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42화
멸망한 왕국 - Lv.????? 루시(3)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데는 방금 전의 장면으로 충분했다.
규율의 신과 악룡은 무언가를 크게 잘못했다.
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상대였다.
규율과 금전의 신은 머릿속의 계산기가 고장 나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멀쩡한 숫자를 토해내지 못한다.
의미 없는 기호들만이 나열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규율의 신은 계산을 포기했다.
중요한 것은 눈앞의 현상이다. 그 역시 모든 것을 계산하며 살아올 수는 없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부정하고서는 신좌에 도달할 수 없다.
신이 아니라 한 명의 유배자로서, 혹은 유배자였던 자로서 지금을 마주한다.
본명은 잊히고 단지 악룡이라 불리는 존재의 감정이 전해져 온다.
뜻밖에도 절망이나 분노는 아니었다.
그것은 시원함 혹은 섭섭함에 가까운 것이었다.
무엇이 시원하고 섭섭한가.
나름대로 오래 왕국을 경영해 온 파트너로서 규율의 신은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았던 [폴리모프]가 모두 쓰러지고, 이젠 온전히 하나의 자의식만 남았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정화였다.
규율의 신이 이 악룡의 광증을 알며 방치했던 것은 그래야 더 편리한 비즈니스 상대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라는 정체성마저 흔들릴 정도로 많은 [폴리모프]를 겪은 드래곤이라니.
그러면서 묘하게 [게이머]로서의 지식에는 충실하다.
아는 것은 많고 제정신은 아니었다.
규율의 신이 해야 할 일은 단지 신좌에 앉아야만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수단으로 보조하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의 관리.
자존심이 상하는 일 같은 건 없다.
이윤의 추구야말로 그의 기쁨이며 그렇게 쌓여가는 신앙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으니까.
규율과 금전의 신은 부의 노예였고, 그런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악룡이라 불리는 파트너와 함께해야 할 일은 더 이상 비즈니스가 아니게 되었다.
단순한 생존의 문제다.
찾아야 할 것은 가능성.
규율의 신으로서는 찾아낼 수 없는 어떠한 가능성이다.
그걸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온전히 광증을 벗어나 하나의 자신으로 돌아온 그의 대전사뿐이다.
규율의 대전사인 이 드래곤은 그가 아는 가장 강력하고 다채로운 지식을 가진 게이머였다.
이제는 가장이 아니라 두 번째일지도 모르겠으나, 세월로 쌓아 올린 스펙의 격차만은 뚜렷하다.
같은 신으로서, 현존하는 어떠한 신보다도 스펙에서만큼은 압도적인 우위에 섬을 안다.
그렇다면 돌파구는 그곳에 있다.
규율의 신이 하는 그 생각은 마찬가지로 악룡에게도 전해졌다.
‘뭐, 하는 데 까지 해보는 수밖에.’
뒤틀림 없이 올곧게 전해지는 그 사념에 규율의 신 역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것은 그런 싸움이었다.
규율의 신은 완전히 자신의 힘과 스킬을 맡겼다.
가진 모든 신앙을 소모할 각오로 축적했던 것을 퍼부었다.
악룡의 존재감이 부푼다.
새하얀 신성이 깃들며 가뜩이나 거대한 체격을 더욱 크게 보이게 만들었다.
늘 이글거리는 전쟁의 신성도 아니지만 너무나도 밀도가 높은 새하얀 규율이 불타오르듯 흩날린다.
긴 세월 왕국을 독점하며 쌓아올린 부는 크다.
성직자의 나라는 사실상 규율의 지배하에 있었고, 랭커나 하이랭커라 불리는 이들은 그곳에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 모든 것을 쏟아부은 지금, 단순한 스펙만이라면 [메인 던전]을 우격다짐으로 돌파할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힘.
정말로 이 대지를 움켜쥐어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막대한 힘이 모였다.
온전히 자신을 되찾은 악룡은 그 힘을 쥐고서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한다.
후려치면, 그래서 맞기만 한다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
지금 그에게는 그 정도의 힘이 있다.
하지만 저 혼돈의 옅은 보랏빛을 두르고 소녀의 모습을 한 존재.
비늘 한 장보다도 자그마할 것이 분명한 저 소녀의 눈이 너무나도 똑똑히 인식되었다.
