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32화
왕국 - Lv.2911 ‘오르골’(7)
함포의 위력은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개인이 가지고 다니는 전함은 그런 존재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심연]은 저층일지라도 [메인 던전]의 편린이라는 점이었다.
고로 블랑쉐가 의도했던 것처럼 계층 자체가 날아가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약간의 오산이었으나 큰 문제는 아니다.
그림자 분신들은 모두 폭발과 함께 사라졌으면 거대한 크레이터들을 남겼다.
일시적으로 심연의 어둠이 환하게 밝혀진 상태다. 태양이라도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온 사방이 타오르고 있다.
심연의 계층은 홀짝 층들의 일부가 무너져 내린 쓰레기장이다.
불탈 물건들이라면 얼마건 고여 있다.
인간이라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유독성 가스에도 제약을 받았을 정도다.
매캐하기 짝이 없는 가운데도 어마어마한 민첩 스탯과 각종 패시브 스킬들이 시야를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블랑쉐는 손가락을 튕겼다.
누아르의 함포가 다시 병기창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재장전을 명령하며 천천히 주변을 살핀다.
서두를 이유는 없다.
단순히 화력이라면 그녀가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사수는 장비빨, 꼬우면 이런 걸 만들었어야지.
그러며 조작하자 오래 써서 손때마저 묻은 레일건의 가변형 총신이 길게 늘어났다.
병기창이 열리고 저격용 탄창을 뱉어냈다.
블랑쉐는 단 한 호흡으로 장전을 끝마치고 겨누었다.
사격까지는 반 호흡이면 충분하다.
광선이 된 총탄의 궤적이 저 멀리 그림자가 일어나는 곳에 꽂혔다.
폭발이라기에는 작으나 충격파라고 부를만한 큰 타격이 발생한다.
타오르던 잔해가 무너져 내린다.
‘오르골’의 스킬을 떠올린다.
좁혀진 여러 가지 후보들 중 하나였다.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
어둠의 대공이라. 실로 저 남자에게 걸맞은 이름이 아닌가.
효과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하다. 그림자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어 침투와 은신에 용이하며 스택이 허락하는 한 분신은 찍어낼 수 있다.
그 분신들은 기본무장 외에는 복제되지 않으며 유니크 스킬을 보유하지 않으나 그 외에는 본체와 똑같은 성능을 지닌다.
전사나 마법사에게도 유용한 기능이지만 어디까지나 민첩직, 개중에서도 암살자를 위한 스킬이다.
제한 조건의 문제다.
순수하게 민첩 스탯을 많이 찍어야 한다.
기초 스탯에 영향을 받지 않는 마인드맵의 절댓값이다.
투자 비율은 총 레벨의 80%를 초과할 것.
강제로 타 클래스가 사용하는 것을 막아둔 것이나 다름없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무수한 암살자 계열의 패시브.
암살자 유니크 스킬은 대부분 이렇게 강력하면서도 까다로웠다.
랭커 중에 암살자가 드문 이유다.
그래서 블랑쉐는 사수치고는 유틸리티에 투자를 거의 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힘 투자와 종족값으로 메꾼 지능 이외에는 모조리 민첩에 투자된 기형적인 마인드맵을 가졌다.
그 대신, 대부분의 암살자 계열의 최상위 유니크 스킬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개중 하나가 눈앞에 있었고, 어차피 그녀가 죽여야 할 상대다.
하지만 블랑쉐는 조금 더 생각했다.
선점당한 스킬이 많았다.
모든 조건을 만족했음에도 블랑쉐의 마인드맵이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은.
누가 가지고 있어서가 아닐까?
알파는 아니다.
그녀의 스킬은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는 스킬도, 조건이 까다로운 스킬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가 모두 가지고 있을까?
‘오르골’은 용의주도하며 계산적이다.
현상을 분석하고 이해하여 다시 설계하는 것에 능하다.
그 재능만은 진짜다. 그러므로 [게이머] 못지않게 능통할 것이다.
