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43화
왕국 - 침공 직전(1)
자연의 신이 생각하기에 최선은 악룡이 무언가를 하기 전에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방안은 너무 위험부담이 컸다.
악룡이란 존재에 대하여 알려진 사실은 너무나도 적다.
그 의견을 제시한 것은 오르골이라는 유배자다.
이런 왕국 환경에서 1만 년 이상 된 드래곤 게이머라면 신들이 나서도 정말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부정하긴 힘든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따랐다.
그래서 만들어진 플랜 A는 포위섬멸.
이상적으로 강력한 3명의 신과 선별된 하이랭커들을 통한 [더 시티즌]의 포위였다.
다만 이것은 실패였다.
레베카와 맥이라는 변수, 그리고 ‘오르골’이라는 [더 시티즌]의 실질적 수장에 의해 제때 섬멸할 수 없었다.
물론 여기서 끝날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바로 다음 플랜으로 이행되었다.
플랜 B는 상황에 따라 필요한 위치에 신들을 즉각적으로 내려보내어 대응하는 것.
도주할 경우, 추격을 위해 신좌에서 대기했다.
다만, 이번의 경우에는 악룡이 가진 유니크 스킬의 특수성과 즉각적인 [침공] 이벤트의 시작으로 인해 방어적으로 소모되었다.
그 외에도 악룡의 스킬셋에 따라 다양한 계획이 있었다.
아마도 이런 게 있을 것이라 윤곽은 잡혀 있었으나 확정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연의 신은 이 정도면 대체로 다 들어맞았다고 생각했다.
미궁은 변덕스럽고 제대로 굴러가게 만드는 경우가 없다.
겨우 두 번 계획이 파토 난 것이라면 이보다 좋을 수가 없는 정도다.
애초부터 밖에서 간섭할 수 없는 스킬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을 확인했다.
이 상황에서 신들을 지휘하는 것은 자연의 신으로 정해져 있었다.
드라간은 의외로 지휘권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신좌를 벗어난 그는 전사였다.
그러니 지휘보다는 악룡의 내장을 꺼내 널어버리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으리라.
“도움은 되었다고 봐야겠지.”
악룡의 이동에 어쩌다가 따라간 후, 딱 좋은 정도의 시간을 끌어주었다.
그 이후로 연락이 두절되었지만 생존을 걱정할 만한 자는 아니다.
자연의 신은 하드스록과 아케인에 나누어 강림한 신들에게 일제히 전달했다.
[한때의 대전사로서 협조를 구하지.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왔던 신들이여.]
아케인의 협력으로 구축된 마법 통신 네트워크는 제대로 작동했다.
왕국의 모든 이들이 이렇게 힘을 모으는 것은 얼마만의 일인지 모른다.
먹고살 만해지면 각자의 이익이 생각나는 법.
언제 다음 회차로 사출될지 모르던 개척 초기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이렇게 세월이 흐른 후에도 이런 광경이 다시 가능해지는 것은 압도적인 힘과 지식을 지닌 초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자연의 신은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튜토리얼에서부터 지켜보아 왔다.
요즘 것들은 패기가 없다. 도전 정신이 없다. 같은 생각을 하던 차에, 빛나던 신참이었다.
처음 보았던 것은 46서버가 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신도인 요정들과 처음 접촉했을 때다.
인지했던 것은 또 첫 접촉보다는 나중의 일이다.
저쪽의 입장에서는 6층이었던 곳, 잎사귀 요정들의 캠프.
그 이후로 저 유배자는 참 꾸준히도 인상적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시 혼돈의 여신이 돌아온 것이다.
저 남자 하나를 보고서 말이다.
처음에는 어째서인가? 혹은 말년에 추해질 셈인가 같은 생각을 했다.
순환이 멈춘 왕국에서 신이 죽을 방법은 많지 않다.
끈질기고도 오래 걸리는 방법으로 자살을 택했다.
그런데 어째서?
지켜보며 이해할 수 있었다.
희망을 걸었으리라.
미궁의 순환 고리를 끊을 가능성으로서.
그러나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한때 대전사로서 모셨던 신이건만, 기억조차 하지 못하다니.
곧잘 연락은 해오면서도 눈치챈 바는 없어 보인다.
기억장애는 오래 살다 보면 흔한 일이다.
정신병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
바깥에서도 사람은 누구나 가벼운 병증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물며 유배자라면.
혼돈의 말로를 안타까워하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긴 했다.
미묘한 애증으로 보고 있으나 저쪽의 8층에서는 난데없이 밑으로 종속되겠다고 말했다.
신좌에 구현되어 있으나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기능이다.
그야 신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일부러 신도를 다 차버리지 않는 이상 사라질 수 없는 죄수들.
져서 다른 신 아래로 들어갈 이유도 없다.
재미있었다.
과거의 전설이 그렇게까지 애착을 가지는 유배자가 말이다.
보며 인정하게 되었으나 그 순간만큼은 질투에 불탔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뭐 상관은 없지.
자연의 신은 미소 지었다.
