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27화
왕국 - Lv.2911 ‘오르골’(2)
희우가 미궁에 오고 나서 얻은 것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물론 오빠, 그리고 귀여운 딸이다.
하지만 그 다음을 꼽으라면 비행이다.
바깥에서도 비행기를 탈 일은 종종 있었지만 자력으로 날 수 있다는 것은, 그것도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마하의 벽만 넘지 않는다면 몸을 때리는 시원한 바람과 흘러가는 풍경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
그래서 희우는 굳이 음속 이상으로 비행하지 않았다.
총탄이 스친다.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희우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상당히 여유로운 상태였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살짝 집중이 풀렸다.
픽 하고 인지 못한 총탄에 상처가 생긴다.
입을 한 번 뻐끔거리고 다시 정신을 모은다.
마인드맵을 불러올 때처럼 고요하게 자신의 속에 가라앉는다.
진짜로 열면 안 된다. 그러면 일시적으로 감각이 차단된다. 그건 치명적인 실수다.
마인드맵이 열리기 직전에 그것을 멈춘다.
주변의 소리가 고요해진다. 마력의 흐름도 느려진 기분이 든다.
몸을 감은 바람도 훨씬 부드럽게 흐른다.
이건 오빠의 훈련 방식이다. 유배자는 마인드맵을 열고 있으면 그 속에 정신적으로 가라앉는다.
마인드맵을 마주한 유배자의 육체는 현실로부터 차단된다. 오직 정신만이 마음 속 별의 가지를 바라본다.
명상에 의한 트랜스 상태와도 같다.
희우는 그게 뭔지 안다.
무술의 달인으로서 전투 중에 그런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다.
감각이 훨씬 선명하고 날카로워진다.
시각, 청각, 촉각, 그리고 직감까지.
그 모든 것이 통합된다.
단 하나의 예리한 공감각으로 벼려진다.
세상과 하나 된 듯한 이상 감각이다.
하지만 처리할 정보가 하나로 통일된 것이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대응능력이 빠르고 정확해지기도 한다.
오래 머무른다면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자유자재로 다룬다면.
다음 순간, 자신을 노리는 총구의 사선이 인지되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 이쪽을 서늘하게 노려보는 차가운 눈초리.
다른 방향에서도 사수가 하나, 둘, 셋이 더 있다.
전방에는 사격 직후 급습하기 위해 몸을 숨기고 있는 암살자도 하나 더 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뇌리에 새겨졌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몸이 가장 잘 안다.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비행은 이제 희우의 몸에 깃든 무를 체현한다.
단순히 스펙으로 찍어 누르는 것 이상의 영역을 엿본다.
아직 사고의 영역에서 동작의 가짓수가 나타난다.
적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여러 가지 동작들이 나열되고 흩어지고 다시 모인다.
열두 동작.
아홉 동작.
네 동작.
가짓수가 점점 줄어들고, 마지막에는 두가지 동작으로 압축되었다.
그리고 몸이 실행했다.
화려하진 않았다. 그저 날개의 방향 전환과 근육의 수축이 한 호흡에 일어났고 날아든 총탄은 희우의 단검에 튕겨 나갔다.
적들이 움찔하며 방어했다.
튕겨낸 탄이 그대로 도탄 되어 각기 다른 매복자들에게 총탄이 날아간 탓이다.
정면에서 단검을 들고 달려들던 암살자에게도 튀었다.
그녀는 기겁한 표정으로 막아내었으나, 그 덕에 자세가 완전히 무너졌다.
스킬을 동원하여 허공에서 기동할 때, 자세 제어가 무너지는 것은 치명적이다.
희우는 단검의 날 대신 그립을 이용하여 후두부를 강하게 후려쳤다.
비명도 없이 고꾸라져 추락하기 시작한다.
저 암살자 역시 하이 랭커에 준하는 스펙이었으니 죽을 리는 없다.
