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44화
왕국 - 침공 직전(2)
파티 오르골이 좀 더 느긋하게 진행할 시간이 있었다면 성직자의 나라에서도 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성직자의 나라는 사실 나라라고 부를 규모는 아니다.
그보다는 조금 작은 교외의 도시 같은 느낌이다.
다른 세 곳이 적어도 도시국가라고 부를 만한 규모였던 것에 비하면 초라하다.
하지만 제각각의 성역으로 지정된 신전들이 즐비하여 신성을 흘려대고 있으며, 다른 곳에선 구하기 힘든 고급 재료나 장비들이 좌판에 굴러다닌다.
랭커거나 적어도 랭커를 노릴 수준은 되지 않는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는다.
먼 옛날 개척시대의 유배자들이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들인 ‘왕국의 문’ 역시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왕국이라는 공간이 시작된 땅.
무수한 역사가 만들어진 곳이다.
신들이 주시하는 곳도 성직자의 나라다.
야심 있는 신은 강력한 유배자 신도를 수급하려고 하며 도전자들은 그런 신들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한다.
대전사들은 자신의 신을 위해 그런 유배자들을 선별하며, 그렇게 교단의 정예로 인정받은 유배자들은 밝은 미래를 약속받는다.
그렇게 진취적인 이들이 몰려들다 보니 도시의 분위기도 흔히 생각하는 창작물 속의 모험가 도시, 던전 도시에 가깝다.
여러모로 게임스러운 미궁에서도 가장 게임의 마을 같은 곳이라 할 수 있으리라.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이들이 없으니 항상 활기차며 밝다.
클래스간의 갈등도 여기서만큼은 신들의 합의하에 중재된다.
성직자의 도시 내에서 PVP를 벌인다면 우선 대전사들이 나설 것이며, 신들의 미움도 사게 되리라.
이렇듯 규모는 작지만 왕국에서 가장 평균 레벨이 높은 곳이 성직자의 나라 [아르칸]이다.
희우는 그 광경을 상공에서 지켜보며 단 한마디로 평했다.
“그러니까 만렙 마을이네!”
일단 날개를 울리며 포르르 내려간다.
도시 상공을 비행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이곳에서만큼은 종족이 무엇이건, 레벨이 몇이건 걸어 다녀야 한다.
따스한 온대기후가 나쁘지 않았다. 최초의 정착지인 만큼 가장 살기 좋게 설정되는 땅이라는 모양이다.
길가의 야생화들이나 싱그러운 내음을 풍기는 가로수들이 보기 좋다.
지나친 마천루와도, 공간효율을 위해서만 지어지는 마탑들과도, 그저 살기 위해 증축하는 하드스록의 집들과도 다르게 정갈하다.
지중해는 없지만 몰타나 나폴리 같은 휴양도시가 떠오른다.
절로 웃음이 나오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희우는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상황은 급박하지만 오빠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드래곤 회를 쳐서 가지고 오겠지.
이거 먹으면 더 강해진다며 이상한 요리를 해줄지도 모른다.
드래곤 하트를 썰어서 먹일지도 모르고.
용고기는 무슨 맛일까?
잡다한 생각을 하며 걸었다.
악룡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드라간이 벌어주는 시간 동안 미아가 모두를 바르게 이동시켰다.
별동대의 역할을 다했으니 빨리 다음 위치로 배치되는 것이다.
시티즌 주변에는 생존한 난민을 정리하는 팀이 남았다.
희우는 곧바로 아케인으로 이동하고 곧바로 성직자의 나라로 다시 이동했다.
곧 익숙하고도 험악한 대머리의 신관이 손을 흔들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막내 아저씨! 항상 오랜만이네요!”
“이제는 헨리입니다.”
마중 나온 헨리 신관은 빠르게 걸었다. 희우의 보폭으로는 따라잡기 힘들 정도여서 종종걸음을 쳐야 한다.
곧 다섯 명의 유배자 무리가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들의 눈길이 희우에게 향한다.
날카롭고도 불만스러운 눈초리.
왕국이 당장 작살이 나냐 마냐의 기로인데도 저렇다.
그렇게 살았으니 랭커거나 하이랭커겠지.
이제 유배자의 생리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희우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반갑습니다. 천사 정찰대의 리더를 맡을 대거라고 합니다.”