그렇다면 보유한 유니크 스킬셋은 어찌 될 것인가?
하나가 아닐 확률이 높다.
그러나 저 긍지 높고 자기애로 가득한 남자는 언제나 바깥의 그와 같은 상태로 있고자 했다.
대면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러한 사실을 온몸으로 웅변 중이다.
파티 리더와 함께 추린 예측이 빗나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생길 만큼이나 그랬다.
미궁은 저 남자를 바꾸지 못했다. 도리어 저자가 미궁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같은 이름을 쓰는 누군가와는 애처로울 정도로 다르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함께하고 교류하며 신뢰를 하고, 사랑을 하며 바뀌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그녀에게 가르쳤던 모든 것을 생각하면 저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이 아니었다.
너무나 뛰어난 능력 덕에 생긴 자기애, 열등한 남을 믿지 못해 제 손에 모든 것을 틀어쥐려 한 인간불신, 그 속에서 피어난 고독.
블랑쉐는 문득 왜 저 남자가 자신의 복제를 만들었는지, 그리고 미궁에서 블랑쉐에게 애착을 가지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저것이 나름대로의 사랑일지도 모른다.
결혼도 연애도 사랑도 해본 적 없는 저 사람에게 가족이라고 할 만한 것은 자신뿐이다.
그리고 블랑쉐는 그의 생물학적 분신이다.
하지만 그렇게 문득 품게 된 연민이 그녀의 날을 무디게 만들지는 않는다.
아직도 타오르는 사방에서 한 줄기 빛이 번뜩였을 때, 블랑쉐는 침착할 수 있었고 그 대응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유니크 스킬 [암살자의 작법]
유니크 액티브 [배후의 그림자]
조건 없이 무조건적으로 배후를 잡고, 인지 범위를 벗어난다.
전조는 오로지 직전의 한줄기 번뜩임뿐.
뒤돎과 동시에 그 공격을 차단한다.
방어해서는 안 된다. 이 이동후의 공격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암습 판정이다.
섬뜩하고도 날카로운 판정이 블랑쉐의 무기를 갈랐다. 그녀의 단검이 찢어지듯 베여나갔다.
블랑쉐는 수트의 장비인 스파크를 뿌렸다. 전기가 튀고 그와 함께 몸도 파고든다.
유배자의 전투방식은 몸을 아끼는 것이 아니다.
틀림없이 100년이 넘었을 상대에게는 포션이 없다.
팔이 베이는 수준에서 끝나지는 않았다. 왼쪽 어깨부터 대각선으로 길게 베이며 뼈와 내장이 드러날 만한 큰 상처가 생긴다.
그러나 심장을 지나가지는 않았다.
악마라는 종족의 강인한 생명력은 그 와중에도 블랑쉐의 오른손에 힘이 풀리지 않게 했다.
주먹 끝에는 보라색 열매가 쥐어져 있다. 손안에서 터져나간 폭발 열매의 충격이 질량이 가벼운 둘을 한순간에 밀어낸다.
연격으로 들어오는 연속된 참격이 차단되었다.
거리가 벌어지며 포션을 깨버린다.
위협적이라면 저것이 가장 위협적이라 판단했다.
견뎌내었다면 이 정도로 일격필살을 자랑하는 액티브는 더 존재하지 않는다.
오른팔의 장갑에서 드론들이 퍼져 나갔다.
회복되는 짧은 시간을 8기의 드론들이 사방을 날며 광선을 조사했다.
폭발적인 열량이 가해지자 사방이 녹아내린다.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정확한 공격은 할 수 없다.
그래도 광역으로 밀어버린다면 시간은 충분하다.
몸이 회복되자마자 몸을 변형시켜 날아올랐다.
아직도 밝은 심연은 더 이상 시야를 가리지 못한다.
그림자들이 곳곳에서 다시 피어오른다.
각각 총기를 들고 상공의 블랑쉐를 겨누었다. 하피의 날개는 그리 빠르지 않으나 본래 총탄보다 빨라서 피하는 것은 아니다.