블랑쉐를 위해 죽이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다.
“후우…….”
공방일체의 묘기를 선보였으나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감으로 무언가를 해낸다.
그것은 영적인 일이 아니다. 엄연히 육체의 일부인 두뇌가 한순간에 모든 정보를 처리하여 내놓는 결론일 뿐이다.
고로 희우는 방금 뇌를 엄청나게 혹사했다.
그래도 이제 잠깐 쉴 타임이다.
마법사들의 지원이 들어왔다.
습격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끄는 동안 캐스팅이 충분히 이루어졌다.
제니는 늘 그렇듯 두 마법사를 목숨 걸고 지켜내었다.
광포한 마력의 격류가 한바탕 휩쓰는 동안 희우는 몸을 은폐하며 한숨을 돌렸다.
“이걸 마인드맵을 켜는 요령 없이 해야 한단 말이죠.”
어디까지나 연습용으로 공정을 추가한 것이 마인드맵을 활용하는 형태다. 그런 마음가짐의 준비 없이 곧바로 들어가야 한다.
사실 좀 너무하다.
정씨 집안 내에서 어릴 적부터 수행해야 했던 훈련도 충분히 가혹했다.
그 덕에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트라우마도 마음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난이도만 따지면 이쪽이 훨씬 말이 안 된다.
오빠 가라사대, [메인 던전]은 단지 고레벨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저 싸움의 달인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미궁이 부여한 초인적인 신체능력과 감각은 상식 이상의 일을 가능케 한다.
몇 가지 꼼수성 보조가 있다면 육신의 모든 가능성을 쥐어짜낼 수 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이런 공감각의 상태다.
자유자재로 이 상태에 드나들 것을 요구받았다.
희우는 이 상태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마침내 오랜 의문이 풀 수 있었다.
항상 힘도 더 세고, 민첩성도 더 높은 희우가 오빠를 대련에서 제대로 이긴 적이 없다.
서로가 준비된 상황에서의 대련은 점점 치열해지기만 했지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항상 목에 무기가 겨눠졌었다.
언젠가 부터는 슬슬 져서 분하다는 마음조차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걸 쓰고 있었다니! 비겁해!]
[비겁하다니. 몸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동시에 유배자로서의 스펙도 일정 이상이어야 가능한 노하우다.]
[노하우 수준이 아니잖아요!]
[그럼 비전 오의라고 하자.]
[버그 아니고요?]
[버그 아니고 스킬인데…….]
대충 또 미궁의 시스템 자체를 등쳐먹는 무언가구나 하고 납득하긴 했다.
[그런데 진짜 조심해야 해.]
[왜죠?]
[너무 깊이 빠져들면 못 돌아온다고 했잖아?]
[네.]
[눈 떠보니 다음 회차 시작하더라고.]
그건 상당히 많이 오싹했다.
그래서 희우는 가능한 안전하게 연습을 진행 중이다.
마인드맵을 여는 요령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더 훅 빠져든다. 그때는 놓친다면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렇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해. 0.08초 정도 더 빨라진다고.]
그때의 대화를 생각하며 희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마 오빠가 본다면 고운 이마에 주름 잡힌다며 말렸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히죽히죽 웃으며 다시 날아오른다.
마법사를 공략하고 싶겠으나 갑작스레 다시 나타난 천사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노골적으로 블랑쉐 언니와 일대일 상황을 조성한 적의 우두머리가 쓰러질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레벨이 많이 오른 것은 아니지만, 요정의 꿀술을 통해 올라간 마력의 절대량은 단순 레벨 이상의 스펙 상승을 가져왔으니까.
그날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만 빼면 완벽하다.
* * *
루시가 자연의 신에게 뜯어낸 스펙업은 기초 스탯에 관계된 것이다.
단순 수치로는 레벨링으로 얻는 능력치에 비해 낮다.
