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39화
왕국 - Lv.15012 악룡 재버워크(6)
드래곤은 본디 여러 가지 속성을 지닌 형태로 태어난다.
이 몸은 블랙 드래곤이었으나 어느 순간 그것에 의미는 사라졌다.
적성과 특성을 따지기에는 스펙이 너무 높이 올라간 탓이다.
산성을 띄었을 브레스는 순수한 마력의 결정체에 가까워져 차라리 마도 입자포라 부르는 편이 어울린다.
마법의 적성에도 의미가 사라진 지 오래다. 악룡은 거의 모든 마법을 스킬로서 보유하고 있다.
검은 비늘만이 남아서 그가 한때 블랙 드래곤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는 강하다.
그가 이겨내지 못할 것은 신들 정도 되는 유배자들이 동시에 공격하는 상황뿐이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일어났다.
악룡이 아케인을 향해 내뿜은 브레스는 어둠을 가르고 세상을 잠깐이나마 대낮처럼 밝게 만들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막대한 마력의 존재감과 신성의 기척은 저쪽에도 또 다른 신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악룡은 기뻐했다.
게임은 쉬우면 재미가 없다. 그는 지금 공전절후의 난이도에 도전하고 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악룡으로서의 정체성이 되돌아온다는 것은 동시에 광증을 다시 불러온다는 것과도 같다.
[폴리모프]는 양날의 검이다.
원래의 인격으로 있었던 시기는 점점 줄어간다.
악룡은 이미 자신이 누군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를 규정하는 것은 미궁의 바깥에 대해 남은 가장 선명한 인상인 게임으로서의 미궁.
그리고 미궁에 처음 유배당했을 때 느꼈던 충격뿐이다.
게임으로 이미 접했던 세상이 현실이 된 바로 그 충격 말이다.
그러니까 그는 생각한다. 이 세상의 주인공은 자신이라고.
남은 기억이, 사고가, 생각이, 자아가 그런 것 뿐이다.
스스로 미쳤다는 자각은 있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악룡의 비대한 자아는 분열을 거듭하고 무수한 인생을 낳았다.
[폴리모프]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바깥에서의 플레이.
왕국의 모든 NPC를 적으로 돌리고 황폐화하는 그런 플레이.
보통이라면 하지 않겠지만 그는 해보았던 기억이 있다.
어렴풋하게 남은 감각을 되새기며 악룡은 떠올린다.
그는 [게이머]고 이것은 게임이다.
게임의 만사에는 공략 방법이 있다.
신들과의 정면 승부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기믹을 생각해라.
신들이 왜 갑자기 나타났을까?
신좌에 묶여 있어야 할 죄수들은 어떻게 탈옥했을까?
문득 어지러운 정신 속에서 조각나 흩어져 있던 기억의 편린이 부상한다.
신좌부품.
그런 게 있었다.
그걸 누가 모았지?
일그림은 모른다.
아직 깊은 곳으로 가라앉지 못한 ‘맥’이라는 자아의 기억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얼치기 [게이머]였다.
아는 것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으며 의지조차 없다.
소시민적인 무언가였다. 악룡은 일그림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그도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
하지만 이젠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다.
즐거움을 위해 공략법을 생각한다.
그러며 몸은 [차원의 유랑자]를 사용하여 이동시킨다.
마법적 방해가 들어오지만 스킬은 본래 한 차원 위에 존재하는 불합리한 힘의 행사다.
통상적인 공간이동 방해로는 막을 수 없다. 애초에 술식조차 아니다.
푸르스름한 차원들의 잔영을 헤치고 흘러흘러 어느 곳에 도착했다.
하드스록의 설원이 눈에 들어온다.
이 전사의 나라는 일 년 내내 눈이 내리기도 하는 곳이다.
북쪽으로는 대설원이, 그리고 설원 너머에 세계의 지붕 같은 산맥들이 보인다.
저 산맥이 언제 만들어졌는가를 되짚어본다.
기억나지 않았다.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닌 건 확실한데.
