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337화 (337/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37화

왕국 - Lv.15012 악룡 재버워크(4)

[외계]라고 불리는 곳은 대기권의 끝자락, 아주 넓은 곳에 존재하는 소행성 군집과도 같은 곳이다.

소행성이라고는 하나 둥글고 예쁜 모양으로 깎여 있는 경우는 없다.

이곳의 괴물들이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싸우고 날뛰는 과정에서 평평하게 다져진 곳도, 깨부숴진 곳도 많다.

온갖 모양과 크기의 암석들이 난잡하게 뒤섞여 길고도 긴 소행성의 띠를 형성하고 있다.

대지라고 부를 곳은 허공에서 드문드문 부서진 채 이어져 있는 무수한 파편들에 불과하다.

공중전이지만 공중은 아닌 기묘한 환경.

이곳에 처음은 아니지만 그 황량함과 황폐함만은 기억에 남아 있었다.

실로 시원했다.

그 감상에서 흘러나온 기세를 타고, 드라간은 아까의 그 공격에서 잡힐 듯했던 느낌에 집중했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

잠깐이나마 신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은 이래서 좋다.

심증에 불과해 확실하지는 않으나, 신좌란 어딘가 박제되는 기분이다.

모든 것이 영구히 유지되는 곳.

그것은 몸과 마음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분명하다.

감정을 가져도 상대적으로 억제되며 의지나 의욕마저도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드라간은 자신이 신좌에 있는 긴 세월 동안 얼마나 차분해졌는가를 되짚어 보았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신좌에 갇혀 지내는 죄수들을 위한 배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라간이 생각하는 강함이란, 많이 화내고, 많이 기뻐하고, 많이 슬퍼하는 것이며.

하루 종일이라도 전투와 전쟁을 벌이며 끝난 후에는 술도 음식도 잔뜩 먹고 푹 쉬는 그런 것이었다.

생물 그 자체로서의 강함.

드라간이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이루기에 신좌는 좋은 곳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도, 불로불사도 필요 없다.

그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이렇게 하계에서 내달리고 후려치고 두들겨 맞으며 싸우는 일 그 자체다.

실로 전쟁과 야성의 신 아니겠는가.

거기에 드래곤이라는 존재 또한 어찌 보면 생물로서의 정점에 가까운 괴물.

무대는 저 하늘 위의 공기조차 희박하고 그렇기에 추위가 잘 느껴지지도 않는 극한의 환경.

주변에는 아무런 방해꾼도 없는 일대일 상황.

[외계]의 괴물들이 좀 눈에 띄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가진 생물로서의 본능은 이런 싸움에 곧바로 끼어들지 않는 방향이다.

고로 전쟁의 신, 드라간은 마음껏 날뛰었다.

악룡 역시 그러했다.

물리력의 파도라고 불러야 할 것들이 온 사방에 날뛴다.

공간이 힘에 의해 찢어지고 [외계]를 구성하는 발판들을 으스러뜨린다.

그렇게 발판이 사라지면 다시 다른 곳으로 훌쩍 뛰어올라 망치를 휘두른다.

[원초의 힘]의 액티브를 발동한 드라간은 악룡에는 미치지 못해도 거인만큼이나 거대한 트롤이었다.

두 괴수가 날뛰는 가운데 촉수를 흔들며 다가오던 다른 괴물들은 그 호전성에도 불구하고 밀려났다.

오로지 파괴와 파괴만이 휘몰아치는 거대한 태풍이었다.

그 눈 속에서 다시 발판이 박살 나는 것을 보며 드라간이 뛰어오른다.

거대한 악룡은 이제야 제 몸을 사용하는 방법을 되찾아가고 있는 듯했다.

사납게 휘둘러진 거체의 발톱과 망치가 부딪친다.

재질적으로는 아티팩트인 그의 [라그나로크]보다 좋은 것이 없음에도, 튀어 오르는 불꽃과 공간의 출렁임 사이에 손상은 보이지 않는다.

동등하다.

힘 역시 그랬다.

두 발을 굳건하게 땅에 딛고 내지르는 일격은 저 악룡의 거대한 힘을 견딜 기반이었으며, 드라간의 뼈와 근육 역시 그 찍어누름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점점 불리해지고 있음 역시 자각한다.

뒤돌며 꼬리로 후려친다.

수천 미터 단위의 꼬리가 놀라울 정도로 날렵하게 움직이며 [외계]의 터전을 때려 부쉈다.