하지만 그럼에도 클 수밖에 없는 것은 유배자 대다수가 마법이 없고 마력이 규명되지 않은 세계에서 온 탓이다.
사용하지 않는 능력은 단련되지 않는다.
그래서 유배자의 기초 스탯에서 마력 관련 능력치가 높게 책정되는 경우는 드물다.
기초 스탯은 유배 시점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제니는 실제 스펙에서도, 숙련도에서도 가장 부족한 멤버였다.
그녀는 슬슬 부침을 느끼던 차였다.
이런 식으로 고기방패만 할 것이라면 쌍검사를 포기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제니의 전투력은 가면 갈수록 적을 따라가기 힘들어질 것이다.
약간의 지적과 대련만으로도 무언가를 깨닫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들이 스스로 익혀 탑재하는 여러 기술들을 제니는 미아의 보조를 받아 이루어내야 한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마법사가 최대한 지원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저 몸을 내던진다.
제일 많이 다치는 인원이란 점에서 항상 존중받고 있지만 그 존중도 시간이 흐르면 상처가 된다.
제니는 시무룩해하는 대신 에길이나 블랑쉐를 찾아가고, 자괴감에 빠지는 대신 미아와 한마디라도 더 전술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
잎사귀 요정이니만큼 정령을 병행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재주가 없어 포기했다.
하급정령과의 계약도 제니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제니의 귀 각도는 점점 내려갔다.
조금씩 지쳐가고 있음을 미아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아는 눈을 크게 뜨고 제니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별다른 마법적 보조를 하지 않았다.
단지 암습 판정을 당하지 않게 끊임없이 견제하며 [메모라이즈]의 구슬만을 쌓고 있다.
평소 같다면 이렇게 마법사만으로 적들에게 노출된다면 정신없이 캐스팅을 반복해야 했다.
공세를 취할 겨를도 없다. 단지 버텨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러고도 경우에 따라서는 몸을 던져 위험한 공격을 받아내곤 하는 것이다.
지금은 달랐다.
“후우우우.”
제니의 심호흡이 들린다. 본인도 놀라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요정의 육체에 본디 마력은 친숙한 것이다.
그것이 증폭되자 단순히 몸에 힘이 넘치는 것 이상의 일이 일어났다.
‘세상에 이렇게 느리게 움직였나?’
물론 지금도 빠르다. [더 시티즌]의 암살자들은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는다면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고 공세를 펼치고 있다.
하지만 불과 저번 주만 해도 이런 식의 대응 자체가 불가능했다. 제니는 두말없이 미아를 안아 들고 뛰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에게 붙어있는 두 명의 암살자는 하이랭커다.
심지어 [더 시티즌]의 하이랭커다.
‘어째 서브 리더가 갑자기 맡기겠다고 하며 가버리더니.’
그 순간의 심정은 ‘대체 뭘 맡겨요? 미쳤어요?’였다.
리듬이 보인다.
밤의 공기를 가르는 칠흑의 칼날.
달빛조차 비치지 않으나 느껴지는 어떤 흐름.
저것을 쳐내고, 바로 이어서 옆으로 몸을 뺀다.
제대로 피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검이 갑옷을 뚫지 못하고 긁어만 놓는다.
자세를 살며시 숙이며 [회전 베기].
상대에게 위협이 되는 공격은 아니지만 밀어낼 수는 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밤공기 속으로 녹아 사라지기 전에 미아의 지원이 떨어진다.
불꽃으로 밝아진 사이에 적들의 움직임이 언뜻 눈에 비쳤다.
에길이나 블랑쉐라면 여기서 역습하겠지만, 제니에게 그 정도 능력은 없다.
단지 눈으로 좇으며 다시 들어올 공격을 대비한다.
미아와 레베카에게 향하는 것이 보였다.
레베카는 괜찮다. 본래부터 하이랭커인 레베카는 최소한의 호신이 가능하다.
미아가 심장을 노리고 들어오는 암살자를 똑바로 쳐다본다.