사선에서 최대한 몸을 뺀다.
몇 발은 몸에 맞아 타격을 입으면서도 드론을 움직여 맞대응한다.
무기를 통해 구분할 수 있다. 아티팩트는 복제되지 않는다.
다른 쪽에서 그림자가 하나 더 피어남이 보였다.
그리고 그 무기는 다른 분신들과 다른 것이었다.
블랑쉐는 레일건을 들었다.
그리고 마인드맵을 펼치는 감각을 순간적으로 되새긴다.
환상, 혹은 몽상으로 빠져는 짜르르한 감각이 몸을 감싸고 어쩐지 흐릿해지는 의식 대신 그만큼 또렷해지는 감각을 느낀다.
시간이 멈춘 것과는 다르다. 오로지 자신만이 사고되는 이 세계에서는 저 멀리서 자신을 조준하는 총구의 사선, 방아쇠의 격발, 총기 내부의 구조와 형태, 심지어 내쉬는 숨과 혈관에 흐르는 피마저도 느껴진다.
그녀의 마인드맵에 새겨진 모든 감각 보조 패시브들이 폭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파티 리더는 연습은 하되 최소한도로만 사용하라고 했다.
감각을 왜곡하여 인위적인 트랜스 상태를 유도하는 버그성 기술은 더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민첩직일 수록 위험하다.
돌아오지 못할 위험도 있으나 받아들일 정보가 너무 과해 영구적인 손상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블랑쉐는 지금만큼은 전지함을 느꼈다. 모든 것이 보고 들리고 느껴진다.
공감각으로 통합된 가운데 적의 격발이, 그리고 날아드는 총탄이, 선명한 핏빛의 궤적으로 시각에 떠올랐다.
자신의 몸에 존재하는 털 한 올 한 올 느껴질 만큼 증폭된 이상 감각이 그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레일건을 겨눈다.
이미 어썰트라이플의 형태로 변환도 장전도 끝났다.
핏빛 궤적에 자신의 사선을 겹친다. 그것은 따뜻한 녹색으로 비쳤다.
겹치는 순간마다 격발.
전자적 신호로 격발하는 레일건의 연사 속도는 필요하다면 얼마건 끌어올릴 수 있다.
* * *
‘오르골’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가 갈긴 것은 기관총이다. 정밀도보다는 화망을 형성하는 연사력과 화력으로 승부하는 종류다.
그리고 아티팩트에 속하는 기관총은 당연히 더없이 강력하고 공중 기동을 하는 적을 찢어발기기에 적합하다.
[배후의 그림자]를 방어해 낸 것은 놀라우나 그에게도 수단은 많다.
죽지만 않으면 살릴 수 있으니 걱정은 않았다.
하지만 허공에 무수한 스파크가 발생했다. 무엇하나 블랑쉐의 근처까지도 가서 닿지 않는다.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맞아서 튕겨 나가고 사방으로 도탄하지만 그 도탄마저 다시 뭔가와 충돌했다.
다음 순간 깨달은 것은 저쪽의 총구 역시 불을 뿜는다는 사실이다. 묘하게 리듬감마저 있게.
먼저 발사된 총탄이다. 그것도 분당 1천 발, 초당 25발을 사격한다.
모든 화망이 하나하나 격추되고 있다.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아쇠를 유지하는 지금, 그것이 점점 더 정밀해짐을 느낀다.
부딪혀 빗겨 나가는 총탄이 사라지고 있다.
모두 허공에서 깔끔하게 맞물려 제자리에 추락한다.
사격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블랑쉐는 총탄 하나하나를 보며 그것을 사격해 맞히고 있었다.
곧이어 소음마저 사라졌다.
서로의 사격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점점 따라잡히고 있다. 미처 발사되기도 전에 이쪽을 향해 저쪽의 탄이 날아든다.
그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닌 기계적인 탄의 격발마저도 읽히고 있다.
점점 보이지 않는 벽이 다가온다.
조금씩 조금씩 조여 오는 느낌이다.