아무래도 좋다.
악룡은 다시 힘을 모았다.
[드래곤 브레스]는 소모가 커 남발하기 힘든 공격이지만 그렇다고 아낄 필요도 없다.
단순히 스펙 싸움으로라면 이 왕국에서 그가 최강이다.
이런 낭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시 신성의 기척이 느껴졌다.
비상한 시력에 감지되는 것이 있다. 신좌로 통하는 공간균열이 열리고 그 속에서 신들이 걸어 나온다.
몇몇은 눈에 익었다.
결투의 신이라고 한다면 전쟁의 신만큼이나 까다로운 존재다.
악룡은 들이쉬던 숨에서 마력을 거두고 그저 다시 내쉬었다.
이건 아닌데.
다시 아까 하던 생각을 이어간다.
누가 저 신들을 풀어주었을까?
그런 지식과 능력을 동시에 갖춘 자.
빅맥을 잘 만들던 그 녀석.
어디 있지?
무시무시한 규모의 마력 탐지가 다시 퍼져나갔다.
자신을 숨길 생각이 없는 거대한 존재들이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하나하나가 지상에 돌아온 신일 것이다.
악룡은 생각했다.
일종의 포위망이다.
그가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막아서는 행동.
도박보다는 확실한 승리를 위해 차근차근 나아가는 모습이다.
다음 순간 악룡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그 녀석이구나.
공략의 실마리가 보였다.
제일 먼저 죽여야 할 놈이 있었다.
이번에는 마음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 * *
신들의 스킬셋이 짐작이 가능해지면 어느 정도 남은 최상위 유니크 스킬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건을 만족했음에도 그것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누가 한손에 다 틀어쥐고 있는지 알만해진다.
거기에 [게이머]라는 출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태도.
과대망상적 행동과 그걸 실현하려는 모습.
여러모로 겪어본 적이 있는 인간군상 중 하나다.
완벽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가진 스킬은 셀 수 없이 많을 테니까.
하지만 추측 가능한 영역에서 반드시 이것만은 들고 있으리라 여겨지는 게 있다.
“[허수차원 붕괴]는 공격력과 무관하게 상대를 무력화할 수 있으니 적에게 주기 싫어서 가진 것일 테고.”
루시와 자연의 신이 경청하고 있다.
다른 신들에게도 전달될 것이다.
“[차원의 유랑자]는 최고의 유틸기죠. 권능의 영역에 도달한 이동기입니다. 이게 있다면 [리프트]를 통하지 않고도 서버를 드나들 수 있습니다.”
“너무 좋은 것 아닌가?”
“그러니 챙겼겠죠. 이 녀석 스킬셋을 보고 있으면 대체로 자기가 하려는 일에 방해 되는걸 배제하는 식입니다. 본신의 모습일 때 전투력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판단이겠죠.”
그리고 그건 옳은 선택이었다.
이렇게 위기에 몰리더라고 녀석이 먼저 함정으로 걸어들어 오는 게 아니라면 잡을 수 없다.
심연의 신의 대전사 같은 존재가 나서는 게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그런 이가 나타나더라도 [허수차원 붕괴]로 뚫고 사라지겠지.
“그러니까 틀림없이 [부서진 세계의 신]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게 품절인 경우는 어떤 회차여도 극히 드문데 말이죠.”
“그럼 그 녀석이 가지고 있겠군. 뭐 하는 스킬인가?”
“강제로 일대일 상황을 만들죠.”
“일대일?”
어떤 강자를 고립시키기에는 최고의 스킬이다.
이걸 가진 누군가가 있다면 악룡이 재미 보지 못하게 끌고 간 후, 그곳에서 시간을 끌 수도 있으리라.
대체로 자신에게 위협적일 수 있는 스킬들을 먼저 취득하는 식으로 마인드맵을 설계했다.
타당하며 합리적이다. 적어도 그 시점에서는 제정신이었던 모양이다.
그럼 이제 상대가 그런 것들을 어찌 활용할지를 고민할 차례다.
