의 아비가 주입한 독을 배출했다.

돌이켜 보면 과거의 자신은 명백하게도 정상이 아니었다.

‘오르골’을 싫어하여 죽이고 싶다 생각하며 실제로 한 일은 어떤가?

그 남자와 다를 것이 있기는 했던가?

미궁에서 20년 가까이를 더 보내고도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과거를 생각하면 부끄럽다기보다는 괴로워진다.

닮기 싫은 아비를 누구보다 닮았던 딸이 아닌가.

“이 정도면 당장 큰 위협은 없겠군요. 우리는 사실상 척후니까 너무 큰 규모의 싸움이 예상되면 즉시 이탈합니다.”

참혹하다면 참혹한 현장에서도 천사는 발랄하게 웃으며 쾌활하게 말한다.

블랑쉐도 마주 미소 지었다.

이제는 안다.

이 천사 여동생도 고민이 많다. 갈등도 많다. 두려워하는 것도 많다.

그럼에도 항상 개의치 않는다.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을 조용히 감내하고 마음에 새기고는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상처 입지는 않는다. 혹여 입더라도 주변에 털어놓는다.

강인한 정신이라고 하겠다.

블랑쉐는 아주 늦게 서야 그런 태도를 배웠다.

블랑쉐는 천사의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왜요?”

“피.”

“에엥? 어차피 한동안 뒤집어 쓸 거 같으니까.”

손을 내린다.

옆을 본다. 블랑쉐가 아까 쏜 소년의 시신이 멀리도 날아와서 처박혀 있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이렇게 하는 거라고 했던가?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가벼운 마법으로 화염을 불러일으켜 태웠다.

조용히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미안하다.”

다른 사람들이 눈이 조금 커졌다.

그들이 알던 블랑쉐와는 너무 달랐을지도 모르고, 혹은 그냥 이 상황이 너무 기묘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블랑쉐는 진심이었다.

자신이 구하려던 여동생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이다.

이렇게 만든 것은 ‘오르골’일지 모르지만 죽인 것은 자신이다.

“대신 그 남자를 죽이겠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안다. 도리어 이 아이들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블랑쉐는 삶이 소모품이라 여기지 않는다.

자신이 죽인 자들 하나하나를 자신의 마음에 새긴다. 그리고 그걸 지고 그 남자를 찾아가서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대화가 될 것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그건 인간이 아니니까.

그래도.

그래도, 그냥 그렇게 말하고 죽일 것이다.

이 파티에서 그게 위선이라는 것도 배웠다.

블랑쉐는 이미 끔찍한 살인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쓰레기다.

그래도 그의 아비는 그런 위선조차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후후후 하고 웃고 있던 천사가 말한다.

“갈까요?”

“그래.”

* * *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미 대피가 끝난 게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루시는 그래서 한결 편안하게 도시를 때려 부수었다.

이걸 남겨두어 쓸 곳도 있겠지만 뭐,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어차피 침공이 들이닥친다면 요새화를 염두에 두지 않은 이런 곳은 금방 폐허가 된다.

그러므로 신들이 세 방향에서 밀고 들어가는 것은 단지 무력 시위였다.

나타나라. 너는 지금 싸워야만 할 것이다.

악룡이라는 녀석은 알고 있는 사이다. 전쟁의 신만큼 오랜 인연은 아니지만 그녀가 아직 신으로서 내려놓기 전에 본 적이 있다.

드래곤 카드를 손에 넣은 유배자는 언제나 그렇듯이 드물기에 기억할 수밖에 없다.

다른 신들은 모를 것이다.

그는 가장 강력한 신이었던 루시에게 손을 먼저 내밀고 말했었다.

[왕국을 지배하자. 너와 나라면 가능하다.]

[게이머]였기에 가진 자신감이었다. 실제로 드래곤이라는 가장 강력한 종족의 카드를 손에 넣은 참이기도 했고.

그는 자신에 대하여 밝히며 끈질기게 그렇게 제안했다.

당연히 루시는 매번 그것을 거절했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뒤로 어떻게 된지는 몰랐다.

드래곤씩이나 되는 주제에 랭킹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녀가 가라앉을 때까지도 다시는 전면으로 나서지 않았었다.

그리고 루시만이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다른 신들에게 굳이 털어놓고 다니질 않았으니.

사실 그 녀석만이 그런 제안을 루시에게 했던 것도 아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너무나도 많은 탓이다.

다른 신들도 비슷한 경험은 있지 않을까?

드래곤도 그렇다.

그 귀하다는 드래곤 카드지만 운 좋게 얻은 이들은 꾸준히 나타났다. 그리고 저마다의 이유로 사라져 갔다.

동일인이겠구나 하고 알게 된 것도 자신을 숨기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병적인 태도 때문이다.

아직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기에 빠르게 떠올리진 못했다.

다시 다른 신들과 교류가 생긴 후에나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별난 녀석은 세월이 흐른 끝에 루시 대신 규율의 신과 손을 잡았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신의 도움 없이 왕국을 경영할 수는 없을 테니까.

지금은 악룡이라고 불리고 있다.

드라간이 반가운 추억이었다면 이것은 불편한 추억이다.

“그런데 계속 어디 은신하여 숨어 있나?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싶은데.”

“그러게 말이죠. 뭐 힘숨찐 이런 거 좋아하나?”

“힘숨찐이 무어냐.”

“그 왜, 약한 척하고 다니는 그런 거 있습니다. 내가 사실은 이만큼 세다. 큭큭큭 하는 그런 거요.”

“등신 같은데?”

“아, 이게 또 그런 감성이 있긴 해서.”

대전사의 너스레에 루시는 어깨만 으쓱했다.

어차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저쪽이 일방적으로 끈질겼을 뿐이지.

뭐 어쩌겠나. 좀 이상하긴 해도 모르면 모르는 것이지.

루시는 날개를 접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창을 휘둘렀다.

추풍낙엽처럼 거대한 콘크리트의 건축물들이 휩쓸려 날았다.

아직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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