“예쁘네?”
“칭찬 고마워요.”
오빠가 구상한 왕국 방위전략에서 희우를 비롯한 천사 종족 유배자들의 가장 큰 역할은 정찰이었다.
그중에서도 기천사는 희우를 제외하고도 왕국에 다섯 명이 더 있었다.
고위종족은 그 자체만으로도 랭커 상위권까지는 치고 올라갈 잠재력이 있다.
대다수의 랭커들은 고위종족이라서가 아니라 짬으로 마인드맵을 세팅하고 장비를 파밍한다.
그러므로 고위종족이 되고도 하이랭커가 못되고 일반 랭커 정도에 머무는 이들이라면 운이 좋았던 것이지 실력이 대단히 좋다고는 할 수 없다.
불행인지는 몰라도 둘은 하이랭커였고 셋만이 일반 랭커였다.
그래도 상위권은 되는 정도.
“침공이니 뭐니 해도 그냥 날아다니면 살 거 같은데 굳이 우리가 싸워야 하나?”
“그 드래곤은 어떻게 된 거야? 그거랑 싸워야 하는 건 아니지? 그렇다면 난 빠지겠어.”
벌써 이기적인 발언 두 명.
하이랭커 하나와 그냥 랭커 하나.
다른 셋도 탐탁지는 않은 모양이다. 애초에 이렇게 모을 수 있었던 것도 혼돈의 교단이 가진 막대한 자금력 덕분이었다.
대출은 무서운 것이다. 신용카드도 무서운 것이고.
그러니 아직은 그저 돈에 고용된 용병일 뿐이다. 사실 고용도 아니다. 그냥 그걸 빌미로 신권으로 윽박질러 모아놓았을 뿐이다.
그러니 이들이 말을 얼마나 잘 들을지는 희우 하기 달려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녀석들은 모두 민첩 계열 전사였다.
유배자가 이미 그렇겠지만 특히나 전사 클래스들 사이에서는 강한 자가 정답이라는 법이 있다.
무기와 장비를 죽 훑어본다.
오빠의 사고방식을 흉내 내어 보았다.
상대의 전력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파악한다.
어디까지 가능할까? 가능한 가장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제압하려면 어느 정도가 좋을까?
콧노래를 지속하며 생각한다.
오빠는 미궁의 클리어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 동등한 수준의 역할을 각자의 단일 클래스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경력직 위주로 파티에 채용했다.
희우는 바깥에서도 초인이었으며 천재였다.
미궁에서 단련된 방식도 그에 걸맞았다.
아마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유배자로서의 경력은 짧겠지만.
“좋아요. 그럼 다들 따라 나올래요?”
불만이 나오려고 하자 헨리 신관이 무언가 제스쳐를 취했다.
인상을 쓰더니 조용해진다.
고분고분 따라 나오는 모습에서 또 정보를 취한다.
걸음걸이는 가장 습관이 강하게 드러나는 동작이다.
빠르게 머릿속에 기억해 둔다.
스킬도 고려해 본다. 이미 오빠와 레미가 유니크 스킬 풀에 대한 조사는 끝마쳤다.
대강 누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려져 있다.
기천사는 다섯밖에 없다.
정확도는 더욱 높다.
속도를 조절하여 거의 달리다시피 빠르게 한다.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쫓아오는 모습을 또 슬쩍 눈에 담았다.
제대로 무술을 배운 사람도 한 명 있다.
아마 바깥에서부터 수련했겠지.
밖으로 나오고 희우는 무기를 들었다.
“시간 없으니까 한 번에 다 덤벼요. 납득이 안 된다면 몇 번이건 상대해 줄게요.”
카롤리를 떠올려 본다. 그 웨펀 마스터 트롤이라면 이 다섯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을까?
답은 ‘충분히 가능하다.’였다.
그리고 희우는 카롤리를 상대로 승리했다. 그러니까 이제 최근에 연습하기 시작한 그걸 활용한다면…….
마인드맵을 열고 침잠한다. 깊이 빠져들지는 않고 의식적으로 조작하는 공감각.
“후우.”
조용히 호흡을 내뱉고.
눈을 뜨자 세상의 속도가 조금 달라진다.
헛소리를 들은 것 같은 다섯의 반응이 보인다.