분신 쪽이 어떤지 살폈다.
8기가 아니라 24기로 늘어나 정신없이 움직이는 드론들이 분신들을 하나하나 격추하고 있었다.
‘오르골’은 헛웃음을 지었다.
있을 수 없으며, 가능해서도 안 된다.
분노를 밀어내고 또 다른 감정이 가슴 속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르골’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했다.
유니크 스킬 [삶과 죽음의 경계]
유니크 액티브 [피안의 검은 정원]
* * *
블랑쉐는 아직도 공감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기묘한 집중은 사고를 여유롭게 만들어준다.
세상이 너무 느리고 예민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니 여유가 생길 수밖에 없다.
몸이 어떻게 비명을 지르건 블랑쉐는 세상을 관조하듯이 조용히 지켜볼 수 있었다.
그래서 상대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짙고 검은 어둠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다.
차갑고 무거운, 마치 생물 같은 짙은 어둠은 파티 오르골의 튜토리얼 12층을 겪은 적이 있다면 낯익은 것이었으리라.
블랑쉐에게는 그 경험은 없었으나 미리 알기에 무엇인지는 알았다.
저것이 번져나가면 모든 것이 차단당한다.
심연에도 흔하나, 그보다 더욱 깊은 곳.
[메인 던전]으로서의 [심연]에서나 보게 되는 끔찍한 환경요소다.
블랑쉐가 거기까지 생각한 직후, 어둠이 폭발적으로 번져나갔다.
그리고 블랑쉐는 어둠 속에 있었다.
별빛이 없다면 실수로 마인드맵을 열어버린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농밀한 어둠.
축축한 혀가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핥아 올리는 듯한 불쾌함.
끈적끈적하며 마법도 감각도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어둠이다.
감각이 사라지자 자신의 몸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정신만이 허공에 둥실둥실 부유하고 있을 뿐.
블랑쉐는 바닥에 내려섰다.
촉각도 청각도 발이 바닥에 닿았음을 알려주지는 못하니 진짜로 그랬는지는 모른다.
단지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공감각의 기억이 그곳이 바닥이며 이렇게 근육에 힘을 주면 서 있을 수 있다고 알려줬을 따름이다.
드론들의 위치는 놓쳤다. 각각 어디선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겠지.
블랑쉐는 평평한 곳을 찾아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명상하듯이 고요하게, 마지막을 기다린다.
* * *
[피안의 검은 정원]은 그리 만능 스킬은 아니다.
시전자 역시 똑같은 환경에 노출되며 제가 사용하니만큼 익숙하다는 것 외에는 이점이 없다.
하지만 그래도 시전자이기에 주어지는 단 하나의 보정이 있다면 이정표다.
범위 내에서 가장 위협적인 적에게 표식이 남는다.
제 몸의 위치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불길을 밝히는 모닥불처럼 표식이 타오르는 것이다.
희미한 불빛이 그의 딸이었던 존재를 비추고 있다. 가느다란 실루엣.
그를 기다리듯 조용히 앉아 있다.
‘오르골’은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고 싶어서는 아니다.
이곳에서는 무엇도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
스킬을 사용하는 것도 자유롭지 않다. 원거리 공격도 힘을 잃는다. 마법은 말할 것도 없다.
순전히 날붙이로 상대를 찌르는 것이 최선인 공간이다.
어둠의 원소로 이루어진 검은 정원이 ‘오르골’이 태어나서 처음 느낀 감정을 자극한다.
공포는 낯선 것이었다. 하물며 자신이 설계하고 자신이 만들어 자신이 길러낸 암살자에게는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감정도 차오르고 있었다.
벅참이었다. 어째서 이 상황에서 기쁨을 느끼는가?
‘오르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절체절명의 위기다. 그라는 존재가 여기서 마지막을 맞이할지도 모르는 그런 순간이다.
안배한 모든 것이 파훼되고,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단검 한 자루로 저 멀리 있는 딸의 뒤를 찌르는 것뿐이다.
이 상황에서 어째서 기쁨을 느끼는가?