무감각하면서도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빛이 없는 눈.
절로 전의가 꺾일 것 같은 기계적인 눈빛이었다.
악룡은 [폴리모프]가 지워지며 다시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무수한 경험들 되새긴다.
그리고 유배자로서, 도전자로서 이 자리에 도달하기 전까지 보내왔던 나날을 되새긴다.
지금은 돌아갈 때다.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던 그 순간으로.
그 순간, 허공을 천천히 걷듯이 다가오고 있던 혼돈의 화신이 사라졌다.
악룡은 집중했다.
자신이 가진 모든 노하우를 동원해 스펙과 체격의 이점을 살릴 수간을 강구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드래곤이 되기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을 쌓았다.
다양한 [폴리모프]가 수없이 많은 전법에 대해 연구했고 기억을 남겼다.
다행스럽게도 그 세월은 헛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나태하게 지냈으나, 그럼에도 오만했고, 그럴 자격이 있었던 악룡은 자신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간신히 싸움이 성립했을 뿐이다.
머릿속에서 조합된 전략은 단순.
압도적인 스펙의 우위가 있으니 어떻게든 일격을 노린다.
그것은 치명상이 될 수도 있으며 적어도 전황을 바꿀 한 방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견뎌야 했다.
그러나 마음먹고 단 1분.
3번의 부활 끝에 악룡은 비명을 질렀다.
덩치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노려질 곳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동시에 그만한 방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리적 두께만 해도 1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비늘, 재질이라면 아다만타이드보다도 훨씬 강력하다.
1만 년 이상의 세월을 보낸 고대룡의 신체보다 더 우수한 재질은 극히 드물다.
더하여 마력방벽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마법적 강화와 물리 보조가 깃들어 있다.
초고밀도의 신성과 마력의 보호는 틀림없이 상대무기에 서린 마력을 중화하며 흩어서 그 위력을 약화시킨다.
적어도 창질 한두 번에 비늘이 아작 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비늘 서너 장이 동시에 으스러져 가루가 됨을 느낀다. 몸이 붕 하고 떠올랐다.
어이가 없다. 상식이 붕괴한다.
자신의 본체 질량이 어느 정도일까?
건축물의 수준도 초월했다. 자연물의 영역에 가까운 거대한 질량이 창을 휘두르는 충격에 퍼올려진다.
타격 지점은 아랫배 주변.
창이라기엔 둔중한 물리적 충격이 어떠한 스킬에 의해 골고루 퍼져 나갔다.
전신의 비늘이 으스러지거나 금이 간다.
그 충격은 고스란히 [드래곤 하트]에까지 도달했다.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일단 이게 무엇인지는 안다.
유니크 스킬 [확장성 파문]의 유니크 액티브, [힘의 파문]이다.
일점에 집중하는 대신 최대한 증폭하여 광역으로 퍼뜨리는 공격.
단순한 찌르기라면 이 거체에는 이쑤시개만도 못하다.
하지만 창 주제에 둔기나 다름없는 묵직한 파괴를 드래곤의 몸체를 대상으로 흩뿌린다.
그런데 [힘의 파문]이 자신의 무수한 방호를 일격에 때려 부수고 이렇게 막대한 타격을 가할 정도였는가?
그럴 리가 없는데.
직후, 다시 한순간 적의 위치를 놓쳤다.
마력탐지에 준하는 막대한 마력을 사방에 깔아두었다.
대단한 낭비지만 체내나 다름없을 정도로 정밀하게 주변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위치를 놓치는 것은 대체 어째서일까?
욕설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몸을 치유한다.
로그라이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
그러기 위한 스킬은 얼마건 가지고 있다.
드래곤은 세월만 보내면 저절로 강해지는 존재다.
그랬기에 선택한 유틸 위주의 스킬셋이다.
[무오의 광휘] 단 하나만 뺀다면 말이다.
일격, 어떻게든 그것만 성공시킨다면 전세는 반전될 수 있다.
자신은 부활 스택이 많다. 그러니 오랜 시간을 버텨낼 수 있겠지만, 저쪽은 기껏해야 한두 번.
존버는 승리한다.
* * *
루시는 거의 신앙에 가까운 경건한 마음으로 자신의 육신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벌써 얼마나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몸인가.
그것도 신좌에 박제되어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지내왔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마저도 외우고 있을 지경이다.