정말로 미궁이 문을 여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고, 다시 한번 생각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레미는 일이 틀어지기도 전에 이미 복귀한 상태였다.
어차피 그녀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사실을 만들기 위해서 뿐이다.
바깥에서 그냥 여중생이었던 소녀는 미궁에서 10년 조금 안 되는 시간을 더 보내었고, 이젠 한 왕국의 지배자로 내정되어 있었다.
“지배라라고 하니 너무 거창하네.”
그러나 주어진 권력은 그렇게 부를 만한 것이었다.
리더의 일 처리는 항상 그렇다. 큰 틀만 짚어주고 그 안에서는 자유다.
그러니 교단 실무의 책임자나 다름없는 레미에게는 그만한 힘이 주어진다.
“대체 뭘 믿고 나한테…….”
입으로는 툴툴거리고 불만이 많지만 또 시키면 너무 잘해내는 성격 탓인가 고민을 해본다.
어쨌든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다. 할 수 없었으면 못한다고 말했겠지.
그러니 지금부터는 지배할 왕국을 지켜야 한다.
아케인의 학장과는 이미 상당히 친해졌다. 양쪽 다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그럴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강제로 감투를 썼다.
빠르게 방위계획을 복기한 후에 서로의 무운을 빌어주었다.
통신 화면 너머로 트동트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반가운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신 삼의회는 대피작업을 수행 중이다. 하드스록이라는 국가의 상당 부분은 슬럼가였다.
뒤늦게 정비하고 공을 들인다고 그 넓은 구역이 모두 어떻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혼돈의 교단이 다시 자리를 잡은 후에 무한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대비가 진행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방벽 너머로 주민들을 옮긴다.
시티즌의 난민들도 받아야 한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이동하고 있다.
못해도 수백 년 단위로 한 번씩 있는 [침공]이란 것은 왕국 사람들 대부분에게 와닿지 않는 재앙이었다.
차라리 그 악룡이 제대로 일깨워 준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업무 연락이 바쁘게 오간다.
리더의 조언대로 일을 나눌 부하들을 잔뜩 만들었다. 교단의 중진들은 대체로 업무의 유능함을 보고 뽑혔다.
신앙이야. 슬럼에서 구해준 이들이니 없을 리가 없고.
최후의 보루가 될지도 모를 성직자의 나라는 헨리 사제가 상주하고 있다.
대체로 일임하고 있기에 어떻게 하였는지는 몰라도 그곳의 랭커들을 어찌 잘 구슬린 모양이었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것은 전쟁이다. 병력은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이 좋지.
그래도 분위기는 좋았다.
리더가 시티즌을 제외한 도시를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신들의 협력마저 더해지니 민심을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었다.
미궁의 사람들은 바깥의 사람들보다 더 단순하다.
힘의 논리는 물론이요, 인터넷 같은 것도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문 같은 언론을 장악하면 그보다 쉬울 수가 없다.
거기까지 생각한 후 레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나는 왜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왜 이걸 잘하는 거지?
“쯧, 또 한 번씩 그런 걸 고민하고 있나?”
“앗, 스승님.”
레미가 눈치를 보는 몇 안 되는 상대다.
어쨌건 놀라울 정도로 유능한 의사이며 그녀의 의술 스승이기도 하니까.
배우면서도 과연 이게 바깥에서도 의미가 있을 공부인가 싶긴 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잘하는 게 있으면 좋은 일이지 그걸 그렇게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렇긴 하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나는 바깥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왔는데 대체 왜 이러고 있는가.
돌아온 대답은 단순했다.
학교를 다녀? 지식인이로군. 상류층이야.
할 말이 없었다.
노의사의 에티오피아에 비해 일본은 너무 살기 좋은 나라였으니까.
헨리 사제를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그곳은 현실감조차도 없는 근미래의 지옥이었다.
어찌 되었건 미궁이 더 나을지도 모를 사람들이니까.
레미는 늘 그렇듯이 툴툴거리면서도 해야 할 일을 잊지는 않았다.
“이 카드란 거 대체 뭐하는 원리일까요?”
“의사로서는 노코멘트 할 수밖에 없군. 말 같지도 않은 게 한둘이 아닌 미궁이지만 그래도 그건 각별하지.”
꽃잎 요정의 카드는 그냥 보기만 해도 아름답다.
교단을 떠맡은 후 다른 카드를 볼 일은 많았다.
잎사귀 요정이나 그루터기 요정 카드는 수요도 많지만 공급도 많다.
당연히 레미도 손에 넣고자 하면 넣을 수 있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사소한 거부감 때문이다. 최근에야 체력적 문제로 고려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께름칙함은 어쩔 수 없다.
노의사를 본다.
이 의사 역시 인간으로 남은 사람이다.
그렇게 강하면서 그저 수명에 따라 늙어 죽기를 택한 사람.
왠지 그냥 그렇게 따르고 싶었지만 기회가 왔는데 놓치는 것도 이상하다.
꽃잎 요정 카드는 그만큼 귀하다.
“그럼 써볼까요.”
