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35화
왕국 - Lv.15012 악룡 재버워크(2)
붉고 푸른 번개가 전신을 불태운다.
드래곤도 생물이다.
생체의 전기신호가 교란되고 마력이 미쳐 날뛴다.
번개의 원소는 그 무엇보다 강렬하고 파괴적이며 침투성도 높다.
뇌와 심장이 따끈하게 익어가는 것을 느끼며 악룡은 환희를 느꼈다.
아직 꿈에서 덜 깨어난 몸에 기억이 돌아온다.
바삭하게 익어가는 뇌리의 한 구석에서 번뜩이듯이 빛나는 기억들이 피어났다.
가진 스킬들 중 쓸 만하다고 여기던 것들.
오랜 세월 유배자로서 쌓아온 전투 경험들.
일개 하이랭커 사수가 아니라 왕국의 지배자로서 그가 사용하던 힘들이 또렷하게 되살아난다.
[무오의 광휘]
[차원의 유랑자]
[부서진 세계의 신]
[허수차원 붕괴]
떠오른 기억에서 본신의 모습으로 사용가능한 것은 저 정도였다.
어떤 종족이건 될 수 있는 드래곤은 그야말로 모든 스킬을 습득할 수 있지만, 습득했다고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킬은 저마다 적합한 클래스와 형태제한이 있고 드래곤의 본모습인 괴수형은 많은 스킬에 제약을 받는다.
그 반대급부로 손에 넣는 것은 압도적인 질량과 스펙.
최고의 공격력을 가진 종족 특성, [드래곤 브레스]를 비롯하여 온갖 드래곤만의 특전들.
그리고 사실 최상위 유니크 스킬이라면 그런 제한은 아무 상관도 없다.
어차피 강력한 유니크 스킬들 전반은 드래곤의 모습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드래곤이 하이엔드 종족인 이유다.
퍼즐이 짜 맞추어지듯 맞아떨어진다.
무수한 유희의 기억들을 뒤로하고 저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악룡 재버워크로서의 인격이 깨어난다.
스스로의 호칭을 그런 식으로 정한 이유는 그가 악몽 같은 자이기 때문이다.
악룡이란 세상을 멸망시키는 존재가 아닐까.
그러니 채용한 스킬들도 세상을 멸망시키기 좋은 것들이다.
기분 좋게 하나를 발동한다.
유니크 스킬 [허수차원 붕괴]
어려운 스킬은 아니다.
공간계열의 극치를 달리는 마법을 그대로 스킬로 만들어둔 것이다.
이걸 습득한 이유는 맨정신으로 이 마법을 해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심연의 권능을 마법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과 별반 차이없는 미친소리니까.
마법의 근원이라 불리는 드래곤 하트는 대부분의 마법 설계를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해주지만, 그런 기물에게도 불가능한 것은 있다.
퍼져 나간다.
보랏빛 어둠이 현실에 새겨진 실금처럼 퍼져 나간다.
자연의 신이 대응했다.
하이랭커급이라면 스킬을 섞어 쓰더라도 마법 자체에는 조예가 깊다.
신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해석이 불가능에 가까운 마법은 막을 수도 없다.
곳곳에서 공간이 깨어져 나간다.
비틀린 사이로 심연과는 또 다른 무의 공간이 보였다.
마법사들이 마법은 미궁의 시스템 어디까지 닿아 있는가를 몰라 전전긍긍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다.
아케인 이전에도 악룡이 만든 무수한 마법사의 도시가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누가 밝혀내기를 본디 미궁의 공간이 개박살이 난다면 그것이 쏟아지는 곳은 이런 무의 공간이다.
그럼에도 심연의 신이라는 대신격은 그 모든 것을 받아내는 [심연]이라는 공간을 만들고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마법의 위력과 효능은 간단하다.
돌아올 수 없는 어떤 영역에 상대를 빨려 들어가게 하거나 처넣은 다음에 닫아버리면 된다.
두 번 다시 볼 일은 없다.
공간이 사방에서 와장창 깨어져 나간다. 이건 피할 수밖에 없는 타입의 공격이다.
유리창이라도 깨진 것처럼 허공에 두둥실 하게 떠오른 공간의 균열들이 아가리를 벌린다.
시티즌이란 도시에 남아 있던 것들이 쓸려 내려간다.
