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345화 (345/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45화

왕국 - 침공 직전(3)

마법의 신이 연락해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다면 조금 빠져나오는데 시간이 더 걸릴 뻔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다른 신의 메시지가 내 의식을 현실로 되돌렸다.

그가 하려는 마법적 조치에 대해 몇 가지 조언을 한 후에 현실로 눈을 돌린다.

“후우우우우우. 힘들구만.”

아직 화신이 풀리지 않아서 루시의 목소리로 흘러나온다.

아직 앳된 느낌이 강한 목소리라 톤과는 영 어울리지가 않았다.

‘신이시여. 뻥치지 마십쇼. 전혀 안 힘들어 보였는데요.’

“존댓말 하지 마요. 루시. 우린 영혼으로 이어진 든든한 동료 아니었습니까? 나는 당신의 대전사. 당신은 나의 신.”

‘지금은 거꾸로야! 하지만 그럴까?’

그래도 내 입에서 루시의 목소리가 나오는 건 어색하다.

신언으로 대체하자.

「화신한 채로 직접 느꼈으니까 뭔가 좀 알 것 같죠?」

‘네가 어떻게 했는지?’

「네. 단순한 창술이 아니란 것도요.」

내가 루시의 몸으로 구현한 것은 그저 무(武)도 아니며 그저 스킬(Skill)도 아니다.

현실과 게임의 경계쯤에 위치한 미궁이기에 가능한 어떤 글리치 같은 것이다.

‘글리치라면 그건가. 미궁을 속이는 그런 느낌.’

「느낌만이라면 대강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건 마법이 아니고, 미궁의 시스템을 속이는 것도 아니에요. 단지 스킬의 보정에 순응하며 만들어진 연계기죠.」

요체는 간단하다.

하급 스킬로 갈수록 공격력 보정만 붙는 게 아니라 동작 그 자체에 보정이 붙는다.

게임스럽게 말한다면 모션이 정해져 있는 스킬인 셈이고,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같은 동작도 스킬을 발동한 상태면 더 빠르고 강해진다는 의미다.

같은 붕권이어도 스킬로서의 붕권은 무술로서의 붕권보다 더 빠르게 적에게 도달하고, 더 강한 근력으로 적을 타격한다.

시스템적으로 붙는 공격력 보정을 떼고도 그렇다.

그렇다면 모든 동작을 스킬을 이어가는 것으로 수행하면 된다.

창을 찌르고 그것을 거두며 다시 휘두르는 모든 동작이 이어지는 스킬 연계다.

정말로 하위 스킬 가짓수가 많다면 숨 쉬는 것도 스킬을 통해 더 빠르게 수행할 수 있다.

명상 관련 스킬엔 그런 동작이 있다.

다만 제대로 굴러가는 루틴을 짜는 것은 보유 스킬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야 가능한 일이라 내 몸으로는 못한다.

기껏해야 아서와 [하드스록]의 요새에서 싸웠을 때처럼 마지막 한 동작에 보정을 구겨 넣는 정도가 다다.

혼돈의 화신으로서는 거의 모든 움직임이 스킬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모든 동작이 [강격]이자 [초신속]을 발동한 상태라는 거군.’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좋은 스킬들이 많이 섞이니 몇 배나 증폭되죠. 미궁의 보정은 죄다 곱연산이거든요.」

루시는 아연하듯 그에 대한 감상을 말했다.

‘상상 비슷한 것도 해본 적이 없다. 정말로 무기술도 아니고 스킬 활용도 아니군. 미궁에 최적화된 기예라고 봐야겠어.’

「이걸 할 정도로 고레벨이 되는 유배자는 왕국 하나에 아무리 많아봐야 서넛이니까요. 잡액티브가 정말 산더미처럼 많아야 하거든요.」

연결 동작의 빈틈을 빠짐없이 채우려면 특화하여 마인드맵을 설계하더라도 5천 레벨.

일반적으로는 7천은 넘어야 한다.

그러니 현재 이 왕국에서 이게 가능한 것은 루시의 육신 하나뿐이다.

‘그, 육신이란 말 좀 자제해 주면 안 될까? 부끄러운데.’

몸이라고 부르는 거니까 그럴 법도 하군.

하지만 긴장이 풀리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한없이 진지하게 루시의 육신을 품평한다.

「부끄러울 필요까지 있습니까. 잘 단련된 몸입니다. 키가 좀 작을 뿐이지 골격도 적당하고 힘을 낼 근육과 몸을 지탱할 지방의 밸런스도 이상적이에요. 팔다리도 체격에 비해서는 상당히 긴 편이라 창을 쓰기엔 좋군요.」

루시가 정신적으로 온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하 하지 맛……!’

「거기에 사실 여성스러움은 없는 편이 전사에겐 더 유리한데, 희우의 경우에는 태생적으로 초인이니 그렇게 볼륨이 있어도 문제없지만 루시는 평범한 사람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희롱이다! 성희롱! 미투 할 거야!’