신들은 대체로 쉬운 존재가 아니다.
루시라면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신들의 포위망이 깔리기 시작했음을 안다. 도망만 다닐 생각이 아니라면 제일 중요한 누군가를 하나 찍어서 처리하려고 할 게 분명하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너군.”
“강제로 일대일이라는 것의 메커니즘이 뭐지?”
“도전자가 신좌에 입장했을 때 벌어지는 싸움과도 같은 겁니다.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그런 공간으로 함께 들어가는 거죠.”
루시의 표정이 굳어진다.
“완전히 같은 메커니즘?”
“그렇습니다. 애초에 부서진 세계의 신이란 게 신좌 이야기거든요.”
“조건은 없고?”
“쿨다운이 아주 깁니다.”
루시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네가 이길 수 있나?”
“못 이기죠.”
“그럼 큰일 난 거 아닌가.”
“그러니 속여야죠.”
“속여?”
지금쯤 슬슬 상황을 완전히 깨달았을 것이다.
가장 인구가 밀집한 지역은 신들이 지키고 있다. 단독으로 돌파할 수 있는가를 따지자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 좀생이 같이 주변을 부수고 다닐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큰 의미가 없다.
본인도 잘 알 것이다. 가오는 한껏 잡아두고 그런 짓만 하기도 뭣하단 것을.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도박 수를 걸게 된다. 그걸 공략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나를 죽이러 올 것이다. 그렇다면 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승리했다고 여길 수 있을 테니까.
나에게 [부서진 세계의 신]을 건다면 그걸로 끝이다.
그렇게 생각하리라.
“그런데 거기는 신과의 연결이 끊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런 식이면 신앙 위주의 유배자는 아무것도 못 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신도가 있다면 신이 개입은 할 수 있어요.”
“오호?”
“조만간 올 것 같으니 함정을 파죠.”
달리 말하면 그 스킬로 만들어진 곳은 [차원의 유랑자]로도 [허수차원 붕괴]로도 탈출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곳이다.
가둬두고 패기에는 최적이란 뜻이다.
그게 내게 없는 것이 문제일 뿐.
“함정?”
“여신님 신좌로 가는 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루시가 사색이 되었다. 돌아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아직 하루 남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내가 너에게 화신해서 싸운다면 확실히 할 만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나는 다시……. 거기…….”
말꼬리가 급격하게 처지는 것이 정말로 돌아가기 싫은 모양이다.
“아니,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무, 무엇을?”
“고블레타리아 연방은 너무 깔끔하게 짜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연히 뛰어난 인재들이 있었다곤 해도 그렇게까지 이상적으로 독립하여 발전하긴 쉽지 않습니다.”
루시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러나 반박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수긍이다.
“그건 그래. 여러 시간대를 훑었으나 모두 너무 잘 처리가 되었더군. 나도 내 경영능력이 그 정도까지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럼 다른 사람이 한 거죠.”
“응?”
“그때가 지금인 것 같습니다. 바르바로이가 신경 써서 미래를 숨겨주었어요.”
그는 훌륭한 조언자다.
수없이 미래와 과거를 넘나드는 나를 만났을 것이며 어떻게 그 과정을 조율해야 할지 깨달았으리라.
적당히 힌트만 주면 내가 그 퍼즐을 맞추어 해법을 찾으리라고 믿었음이 틀림없다.
현실이 된 미궁에서 서버의 NPC들과 친하게 지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미래가 잘 바뀌지 않는 서버라면 그로 인해 자신의 행보를 대강이나마 알게 된다.
물론 시간의 신이 눈을 부릅뜨고 있어 언제 분기가 갈려 버릴지 모르니 조심스러워야 한다.
하지만 미래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제한적인 추리뿐이라면 괜찮다.
그렇다면 쉽게 변하지 않는다.
바르바로이는 내게 힌트를 줬다.