[하드스록]의 이름을 달고 나타났어도 크게 다르진 않았겠지.
하물며 알려지지도 않은 누군가라면, 랭킹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은 낯선 천사가 나타나 이런 소리를 하면 어이가 없는 게 당연하다.
“농담하는 것 같죠?”
그럼 그 어이를 다시 쑤셔 넣어주면 된다.
단 한 걸음에 날개를 살짝 펴고 추진하여 한 명의 뒤로 돌아 들어갔다.
목을 부러뜨렸다.
그리고 포션을 뿌린다.
자신이 한번 죽을 뻔했다는 것을 알게 된 하이랭커 기천사가 멍하게 고개를 든다.
“다시 말할게요. 한 번에 덤벼.”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마법의 신은 고민했다.
그는 마법의 전문가이자 원소의 전문가다.
빛과 어둠의 원소는, 그중에서도 특히 어둠의 원소는 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하여 어둠의 원소는 많은 유배자들의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 무너뜨린다.
그에 대한 대책도 여러 가지로 연구되었다.
마법에서 그 대책이란 결국 정신을 조작하는 것과도 같다.
어둠을 다루는 마법에는 기억을 다루는 것도 많다.
그러니 기억을 지우고자 하면 할 수 있다.
본인이 그것을 원하냐는 중요하지 않다.
의식이 없는 지금이 가장 적절하다.
마법의 신은 아직도 화신의 상태로 레베카의 몸을 점유하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볼 문제다.
오래 산 유배자의 정신은 불안정하다.
그 삶에 정처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레베카는 더 특수한 경우다. 그녀가 이번 회차에 당도하기 전에 어떻게 지냈는지는 안다.
심지가 약하고 곧잘 휩쓸리는 성격에 마법적 재능만 이상하게 뛰어났다.
튜토리얼에서 마법사는 귀하다.
어떤 용도로 귀하냐고 하면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귀하다.
최악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작고 재능 있는 마법사는 왕국에 처음 도달했을 때, 몸도 마음도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40서버였던 걸로 기억한다.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하던 레베카를 구한 것이 맥이었다.
보살핀 것도 맥이었으며, 그 후에 거리를 둔 것도 맥이었다.
일그림 파티에 불러들인 것 역시 맥이다.
연정은 아주 오래된 것이며 강렬하게 새겨져 있다.
그것이 모두 거짓임을 간파해야 했다. 그러나 [폴리모프]의 작동 기전은 알고 있다.
필요에 따라 무수한 자신을 만들어내는 힘.
마법이라기보단 권능에 더 가까운 것이다. 흉내 내려면 미궁의 산물인 포션에 여러 가지 재료를 조합하는 수밖에 없다. 그마저도 지속시간이 있다.
해석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사회에 숨어든 드래곤은 그런 존재다.
학장이 레베카의 연구실을 개방해 주었다. 그리고 필요한 물자도 모두 대어주었다.
대마탑이 무너지긴 했으나 중요한 물건은 대체로 낮은 층에 보관되어 있다.
개중에는 자신이 신좌로 도피한 후 넘어갔던 것도 있어 우습다.
거울을 본다. 푸른 신성에 휘감긴 고운 얼굴이 있다.
꽃잎 요정이 레베카는 정말 아름답지만 인간 레베카는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원래의 모습은 잘 알지 못한다.
포션 없이 길게 방치된 레베카의 자잘한 상처는 본래 모습을 거의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다시 생각해 본다.
레베카에게 맥이란 단지 연모의 대상만이 아니다.
구원자이며 구세주였다.
그렇기에 조심스러웠다.
너무나도 긴 짝사랑이다.
그러니 그걸 즐겼겠지.
그리고 마법의 신은.
떠올린다.
이곳에서 이루었던 가정을,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아이와 아내를.
그것 역시 따지고 보면 ‘경영자’라 불리는 이들에 의해 일어났다.
유배자는 그래서 누군가에게 정을 주지 않으며 가족을 만들지 않는다.
현역이라면 말이다.
그보다 좋은 약점이 어디 있겠나.
마법의 신도 레베카도 유배자로서는 실패한 셈이다.
딸같이 여기는 아이의 목소리로 다짐한다.
“신좌에 좋아서 있는 것은 아니지…….”
갈 수 있었기에 갔다.
