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330화 (330/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30화

왕국 - Lv.2911 ‘오르골’(5)

작전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죽는 것이 계획이다.

블랑쉐는 이 말을 알고 있다.

의외로 지금의 파티 리더인 오르골이 아니라, 그의 아비인 ‘오르골’에게 듣던 말이다.

실전에서 계획대로 돌아가는 일은 거의 없다.

큰 틀에서는 유지되겠으나 자잘한 부분은 도리어 무언가 맞아떨어진다면 그것이 더 신기하다.

그리고 보통 저런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자들일수록 그걸 대비하여 여러 가지 플랜을 동시에 세운다.

대부분은 버려지지만 일부는 기능한다.

블랑쉐는 그런 점에서 두 오르골의 공통점을 찾았다.

오해할 만도 했다. 둘은 비슷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를 가르친 스승은 더 이상 ‘오르골’이 아니다.

같은 이블로서 변신 능력을 사용하는 자가 곁에 있자 어딘가 따끔따끔한 감촉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종족이라 알게 되는 것일 뿐, 가짜 레베카는 위화감 없이 녹아들어 있다.

그럴 것이라고 미리 예상하지 않았다면 눈치챌 방도가 없을 정도였다.

블랑쉐는 때때로 레베카가 자신을 보는 것을 느꼈다.

이 또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에 느껴지는 것일 뿐, 그 시선은 평범했다.

블랑쉐는 최대한 그가 아는 생물학적 친부의 사고를 모사해 보았다.

저 남자가 아직도 그녀를 ‘딸’.

그러니까 단순 소모품에서 좀 더 가치 있는 무언가로 여길까?

아낄 생각이 있을까?

그런 질문을 한다면 그건 ‘오르골’을 이해하지 못해서다.

만약 블랑쉐가 ‘딸’이 아니라면, 그렇게 만들면 될 뿐.

그녀의 세계에서 태양계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우던 공포스러운 암살자의 방식 그 자체다.

그럼 어떻게 그런 상황을 만들까?

지금의 상황은 단기전이다. 당장은 몰라도 약간만 길게 머무른다면 반드시 들키는 상황.

이것은 연기력의 여부와는 무관하다.

신마저도 존재하는 전장이다.

마법의 신이 눈치를 채더라도 챌 것이며, 본격적인 마법을 구사해야 할 순간이 오더라도 들킬 것이다.

그렇다면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든다면 반드시 접촉해 오리라.

블랑쉐는 장비를 점검하고 컨디션을 점검했다.

혼자 적의 계략으로 몸을 던지는 행위다.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건, 자신감이 있건 없건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다.

블랑쉐도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죽고 죽이는 것 이외에도, 필요를 상대에게 증명하는 것 이외에도.

세상에는 다양한 관계가 있다.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고, 또는 깨달아가고 있는데 다시 다음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물며 만약 그녀가 다시 이 왕국에 나타난다면, 이 모든 기억을 잊은 채 초기화되어 있으리라.

오싹해졌고 끔찍해졌다.

자기 자신에게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게 된 지금의 동료들에게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 * *

‘이거 이거, 알고 있군. 뻔히 알고 있어.’

‘오르골’은 바보가 아니다.

처음의 순간이 지나고 주변의 태도를 보며 눈치챘다.

알고 있다.

사실 지금쯤이면 슬슬 의심의 시선이 와야 한단 말이지.

조금이라도 이상함을 느끼는 태도.

특히 어린아이들은 그런 것을 잘 안다.

이 마법사의 제자라는 저 작은 흡혈귀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다거나, 혹은 그와 같은 이름을 쓰는 이 파티의 리더가 뭔가 떠본다거나.

이런 수준의 유배자들이 모여 있다면 누군가는 아주 가벼운 의심이라도 품게 마련이다.

그걸 확신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핵심이지 애초에 이상함 자체를 못 느끼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유배자의 감각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런데도 노골적으로 아무런 시선도 없다. 일이 그렇게 잘 풀리는 건 이상함의 신호다.

‘뭐, 상관은 없겠지.’

알고도 내버려 두고 있다면 당장 자신을 어찌할 생각은 없는 것이다.

그런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블랑쉐는 대체로 그를 증오하고 있었다.

미궁에서 구르고 깨지며 머리도 같이 맛이 가버렸는지 그를 죽이러 돌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복수일지 관심을 갈구하는 것일지 모를 그것은 어떤 결말이건 스스로 짓겠다고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저 딸아이의 생각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뻔했다.

처음부터 설계하에 만들어온 자식들이다.

유전자 단계에서부터 발현시킬 형질을 결정하고 유능하지만 다루기 쉬운 형태로 다듬었다.

후천적인 요인도 최대한 통제했다.

그 우리를 벗어나 야생으로 나갔다 한들 여전히 그가 내다보는 범주 안일 것이다.

귀여운 딸이여. 그래, 나와 한번 만나고 싶었구나.

어차피 해야 할 일은 똑같다.

‘오르골’은 노골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뻔하게 자신에게 거리를 주는 블랑쉐를 보았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이 상황 자체가 이미 저쪽의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어떻게든 해보아라. 어차피 블랑쉐를 죽일 생각은 없을 것이다. 네 목적은 알고 있다.

