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340화 (340/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40화

멸망한 왕국 - Lv.7760 루시(1)

영원불멸할 것 같은 왕국에도 끝은 있다.

어떤 왕국에 100년의 기한이 아직 남아 있는 유배자, 도전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유배자가 단 한 명도 남지 않는다면.

그 왕국의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게 된다.

새로운 유배자는 더 이상 유입되지 않는다.

남아 있는 이들이 자손을 길러 번창할 수 있을지언정, 새롭게 마인드맵의 보정을 받는 이는 태어나지 않는다.

리프트도 영원히 닫힌다. 왕국은 어떤 서버와도 소통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고립된 채로 세월이 더 흐르고 찾아오는 [침공]을 막을 힘은 없게 된다.

생존자가 사라지고, 신도가 사라진다.

신도가 사라지면 신들도 쇠락한다.

그렇게 맞이하는 종말이다.

[부서진 세계의 신]이라는 스킬이 만들어내는, 혹은 이동시키는 공간은 그런 설정을 가지고 있다.

지금 이곳은 다른 회차의 다른 왕국이며 생명체는 단 하나도 남지 않은 황량한 땅이다.

다시는 열리지 않은 왕국의 문과 리프트, 그리고 그 주변을 크게 둘러싸고 있는 주인 잃은 신좌들.

이 땅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시전자와 대상자 둘만의 공간이다.

을씨년스러운 잿빛 풍경 속에서 갑작스러운 화신에 루시가 당황했다.

‘잠깐만! 뭐야? 왜 화신해?’

「순수한 일대일 자신 있으십니까?」

‘해봐야 알 일이지만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이해가 가는 사고방식.

저런 낙관적인 태도와 그것을 이겨낼 실력이 없다면 개척 초기의 왕국에서 유일한 신으로 숭배받을 수는 없다.

그러니 루시는 그냥 내버려 두어도 어떻게 저 악룡을 이겨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필요한 위험부담이다.

내 생각이 그대로 나의 대전사에게 흘러들어 간다.

루시는 그 상황이 자못 즐거운 듯이 웃으며 동의했다.

‘좋아. 나의 신이시여. 그럼 어디 한번 해볼까?’

「싸움 자체는 루시가 편한 대로 하면 됩니다. 그냥 필요할 때 잠깐 주도권을 가지도록 하죠.」

‘오? 빼는 거냐?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회인데.’

「제가 루시보다 창을 잘 다룬다고 생각하진 않으니까요.」

‘비슷하게 할 수는 있다는 거 같은데.’

「그건 맞습니다.」

‘멋있게 재수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15층에서의 상황과는 많은 부분에서 반대다.

그때는 화신한 신의 역량은 아주 높았으나 신도의 육신이 그렇지 못했다.

전쟁의 화신도 그랬다. 피차 신의 위엄을 고스란히 보여주기엔 많은 제약이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전사로서는 종족 빼면 최선의 육신에, 순수 전사의 단점을 모두 보완할 수 있는 신이 화신했다.

루시는 미소 지었다.

거대한 용을 눈앞에 둔 소녀답지 않은 싱그러운 미소.

‘누군가의 대전사 노릇은 오랜만이군.’

「저도 누군가의 신 노릇은 오랜만이군요.」

화신한 상태에서는 일반적인 상황보다 좀 더 상대의 마음이 잘 흘러든다.

루시가 꽁해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내가 모아둔 신앙인데!’

하하.

화신이 창 쥐고 옆으로 떨친다. 덧씌워진 환영이 그 단숨에 부서져 흩어진다.

보랏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생물이라기에는 너무 거대하여 마치 자연물 같아 보이는 머리가 저 높은 곳에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다.

쇠락한 문명의 흔적과 썩 잘 어울린다. 마치 저 악룡이 이 왕국을 멸망시킨 것 같지 않은가.

그럼 우리는 최후의 전사인 셈이다.

그림이 좋군.

* * *

악룡은 [멸망한 세상의 신]을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

연출적 요소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멸망한 왕국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간혹 꿈을 꾸었다.