이 아래에 존재하고 싶지는 않았다. 원수도 잊고 그저 없었던 일로 하고 싶었다.
그래서 마법 연구에 몰두했다.
재미없다면 재미없는 성격이다.
복수를 하기보다는 그 가능성에 대해 고려한 후 너무 손쉽게 포기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기보다는 신좌로 도망쳤으니까.
지능 스탯은 이럴 때 불편하다.
너무나도 냉철한 정신력은 감성과는 무관하게 올바른 답으로 이끌곤 한다.
미궁의 보정이 깃들면 깃들수록 점점 인간적임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고레벨 마법사들은 모두 느끼는 것이다.
한편으론 그래서 고레벨들은 미쳐간다. 감성을 배제한 이성은 정상이 아니니까.
그가 좀 더 저레벨이었다면 기꺼이 분노하고 산화했으리라. 그걸 찍어 누를 스탯이 없었을 테니까.
레베카는 그런 점에서 특이했다. 아무리 스탯이 올라가도 감성적이었으며 미궁의 보정에 지지 않았다.
혹자는 너무 여리다고 말하겠으나 마법의 신은 달리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미궁에 휘둘리지 않는 것 같은 사람들.
그가 존경하는 오르골이라는 남자의 곁에 있는 천사처럼.
“후우. 내가 도망쳐서 생긴 일이군.”
냉철한 이성이 속삭인다. 그게 아니라고. 최선의 판단이었으나 결과가 나빴을 뿐이라고.
그래도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해결할 수 있었을 건데도 그저 방치했다.”
그것이 사실이다.
[아케인]은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신좌에서 적극적으로 방해한다면 다른 형태로 수작을 부려왔을 테니까.
그러니 관심을 배제했다. 본래도 신도를 모아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 같은 것엔 관심도 없으나, [아케인] 때문에도 그리했다.
“나는 신좌에 있을 자격도 없다.”
레베카는 강력한 마법사다.
기억을 어딘가에 봉해 넣더라도 결국 알아낼 확률이 높다.
하지만 기억을 봉인하는 것은 상태다.
신좌는 상태를 고정한다.
신좌에 앉은 신은 더 이상 성장할 수도 없으나, 반대로 언제나 전대의 신을 이긴 그 전성기의 순간을 유지한다.
신좌는 판단할 것이다. 레베카의 기억은 풀리지 않는 편이 더 신의 전력에 도움이 된다고.
혹여 본인이 알아내더라도 좋다.
적어도 신인 채로 존재하는 한 모를 것이다.
레베카의 기억을 봉인하고 신좌에 올린다.
그리고 이플릭셔스는 마법의 신을 영원히 섬길 것이다.
이 왕국이 끝나는 날까지.
혹은 오르골이 미궁을 끝내는 날까지.
손을 휘저었다. 마력이 흐르며 필요한 것들을 필요한 자리로 옮긴다.
레베카의 연구는 미궁의 인식에 대한 것이었다.
그 연구는 그도 도왔다.
사람의 기억을 숨기는 일 정도는 어렵지 않다.
가능하면 눈치채기 힘들게, 임시조치여도 신좌가 그것을 영구히 유지할 테니 지속시간보다는 그저 강한 봉인을 위해.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신의 힘을 사용한다.
조언이 필요하다. 그보다는 더 마법을 잘 다루며 미궁의 인식을 잘 가지고 노는 남자의 조언이.
마법과 지식의 신의 명의로 발송된 메시지가 혼돈의 신좌로 날아갔다.
여유가 생긴다면 이라는 단서를 단 도움의 요청이었다.
바쁜 와중이니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으나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아, 마법의 신입니까? 여기 일은 방금 끝났습니다. 그런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도와줄 수 있겠군요.]
여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당신은……. 당신이 왜?]
[그렇게 되었습니다. 임시지만 한동안 혼돈의 신을 하게 되었네요. 그보다 그렇다면 당신이 마법의 대전사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거절할 리는 없었다.
신 하나가 영구히 신좌에서 내려온다면 그보다 큰 전력도 없으니까.
레베카가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 한들 아직 일개 하이랭커.
마법의 신 본인에 비하면 손색이 크다.
이플릭셔스는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새로운 혼돈의 신의 신명을 보았다.
[혼돈과 절망의 신]
처음 보는 신명의 접미다.
미궁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