그래서 신좌에서 내려온 후 조금씩 변해가는 몸이 즐거웠다.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빠지고, 다시 자라고, 조금 살찔 수도 있으려나 생각해 보고 잊고 있던 것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래도 이 육신은 그녀의 것이다.
팔과 다리의 길이, 근육의 형태, 타고난 골격상 더 강하게 타격할 수 있는 각도, 모든 하이랭커급 전사가 그렇겠지만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낯설다.
어떻게 가능한가 의문이 가는 동작들이 많다.
단순한 동작의 문제가 아님은 알고 있었다.
흔히 랭커가 되면 유니크 스킬에만 집중하기 마련이다.
더 강력한 필살기를 더 유효한 순간 꽂아 넣어야 한다.
물론 그건 하이랭커 수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유니크 스킬이 아닌 기본 스킬의 활용부터 장착된 무수한 스킬의 보정을 연계하는 법이 중요해진다.
당연히 평타에 해당하는 그냥 공격의 중요성도 올라간다.
그런 디테일이 없다면 하이랭커라 불리는 영역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법이다.
지금 보는 것은 그것을 초월해 있다.
다양한 클래스의 경험이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조밀한 마력적 탐지를 한순간이라도 속이고 전혀 다른 곳에 모습을 드러내며 거는 심리전.
이것은 암살자의 기술이다.
평범한 타격도 마법이 보조하고 있다. 처음의 레일 투창처럼 다양한 형태로 전사로서의 타격을 마법이 보조한다.
마법이 공격적이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보조에 불과하다는 것의 의미를 지금에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파티에서의 보조 역할이란 의미조차도 아니었다.
그냥 타격보조다.
그 사이사이 움직임, 기묘한 움직임과 동시에 창술에 접목되는 것에는 다른 무기의 흔적도 보인다.
때로는 권법처럼, 때로는 검술처럼, 어떤 때는 둔기처럼 활용되고 있다.
단순한 근력을 힘으로, 마력을 파괴력으로, 신성을 치명적인 일격으로.
그렇게 바꾸어나가는 육체의 공정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리고 아직 자신은 저것을 흉내조차 낼 수 없음을 안다.
루시는 조용히 기도하듯이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실로 신과도 같았다.
신이라고 불리며 숭배받은 지난 세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미궁에 신이 있다면 저런 것이 신이리라.
자신부터 배울 것이 너무 많았다. 세상엔 아직도 모르는 게 이렇게도 많다.
* * *
대지가 갈라지고 악룡의 피가 강이 되어 흐른다.
멸망한 대지의 잿빛이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거대한 질량이 패대기쳐지듯이 날아다녔다.
타격은 점점 거세지고 힘을 더해갔다.
이미 가해진 힘의 방향을 통제하고 그것을 증폭해 나간다.
물리법칙이 이상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미궁은 원래 그런 곳이다.
이런게 가능하다는 것을 몰랐을 뿐.
완벽한 대형 괴수의 상대법이다.
14번을 더 죽었다.
저항조차 제대로 하기 힘들다.
악룡은 단순히 버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느꼈다.
대부분의 유니크 스킬은 [폴리모프]가 가지고 있었기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모습에 주어진 것 역시 충분히 강력하다.
쿨다운이 돌았다.
유니크 스킬 [허수차원 붕괴]
존재 자체가 유니크 액티브이며 패시브 따위는 없는 절대적 파괴.
공간이 무너져 내린다.
시커먼 균열이 입을 벌린다.
단지 시간벌이밖에 되지 않음은 알고 있으나, 그 사이로 빠지는 대신 아무렇지도 않게 후려쳐 공간의 아가리를 다물게 하는 모습이 기가 차다.
그래도 덕분에 시간은 벌었다.
유니크 액티브 [다차원 연속체]
지속 시간동안 무제한으로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차원의 유랑자]의 유니크 스킬.
또다른 형태의 공간 균열이 열린다.
맑은 하늘빛이 번뜩이며 멸망한 왕국의 하늘을 푸른 포탈이 뒤덮는다.
그 사이로 최대한 빠르게 비행했다.
둔해야만 하는 거체가 움직인다.
포탈이 닫히기 전에 혼돈의 화신이 뒤쫓아 왔다.
새로운 포탈이 이어진다.