태초의 어둠과도 같은 적막 속에서 기나긴 걸음을 걷는 것은 순례와도 같다.
유일한 불빛이 비치는 곳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간다.
그에게 주어진 일은 이제 이것뿐이었으니까.
점점 불빛이 가까워지고 ‘오르골’은 문득 깨달았다.
* * *
블랑쉐는 갑자기 알 수 있었다.
이 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아주 막연하면서도 알 수 없는 어떤 느낌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냥 그렇게 알 수 있다.
직감인지 직관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
그래서 일어섰다.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돌아섰다.
잠깐이지만 어둠에 조금 익숙해졌다.
감각이 약간은 제자리를 찾고, 적어도 자신의 몸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시각은 여전히 제 기능을 하지 못하나 정말 가까워진다면 그곳에 무언가가 있다고 깨달을 정도는 되었다.
단검을 쥔 손에 힘을 넣는다.
바로 눈앞까지 다가오자 어렴풋이 느껴진다.
빠르게 움직이기에는 감각이 지나치게 차단되어 있다.
둘은 지금까지의 공방에 비하면 아주 느릿느릿해 보일 정도로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몇 번의 검격이 교차했다.
블랑쉐는 아직도 공감각 속에 있었으며, 점차 익숙해지는 어둠 속에서 ‘오르골’의 공격이 눈에 익기 시작했다.
분명 눈을 감고 있음에도 그 공격은 색채로 보였다.
칙칙하고 검은 회색이던 것이 조금씩 밝아지는 느낌.
휘두르는 소리가 점점 더 밝은 빛을 띤다.
검에 실린 힘이, 합을 나누며 손아귀에 느껴지는 촉각이 경쾌한 선율이 되어간다.
어째서 그런지는 몰랐다.
블랑쉐는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했다.
지금 이곳은 저 남자와 블랑쉐 둘만의 세계였다.
다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암살자로서 맞춰둔 체내의 시계만이 지금도 세상이 어딘가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시계가 10분을 가리켰을 무렵, 블랑쉐는 상대의 빈틈을 발견했고 그것을 찔렀다.
놀라우리만치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촉감은 틀림없이 심장이다.
시전자가 쓰러졌다.
세상의 어둠이 걷힌다.
둘밖에 없던 무채색의 공간에 조금씩 색채가 들어찬다.
블랑쉐는 심호흡을 했다.
공감각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그리고 다시 부활할 ‘오르골’에게 대응해야 한다.
저 용의주도한 남자가 소모성 부활 패시브 하나 챙겨두지 않았을 리가 있나.
‘오르골’이 일어선다. 그리고 공감각이 해제된다.
이상감각이 해소되며 세상이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았다.
‘오르골’은 곧바로 단검을 빼 들고 달려들었다.
스킬 같은 것을 활용할 시간은 없다. 대부분은 이미 쿨다운이 돌고 있다.
블랑쉐는 놓쳤던 드론들의 위치를 파악하며 급박하게 그 공격에 대응했다.
공감각에서 벗어난 상태가 아직 익숙하지 않다.
여기까지 해놓고 질 수는 없다.
서로의 피가 튄다.
힘이 빠질 만큼 빠지고 집중력도 소모되었다.
방어는 완벽하지 않았고, 공격 또한 조금씩 더 무뎌져 가고 있다.
서로가 그러하니 상처가 점점 늘어갔다.
블랑쉐는 조금씩 제 감각을 되찾았다.
‘오르골’이 말하기 시작했다.
블랑쉐는 대꾸하지 않았다.
“내 얼굴이 보이느냐?”
보인다. 죽음으로서 해제된 이블의 변신능력은 본모습을 드러내었다.
위엄 넘치던 미중년의 신사는 간데없고 평범하게 사내가 그곳에 있다.
뿔과 붉은 피부가 시선을 잡아채지만, 그것을 너머 인간이었던 시절의 본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블랑쉐의 세계에서, 그리고 블랑쉐와 그 여동생들에게 한없이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하던 남자는 뜻밖에도 선량한 인상이었다.
