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29화
왕국 - Lv.2911 ‘오르골’(4)
레베카는 아케인의 연구실로 돌아가 술에 진탕 취해 버릴 생각이었다.
그녀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시티즌의 도시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맥을 발견하지도 못했고, 그녀가 필요한 전투도 없었다.
오늘만큼은 마음껏 울고 뻗어버리고 싶다.
독한 술에 취해 기억마저 날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꿀술은 아직 남아 있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났다.
레베카는 반사적으로 마력방벽을 펼치고 방어했다.
그것이 바스러질 정도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란 무릇 기습적인 물리공격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두는 법이다.
차라리 암살자의 공격이 더 위험하다. 암습 판정은 그런 방비를 대개 무시해 버리니까.
이번 공격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사수의 포격에 더 가까운 종류다.
일회용의 값어치 높은 아티팩트들이 빛을 잃으며 레베카의 목숨을 보호했다.
다만 충격에 하늘 높이 떠오르고 대지가 뒤집어엎어지는 가운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별수 없다.
[마법의 신이 당신을 걱정합니다.]
목소리가 아닌 메시지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조금 더 거리감을 두어 편안하게 해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오랜 기간 몸에 익은 여러 습관들이 마법을 자아낸다.
열기와 후폭풍을 막고 바닥으로 착지했다.
아직도 충격에 출렁이며 녹아내리고 뒤틀리고 있다.
하지만 상대가 사수라면 공중에 떠 있는 편이 더 위험하다.
일단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죽어서 떠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적어도 맥을 추모해야 하지 않겠나.
유배자인 이상 언제건 이럴 수 있다고 각오는 했고 괜찮을 줄 알았지만 괜찮지 않았다.
레베카는 열기에 눈물이 증발하는 것을 느끼며 돌아가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위협에 노출되었음을 깨달았다.
타오르며 이지러지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번 물리쳤던 암살자들이 다시 보였다.
왜 나를?
레베카는 우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했다.
* * *
희우는 하늘에서 날아드는 텅스텐 탄자를 깨닫는 즉시 날아올랐고 가능한 최강의 일격을 때려 부었다.
그 결과 두 개를 어떻게 쳐내며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희우는 강한 불쾌감을 느꼈다.
지금까지의 적들은 강대했다.
강대했기 때문에 숨지 않고 드러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지언정 드러나서 했단 말이다.
이번 적은 그렇지 않았다.
일찌감치 숨어 있었고 본거지를 덮쳐도 좀처럼 무언가 하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피해는 계속 키우려고 했다.
이 공격은 분명 위력적이지만 그렇다고 희우의 파티원들을 제거할 수 있을 정도냐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럼 순수하게 난민들을 향한 공격이다.
제대로 된 적을 노린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사람을 죽이고 싶었을 뿐인 공격인 것이다.
불쾌함은 분노가 되었다.
어차피 지상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미아와 제니는 무사할 것이다.
어디서 날아온 공격인가?
희우는 추가적인 공격이 있지 않은가를 걱정해야했다.
저 높은 곳. 아득한 상공.
무엇이지?
위성이다.
고블린들이 운용하던 병기를 본 기억이 없다면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한참이나 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곧 신들과 오빠가 도착했다.
다들 불쾌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버러지 같은 도마뱀이군.”
드라간이 가장 크게 화를 내었다.
자연의 신이 마력 탐지를 펼쳤다.
그저 있는 대로 마력을 때려 박아 물리적 충격마저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마력탐지가 일어났다.
저 먼 곳까지 달려갔다 돌아오는 마력을 본인이 아님에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군. 그냥 날려 버리도록 하지. 어차피 여기서 난민들을 챙기다간 다 같이 소모만 되겠군. 나타날 생각 자체가 없다.”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휘말린 다른 사람들은 무사해?”
에르메스와 로잘린이 살아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베티 덕분이었다.
베티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무기고의 길드마스터였으며 고위랭커다.
제니와 미아도 너덜너덜하긴 하지만 무사했다.
이제 와서 이 정도에 목숨을 위협 받기에는 충분히 강해졌다.
블랑쉐는 레베카와 함께 날아왔다.
알파와 베타도 죽지 않았다. 정확히는 한 번 죽었으나 부활했다는 모양이다.
소모성 부활은 암살자들도 흔히 채용하는 스킬이다.
블랑쉐는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하다면 얼마건 쥐새끼 같을 수 있는 남자지. 악룡이라는 녀석도 비슷한 모양이군. 놓쳤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다.”
오빠가 일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말하였다.
“사실 이게 가장 우려하던 일이지. 자존심이고 뭐고 모조리 내팽개친 경우 말이야. 작정하고 숨어 지내면 어찌할 방법이 없어.”
실제로 그렇다. 하이 랭커가 게릴라가 된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딘가 불안 요소를 남겨둔 채 [메인 던전] 공략을 한다?