바보들을 상대하지 않을 때는 이런 것이 좋다.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느 정도 안다.

까고 있는 패는 서로 인정하고 대신 숨겨둔 진짜 카드를 꺼내보라는 식으로 진행되는 흐름 자체가 너무 좋다.

이것은 신뢰다.

서로의 목적을 알기에 보내는 신뢰.

그렇다면 기꺼이 응할 뿐이다.

블랑쉐의 뒤로 다가갔다.

왼손은 스스로를 심연으로 밀어 넣을 [추방]을 캐스팅하고 있다.

다른 손으로는 확실한 추방을 위하여 성물을.

[아카샤의 눈]을 통해 저항할 수 없는 확실한 추방을.

그 등을 찔렀을 때, 블랑쉐는 별다르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뒤를 돌아보았을 뿐이다.

‘오르골’은 속삭였다.

“오랜만이구나. 딸아.”

짙은 보랏빛 권능이 피어올랐다.

일반적인 추방과는 다른 입자로 올올히 분해되어 가는 듯한 형태가 나타났다.

블랑쉐는 마지막까지 무표정하게 그를 보고만 있었다.

그 속에 담긴 서늘한 적의, 그리고 이글거리는 불타는 전의.

그냥 돌아올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 이것은 스승과 제자의 싸움이다.

그의 우리를 벗어나 야생에서 단련되고 살아남은 자식의 모습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동시에 ‘오르골’은 마법을 완성하고 자신을 스스로 추방했다.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서로가 원해서 만들어진 무대다.

그러니 온전히 이 딸과 서로를 죽이는 싸움에만 집중하면 된다.

물론 ‘오르골’은 블랑쉐를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소리 없이 조용하게, 약간의 마력 파문만을 남기고 두 사람은 [심연]으로 사라졌다.

* * *

“갔군.”

“예상대로였나요?”

“대부분은 블랑쉐 스스로가 예측했어. 나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왜 저한테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까요?”

희우가 볼을 부풀리며 툴툴거린다.

이런 애교를 부리던 녀석은 아니었는데 누구한테 배운 거람.

“너는…… 아무래도 그쪽으론 신뢰가 말이지.”

“제가 어때서요! 요즘은 공부 많이 하고 있는데!”

이건 재능의 문제 같은 거니까 어쩔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블랑쉐는 본래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상대방의 사고를 읽는 법을 제대로 익혀가고 있다.

블랑쉐에게 부족했던 것은 공감 능력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고 능력은 부족하지 않으나 공감 능력을 발휘할 이유가 없도록 교육받아 왔으니까.

이 또한 그 아비의 주박일 것이다.

“잘 돌아오겠죠?”

“[심연]으로 간 것이니 원래라면 루시가 보조해 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신좌가 공석이다.

루시가 내 눈치를 보았다.

“어? 그럼 나 돌아갈까?”

“피같이 소중한 휴가 아니십니까?”

시간이 아까워 지옥을 박살 내던 그 모습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난 저 블랑쉐를 계속 보고 싶어. 그래. 만약 다음 서버가 열렸는데 그곳에서 블랑쉐가 나타난다면…….”

끔찍한 이야기군.

다른 이야기를 하자. 저쪽은 믿어주는 수밖에 없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끝내야만 하는 일도 있는 것이니.

“그래도 이 정도면 규율의 신도인 건 확실하군요.”

“그래, 그거 심연의 성물이었지? 네가 규율에게 바쳤던 것.”

“그렇다면 이제 악룡은 우리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했겠군요.”

‘오르골’이 어떤 식으로건 접촉해 올 것이다.

이게 블랑쉐가 확신했던 것이었다.

각자의 사정을 떼놓고 본다면 규율의 신에게는 우리 측을 정찰하는 것도 된다.

신도 모두를 하나하나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실질적으로 규율이 우리 파티를 대면한 것은 [아케인]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쪽 마법사들도 아직 살아 있을 거야. 이쪽에 붙어 있겠지.”

학장을 노리는 위협은 없었다.

충분히 위협적일 것이라 생각했음에도 말이다.

계속해서 이 도시에 도사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규율의 신은 젊은 축이다.

현재 혼돈을 기억하는 신들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대다수는 그다지 열정적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늙었으면서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드라간 같은 신이 몹시 특이한 경우다.

“규율의 신은 혼돈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만 있겠지.”

루시가 부끄러운 듯 몸을 꼬았다.

“크크크. 누구나 자신이 직접 보지 못한 과거의 위업을 과소평가하곤 하지. 용이란 놈과 그 신은 어떨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도 입질이 없다면 포기한 거겠죠. 대놓고 지금 상황을 보여주고 우리가 뭘 믿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마지막 낚시다.

미끼를 물까?

혹은, 단지 제 맘대로 살아가는 광인인가.

솔직히 말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마법의 신이 연락해 왔다.

저 멀리 자신의 신도들이 있는 곳, 학장을 통하여 긴급하게 연결된 통신이었다.