세상을 모두 으깨 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며, 마지막 하나의 유배자마저 죽여 버려 유배자의 맥을 끊어버린 왕국.

신들마저 쇠락하여 사라진 후, 자신만이 남아 한때 융성했던 문명의 흔적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그런 삶을 말이다.

언제부터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장난감이 가끔은 질리는 모양이다.

그러니 새로운 자극을 찾을 수밖에.

그래서 지금의 상황은 더없이 짜릿했다.

자신이 멋지게 속아 넘어갔음은 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잠자고 있던 전사의 혼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분노가 아닌 즐거움을 담아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지만 그 존재감만은 거대한 여신을.

[루시…….]

악룡 스스로도 가끔은 의문을 가지고는 했다.

그 자신은 얼마나 강할까?

위험부담이 크니 직접 확인할 생각은 없었다.

[메인 던전]도 신중을 기해 초입에서만 머물 뿐 별다른 진행은 해본 적 없다.

가능한 조심했고 길고 오래 살아가고자 했다.

신들의 눈을 피한 것도 그 일환이다.

어쨌건 완전히 세대교체가 일어나기 전이라면 그를 알고 있는 녀석들이니까.

그렇게 영원히 살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딘지 껄끄러웠다.

그런 행위에 의미를 찾고자 하는 자신이 있었다.

단순히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그런 불만이 유희가 되었다.

롤 플레이의 일환이다.

지배하는 세상에서 일개 개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

캐릭터를 하나하나 생성하듯 그의 삶은 늘어났다.

무수한 삶, 업적, 기억, 추억.

이 세계 구석구석에 자신을 새겨두었다.

사소하지만 만족스러웠다.

게임을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문득 자신 역시 바깥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궁은 게임일 때 더 좋은 곳인가 같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다.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지금 여기서 루시를 쓰러뜨리고 남은 위협도 이겨낼 것이다.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최선의 수를 둘 수 있을 것 같다.

피가 끓어오른다. 이 왕국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고 불리던 여신과 독대하는 상황.

기쁘기 그지없다.

드디어 힘을 증명할 시간.

기쁨?

악룡은 문득 자신의 생각에 의문을 가졌다. 이건 스스로 생각한 게 아니다.

곧 원인을 깨달았다.

무수한 유희 끝에 분열된 자아들은 제각각 생각한다.

어떤 전사, 저 여신을 동경했던 전사가 그의 속에서 떠오르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에 몸을 맡기는 것도 재밌겠지.

아무튼 즐거우면 문제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

그냥 그랬다.

* * *

거체는 꼭 장점이 아닐 수가 있다.

거대한 몸의 방어력과 완력, 그리고 질량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통하는 상대가 있으며 그렇지 않은 상대가 있다.

통하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거대한 몸은 그만큼 큰 표적이 될 뿐이다.

다른 신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루시는 이미 악룡을 한 번 죽임으로써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래서 나는 루시에게 화신했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서, 즉각적인 피드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늦을 수도 있다.

저 악룡이 보유한 스킬이 얼마나 많을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본인 역시 모를 것이다.

그리고 미궁에는 틀림없이 모르면 죽어야 하는 종류의 스킬들이 있다.

폴리모프는 즉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 어떤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모습이 변했다.

커다란 트롤, 마치 드라간을 연상케 하는 트롤이 어디선가 나타난 자신의 병장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루시는 그 순간 반응했다.

내지르는 창이 부딪친다. 힘 대 힘으로 싸워서 이 작은 악마의 몸이 밀리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질량에서는 밀리니 그만큼 뒤로 밀려난다.

질량은 움직이기 어려운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

가벼울수록 더 쉽게 밀려나고 더 쉽게 날아간다.

그것은 힘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다.

루시는 밀려나는 도중에 발을 땅에 박았다.

바닥이 갈려 나가며 밀려나는 속도가 줄어든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아예 창을 들어 바닥을 내려쳤다.

작은 체구인 만큼 한번 밀려난 관성을 되돌리는 것도 쉽다.

휘둘러진 창의 뒤편이 폭발해 솟구치고 루시는 다시 앞으로 돌진했다.