그 파괴를 보고 있자니 악룡은 기분이 좋아졌다.
더 부숴봐야겠다.
다 부숴야겠다.
깨끗하게 청소를 하는 것은 침공이라는 하청에게 맡겨왔지만 이번엔 직접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신이랑 싸우는 것이 갑자기 재미없게 느껴졌다.
용은 날개를 펼쳤다.
유니크 스킬 [차원의 유랑자]
유니크 액티브 [차원회랑]
지금까지의 질은 보랏빛과는 전혀 다른 상쾌한 하늘빛 기운이 번졌다.
자연의 신이 인상을 쓰는 것이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여기서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남이 하고 싶은 걸 망치는 것 또한 커다란 즐거움이다.
악룡은, 혹은 광룡은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했다.
이 왕국을 손수 파괴할 것이다.
* * *
드라간은 자신을 향해 보랏빛 균열이 달려옴을 느꼈다.
마법적인 무언가를 해결할 때 이 용맹한 트롤은 대체로 이렇게 해왔다.
온몸의 근육에 힘을 잔뜩 불어넣는다.
다음 삶이 없더라도 지금에 최선을 다한다. 젖 먹던 힘은 물론 전생과 후생의 힘까지 끌어모은다는 생각으로 전력을 다하고.
루시를 언제고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몸에 익힌 공간을 후려치는 요령을 사용한다.
이미 불안정해진 공간에 더 강한 힘을 가하면 어떻게 되는가.
더 크게 부서질 것이라 생각하겠으나, 종류가 다른 힘은 서로를 중화한다.
우지끈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팔뚝이 터질 듯 부풀었다.
그대로 주변의 공간균열이 찌그러지며 닫혔다.
그리고 전쟁의 신은 악룡의 거대한 동체가 무언가 하늘빛 기운에 휩싸이는 것을 보았다.
스킬이다.
어떤 스킬인지는 모른다.
해야 할 일은 언제나 단순하다.
두들겨 부순다.
그게 성공하지 못했다면 힘이 부족하지 않았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면 될 일이다.
대지를 디디고, 요령을 담아 힘을 분산하고, 드래곤만큼은 아니지만 이 거대하고 사나운 트롤의 육신을 충분히 날려 보낼 만큼의 힘을 담아서.
도약의 순간 발끝을 뒤튼다.
소용돌이치며 뻗어 나간 힘이 지반을 넓게 뒤흔든다. 약한 지반임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작용반작용을 버티게 하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다.
다음 순간 반경이 400미터에 달하는 원형의 소용돌이 모양 크레이터가 발생한다.
도약만으로 가벼운 지진이 발생하고 널리 퍼져 나간 충격파가 사방의 물체를 퍼 올린다.
그만큼의 힘을 받은 6미터 트롤의 육체는 순간적으로 소리의 벽을 몇 개 깨부술 정도로 빠르게 날아올랐다.
거룡의 몸체에 휘두를 생각으로 등을 젖힌다.
전초전은 끝났다. 몇 번을 죽여야 할지 모른다면 가장 많이 죽인 것은 그가 되어야 한다.
등골을 짜내듯이 몸을 잔뜩 젖히고 척추기립근부터 광배근까지 몸에 존재하는 모든 근육의 힘을 짜내고 최선의 일격을 준비했다.
지상은 좋다.
신좌에 갇혀 불길 같은 신성력을 두르는 대신 제 한 몸의 마력과 힘으로 이렇게 적을 찌그러뜨리는 것은 보람찬 일이다.
그 적은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좋다.
그런 괴수를 때려눕히는 자신은 더욱 굉장해 보일 테니.
그런 의미에서는 자신이 상대보다 조금 작은 것도 만족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거의 무아의 지경에서 애병 [라그나로크]를 휘둘렀다.
망치 끝에 무언가 걸린다.
드라간은 그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억세게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것은 공기저항도 그 무엇도 아니다.
무엇일까?
생각하지 않았다.
드라간은 그저 최선을 다해 망치를 휘두른다. 그 결과가 저 거대한 악룡의 머리가 으깨지는 것이면 충분하다.
으지직하며 무언가 뜯겨 나가는 소리.
드라간은 그 순간 느꼈다.
무언가 한발 더 나아갔음을.
공간을 치는 요령 이상의 무언가.