가장 위험한 일이다.
라고 일단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레베카를 보았다.
* * *
‘오르골’이 레베카의 행세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실의에 빠진 마법사는 애초에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익힌 간단한 마법 정도로도 속여 넘기는 건 쉬웠다.
계획대로 일이 풀리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하지만 갑자기 먼 곳에서 파괴를 자행하던 그룹들이 나타났을 때는 조금 당황했다.
‘오르골’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좋아한다.
정보가 많으면 계획이 정교해지며 틀어지더라고 탈출구가 생긴다.
신들의 용모에 대하여 정보를 수집한 것은 습관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알아볼 수 있었다.
저 거대한 트롤은 전쟁의 신이다. 그 옆에 있는 꽃잎 요정은 자연의 신이다.
그로서도 예상치 못한 무언가였다.
강림? 아니다. 그런 신성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저 강력한, 하지만 신좌에 오른 위대한 유배자로서의 위엄만이 느껴질 뿐이다.
‘오르골’은 비로소 깨달았다.
이자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이 내려와 있다.
어떻게 하였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랬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악룡에게 보고할 필요가 있다.
머리카락이 쭈삣하고 서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스릴에 기뻐했다.
일선에서 물러나 있지만 가끔은 그립곤 하던 것.
이렇게 다시 느끼니 좋다. 레베카의 가면을 뒤집어쓴 채 속으로만 미소 짓는다.
재밌는 일이다. 악룡이 신을 이겨낼 수 있을까?
그의 상관이지만 그 역시 확신하지는 못하는 일이었다.
있는 그대로 괴물끼리의 싸움이다.
하나도 아니고 둘.
게다가 아주 오래되고 강력한 신 둘이 동시에 존재한다.
‘오르골’은 문득 하늘을 보았다. 그 너머, [지옥]과 함께 번외 던전으로써 존재하는 인외의 마경.
만약 그 [외계]까지 동원된다면 어찌해 볼 만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악룡이 안배해 둔 것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지만 신 둘 정도라면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에 들지 않는 상관이라고 늘 생각하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신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블랑쉐를 어떻게 할까.
신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어찌하긴 힘들다.
이렇게 어렵게 돌아갈 필요는 없을 줄 알았는데.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며 품속의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횟수가 한 번 남은 단검. 규율의 신이 그에게 남긴 선물이다.
이걸 지금 써야 하나 생각을 해본다.
이 파티와 신의 존재는 악룡이 알아서 할 문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블랑쉐.
따로 빼돌리기에는 심연만큼 좋은 곳이 없다.
‘신이시여, 당신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규율의 신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이 신은 경영에 관심이 많은 유일한 신이었다.
다른 신들은 각자 제 할 일만을 한다. 신좌에 얽매여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런 자들인지 야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혹은 단지 그나 악룡과 코드가 맞지 않는 것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규율과 금전의 신은 세상을 올바르게 보고 있었다.
인간에게도 가치를 매길 필요는 있다. 불필요한 것은 줄여서 가치를 재조정할 필요도 있다.
세상엔 어떤 식으로건 군림하는 자가 필요하다.
바로 그런 점만큼은 셋이서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추구하는 것은 조금 다르겠지만 말이다.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바깥에서는 이런 동료가 없었다.
* * *
밤은 어둡다. 시티즌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저 상공의 위성은 희우가 처리하러 올라갔다. 정확히는 파괴할 생각이 아니었다.
포획할 생각이다.
지구에서 인공위성이 궤도를 돌 수 있는 것은 행성이 자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행성이 아니다. 평지로 이루어진 왕국이라는 이름의 공간일 뿐이다.
그런데도 위성은 기능하고 있다.
그런 물건은 귀하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둘 필요도 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침공을 방어하는 데 써먹을 수 있다.
블랑쉐가 나에게 찾아왔다. 시원하면서도 섭섭한, 그리고 비장한 표정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레베카야?”
“그렇다.”
진짜 레베카는 지금 약간의 위기에 처하긴 했으나 마법의 신이 있으니 문제없다.
그는 기꺼이 자신의 제자를 위해 강림할 것이다.
이렇게 될 거라고는 알고 있었다.
내가 알았던 것은 아니다.
“네 생각대로 되었군.”
“그 남자라면 틀림없이 이블을 택했을 거라 생각한다. 가장 취향일 테니까.”
“실제로 암살자에게 그 변신하는 종족 특성만큼 잘 어울리는 것도 없지.”
정보가 가장 많은 것도 레베카였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일그림처럼 잘 알려진 다른 인원을 배제했다.
블랑쉐와 함께 편성된 파티원들 중 바로 옆까지 갈 수 있으면서도 ‘오르골’이 능숙하게 연기할 만한 인원은 레베카뿐이다.
물론 레베카가 스스로 자원하기도 했다.