트롤이 무언가 스킬을 발동한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지켜보았다.

트롤이 몽둥이를 휘두른다. 힘이 실린다. 거하게 풀스윙이다.

그러나 보잘것없다. 그다지 고레벨로 책정되지는 않았던 삶이었을까?

그러나 저 트롤 역시 언젠가의 하이랭커임은 틀림없다.

루시는 날개를 접은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속한다.

가벼운 만큼 같은 힘을 낸다면 원하는 속도에는 빠르게 도달하는 법.

그래도 뭉둥이는 결코 느리지 않았고 허공을 가를 생각도 없었다. 달리기만으로 피할 수는 없다.

끈질기게 따라붙은 몽둥이의 궤적이 루시의 몸을 추격했다.

루시는 마지막 순간 창을 내저어 제동했다.

몸이 몽둥이의 바로 앞에 멈춰 선다.

하지만 상대도 우악스럽게 힘을 가해 방향을 바꾼다.

조금은 약해진 기세로 멈춰선 루시를 향해 다시 다가왔다.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급격한 방향 전환으로 기세가 흐려진 공격이었다.

단지 그것으로 충분했다.

루시는 소풍이라도 온 아이처럼 폴짝 뛰어올라 몽둥이에 올라탄다.

그리고 단 한 번의 가속.

창이 스쳐 지나가고 트롤의 머리통이 사라졌다.

목을 잃은 시체가 쓰러진다.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적이 출현했다.

루시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이, 대전사여. 이 녀석 지금 장난치고 있는 건가?’

「반푼이라 그렇습니다.」

‘무슨 뜻이지?’

「스펙으로 찍어 누르는 게 안 되니까 본체로는 못 싸우는 거예요. 유배자 드래곤을 별로 안 겪어보셨습니까?」

‘적어도 싸울 일은 없었지.’

「사실 태생부터 드래곤인 놈들도 그렇습니다. 힘으로 찍어 눌러도 뭐건 이루어지니 본체의 모습을 사용할 줄 모르죠.」

드래곤의 모습으로 싸우는 것도 나름대로의 숙련도와 요령이 필요하다.

단순히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발톱으로 적의 공격을 흘리고 이빨에 마력을 씌워 오러 블레이드에 대항하고.

막대한 마력과 육체 자체의 강도를 활용할 수단은 무궁무진하다. 그렇게까지 하는 녀석이 없을 뿐.

그리고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동스펙의 인간형이 상대일 경우 차라리 [폴리모프]해서 싸우는 편이 낫다.

하지만 과연 왕국을 호령한 드래곤의 삶에 루시에 비견되는 존재가 있을까?

‘죽여도 안 죽는 건 왜 그렇지?’

「죽은 겁니다. 방금 그 트롤은 이제 영영 저 드래곤의 속에서 사라졌겠죠.」

‘오호라. 게임 캐릭터 같은 것인가.’

「예. 캐삭입니다.」

그리고 스킬도 풀려날 것이다.

[폴리모프]로 이루어진 또 다른 삶은 자신이면서도 자신이 아니니까.

나는 그래서 드래곤 플레이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정신병이 오기 너무 좋은 종족이다.

태생부터 드래곤인 것들이 비대한 자아와 괴이할 정도의 자존심을 지닌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드래곤인 것마저도 잊고 살아가는 수가 있으니까.

드래곤은 오만하기에 드래곤이다.

후천적 드래곤인 저 악룡은 오만해져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상참작의 여지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럼 족족 쳐 죽이면 되겠군.’

나타난 마법사는 그루터기 요정이었다.

폭풍이 휘몰아친다.

악룡의 거체가 사라지고 비어버린 공간은 진공이 되었고 그곳으로 모든 공기가 빨려 들어오고 있다.

요정 마법사는 젊은 아가씨였고 몰려드는 바람의 원소를 고스란히 활용했다.

이미 불어 닥치고 있는 바람보다 더 큰 바람의 원소, 즉 마력은 없다.

창과 몸에 마력이 휘감긴다.