망치를 휘둘러 그걸 받아낸다.

둘 중 어느 쪽도 튕겨 나가지는 않았다.

다만 또다시 딛고 있던 대지가 으스러져 떨어져 내린다.

드라간은 힘을 모아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지구전은 진다.

반드시 진다.

이것은 체격의 문제다. 그의 재생에는 거의 한계가 없을 정도지만 그렇다고 진정한 불멸은 아니다.

하나 저 드래곤의 목숨은 몇 개인지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단순한 체력 싸움으로 가더라도 몇 달이고 싸우겠으나 먼저 지치는 것은 트롤인 그다.

과연 지상최강의 생물.

이 왕국에서 가장 강한 존재.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개한 야생동물들의 경우.

드라간은 단순히 강한 생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사였다.

순식간에 달려들며 몰아친다.

품속에 뛰어드는 트롤의 모습을 보며 용은 날개를 펼치고 뒤로 뛰어올랐다.

거체에서는 믿을 수 없는 속도였으며 동시에 힘이었다.

몸체가 빠져나가는 곳에 일시적 진공이 발생하며 이어서 후폭풍이 휘몰아쳤다.

휘말린 외계의 파편이 저 아래로 밀려나 가라앉는다.

드라간은 사정없는 연타를 날렸다.

악력으로 아티팩트의 자루에 손자국이 새겨질 정도로 움켜쥐고 공간을 치는 요령이라기보다는 그저 물리적으로 밀어내기 위해.

강대한 힘을 담아 드래곤을 두들긴다.

거체의 비늘에 연타가 가해지고 악룡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충격이 누적된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단단한 비늘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비늘이 부서져 튀기 직전에 악룡이 대응했다.

뾰족뾰족한 이빨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이에 넘실대는 마력도 보였다.

드래곤이라는 괴물이 진정 괴물들의 왕으로 남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

“그래, 큰 걸 준비해라. 나도 그래야 시간이 생길 테니.”

드라간은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러나 몸은 더없는 열혈로 들끓고 있다.

결국 뭔가 닿을 듯 말 듯 하던 그 감상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원래 잘하던 것을 하면 된다.

루시의 화신과 싸운다고 생각하며 우주에서 전력을 다한 그 순간처럼, 온몸의 힘을 응축시킨다.

눈에 핏발이 선다.

행성을 찢어발겨 [심연]으로 가라앉힌 일격을.

지금 여기서.

다시 한번.

* * *

드라간은 자신의 행보를 알릴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모를 수는 없었다.

온 사방에 [외계]의 파편들이 날아든다.

산산조각 나서 산탄처럼 흩뿌려지기도 하고 거대한 덩어리가 제 궤도를 벗어나 내리꽂히기도 한다.

거기에 실린 힘은 운석을 불러오는 마법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왕국의 정상에 다다른 전사와 지배자이던 악룡이 물리적 힘을 가하여 휘둘러 대는 것들이니까.

자유 낙하하는 운석과는 애초에 다른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저 높은 곳에서 쏟아지는 파편들이 왕국의 대지를 갈아엎고 있었다.

지상이 그야말로 초토화되고 있다.

자연의 신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한순간에 의식이 아득해질 정도의 마력이 꽃잎 요정의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온다.

한순간 마법진을 그리며 밤하늘에 거대한 마력방벽이 펼쳐졌다.

단순한 마력으로 만든 벽이라기보단 일종의 마법이다.

쏟아지는 재앙들을 받아내고 튕겨내고 있었으나 곧 의미 없어졌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드넓은 창공과 하늘에 빛나던 별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달도 빛도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어둠이 왕국의 하늘에 강림한다.

산산이 박살 나는 현실, 조각나 쏟아지는 세상의 편린들.

“오, 맙소사. 전쟁의 신이 살아 있을지 모르겠군요.”

“죽지는 않겠지. 돌아올 수 없더라도 신좌로 돌아가면 그만일 테니.”

이전과는 다르다.

리프트 속에서라면 모를까 왕국에서 저런 식의 파괴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는다.

그저 무의 공간.

게임에서 그래픽이 깨지고 그 틈새에 발생하는 아무것도 없이 무한히 추락하기만 하는 그런 공간이다.

그것이 [허수차원 붕괴]라는 스킬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하지만 저건 스킬에 의한 게 아니다.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화신으로 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외계] 전체를 엎어놓을지도 모른다.