[메모라이즈]의 구슬 하나가 사라지며 강렬한 스파크, 저지력은 없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제니를 생각 못 하게 만들 수는 있다.
암살자는 미아를 찌르는 대신 방향을 틀어야 했다.
쌍검이 맹렬하게 그 뒤를 추격한다.
검과 검이 맞닿는 불똥이 차가운 바닥에 흩뿌려졌다.
제니는 생각했다.
‘나 왜 이렇게 잘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위기가 닥쳤다.
“윽?!”
강렬한 암습 판정.
다른 하나가 제니를 노렸다.
몸을 최대한 튼 덕에 어깻죽지부터 길게 베였다.
죽을 수도 있었다.
검술보다도 더 익숙한 동작으로 포션을 튕긴다.
리더마저도 포션 먹는 동작의 간결함은 제니가 최고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몸이 치유됨을 느끼지만 갑옷은 가버렸다.
자만은 금물. 방심도 금물.
다시 한번 이걸 당하면 진짜로 죽는다.
제니는 이어 들어오는 공격에 조심스럽게 대응했다.
하이랭커는커녕 일반 랭커조차 하늘 위의 사람처럼 보였다.
하물며 각 클래스를 대표하는 하이랭커라니.
그러나 이제는 그저 자신보다 조금 앞서간 누군가에 불과하다.
제니의 귀가 쫑긋하고 각도를 되찾았다.
* * *
희우는 블랑쉐의 드론들이 날아오름을 확인했다.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다. 승리하고 합류하는 것이다.
공중에서 끊임없이 공격할 틈을 찾고 있던 암살자들도 그것을 깨달았다.
사수들이 갑자기 화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타격을 노린다기보다는 지역을 장악하려는 듯한 움직임.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팽팽하던 균형을 깨뜨리는 행위기도 했다.
희우는 즉시 공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최선의 수로 적을 파고든다. 희우의 대응을 예상하고 있던 근방의 암살자들이 아니라 멀리서 사격을 하고 있는 다른 녀석들에게 간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적들의 기척이 사라진다. 달그늘 속에 모습을 감추는 것은 흔한 일이다.
민첩 전사란 본디 암살자의 천적이다.
힘 전사는 딜로 뚫어내기가 힘들지 암살자의 목숨이 위험하진 않다.
민첩 전사는 암살자를 감지하고 추적하여 제거할 수 있다.
희우는 그보다도 더 민첩 계열에 걸쳐져 있는 상태다.
날개가 폭발적으로 진동한다. 시간을 잡아 늘인 것처럼 기이한 감각이 몸을 덮치고 시야가 어안렌즈마냥 휘어진다.
소리의 벽을 한순간에 찢어발기고 사라지는 사수 하나의 꼬리를 붙잡았다.
이 상황을 지휘하고 있음을 눈여겨보던 녀석 하나다.
격렬한 저항이 돌아온다. 엄호사격을 몸으로 그냥 무시한다.
화끈한 충격이 등허리에 닥치고 날개도 일부 손상된다.
하지만 이미 닿았다.
[슈퍼 히어로 랜딩]
고도가 높지 않았고 가속할 시간이 충분하진 않았기에 도시를 날려 버릴 정도의 파괴력이 나오진 않는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저항을 일순간에 제거할 만큼의 위력은 되었다.
빌딩 몇 채가 흔들흔들하며 쓰러졌다.
그 여파로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시작한다. 충격파로 온 사방의 유리창이 날아갔다.
깨지는 것이 아니라 날아간 것이다.
한순간 진공이 될 정도로 공기가 터져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온다.
그것은 그대로 회오리바람이 되었다.
직격한 사수는 죽지 않았으나 즉시 무력화되었다.
추가타를 대비하려고 했다.
몸을 틀고 검을 들고 다시 순간적으로 빠져든다.
주변의 모든 것을 감지할 만큼 날카롭게 오감이 뻗어나간다.
