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28화
왕국 - Lv.2911 ‘오르골’(3)
울창한 정글 한가운데, 천만 이상의 인구가 살아가던 도시는 이제 절반의 부피를 잃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미 황무지가 되었겠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도 많다.
일단은 희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르골’의 꼬리를 잡았다. 현재 두 명의 [더 시티즌] 소속 오르골의 수하를 산채로 포획했다.
어떤 식으로건 수색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럼 아예 여기서 좀 멈추고 기다려야 할까.”
루시가 뒤를 돌아본다.
잘게 다져지다시피 한 도시 가장자리가 보인다.
저 속에는 당연히 탈출하지 못한 시민들도 있을 것이다.
상대의 격렬한 저항을 예상하고 강행하였으나 나타나지 않는다. 무혈입성이 가능했다면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고려했다.
악룡이 신좌부품의 사용처를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라는 경우.
모든 사람이 게임할 때 달달 외우다시피 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를 캐고, 그걸 분석하고, 효율을 추구하는 타입의 게이머들은 극소수다.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그냥 어디 유튜브에서 공략이나 좀 본 후, 적당히 클리어해 봤을 뿐이다.
숨겨진 요소는 전혀 모른다.
이런 타입에 해당한다.
아주 모르지는 않더라도 어설프게 조각난 정보만을 알고 있을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면 악룡의 판단은 간단해진다.
신들이 다시 내려올 수 없는 타이밍에 우리를 어떻게든 정리하면 된다.
“그럴 만한 녀석인 것 같습니까?”
“그 긴 세월을 인내하고 왕국을 손에 넣은 녀석이라면 그럴 만할 수밖에.”
이게 약간 문제다.
악룡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애초부터 드래곤은 평시에 본모습으로 다니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그럴 수가 없다.
연식을 생각하면 적어도 ㎞ 단위의 거대한 괴수다.
당연히 평소의 모습은 종족 특성인 [폴리모프]로 위장한 인간형의 어떤 다른 종족이다.
카베가 본 악룡도 그런 무수한 모습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제 둥지에서 난리를 피우면 틀림없이 나타날 줄 알았지만 자존심을 내던지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면 곤란해진다.
그럼 이제 귀찮고 피곤한 술래잡기가 시작되니까.
“정면으로 응할 생각이 없거나, 혹은 정면으로 뭔가를 하되 꿍꿍이가 있다고 봐야겠군요.”
“……사실 지금 우리 전력을 알면 절대 정면으로 덤빌 생각이 안 들긴 하겠지.”
“모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여겼는데 어느 정도는 알고 있나 봅니다.”
거기까지 말한 뒤에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어요.”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건 다른 신들도 공감한 내용이었다.
오랫동안 일선에 없었던 루시와 다르게 자연의 신과 전쟁의 신은 왕국을 지켜보고 있었다.
악룡은 오랫동안 신앙 없이 지내왔다. 철저하게 자신을 숨겼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어떠한 흔적도 없이 왕국을 장악할 수는 없다.
악룡은 끊임없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신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특정할 수단은 없지만 모두의 공통된 의견은 자존심이 강하고 오만하며, 드물게도 사악하다고 말할 만한 성향이라는 것이었다.
악룡이라는 별명이 그래서 만들어졌다.
신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하게 그리 불리는 호칭이다.
“그럼 그냥 뭔가 꿍꿍이가 있단 거군요. 정상적인 생각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는 미친 소리가.”
“불러들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오르골’ 정도는 놓쳐도 되지 않겠나.”
가장 안전한 곳은 신들의 곁이다.
루시는 말할 것도 없고 전쟁의 신, 드라간은 어찌 되었건 전폭적인 협력을 해주고 있다.
신이라는 입장임에도 내가 지휘봉을 잡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순간부터는 어떤 토도 달지 않았다.
루시의 후광이 있다곤 해도 원래부터 그런 성격이라고 봐야겠지.
