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41화
멸망한 왕국 – Lv.????? 루시(2)
하나하나 핥듯이 분석해간다.
그와 동시에 혼돈의 권능 역시 점검했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검토하고 루시의 전법과 상대의 전법 역시 관찰한다.
그리고 내가 필요한 순간이 왔다.
갑작스러운 섬광이 번뜩였다. 전조를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슬슬 그런 때라 여겨서다.
이성이 아닌 감각으로 루시의 움직임을 제어했다.
갑작스럽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루시는 순간적으로 몸을 맡겼다.
유니크 액티브 [순연일섬]
속도에서 비상한 스킬들이 있다.
선공을 잡기 위해 사용하는 발도술 계열이 특히나 그러하다.
암살자와 민첩 전사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는 이 스킬은 반응하는 것이 극히 어렵다.
악마의 육신은 물리공격에 강하므로 큰 부상으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저걸 맞는 것은 좋지 않다.
지금은 이른바 전초전.
힘 대 힘으로 싸워야하는 순간은 지금이 아니다.
서로 포션도 없는 전투다. 몸은 아껴야 한다.
날아드는 참격은 거의 인지 밖의 속도였다.
이걸 반응하려면 전조를 알아야한다.
찰칵하고 울리는 소리와 살짝 반짝이는 섬광.
그 방향으로 돌아서는 동시에 창을 들어 앞에 세운다.
번쩍이는 참격이 지나간다.
몸을 틀고 루시처럼 큰 동작으로 후려치는 대신 단창처럼 짧게 쥐고 파고들었다.
다음 참격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와 마력의 기척으로 즉각 반응, 다음 순간 창으로 머리를 쳐낸다.
종족을 확인할 필요도 없다.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연계.
그러면서도 생각을 이어간다.
단순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폴리모프] 속의 인간형들을 꺼내는 것 같지는 않다.
미친 드래곤은 종종 보아왔다.
태생부터 드래곤인 존재들도 그렇게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너무 강한 힘을 가지고 너무 오래 살아가는 드래곤이란 것들은 그래서 [폴리모프]같은 종족 스킬을 가진다.
그것이 드래곤이라는 종족 자체가 가지는 광기의 원인이 되곤한다.
본래 인간이었던 유배자는 더 심하게 노출된다.
드래곤은 끔찍하게 강력하고 완벽한 종족이지만 그래서 요정들보다 오래 살지 못한다.
악룡도 그런 케이스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하나하나 지워지며 도리어 정신을 되찾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스킬을 떠안고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으며 온갖 삶과 경험과 그에 파생된 자아를 겪는 것.
죽을 맛이지.
오래 산 드래곤들은 곧잘 이런 전초전이 존재하곤 한다.
오만이어서 혹은 미쳐서.
둘 중 하나의 이유로.
언제나 2페이즈가 존재하는 몹쓸 보스몬스터들인데, 이렇듯 유배자 드래곤이 되면 더 가관이다.
「대충 알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주도권을 잡아도 되겠습니까?」
‘결국 이 나를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군. 원하는 대로.’
「말이 좀 그렇네요.」
루시가 완전히 뒤로 물러난다.
몸의 통제가 온전히 내 손에 들어왔다.
신장이 작다.
손도 작다.
다리도 짧다.
‘나 비율은 좋거든! 항상 실제보다 커보인다고 그러거든!’
그 이야기가 아닌데.
아무튼 낯선 몸에서 잠깐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다.
나는 루시가 되었다.
* * *
우스운 일이지만 악룡이 긴 세월을 보내며 만들었던 자아 중에서는 진짜 강자라고 부를 이들도 있었다.
어느 신의 대전사였던 적도 있으며 나름대로 왕국의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적도 있다.
언젠가부터는 관전하는 느낌으로 유희했다. 지금처럼 한발 물러서서.
루시가 어느 날 사라졌듯이 자신도 사그라들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래도 지금은 즐거웠다.
감독이라도 된 기분이다.
죽어있던 몸이 살아난다. 언제나 한 발 물러나있었지만 지금은 점점 한발씩 내딛고 있는 것 같다.
실감이 돌아온다.
그러니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이 맑아지고 눈앞의 전투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잊고 있던 기억이, 기술이, 지식이 돌아오며 점점 더 가속되었다.
혼돈의 여신이 휘두르는 창술을 뇌리에 새긴다.
이 카드를 얻어 드래곤이 되기 전에 발버둥 치던 삶을 다시 떠올린다.
성실한 게이머로서 살아가며 쌓아올린 역량을 모아간다.
버릇과 습관, 동작의 유사성.
일종의 창술이라고 불러야할 것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제 분열된 자신이 다른 삶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 * *
[무오의 광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던 스킬들 중 하나다.
희우에게 주려고 고려하던 것들 중 하나인 공격력이 가장 높은 스킬.
효과는 간단하다.
가드불능의 방어 무시 고정 데미지를 추가적으로 가한다.
즉 상대에게 회피를 강제한다.
갑자기 그런 것이 적에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본래는 드래곤인 존재니 그 스킬들을 끌어다 쓰고 있다.