모든 신들마저 절멸하고 닫힌 세계가 되었어야 할 이 왕국의 서버들 위로 거대한 드래곤이 날고 작은 악마가 그것을 추격했다.
연속된 포탈들 사이로 끊임없이 풍경이 변한다.
풍압에 지상과 공중의 온갖 것들이 쓰러진다.
우주가 지나가며 전함들이 보인다. 부딪혀 파괴된다.
비로소 악룡은 깨달았다.
비행속도에서만큼은 이쪽이 더 빠르다.
맞서 싸우려고 했기에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 스펙은 여전히 압도적인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적을 둔다면 한쪽 방향에 두는 편이 더 좋다.
[다차원 연속체]가 지속되는 동안은 끝없이 포탈을 열어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
무한한 공간에서 난데없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브레스를 모을 시간이 있었다.
비행하며 빛을 뿜어낸다.
규율의 신성마저 더해진 광선이 상공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대지가 불타고 강이 메말랐다.
밀림이 잿더미가 되고 그 너머의 설산이 녹아내린다.
그리고 상대가 창을 휘둘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겠다.
막대한 광량을 지닌 직경 10미터 가량의 응축된 용의 숨결이 파리채에 맞은 듯 튕겨 나갔다.
그것도 단 일격에 궤도가 꺾이듯 날아가 어딘가의 산맥을 주저앉힌다.
기가 막혀서 마법을 캐스팅한다.
[역설의 제논]
공간 마법의 극치 중 하나가 펼쳐지며 물리적 거리를 아득하게 늘렸다.
다시 창을 한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늘어진 공간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쫓기면서 온갖 수단을 강구한다.
다양한 고위 마법들이 쏟아져 내린다.
그사이에 브레스들도 수없이 발사되며 허공을 수놓는다.
상대는 마법전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그저 막대한 마력과 신성이 응축된 창으로 쳐낼 뿐이다.
그 사이로 가끔 날아드는 투창은 모골이 송연해지게 했다.
발톱으로 막아서면 발톱을 찢어발긴다.
[무오의 광휘]가 저쪽에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방어력이 무시당하는 것 같은가?
진실은 안다.
그저 방어력을 웃도는 타격이 들어오고 있을 뿐이다.
왜 그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은 이제 가지지 않았다.
필사적일 뿐이다.
브레스들은 수없이 날아들며 새로운 포탈 너머로 사라졌다.
풍경은 끊임없이 바뀐다.
낮이 지나가고, 밤이 지나간다, 어둠이 드리운 가운데 빛이 산란하며, 전장의 한가운데마저 지나친다.
거리가 벌어질 듯하면서도 더 멀어지지는 않는다.
중간중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뒤편으로 무언가 날리며 추진력을 더하는 모습을 보았다.
핵열이 구현되며 그 충격으로 추진하고 있는 모양이다.
날개조차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미 상대는 추진체다.
거리는 조금씩 좁혀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더 이상 브레스를 갈길 여력이 없다고 느꼈을 때, 악룡은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다차원 연속체]의 지속시간이 끝나기 직전, 무수히 빛나는 푸른 포탈들이 늘어선다.
악룡은 비행을 멈추고 상대를 보았다.
규율의 신이 계산을 도왔다.
공간의 저편으로 날아든 무수한 브레스들의 입구에 포탈이 열리고, 그 출구인 이곳에 되돌아왔다.
일격에 내뿜을 수 없는 수준의 다중 화력이 포화가 되어 쏟아진다.
50여 개에 가까운 포탈이 먼저 열리며 일점 포격을 했다.
브레스는 약간의 지속력이 있는 채널링 공격이다.
규율의 신이 면밀하게 포탈의 각도를 조절한다.
광선이 집중된다.
어느 미래시대의 집속광선처럼 1만 년 이상 묵은 고대룡의 브레스가 집적되어 조사된다.
상대의 대응은 보지 않고 다음 포탈이 열렸다.
순간이나마 늦어진 혼돈의 화신의 위치를 둘러싸고 다시 30개 정도의 포탈이 아가리를 벌렸다.
그 속에서도 다시 한번 브레스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악룡은 ‘오르골’이 했던 보고 중 하나가 떠올랐다.
용사의 취득을 막겠다고 한 것.