“도망쳤네.”
그래도 한 명은 건졌다.
드론들이 날아다니며 주변을 정찰하기 시작했다.
희우는 드론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제니와 미아, 그리고 레베카도 안전하다.
숨어 있던 베티가 손을 흔든다.
로잘린과 에르메스가 베티의 곁에서 엉거주춤하게 무기를 들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지 모르겠다는 듯 눈만 껌뻑이는 모습이 퍽이나 우스웠다.
* * *
‘오르골’은 미소 지었다.
“맞이하러 나가야겠군.”
위성으로 관찰하고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일단은 블랑쉐의 전력을 파악하는 것.
만에 하나라도 도저히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스펙이 높다면 정면으로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드래곤 카드라도 얻었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결국 알파와 호각 혹은 조금 부족한 정도의 스펙.
8년간 떠돌이로 지낸 것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의 발전이지만 그뿐이다.
거기에 그에게 배운 것이 아닌 이상한 동작들이 섞여 있기도 했다.
아마 그게 지금 저 아이를 지탱하고 있는 버팀목일 것이다.
저 녀석은 그런 식으로밖에 남과 교류하지 못한다.
그가 그렇게 빚어낸 작품이니까 당연하다.
지금은 그 위에 남이 덧칠해 두었다. 기분이 나쁜 일이다.
되찾아서 지워내야 한다. 다시 그의 충실한 딸로 되돌릴 때다.
‘오르골’은 오래간만의 활동에 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바깥에서 그는 언제고 현역에 있고 싶었다.
나이를 먹어 점점 힘들어지자 자신의 복제들을 길러냈다.
미궁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는 이제 언제나 전성기다. 미궁의 자잘한 보정을 떠나 그 자신이 누구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못난 딸을 훈계하는 일이 기대되었다.
복장은 완벽하게 차려입었다. 그의 취향대로 제작된 맞춤 정장, 그리고 눈까지 가릴 만큼 챙이 넓은 페도라를 눌러쓴다.
눈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은 마음을 읽을 단서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궁에 들어오고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오르골’은 아직도 암살자다.
미궁이 아닌 바깥의 방식대로 말이다.
“일단, 우리 딸이 배운 것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볼까.”
거울을 본다.
위성으로 계속 관찰하고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골격과 얼굴, 피부 상태와 눈매, 근육의 붙은 형태부터 표정을 짓는 버릇까지.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제일 적당한 인물도 물색해 놨다.
전신 거울 앞에서 ‘오르골’의 모습이 변한다.
정장을 빼입은 남성의 모습에서 키가 줄어들고 체격이 줄어든다.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옷의 모양도 변한다.
정장은 로브가 되고 얼굴은 꽃잎 요정 특유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가 되었다.
물론, 풍기는 분위기는 정말로 소녀 같기보다는 조금 더 성인의 것이다.
하지만 거울을 보고 약간 치기 어린 표정을 지어본다. 이 모습의 주인은 조금 유치한 성격일 것이다.
그리고 슬픈 모습도 만들어 본다. 최근에는 그런 표정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몸을 더듬으며 확인했다. 골격이나 굴곡에서 어긋난 부분은 있는가.
표정도 계속해서 다양하게 변화시켜 본다.
이미 유명했던 마법사이기에 정보는 많다.
눈썰미 좋은 유배자라도 눈치채기 힘들 만큼 완벽했다.
스스로 만족하며 목소리를 내어보았다.
이 모습의 주인이 할 법한 말.
“맥……. 널 사랑했었어. 이젠 만날 수 없겠지만…….”
서글픈 울림을 넣어 촉촉한 감성을 새겨넣자 누가 보더라도 비탄에 젖은 본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다.
“큭큭큭, 이제 절대로 만날 수 없긴 하겠지. 정말 재밌군.”
완벽한 레베카의 모습으로 ‘오르골’은 도시의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