체구가 작아서 다행이다.
춤추듯이 몸을 날린다.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는 것은 위험하다.
다리 대신 창을 이동에 이용한다.
땅을 치고 날아오른다.
허공을 때리면 그 반작용으로 다시 멀리 이동할 수 있다.
아예 저 상공까지 뛰어 올라 창을 꺼낸다.
원거리 공격으로 상대하는 편이 더 좋다. 루시의 스펙은 충분히 높다.
하이랭커 수준이라면 그저 투창만으로도 목숨을 끊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육신은 본디 물리 마법 복합의 종족인 데빌이다.
가상의 레일을 그린다. 마법을 캐스팅한다.
전격이 번뜩였다.
투창과 동시에 300m정도의 가상 레일에 전격이 가해진다. 마력은 차고 넘치며 통제도 잘 듣는다.
[용사]를 가진 내 본래 몸보다 더 고성능이다.
아무 스킬을 발동하지 않았음에도 아래쪽에 버섯구름이 피어났다.
루시가 가볍게 감탄했다.
‘나도 마법을 익히면 그런 걸 할 수 있을까?’
「이거 보기보다 많이 어렵습니다.」
위험부담 없는 폭격만을 갈겨댄다.
장탄수라면 넘치도록 있다.
하나하나가 통짜 아다만타이드고 힘과 마력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재질이다.
대지에 온전히 전달된 파괴가 이미 멸망한 이곳을 다시 헤집어 놓는다.
그리고 바로 옆에 파르스름한 광채가 피어났다.
확하고 피어난 [차원의 유랑자]의 포탈에서 어떤 악마가 뛰어들었다.
중후하게 수염을 기른 중년의 천사. 한쪽 눈이 없지만 날카롭기 짝이 없는 예기가 느껴진다.
‘이 녀석은……?’
「아는 놈입니까?」
‘[하드스록]이었던 적이 있을걸.’
정확히 그걸 기점으로 적들이 강해졌다.
레벨적 스펙이 점점 상승한다.
유니크 스킬도 더 다양하고 기괴한 것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모든 녀석들이 원래 빌드대로라면 쓸 수 없을 스킬들을 섞어 쓰기 시작한다.
발밑에 창이 솟아나고, 피로 이루어진 소용돌이 사이에서 수십의 분신들이 검을 들고 달려든다.
루시는 기억나는 몇 명을 하나하나 말해주었다.
대부분 왕국의 전체에 이름을 날리며 랭킹에 이름을 올리던 유배자였다.
이젠 죽어 사라졌다고 알려졌으나 사실은 모두 하나의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 이것은 리듬게임이라거나, 서커스에 더 가까워졌다.
13층에서 안 되는 스펙으로 억지로 매직 패링을 치며 가상 노심을 구현하던 그 감각으로 파고든다.
마인드맵을 여는 요령은 파티원들에게 연습시키고 있으나 당연히 그런 꼼수 없이 파진입할 수 있어야 한다.
서순으로서는 턴제 게임에도 가깝다.
동시에 들어오는 서른 네 번의 공격 사이에서 최소한의 동작으로 쳐내는 방법을 찾는다.
‘그렇게도 쓸 수 있군.’
‘그 동작은 그런 개선점도 있었네.’
‘그건 마법으로 하는 거지? 난 못 따라하겠군’
‘그 두 스킬이 이런 연계 활용도 가능했나.’
제 몸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은 공부가 된다.
루시의 창술은 격렬하고 강렬하다.
대신 절제된 맛은 없다.
효율적인 싸움이라기보다는 전장에서 맨 앞에 누구보다 빛나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수의 창술이다.
일대일에는 도리어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루시의 일대일 역시 대체로 스펙으로 누르는 형태였던 모양이다.
루시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때는 대답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스스로 뭔가 깨달아가고 있는 듯하다.
나는 몰입했고, 점점 가라앉았다.
어느 순간 루시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작고 가녀린 몸을 객관적으로 이용한 최선의, 더 최선의 수만을 찾아 다음으로 이동하고 움직인다.
지치는 것을 고려하여 매번 사용하는 근육도 다르게 한다. 피로가 쌓이면 최선이 흐려진다.
가장 올곧은 길만을 향해야한다.
격렬하고 긴 무아의 시간이 이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단지 쳐내고 치고 찌르고 베는 일의 연속이었다.
숨은 거의 들이쉬지 않았다. 호흡하는 순간 죽을 것이었다.
그 연속적이고 긴 전투의 끝에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숨이 찼다.
“하아아아.”
묘한 열기를 띤 심호흡이 내 입에서 새어나온다.
호흡을 가다듬는다.
상처는 전혀 없다.
마력도 절반 정도 소모했으나 이 정도면 합격이다.
루시가 말했다. 어쩐지 조금 주눅이 든 듯,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신이시여……? 이제 다 죽인 것 같아요.’
「갑자기 웬 존대?」
‘아, 아닙니다.’
몇 번의 [폴리모프]를 죽였을까?
그러나 그 와중에 나타나지 않았던 총잡이가 하나있다는 것은 기억난다.