레베카와의 연결이 끊어졌다고 한다.

심연으로 간 것 같은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레베카를? 왜?”

기습을 한다면 차라리 여기라고 생각한다. 레베카는 이런 전투에서 대단한 전력이 될 수 없다.

어찌 되었건 마법의 신은 절박해 보였다. 대신관으로 삼을 정도의 제자라면 그럴 수 있다.

마지막 위치는 특정하기 힘들었다.

아직도 위성 포격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다.

가뜩이나 지형을 잔뜩 갈아버린 후다.

알 수 있는 것은 외곽 어딘가라는 사실뿐.

다른 쪽에서 카베와 고생하고 있을 일그림과 에리나를 위해서라도 구해야 한다.

동시에 나는 구석으로 밀어두고 있던 추측을 하나 퍼 올렸다.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하는 가운데 던져두었던 낮은 확률의 추측.

악룡이 레베카에게 먼저 접근할 이유로서는 완벽했다.

* * *

블랑쉐는 심연의 속을 헤매었다.

식량도 무엇도 준비되어 있지 않지만 서로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질질 끄는 일은 필요하지 않다.

심연의 저층은 그다지 강력한 괴물들이 서식하지 않는다.

칙칙하고 어둡고 축축한 이곳은 그야말로 암살자를 위한 공간이다.

마력은 잘 회복되지도 않는다.

그러니 차근차근 탐색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만날 것이다.

그때가 그녀가 가진 모든 악연을 청산하는 순간이다.

대화는 필요 없다.

그의 가장 소중한 친우 중 하나인 에길이 말하듯, 전사는 무기로 대화하는 것이다.

전사?

블랑쉐는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웃었다.

블랑쉐는 암살자이자 사수지만, 에길은 그래도 전사라고 불렀다.

-네 삶에 가슴을 펴라. 죄업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갚아라.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자를 나는 전사라고 부른다. 너는 전사다. 지금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전사다.

에길은 블랑쉐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현명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말을 믿었다.

주관적인 시간으로 하루가 흘렀다.

아직 서로의 흔적은 발견하지 않았다.

심연을 탐색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유한 왕국이었다.

다른 유배자의 흔적은 극히 드물었다.

가끔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시신에 불과했다.

죽어 쓰러진 지 오래된 백골이나, 낡아빠진 장비들.

혹은 비교적 최근까지 살아 있었던 것 같은 시체들도 있다.

심연은 시간이 제멋대로 뒤틀린 공간이다.

그녀가 여기서 시간을 얼마나 보내게 될지는 모른다.

그래도 침공이 시작된다면 저절로 귀환하게 될 테니 문제없다.

‘오르골’도 그래서 이곳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을 것이다.

대신격의 영역인 심연은 바깥과 완전히 독립된 이상 공간이다.

신조차도 쉬이 간섭할 수 없다.

그야말로 둘만의 전장으로 알맞다.

악룡의 승리를 믿는다면 도리어 안전해지는 곳이 여기다.

침공이 시작되어 왕국으로 강제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어느 쪽이 승리했건 한 몸 보존할 수는 있으리라.

자, 언제가 될까?

그와 내가 마주치는 순간.

암습으로 시작하게 될까? 그것이 그다운 방식이긴 하다.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몇 수 후까지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러므로 블랑쉐는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상대는 언제든 암습해 올 수 있다.

주관적인 시간으로 다시 하루가 더 흘렀다.

심연의 어둠 사이로 빛나는 모닥불을 하나 발견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의아함에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간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노출하는 것은 ‘오르골’의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었다.

모닥불을 쬐며 어울리지 않는 정장과 페도라를 쓰고 가만히 앉아 있는 그의 모습.

블랑쉐는 암습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행동이 시사하는 바가 있었기에.

천천히 다가가자 ‘오르골’이 말했다.

“드디어 왔군.”

“어째서 암습을 하지 않지? 너는 그런 남자가 아닌가?”

“걸작에게는 그에 맞는 예우를 취해야 하는 법. 넌 내가 만든 가장 완벽한 암살자다. 블랑쉐. 그러니 그렇게 시시하게 끝낼 수는 없지.”

“미친 소리군. 정말 본인이 맞나?”

남자가 일어선다. 블랑쉐는 저 모습을 안다.

진짜 얼굴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암살자들을 이끄는 수장으로서는 항상 저 모습을 취했다.

옷은 의문스러울 정도로 깨끗했다. 모자도 마찬가지다 구김 하나 없이 이 심연을 돌아다닌 모양이다.

강하다.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블랑쉐는 새삼 상대의 힘을 느꼈다.

‘오르골’이 모자를 푹 누른다.

눈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챙 아래로 보이는 입이 유쾌하다는 듯이 웃는다.

찰칵하고 어디선가 나이프가 나타난다.

“못난 딸아. 지금부터는 그렇게 망설이다간 죽을 거다.”

픽 하고 정장 입은 남자의 실루엣이 사라졌다.

모닥불의 빛도 꺼진다.

한순간 어둠이 몰려왔다.

블랑쉐도 단검을 들었다.

어둠 속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는다.

그 말이 맞다. 망설일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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