자연의 신 역시 이상한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 와중에 규율의 신은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연락을 받지도 않으며 교섭에 응하지도 않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포기일까 절대적인 신뢰일까?
어차피 신을 해할 방도는 없으니 어찌 되어도 무방한 것 또한 사실이다.
얽힌 이들이 많으니 예측도 어려워진다. 애초부터 정보도 적다.
“그럼 최대한 안전하게 가겠습니다. 포위를 풀고 모이도록 하죠. 놓치더라도 그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미궁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 중 하나.
모든 사람이 논리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르골’이라면 모를까. 악룡은 딱히 어떤 이유도 없이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내키는 대로 말이다.
그렇다면 악룡은 경영자조차도 아니다.
그저 미치광이다.
목적 없이 세상을 자신의 장난감 상자처럼 여기는 것이다.
어떠한 자신만의 재미를 추구하는 종류의 광인일 수 있다.
기나긴 세월 왕국에서 암약하며 냉철한 지성을 가장했다.
그러나 그건 이미 정상적인 행보는 아니다.
냉철함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멀었을 수도 있다.
* * *
붙잡힌 포로는 알파와 베타였다.
협조적이지는 않았다. 자살수단을 잃었기에 침통한 표정이며 강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블랑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의 작명 센스는 원래 그렇다. 누아르도 내 언니의 코드 네임이었지.”
뜻은 흑백.
가장 뛰어나기에 받은 색이다.
그러니 이 둘도 코드 네임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우두머리격일 것이다.
“잠깐만 나 혼자 심문하게 해주겠나?”
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여러모로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도시다. 하지만 모든 인원이 대피할 수는 없다.
당연히 어딘가 남아 있는 다른 유배자 혹은 민간인에 가까운 이들도 있다.
바깥의 굉음에 숨어 있던 이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희우는 에르메스와 로잘린, 그리고 베티를 보았다.
세 명이 약간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해야 한 달 남짓한 대피 작전이었다.
설득은 오로지 하이랭커의 이름과 혼돈의 교단이 지원한 자금으로 이루어졌다.
여러 가지 이유로 파멸이 닥쳐옴에도 남은 자들은 많다.
희우보다는 베티가 더 잘할 것이다.
그래도 수습은 힘들지 않았다.
힘이 곧 법인 세상에서 전 랭커인 에르메스와 로잘린은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진 용병이었다.
그들의 이름값과 힘 앞에서 대다수는 고분고분해졌다.
희우가 해야 했던 일은 천사임을 드러내며 위압하는 것뿐이었다.
갑자기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제니도 힘자랑을 하며 반발을 찍어 눌렀다.
그 과정에선 사상자도 발생했지만 어쩔 수 없다.
압도적인 힘만큼 모두를 고분고분하게 만들 수단은 달리 없다.
“지금 보내도 문제없다고 하네.”
레베카가 마법의 신을 통해 아케인의 상황을 알려왔다.
아케인은 학장의 지시 하에 언제나 난민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평소 같으면 마법사의 마력을 소모시키는 것에 주의하겠지만 이번의 주 전력은 어차피 세 명의 신이다.
미아는 활기차게, 레베카는 의기소침하게 마법을 준비한다.
20여분 만에 생존자들을 규합하고 전송 마법진 위로 올렸다.
아직도 더 많을 것이고 구할 수 없는 이들은 훨씬 많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들만이라도 구하는 것이 최선이다.
지킬 수 있는 선을 잘 그어야 한다. 모두를 구하려다 모두가 파멸할 수도 있으니.
그때쯤 블랑쉐가 밖으로 나왔다.
알파와 베타는 여전히 묶여 있었지만 처음 같은 독기는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체념한 듯한 느낌. 그리고 조용하게 가라앉은 적의.
희우가 물었다.
“알아냈어요? 목적이라거나. 위치라거나.”
지금 상황이 이상함은 희우도 안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벌써 무슨 일이 일어나야했다.
덕분에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는 있게 되었지만 찝찝하기 짝이 없다.