방금의 저항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다.
어딘가, 이 세상에 규정된 힘의 한계를 넘는 순간 일어난 일이 아닌가.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맹렬한 공격은 하늘빛 장막이 피어나며 무력화되었다.
드라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스킬은 뭐지? 공간 관련인가?
물리적인 부분에서는 방금의 그 일격은 그야말로 행성을 일그러뜨릴 위력이었다.
여파만으로 시티즌의 주변은 황무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무력화된다면 공간계통의 어떤 스킬.
잡힐 듯 말 듯한 어떤 깨달음 사이에서 드라간은 자신이 공중에 떠 있음을 깨달았다.
어디인지는 곧바로 깨달았다.
[외계]
그렇게 불러야 할 정도로 높은 고도의 왕국 상공이다.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는 파편화된 무수한 대지의 조각들이 허공에 떠 있다.
을씨년스러운 유적들은 하늘 유적과도 비슷하지만 그보다 더 낡았고 오래되어 보인다.
왕국에 언제나 존재하는 알 수 없는 고대의 무언가들.
대신격들과 어떠한 연관이 있으리라는 점만 어렴풋이 느껴질 뿐인 괴이한 공간이다.
그리고 이곳에 존재하는 괴물들은 [지옥]의 악마들과도 다르다.
이성없이, 혹은 순수한 악의로 서로를 죽고 죽이며 잡아먹고 사는 괴물들의 약육강식 공간.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이형의 괴물이며 지닌 힘도 강대하다.
[외계]는 [지옥]보다 위험하다.
가로막고 있는 대지가 없기 때문이다.
저 괴물들은 뛰어내리고자 한다면 왕국의 사방으로 흩뿌려질 수 있다.
그러지 않는 것은 저 아래의 존재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또 하나의 침공 세력이 늘어난 것과도 흡사하다.
그 시점에서 드라간은 악룡이 어떠한 공간계 스킬로 이동했으며, 자신이 정확한 타이밍에 접촉한지라 함께 이동되었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악룡이 무엇을 하려는지도 알았다.
어떻게 하지?
오래된 신으로서 최소한의 책임감은 존재한다.
이 왕국은 그와 여러 다른 신들의 치하에 존재한다.
이곳이 스러진다면 그가 키운 무수한 서버들의 세력도 의미에 빛이 바란다.
약 0.5초의 장대한 고심 끝에 드라간은 생각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그가 막을 수는 없다.
일대일이라면 더 좋다.
저 용의 머리를 두들겨 부숴 버린다.
* * *
“저거 [차원의 유랑자]인데.”
그전은 [허수차원 붕괴]다.
모두 드래곤의 모습으로 사용할 수 있는 최상위 유니크 스킬로, 과연 최상위답게 직관적이지 못한 스킬명을 가지고 있다.
발동의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수없이 많은 마력들이 허공에 피어났다가 사그라듦을 보았다.
낭패한 표정의 자연의 신이 내 옆에 나타났다.
“어찌하면 좋겠나?”
“저걸 마법으로 막는 건 거의 불가능한 게 맞습니다. 둘 다 저쯤 되면 권능의 영역에 도달한 스킬이니까요.”
“어디로 갔는지도 파악하지 못했네.”
“드라간이 딸려가는 건 보셨습니까?”
“그렇지.”
루시도 내려와 제일 먼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떡하나! 대전사! 빨리 의견!”
마지막 순간 사정없는 투창 세례가 용을 노렸으나 그럼에도 빠져나갔다.
붙잡고 딸려갈 생각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했다.
드라간은 아무 생각도 없었으니까 들이받고 함께 어디론가 가버렸겠지.
자연의 신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 옆의 루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만 올려다보고 있다.
이거 참 신경 쓰이게.
그러면서도 머리 한구석은 회전한다.
악룡은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광기에도 종류는 있다.
무질서해 보일지라도 계산과 목적에서만큼은 확실한 것이 있는 경우다.
그게 아니라면 레베카를 가지고 놀기 위해 그렇게 음흉하게 굴지 못했으리라.
이성적인 광인이다. 그럼 목적을 가지고 뭔가를 했다.
그 목적이나 목적에 다다르기 위한 발상이 제정신이 아닐 수는 있지만.
그러면 추측할 수 있다.