그녀는 맥을 찾고 싶어 했다.
“레베카에겐 안된 일이지만 덕분에 대어가 걸렸군.”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불안에 차 있었다.
“혼자 갈 거야?”
“내가 스스로 마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도움은 이미 충분히 받았다. 나 때문에 더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돌아가고 있지 않나.”
부분적으로는 사실이다. 블랑쉐가 오르골과 대면하고 그의 새로운 딸들을 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처음부터 그냥 도시를 밀어버렸을 것이다.
베티는 진작에 빠져나온 후였겠지.
“내 손으로 죽인다. 그렇지 않는다면 분명 후회로 남을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긴 했던 건가.”
“……서브 리더에게 이런 것이 애증이라고 배웠다.”
“조심해.”
블랑쉐는 나에게 소중한 동료다.
고정 NPC니 하는 생각을 그만두고 나니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블랑쉐는 바로 이전 회차에서도 끝까지 나를 지지해 줬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은 내 가슴 깊숙한 곳에 부채처럼 남아 있다.
현재의 그녀에게 그 기억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같은 사람이라 여긴다.
미궁이 현실이라 인식을 바꾼 순간 모두가 내게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살아 숨 쉬는 사람은 절대로 데이터가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어떤가 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문제다.
그 사실을 똑바로 보게 된 지금은 모든 동료들에게 지난 회차의 모습들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블랑쉐는 내 오랜 친구였다.
여기서 잃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친구니까, 믿어줄 필요도 있는 법.
“이기고 돌아와.”
“그러지.”
그뿐이었다. 우리는 모두 아무도 잠입한 암살자를 모른다는 듯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블랑쉐는 처음부터 생각했다.
‘오르골’은 자신을 되찾으러 올 것이라고.
알파와 베타의 태도로 그것은 확신이 되었다.
실패작에게 신경 쓸 리가 없는 남자다.
자극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 틀림없다.
애초에, 알파와 베타는 블랑쉐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오르골’이 얼마나 블랑쉐의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일까?
그것은 집착이다. 블랑쉐에 대한 집착.
접촉하지 않고 조용히 보고 있으며 언젠가 다시 자신의 손에 넣고자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8년 전부터 말이다.
그렇게 공을 들였던 남자가 블랑쉐를 암살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를 어떻게 할 수도 없다.
그 순간 그는 죽는다.
사방에 있는 전력을 일개 하이랭커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탈출 수단은 준비되어 있다.
실력만 믿고 기어들어 올 리가 없다.
무슨 수단이 있을까?
블랑쉐가 떠난 후 나는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문득, 내가 규율의 신에게 바쳤던 성물이 하나 떠오른다.
심연의 성물, ‘아카샤의 눈’.
심연의 권능이 임한다면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규율의 신은 제 신도를 지원할 수밖에 없겠지.
만약 그것이 ‘오르골’의 손에 있다면.
틀림없이 사용할 것이다.
심연의 저층은 랭커 수준이 된다면 훌륭한 대피소가 된다.
블랑쉐는 자신의 결말을 준비하고 있다.
* * *
레베카는 인상을 썼다.
왜 자신이 쫓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주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암살자들은 정말로 죽이기 위해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들지는 않았다.
도리어 어딘가로 몰아내려는 것 같았다.
마법의 신께서 나서서 무언가 할 필요는 없었다.
합류하지 못하게 만들 이유는 모르겠으나, 한숨 돌릴 시간은 충분했다.
그리고 하나둘 암살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레베카가 숨을 몰아쉬었다.
[마법의 신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메시지가 끝나자마자 신언이 내려왔다.
「뭔가 이상하군, 저쪽에 네가 하나 더…….」
그러나 그것은 갑작스레 뚝 끊어졌다.
레베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가 가끔 있다.
신과의 소통이 끊어지는 상황.
대표적으로는 심연이 그렇고, 또 다르게도 신의 개입을 차단하는 아티팩트 따위가 있다.
레베카는 조금 더 숨죽이고 있었다.
마법을 총동원하여 은신하고 있다. 쉽게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조심스럽게 마력탐지를 해보았다.
마력의 파문이 뻗어 나가고 바로 근처에 어떤 인물의 존재를 알려왔다.
레베카는 마법을 캐스팅하고 대량의 마력방벽을 두른 채 그대로 달려가서…….
총탄이 스친다. 마력방벽이 박살 났지만 일단 레베카는 손에 타오르던 마법을 꺼뜨렸다.
“맥……?”
“맙소사. 레베카. 정말 오랜만인데?”
초췌하고 너덜너덜한 상태의 맥이 보였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마법사 레베카가 머릿속에서 수상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소녀 레베카가 즉시 그 마법사를 쏘아버렸다.
모든 의심을 쓰레기통에 돌돌 말아서 집어넣은 후에 레베카는 울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