맥은 싸우려 하는 대신 천천히 걸어오고만 있었다.
연속된 전투에서 얼마나 이동했는지도 모르겠다.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고 멸망한 왕국의 어느 구석이었다.
처음의 방향이 어디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알겠다. 지금 너는 루시가 아니군. 그 오르골이라고 자칭하던 [게이머]인가?”
“자칭이 아니라 본인인데.”
맥이 뺨을 긁는다. 처음 열차에서 만났던 순간처럼 천연덕스러워서 쓴웃음이 나왔다.
“레베카는 왜 죽이려고 했지? 가지고 놀았으면 된 거 아닌가?”
“그게 재밌으니까.”
여기서 다른 대답이 나오길 기대한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약간은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맥은 웃었다.
그리고 권총을 들었다.
뭔지 알겠다.
레베카가 선물하여 베티가 만들었던 그 권총이다.
“내가 마지막이야.”
맥이 제 관자놀이에 권총을 겨눈다. 아직 방아쇠는 당기지 않았다.
“이러면 레베카가 죽인 게 되나? 복수는 했다고 전해주지.”
“미친놈.”
“흐흐흐.”
하나만 더 물어보자.
“너 랭킹 몇 위권에서 왔다 갔다 했냐?”
“네 바로 밑.”
“만년 랭킹 2위 던 그 친구구나.”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
바깥에서도 친분은 없었다.
이제 와서 더 이상 할 말도 없다.
프로방스는 귀엽기라도 했지.
맥이 제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마지막 [폴리모프]가 죽었다.
거대한 흑룡이 전조 없이 출현했다.
압도적인 부피가 대기를 밀어내고 대지를 으스러뜨린다.
그 바람에 밀려나며 나는 창을 더 꽉 쥔다.
루시가 뻣뻣하게 응원한다.
‘화이팅! 입니다.’
천천히 호흡을 조절했다.
그리고 규율의 하얀 신성이 터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악룡에게 화신했군.
* * *
규율의 신은 화신하며 솔직하게 물었다.
「이길 수 있습니까?」
그는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분명히 소문이 자자한 혼돈의 여신이었다.
작고 가녀리지만 무엇보다 흉포하게 적을 물어뜯고 찢어발기는 맹수.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생물이었으며 이해의 범주 내에 있는 것이었다.
단지 왕국 최강의 전사에 불가능한 그런 창잡이다.
규율과 금전의 신좌는 아주 이성적이어야만 앉을 수 있는 자리다.
그렇기에 그는 승산을 점칠 수 있었다.
강하지만 무적은 아니다.
끔찍하지만 그것은 이쪽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사실 단순 레벨이라면 압도하고 있으리라.
그러니까 가능하다.
악마로 마법조차 구사하지 못하며 단지 창을 잘 휘두를 뿐인 유배자일 뿐이다.
자신의 권능과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악룡이 보유한 스킬로 대응을 짜 올릴 수 있다.
아니,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생각보다 쉽지 않나 여겼다.
찍어 누를 길이 여럿 보였다.
아무리 그래봐야 신좌에 너무 오래 박제되어있었던 신.
더 이상의 레벨링도 파밍도 없다.
규율의 신은 애초에 숫자를 좋아한다.
숫자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신뢰하지 않는다.
단순히 수치로 주어지는 스펙.
그가 이 미궁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다.
수치 이상의 것은 없다.
더 강한 스펙을 가졌다면 이긴다. 바보같이 싸우지만 않는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상성 역시 수치화 할 수 있다.
계산 끝에 승산을 점치고, 그 승산이 충분하다면 변수를 줄여나가면 그뿐이다.
그래서 이 상황이 변수가 많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무조건적인 일대일을 만드는 이런 상황은 변수를 최소화한다.
규율의 신 역시 이 스킬을 아주 좋아했다.
하지만 방금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혼돈의 여신이 전설적인 맹수 같은 존재하면 방금 보았던 그것은 기계였다.
하나하나 프로그래밍 되어 철저하게 일을 수행하는 기계.
있을 수 없는 틈을 찌르고 틈이 없다면 만들어낸다.
혹여 틈이 없다는 것조차 이쪽의 착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주눅 들지 않더라도 느껴지는 이상한 위압감이 있었다.
매 동작 하나하나가 이상하다.
기이하다.
알 수 없다.
전투도 예술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되어있는 것만 같다.
세상이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처음부터 섭리로서 정해져있던 것만 같다.
차라리 꿈이면 좋겠다.
저절로 체념하게 될 정도로 압도적인 무언가다.
그러므로 지극히 이성적인 규율의 관점에서 이것은 불필요한 전투다.
이길 수 없다.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깝다.
악룡이 웃으며 말했다.
‘신이여. 아무래도 도전자는 우리였던 것 같다.’
그렇다.
사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이쪽이 보스였던 적은 없었다.
보스 몬스터 앞에 서있었던 것은 그들이다.
보스룸의 문들 두드린 것도 그들이었다.
방금까지 본 것을 레벨로 환산한다면 몇이 나올까?
규율의 신은 계산할 자신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그들의 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