애초부터 세 명의 신을 적대해 승리할 생각보다는 다른 쪽에 신경이 가 있었나?
왕국의 경영자 행세를 하는 이유는 재밌어서.
다른 이유라면 이렇게까지 제 모습을 숨기고 ‘오르골’에게 일임할 이유는 없다.
그야말로 드래곤에 심취하여 유희를 많이 즐기고 다닌 거겠지.
그건 확실히 정신 건강에 해롭다.
더 흔한 종족이었다면, 요정의 덫처럼 드래곤의 함정 같은 이름이 붙었을지도 모른다.
주기적으로 청소할 생각을 한 것은 일반적인 경영자들의 경우라면 방해가 되어 리셋하는 것이다.
침공을 통제하여 그렇게 하는 것 자체는 게이머거나 게이머에게 얻은 정보가 있다면 잘 알 수 있을 테니 벤치마킹하면 되었으리라.
하지만 이 경우는 아니다. 순수하게 자기 흥미본위로 무언가 꾸며두고 흑막행세를 하는 것에 가까웠다.
행동양식이 그렇다.
일단 그럼 이번 일에서의 목적은 확실했다.
왕국의 파괴 그리고 재창조.
스스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일이다.
거기에 또 하나 더.
앞발의 움직임이나 물기의 숙련도를 보면 드래곤이라는 종족을 제대로 다루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흔한 일이다.
괴수형의 몸을 제대로 다루어 전투력을 온전히 발휘한다면 더없이 끔찍하겠으나, 사실 드래곤씩이나 된 마당에 더 전투를 할 이유가 없다.
가만히 숨만 쉬어도 막대한 수명에서 레벨을 퍼 올릴 수 있다.
매년 1레벨.
별것 아닌 거 같지만 위험부담이 없고, 고레벨로 갈수록 공짜 레벨링의 가치는 점점 더 커진다.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면 동시대에 신좌에 올라 지금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신들 셋을 상대하기는 힘들다.
그러면 결론은 간단해진다.
정면으로 우리와 충돌하는 것을 피하고,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을 실행한다.
그걸 재밌다고도 느낄만한 타입이다.
“카베에게 연락해야겠군요. 신좌 부품을 얼마나 모았건 당장 돌아오라고. 아마 이대로 술래잡기를 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우리를 피해다니며 왕국을 황폐화한다?”
“그냥 깽판치는 거죠. [외계]도 건들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다가 [침공]을 정말로 인위적으로 통제할 작업을 제대로 해두었다면 지금 터뜨릴 겁니다.”
루시가 침통하게 말한다.
“속전속결을 해야 했나.”
“그랬다가 하나가 죽는다면 더 큰 부담입니다. 부활 스택도 많지 않으시죠?”
모르면 죽어야 하는 곳이 미궁이다.
일단 모르는 대로 조심스럽게 대하는 태도는 옳았다.
드라간이 시간을 최대한 오래 벌어줄 수 있다면 좋겠군.
그 트롤이 죽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부터 속전속결을 하면 됩니다. 세팅에서 벌써 느껴졌는데 숨겨둔 한 수 같은 건 없을 겁니다. 그냥 제 마음대로 산 놈이에요.”
한마디 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작부터 쳐 죽이면 되는 거였습니다. 묶어두고 사정없이 죽을 때까지 죽이면 되는 거였는데. 후. 제가 지나치게 신중했군요.”
포위도 뭣도 필요 없었다. 그냥 처음부터 갈아버리면 될 일이었다.
“원래라면 그렇게 했나?”
“그랬을지도요.”
솔직히 전쟁의 신이나 자연의 신이 죽는 것 까지는 그렇게 별생각이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의식중에 그러진 않았으면 했던 게 빈틈이었을지 어떨지.
“결과론이지. 난 이게 더 좋아.”
“끔찍한 피해가 발생할지도 모르고, 침공을 방어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요?”
“아니지. 넌 해낼 거야. 막을 수 있긴 하잖아?”
“저를 무슨 화수분으로 아십니까? 무한하게 뭐가 샘솟는 그런 거요?”
“아닌가?”
잠깐 생각을 한 후 대답했다.
“맞습니다.”
스킬셋은 대충 알 것 같았다. 용의 모습을 포기한다면 달라지겠지만, 그것은 무수한 유희의 그림자에 불과하리라.
드래곤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