오빠의 예측이나 설계, 이중 삼중으로 보험을 마련하는 많은 것들이 중간에 어긋난다.
그럼에도 의도 내에서 마무리되기에 대단한 것이다.
이번에도 그렇다고 생각하면 문제없지만. 가장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각오한 타이밍에 이러면 어딘가 불안해진다.
“이 녀석들도 알 리가 없지. 모든 게 제 손아귀에 쥐어져 있어야 만족하는 게 그 남자다. 내가 알아낸 것은 아지트라고 부를 만한 곳뿐이야.”
그리고 연락이 왔다.
불꽃이 피어오른다.
을씨년스러운 도시의 잔해 끄트머리에서 이곳으로 모인다는 신호.
천천히 포위를 좁혀오던 신들의 파괴가 멈췄다.
하늘에서 각각의 빛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희우는 서브 리더로서 판단했다.
“이러면 마법사들은 그냥 완전히 이탈하는 게 좋겠어요.”
“그건 어떤 의미지?”
드래곤의 마법저항력을 생각하면 어차피 마법사가 드래곤을 물리치는 데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
지금은 자연의 신도 있다.
미아와 레베카가 계속해서 고생할 이유는 없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는다.
희우도 기본적인 마력탐지는 배웠다.
어차피 위치가 노출되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아주 널리 퍼지게 마력을 활용하여 탐지를 해본다.
생존자들이 곳곳에 감지되는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것은 없다.
“왕복하며 사람들을 옮기는 식으로 가죠. 신님들이 다 모이면 위험은 적을 테니. 특히 레베카는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마법사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아가 레베카를 꼭 안아주고 레베카는 쓰게 웃음 지었다.
마법진이 가동했다.
규모가 큰 마법이 발동하는 와중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위험할 수 있다.
발동의 주체는 레베카이며 이곳에 남아 보조하는 것은 미아다.
발동의 순간 어떤 공격이 들어온다면 몸으로라도 막아야 한다.
제니가 긴장하고 있다.
그래도 어디서 예기치 못한 공격이 날아드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알지 못하고 당하니 예기치 못한 공격이라 부르는 것이다.
희우는 미처 하늘을 생각하지 못했다.
누구도 그 생각을 하진 못하고 있었다.
저 상공에서 위성이 빛났다.
* * *
공격용으로 사용할 생각이 없었던 것은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르골’은 그래서 레베카의 모습으로 살아서 돌아온 모든 딸들에게 명했다.
“포격할 것이다. 레베카라는 마법사를 공격해라. 죽일 필요는 없다. 합류하지 못 하게만 하면 족하다. 너희들은 그 후, 가능하면 죽지 말고 집결지로 와라.”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
시티즌의 도시는 분명 본거지지만 그렇다고 다른 집결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오르골’은 단말기를 조작했다.
과학은 편리하다. 기술은 위대하다.
이다지도 쉽게 아무도 모르는 기습을 넣을 방법이 많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공격위성을 서버에서 공수해 와 운영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하늘에서 포격이 쏟아진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르골’은 미소 지었다.
난민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벌레 같은 우민들이 쓸려 나가는 모습은 썩 보기 좋은 구경거리였다.
선택받지 못했으며 선택받을 의지도 없는 하찮은 것들.
살인이라는 업에는 그래서 항상 감동이 있다.
그 점에서만큼은 그의 상관과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필요 없는 목숨이 너무 많다.
가끔은 청소도 필요하다.
아케인으로 이어진다고 생각되던 거대한 마법진이 빛을 잃는다.
[외계]에 도달한 수준의 상공에서 내리꽂히는 텅스텐 탄자는 전술핵무기와도 유사한 위력을 낸다.
강력한 물리는 결국 마법마저 분해한다.
‘오르골’은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포격을 멈추었다. 짧은 시간동안 열 발 정도를 때려박았다.
충분한 혼란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천천히 걸어서 이동한다. 수상쩍은 느낌을 주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