어차피 여신님이 평범하게 조언하여 해결된 문제라면 알려줘도 상관없을 텐데도 연방의 역사 그 자체를 숨기려고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강의 설립 과정 이외에는 전해 들은 바가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중간에 몰래 제가 했던 거 같군요.”
“이해했다.”
루시가 기쁘게 신좌로 가는 문을 열었다. 휴가 연장이니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빈 곳이므로 생사를 건 전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들어간 이가 주인이 될 뿐이다.
신좌에 앉자 신성이 몸에 차오른다.
지금 나는 신좌에 앉을 자격이 충분하다.
오래간만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루시에게서는 신성이 빠져나간다.
지상에 맨몸으로 내려와 있음에도 신이기에 띄고 있던 신성이 씻은 듯이 사라져 갔다.
여러 가지 화면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가장 먼저 평범한 유배자가 된 루시를 대전사로 지정했다.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자연의 신이 헛웃음을 짓는 것이 루시의 시야로 보인다.
신언으로 루시가 자연의 신의 손을 붙잡게 했다.
「마법으로 환영 좀 만들어주시겠습니까?」
“속여야 하나? 그렇게 정교한 걸 지금 할 수는 없는데.”
「오히려 좀 조잡한 편이 좋습니다. 자기를 속이려고 드는데 그토록 조잡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겠죠. 동시에 신좌를 이렇게 내려놓고 싶어 하는 신이 있을 거라고도 상상을 잘 못 하지 않겠습니까.」
드라간도 그랬고 대부분은 신좌에서 해방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죄수라고는 하나 불로불사와 강한 영향력, 그리고 고생 끝에 쟁취했다는 상징성까지 여러 가지가 신좌라는 자리에 미련을 두게 하는 법.
진짜로 일개 유배자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신들은 아무래도 적다. 젊은 신일수록 말이다.
일단 찬양받는 것을 누가 싫어하겠는가.
질릴 대로 질려 버린 루시 같은 신이 아니고서야.
그러니 이건 예상하기 힘든 수단이다.
자연의 신이 루시를 내 모습으로 숨긴다. 반대편에는 완전히 루시의 모습을 한 허상을 만든다.
온 사방에 신이 강림하고 있는 마당이다.
루시의 모습을 한 허상에 충분한 혼돈의 신성을 부여하자 언뜻 봐서는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어차피 한순간만 숨기면 된다.
모습을 드러내는 즉시 나를 죽이려고 들 테니 바로 발동할 것이다.
루시를 눈앞에 두고 시간을 끌 수는 없겠지.
때맞추어 거대한 마력의 파장이 다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력탐지다.
마력의 반향정위라고 할 수 있는 저 탐지 수단은 가장 기본적이고도 정밀한 것이지만, 당연히 마력으로 이루어진 허상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다.
정확한 타이밍이군.
이제 나타나는가?
[차원의 유랑자] 특유의 푸르스름한 공간 균열이 발생한 것이 다음 순간.
그 사이로 거대한 눈이 보였다.
용의주도하게도 시야로 나를 먼저 인식하고 일대일로 끌어들일 모양이었다.
자연의 신은 훌륭하게 연기했다. 곧바로 루시의 환영이 창을 들어 대응하려고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순간 느꼈다.
악룡은 내 모습을 한 루시를 지정했다.
유니크 액티브 [신좌 쟁탈전]
신이 권능을 사용할 때처럼 세상의 시간이 멈춘다.
이것은 시간 정지 같은 게 아니다.
당사자들만이 인식할 수 있는 시스템적인 정지다.
세상의 색채가 빠르게 빠져나가며 새로운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주변의 풍경에 다른 것이 덧씌워진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멸망한 어느 왕국의 모습이다.
폐허밖에 남지 않은 문명의 흔적 속에서 아직 나의 모습을 하고 있는 루시와 악룡의 거대한 모습이 마주하고 있다.
거대한 투기장처럼 여러 개의 낡은 신좌가 경계를 그리며 넓은 공간을 둘러싸고 있었다.
“딱 걸렸군.”
나는 루시에게 화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