유니크 액티브 [다차원 연속체]
푸른빛이 저쪽에서도 맴돈다.
포탈이 열리고 브레스가 돌아온다.
악룡은 헛웃음을 지었다.
오랫동안 사용해 보지 않으면 저렇게 순간적으로,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액티브가 아닌데.
세상이 하얗게 점멸하고 다시 부활 스택 하나가 줄어들었다.
기나긴 추격전은 끝났다.
다시 멸망한 왕국으로 내팽개쳐지며 악룡은 마침내 절망했다.
그 머리 위로, 아득한 상공에, 푸른 포탈이 열린다.
혼돈의 화신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악룡의 발톱이 발작적으로 제 자신의 심장을 향해 움직인다.
가슴팍이 꿰뚫렸다.
[드래곤 하트]가 물리적으로 붕괴하고 마력을 쏟아낸다.
죽어가는 악룡의 육신에서 평생분의 마력이 폭주하며 울컥울컥 솟구쳤다.
유니크 액티브 [창세의 빛줄기]
미궁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공격기.
다른 모든 스킬은 유틸기로 채우면서도 [무오의 광휘]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
마력이건 힘이건 가하는 만큼 더 강력한 무속성의 빛을 만들어내며, 그것은 모든 방어력을 무시한다.
이것만큼은 악룡으로서도 대처법이 없었기에 습득하고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았다.
고대룡의 생명을 불태우며 점점 커지는 빛의 구체를 상대로 혼돈의 화신이 창을 들었다.
쿨다운이 돌았겠구나.
악룡은 그렇게 생각했다.
유니크 액티브 [플래닛 버스터]
유니크 액티브 [행성요새 죽이기]
유니크 액티브 [신살의 검은 창]
유니크 액티브 [최후의 전쟁]
유니크 액티브 [갤러해드 : 띠의 검]
저쪽에서 빛이 부풀어 오름을 느낀다.
악룡은 이제 허탈하지도 않았다.
어떤 유니크 액티브도 사용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스킬에 대한 개념 자체가 붕괴하는 기분이다.
미궁이 이런 곳이었나?
[창세의 빛줄기]가 눈부시게 빛나며 혼돈의 화신에게 쏘아졌다.
모든 것을 무시하는 이 빛은 어떤 스킬로도 방어할 수 없다.
그러나, 방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유니크 스킬 [은빛 섬광] - 녹화 중단
유니크 액티브 [섬광 재생]
저것은 공격이었고, 미궁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 액티브를 찍어 눌렀다.
악룡은 다시 죽었다.
* * *
도합 67번의 사망 끝에 악룡은 자신의 생명이 마지막에 달했음을 깨달았다.
이후의 마구잡이 공격은 어느 것도 통하지 않았다.
권능을 부딪치면 혼돈의 검은 쇠사슬이 일어나며 상쇄했다.
신좌의 힘을 다루는 것에서도 역부족이었다.
[드래곤 하트]를 으스러뜨려 목숨을 불태워도 통하지 않는다.
무슨 스킬의 쿨다운이 돌아와도 소용없다.
인간형으로 [폴리모프]하고 싸워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규율의 신이 모든 권능을 퍼부어도 효과가 없다.
그 무엇도 통하지 않는다.
어떤 방법으로도 이길 수 없다.
모든 부활 스택을 소모한 끝에 간신히 거둔 전과는 약간의 찰과상, 그것도 별 의미도 없는 왼손 손가락의 출혈에 불과하다.
덕분에 깨끗하던 옷에 약간의 피가 튀었을 뿐.
멸망한 왕국이 제 모습을 잃고 평탄화될 지경으로 싸웠다고는 믿을 수 없다.
어여쁜 드레스와 함께 파티에라도 살랑살랑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혼돈의 권능과 마력을 잔뜩 휘감은 창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그리 생각했으리라.
루시는 이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것’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악룡은 혼돈의 검은 사슬에 묶인 채, 죽음을 기다렸다.
혼돈의 화신이 쓰러진 악룡을 허공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악룡에게도 규율의 신에게도 저것은 더 이상 죽일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비웃는 듯, 어쩌면 가여워하는 듯한 화신의 미소를 보며 악룡은 눈을 감았다.
서늘한 감촉이 심장을 관통한다.
이번에도 어떤 스킬도 없이 그저 내던진 투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