어차피 종족을 바꾼 직후의 몸 상태를 체크해 봐야 할 일이었다.
부끄러울 것도 없는지라 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이제 와서 그런 게 남아 있겠나.
멀쩡한 난방이 안 되다 보니 하드스록의 차가운 공기에 몸이 시리다. 힘 스탯에 거의 투자하지 않은 데다가 레벨도 높지 않다.
초인이라고 부르기엔 허약하다.
평범한 인간 소녀 레미는 카드를 찢으려고 했다.
잘 안 된다.
“이거 생각보다 억세네요.”
“실수를 방지하는 차원이 아닐까?”
낑낑대며 겨우 잡아 찢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몸이 떠오르며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마인드맵이 보였다.
인간의 특징 없는 배경에 화사한 색채가 깃들었다.
꽃처럼 향긋한 색이었다. 시간 신앙의 금빛이 더해지니 샛노란 민들레 같다.
따로 인터페이스가 떠오른 것은 아니지만 그냥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범위는 넓지 않다.
어차피 별생각은 없으니 연령대 같은 것은 모두 그대로 두었다.
다음 순간 떠오른 발이 다시 바닥에 닿았다.
레미는 헛구역질을 했다.
“종족 변환은 단기적으론 몸에 무리를 가져온다고 하지. 누워 보거라.”
부축을 받아 비틀비틀 침대로 올라간다.
가장 먼저 체감되는 것은 으슬으슬하던 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면서도 묘하게 온도 감각은 멀쩡하다. 충분히 차가운 공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지러워 눈이 핑핑 돈다.
고위 종족으로 바꾼 것이니 레벨 다운이나 스킬 소실 같은 일은 없다.
하지만 그냥 제 몸이 아닌 것 같은 위화감이 너무 강렬하다.
노의사는 빠르게 진찰하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골격이나 체격의 변화가 크게 없는 종족이라 조금만 쉬면 괜찮을 것 같구나. 그리고 일부 옷은 사이즈가 좀 안 맞을 수 있겠군.”
레미는 멍하니 그 말을 듣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노의사가 밖으로 나가고 조금 더 있으니 정신이 든다.
“후우…….”
그리고 깜짝 놀랐다.
한숨에 불과한데도 목소리가 달라졌다. 아주 좋은 방향으로.
그야말로 꿀이 녹아 흐르는 것처럼 듣기 좋다. 꽃잎 요정이라고 들었던 레베카가 왜 본모습을 항상 숨기는지 알 것 같다.
자신의 목소리임에도 홀릴 것 같으니까.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다.
습관처럼 머리카락을 만지려다가도 놀랐다. 최근에 많이 푸석푸석했었는데 당장 샴푸 광고를 찍어도 될 것처럼 반짝이고 매끄러워져 있다.
“굉장한데?”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가운데 옷을 챙겨 입는다.
사이즈가 조금 안 맞을 수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곧바로 깨달았다.
옷을 입으려다 말고 거울을 본다.
“와……. 모델이야 뭐야.”
유배자의 몸은 대체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건 전사거나 고레벨의 이야기로 레미의 내구력은 조금 한계에 달해 있던 참이었다.
당연히 몸 여기저기서 태가 나고 있던 와중이다.
죽기 싫어서 종족 변환을 하는 것에 가깝다. 배우는 게 의술이니 제일 잘 안다.
“조금 커졌다……. 여긴 엄청 가늘어졌고…….”
최근 늘고 있어 걱정이던 뱃살도 싹 사라졌다. 배가 놀라울 만큼 매끈하다.
그리고 얼굴.
“화장도 안 했는데.”
수수하고 얌전한 편이던 인상 자체는 그대로 살아있다.
원판은 남아 있는 상태에서 말 같지도 않은 수준의 업그레이드가 일어났다.
머릿속에서 주변 다른 여성들의 얼굴이 지나간다. 너무 미인이 많아서 종종, 아니, 항상 기가 죽었는데.
이제 최소한 지지는 않는다.
“히히. 히히히. 히히히히히.”
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누구 보여줄 일은 없더라도 이런 게 자존심이요 자긍심이다.
미궁을 죽어도 떠나기 싫어서 클리어를 방해한다는 사람들이 이해가 갈 것 같다.
아직 자기 얼굴 같지가 않아서 객관적일 수 있는데, 바깥에서 보던 TV에 나오는 누구보다도 예쁘다.
“그럼 이제 일하러 갈까.”
한 번 올라간 입꼬리가 전혀 내려오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노고가 싹 보상받는 기분이다.
인간으로 남긴 뭘 남아. 이렇게 좋은데. 행복이란 게 참 별거 아니다.
자연의 신에게 감사하며 옷을 챙겨 입는다.
평균적인 수준이었던 다리도 길어져서 걷는 게 약간 어색하다.
회의실에는 하드스록에 강림하여 악룡의 브레스로부터 도시를 지켰던 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직접 대면하는 신들의 압박감은 만신전에서 교섭을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레미는 평생 중에 가장 들뜬 기분으로 회의실 문을 열었다.
지금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