견고하면서도 막대한 마력은 마치 갑주와도 같다.

작고 가녀린 몸에 더없는 힘이 깃든다.

루시 역시 안다.

아직은 유니크 액티브를 활용할 때는 아니다.

악룡의 코인은 과연 몇 개일까?

얼마나 죽여야 끝날까?

한쪽이 완전히 죽어야만 이 공간을 벗어날 수 있다.

폭풍이 몰아쳤다. 한순간에 주변의 먼지와 유적들이 날아갈 정도의 힘이었다.

바람은 물리적인 원소다.

정령왕이라도 나타난 것 같은 끔찍한 규모의 폭풍에 주변의 모든 물질이 날아오른다.

온갖 것들이 뒤섞인 극채색의 불투명한 태풍이었다.

이미 마법이라기보다는 현상에 가까운 재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장엄한 공기의 벽이 다가오고 있다.

히지만 루시가 전혀 놀라지 않음이 느껴진다.

크게 회전하며, 드라간과는 다르게 세련되면서도 유려한 동작으로 창에 힘을 싣는다.

그 단순한 동작에도 창끝의 속도가 단숨에 음속을 돌파한다.

소리의 벽을 몇 개나 찢어발기고 마찰에 의한 열기만으로 아다만타이드가 달아오를 정도의 에너지가 가해지고.

한 번의 빙글 하는 회전만으로 창날의 끝은 참격으로 화한다.

창이 만들어낸 물리적 압력에 더하여 농밀한 마력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본디 마법사인 악마는 마력 용량이 아주 큰 편이다.

그다지 소모라고 하기 힘든 사소한 양.

그 강대한 물리력에 혼돈의 신성이 더해진다.

고도로 압축된 참격의 여파는 이미 물리현상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형식의 마법에 가깝다.

공간을 베어 가르듯 거대한 바람의 벽이 갈라졌다.

모세의 기적이 따로 없다.

이미 루시는 다른 창을 하나 왼손에 들고 있다.

그 창으로 투창 자세를 취하고 저 멀리 바라본다.

공간이동으로 거리를 벌린 요정이 보였다.

다중으로 스킬이 발동한다.

[제식 투창 – 빛]

[제식 투창 – 어둠]

“도열하라.”

등 뒤로 사열하듯 늘어서는 빛과 어둠의 창들.

[일제 사출]

스펙이 스펙인지라 견제기라고 부르기엔 너무 강력한 투창들이 날아간다.

그 사이로 루시가 팔을 휘둘렀다.

잠깐 동안 팔과 창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마력 장벽이 겹겹이 세워진다.

제식 투창들에 의해 갈려 나가고 그 사이를 소리보다 빠른 아다만타이드가 순식간에 꿰뚫었다.

어렴풋이 공간 균열이 열리려는 것이 보인다.

나는 생각했다.

저건 악수다. 너무 빠른 투창이다. 그리고 충분한 마력을 담았다.

열리던 공간 균열이 그대로 투창에 맞아 박살 난다.

작은 폭발과 함께 마법사의 모습이 사라졌다.

루시가 중얼거리듯 묻는다.

“생각해 보니 창을 아껴야겠군. 추가 보급은 불가능하지 않나?”

차원수납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속에는 통짜 아다만타이드 창만 가득 들어 있다.

“이거 몇 자루였지?”

「넉넉하게 200개 정도 넣어둔 걸로 기억하는데 말입니다.」

“다 쓸지도 모르겠군.”

「모자라기야 하겠습니까.」

“좋아, 문제없군.”

그리고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 불쑥 솟아났다.

루시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바닥을 찔렀다.

피가 튄다.

그대로 휘둘렀다.

산산이 으스러진 무언가가 보인다.

또 하나의 자아가 사라졌다.

그리고 또 하나의 스킬이 왕국에 다시 풀려난다.

하나하나 하이랭커급인 존재들이 차례대로 나타난다.

[대회전]

땅에 긴 상흔이 남았다. [소멸의 노래]의 패시브가 더해져 깨끗하게 지워진 대지가 부자연스러운 계곡을 남겼다. 주술을 사용하던 오우거를 베었다.