동네 벤치에서 비둘기의 먹이를 주는 모습이 어울릴 법한 주름진 50대의 남자.
검격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파고든다. 무릎을 들어 막아내고 밀쳐내지는 와중 투검이 날아갔다.
챙하고 허공에 스파크가 튄다.
심연을 밝히던 불길이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어둠이 조금씩 스며든다.
“유리한 얼굴은 아니었다. 너무 선해 보이니까. 그래서 복제할 때 얼굴만은 바꾸었지.”
물러난 상태에서 다시 충돌한다.
숨 가쁜 검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가운데도 ‘오르골’은 말을 이어갔다.
“나는 더 나은 나를 만들고 싶었다.”
내리찍는 공격에 힘을 싣는다.
상대가 방어한다. 그 사이에서 문득, 틈이 보였다.
어째서 보였는지는 모른다.
블랑쉐는 홀린 듯이 그 사이를 노렸다.
찌르기도 베기도 아니었다.
가드를 비틀어 열고, 상대의 빈손이 뻗어 나오는 것을 왼손으로 막아선다.
그리고 반응하기도 전에 찔렀다.
푹하고 서늘한 손맛이 느껴진다. 조금 전, 어둠 속에서 한번 알았던 것.
누군가의 가슴팍 피부를 뚫고, 갈비뼈 사이를 지나 박동하는 근육 덩어리를 헤집어놓는 부드럽고도 축축한 감촉.
거의 무의식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공감각도 남아 있지 않다.
블랑쉐는 자신이 어떻게 그 빈틈을 보고 헤집어 열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새로운 입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오르골’이 검을 떨어뜨린다. 작은 나이프가 땡그랑 하고 커다랗게 울리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울컥하고 남자의 입가에 피가 솟구친다.
“훌륭…… 하다. 너는 내 유일한 성공작이요. 걸작이다.”
검을 놓은 남자의 손이 뻗었다.
블랑쉐의 턱을 향해 천천히, 그리고 힘없이.
생명력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인다. 죽음의 그림자가 임박했다.
블랑쉐는 다가오는 손을 쳐냈다.
‘오르골’이 미소 지었다.
선량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사악하고도 자신감 넘치는, 묘하게 위압감을 주는 그 악마 같은 웃음.
그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린다. 혹은 죽음의 그림자가 그리 비치는지도 몰랐다.
블랑쉐는 뭐라고 대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네가.”
남자가 쓰러진다. 뒤로 천천히 몸이 기울어간다.
“‘오르골’이다.”
블랑쉐는 어쩐지 해야 할 말을 알 것 같았다.
기나긴 애증이 지금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털썩하고 남자의 육신이 힘없이 쓰러졌다. 이제는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한 남자가 마지막 말을 짜낸다.
“네가……. 내 모든 것을 가져라.”
블랑쉐는 실소했다.
정말로.
마지막 순간까지도 야망을 버리지 못하는 남자다.
뜻밖에도 블랑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저주의 말이 아니었다.
왠지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저 조용히, 나직하게 외듯이 말한다.
“안녕히…….”
그 말이 들렸을까.
‘오르골’이.
아니,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가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사악함도 자신감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미소였다.
남자의 눈에서 빛이 꺼진다.
블랑쉐는 가만히 죽은 남자를 지켜보았다.
불길이 사그라지고 빛이 잦아든다.
심연의 어둠이 다시 제 자리를 찾아오고 있다.
응당 그래야 할 것처럼 시신을 어둠으로 가린다.
심연은 미궁에서 무너져 내린 세상들이 켜켜이 쌓여 퇴적되는 쓰레기장이다.
그의 최후에 어울리는 곳이 아닐까.
곧 세상이 다시 완전한 어둠으로 잠겨 들었다.
블랑쉐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나는 ‘오르골’이 아니라 ‘블랑쉐’입니다…….”
암살자가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긴다.
동료들에게 돌아갈 시간이었다.
“MISSION COMPLE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