물론 더 높은 곳에 있는 [바벨의 탑]을 건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외계]라는 지역을 구성하는 지반들도 모두 바벨의 파편에 불과하다.

“순수하게 물리적인 힘으로 고위 마법을 구현하고 있군. 다시 봐도 제정신이 아니야.”

“제가 봐온 전사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 중 하나입니다. 저걸 팔 힘으로 한다는 게 믿기지 않긴 하네요.”

물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통신이 잠깐 연결되고 레미가 쾌활하게 말했다.

[교섭은 끝났고, 확정되어 신좌 부품 분배했습니다! 리더 지금 거기로 신들 내려가라고 하면 될까요?]

“딱 좋네. 전쟁의 신이 시간을 잘 벌어주었어. 하지만 여기로 오면 안 될 거야. 내가 위치를 지정할게.”

레미도 참 배짱이 크다. 사실 잘 몰라서 그럴 수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몇 년 차라고 했더라 어차피 왕국은 이번이 처음이니 신이니 뭐니 해도 크게 와닿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딱 좋다. 일일이 주눅 드는 것도 피곤하니까.

무너지고 일그러지고 뒤틀린 검은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피어났다.

여기서는 그저 하늘에 그어진 선인 것 같으나 관측되는 현상이라는 시점에서 실제 규모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브레스다.

그 빛기둥을 보자마자 자연의 신이 마력을 더 불어넣었다.

일그러진 하늘 아래에서 붕괴를 떠받치고 있던 마력방벽이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나 빛의 브레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이를 양단한다.

눈부신 마력이 깃든 방벽이 아무 저항 없이 쪼개졌다.

그리고 그대로 붕괴하는 하늘을 다시 한번 반으로 가르며 지상에 선을 긋는다.

저 북부의 시티즌부터 길고도 빠르게 빛의 선이 그이고 마침내 시티즌이 있던 남부의 밀림까지 가서 닿는다.

왕국이라고 부를 만한 모든 영역을 빛의 기둥이 갈아엎었다.

틀림없이 왕국을 종단하는 거대한 협곡이 생겨났으리라.

그리고 다음 순간 붕괴했던 공간이 제자리를 찾았다.

밤하늘이 돌아왔다.

커다랗고 쩌렁쩌렁한 포효 같은 외침이 온 사방에 [드래곤 피어]를 담고 울려 퍼진다.

[나는 이 왕국의 종말! 세계를 파괴하고 다시 창조하는 자!]

그야말로 온 세계에 울려 퍼질 것 같은 외침이었다.

일종의 마력탐지지만 그것에 목소리를 담는 발상은 좀 참신하다.

저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끔찍한 낭비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강대한 드래곤만이 할 수 있는 마력의 낭비.

[세상이여! 내 날개 앞에 무릎 꿇어라! 멸망이 찾아오리라!]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블랑쉐가 듣지 못하여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안 좋은 심리를 자극하리라.

저 미친 드래곤은 이런 놀이를 즐기며 지내왔다.

그 마지막 또한 그러하리라.

“게임을 너무 많이 한 친구군요.”

“게임, 그래. 그렇지.”

루시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본다.

“왜 저를 보십니까?”

“아니. 아니다.”

되돌아온 밤하늘에 검은 실루엣이 드리웠다.

얼마나 높은지는 모른다. 달빛에 비쳐 마력을 내비치며 왕국의 모든 이가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떠올라 있다.

[멸망의 시작이다!]

왕국 하늘 가운데에서 번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마력을 떨치며 악룡은 그렇게 선언했다.

[유배자들이여! 그리고 신들이여!]

쾅 하는 마력적 충격이 발생했다.

어떤 임계에 도달한 [메인 던전]들이 각자 그 속에 머물고 있던 힘을 쏟아낸다.

왕국 전체에 거대한 힘의 파문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서부터.

네 개의 [메인 던전]과 통하는 포탈이 아가리를 벌렸음이 느껴진다.

준비해 온 모든 것을 지금 동시에 활용해야 한다.

[살고 싶다면 나를 죽여라!]

저 망상병 환자 같은 발언의 제일 무서운 점은, 저 용이 정말로 그런 힘을 지니고는 있다는 것이다.

나는 1만 년 이상 묵은 드래곤의 소재로 만든 장비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카베와도 의논해 볼 만한 문제였다.

드래곤이 날아들었다.

세상 전부를 그 날개의 그림자 아래에 두겠다는 듯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