[물총새의 춤]

체구가 작은 루시가 사용하기 좋은 스킬이다.

재빠르고 정신없이 움직인다. 정해진 루트가 있는 난무 계열 스킬이지만 그 방향을 능숙하게 통제해 낸다.

저레벨 때의 주력이 아니었을까?

조금 전에 생긴 계곡에 벌집 같은 구멍들이 생겼다.

켄타우로스 궁수가 꿰뚫렸다.

[하늘 비틀기]

이건 좀 고급 대공 스킬이다.

창을 허공으로 비틀어 찌르자 잔잔한 충격이 번져나갔다.

날아오른 천사가 파리채에 맞은 것처럼 추락한다.

거리가 충분히 멀지만 스킬조차 아닌 참격을 세 번, 그리고 찌르기 한 번으로 추가적인 비행을 막아낸다.

창끝에서 날카로운 공기 같기도 하고 충격파 같기도 한 무언가가 날아갔다. 마력이 뒤섞인 물리력이다.

그리고 단 두 걸음에 아직 비행에 성공하지 못한 천사에게 접근했다.

천사는 저항했다. 하지만 두 번의 찌르기를 막고 창대로 후려치는 것을 방어하지 못했다.

발로 걷어차고 그대로 머리를 찍었다.

링 사이로 아다만타이드 창대가 꽂힌다.

천사가 사라졌다.

꽃잎 요정이 나타났고 정령과 함께 꿰뚫렸다.

데몬이 나타나 공간 마법을 구사했다. 공간째로 뜯겨져 나갔다.

종족 불명의 암살자가 나타났다. 기척이 감지되는 즉시 머리가 날아갔다.

루시는 즐거운 듯했다.

지상에 돌아온 후 이렇게까지 마음대로 날뛰는 일이 없었던 탓일지, 혹은 결투 같은 이 느낌이 마음에 드는지.

나는 조용히 루시의 움직임과 스킬셋을 관찰한다.

이 육신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고 보완할 수 있을지를 새겼다.

체격도 다르고 신체의 무게 중심도 다르며 종족도 다르다.

사용하는 창술에 따라 몸에 붙은 근육의 형태도 다르며 골격이 다르니 더 강하게 힘을 줄 수 있는 포인트도 다르다.

이것은 악룡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다.

루시 선에서 끝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러란 법은 없다.

그런데 규율의 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 *

하나하나의 삶이 사라져 간다.

유희 기억이지만 동시에 무수한 자신들이기도 했다.

스킬이 지워진다.

하지만 자아가 사라지자 그 기억만큼은 온전히 되돌아와 하나가 되었다.

무수하게 분열되었던 삶들이 다시 하나로 돌아간다.

그 기술과 기억들은 드래곤의 몸에도 새겨지고 있다.

나뉘어 있던 역량이 하나로 모인다.

가만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차례가 돌아올 것이다. 용으로서 그 자신이 나설 차례가.

아마도 유일한 자신이 된 후에 말이다.

하지만 삶이 하나하나 죽어가는 것은 어쩐지 큰 상실감이었다.

그 기억이 온전히 본래의 자아와 하나가 될 때, 더 그런 생각이 강해졌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신언이 들려왔다.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습니까?」

‘확실히 그렇군. 하지만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않나?’

「현재 제 최선의 이득은 당신의 승리입니다.」

‘그런가?’

「당신이 싫다고 해도 도와야겠군요.」

악룡은 생각했다.

규율의 신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른바 세대교체가 된 신 중 하나다.

이 남자는 개척 초기를 알지 못한다.

그저 돈을 원해 돈을 좇는 그런 망자다.

어쩐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게임을 쫓는 망자니까. 이곳이 현실이라 생각하면 견딜 수 없어 게임으로 여기던 망자니까.

그러던 중 또 하나의 자신이 죽었다.

우선은 이겨야 한다.

악룡은 웃었다.

정신이 돌아오고 있다. 분열해 있던 무수한 자아들이 하나로 돌아온다.

원래의 그가 어땠는지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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