나는 껄껄 웃으며 말을 멈췄다.

「거참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시네.」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칭찬이면 받아들이겠지! 이 속이 시커먼 놈아!’

「그래도 좀 의외긴 했습니다. 상체 무게 중심이 생각과 약간 다르더라고요. 키만 작지 훌륭한 레이디가 맞으시군요.」

갑자기 루시의 회로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전사로서도 사람으로서도 어려 보이는 점이 콤플렉스인 모양이다.

‘음? 으음? 그러냐? 그렇지? 후후. 나는 훌륭한 레이디란 말이지.’

뭐, 마인드맵의 허점까지 동원한 정밀한 연계 중에 조금 당황하긴 했다.

여신님은 의외로 제니나 레미보다도 훨씬 고운 체형이시군.

화신하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점점 세상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시야의 문제가 아니라 잠깐 동안 전장이 되었던 멸망한 왕국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이곳은 이제 다시 심연의 저 아래로 가라앉는다.

악룡의 거대한 사체와 함께 다시 우리의 왕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연찮게도 마지막에 악룡이 쓰러진 곳은 처음 도착했던 그 자리였다.

텅 비어 얼마나 방치되었는지 모를 주인 없는 신좌들이 흐려지는 세상 속에서 마지막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곧 그조차도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우리가 있는 왕국은 결코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 * *

악룡의 사체는 우선 [드래곤 하트]만 적출했다.

돌아온 후의 위치는 처음 [신좌 쟁탈]에 당한 그 자리이며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거점은 성직자의 나라다.

침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도 충분히 운송하러 올 만한 거리였다.

악룡과 얼마나 오래 싸웠었지?

희우와 다른 파티원들, 그리고 수많은 협력자들은 이미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악룡의 거대한 심장을 원기옥마냥 쳐들고 비행하기 시작했다. 루시가 볼멘소리를 한다.

‘내 몸! 내 몸 돌려줘! 언제까지 화신하고 있을 생각이냐!’

「빨리 이동해야 하니 조금 기다리시죠. 아니면 저보다 빨리 날 자신 있으십니까.」

‘비겁한 녀석! 아녀자의 몸을 그런 팩트로 계속 점유하다니!’

루시가 조용해지고 계속 날았다.

곧 멀리서 비행하는 다른 것들이 보인다.

기천사들이다. 일단 하나는 희우였다.

“오오! 거기 일은 잘 끝났나 보네?”

“어라? 오빠? 오빠에요? 오빠가 여신님이 되었어!”

이걸 바로 눈치채네.

루시라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제 모습으로 남과 대화하는 모습을 본 루시가 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얼른 몸을 내놓으란 소리다.

어림도 없지 신은 화신의 주도권을 누가 가질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루시는 눈썹 하나 까딱할 수 없다.

나는 드래곤 하트를 든 채 희우에게 말했다.

“포션 좀 뿌려줘.”

“상처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요?”

“지금 속은 큰일 나고 있어. 무리했거든.”

희우가 포션을 뿌리는 동안 루시가 정신 속에서 펄쩍 뛰었다.

‘뭣이? 왜 그렇게 중요한 말을 내게 안 한 것이냐?! 이건 내 몸이다!’

「아마 제가 몸을 돌려주면 한동안 주무셔야 할 겁니다. 피로가 많이 쌓여 있어요. 큰 힘에는 큰 대가가 따르는 법이죠.」

‘이럴 수가! 나는 별로 재미 못 봤는데…….’

「이제 신 아니시니까 시간은 신경 안 쓰셔도 되지 않을까요?」

다시 루시의 회로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말이 옳다. 푹 자고 일어나서,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쳐들어오는 녀석들을 쳐 죽이러 나가도 충분하구나. 음하하!’

새삼스럽게 신좌에서 해방된 기쁨으로 흥분한 루시를 내버려 두고 희우 뒤에 따라오던 천사들을 본다.

몸을 멀쩡하지만 정신적으로 지쳤거나 큰 충격을 느낀 것 같았다.

희우에게 속삭여 본다.

“이겼어?”

“그럼요. 납득할 때까지 두들겨 팼어요.”

아마 날개를 잡아 뜯고 팔다리를 뽑아버렸다는 이야기겠지. 태도로 보아 머리카락 한두 올 이상으로는 내주지 않은 모양이다.

천재는 천재다.

이미 같은 레벨이라면 희우가 루시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태생의 차이란 그런 것이니까.

또 하나의 내가 점점 완성되어 가는 것 같아서 나쁘지 않다.

유배자는 이게 좋다. 무슨 짓을 해도 씻은 듯이 회복할 수단이 있거든.

아주 촉박한 시간 내에 기강을 잡는 데는 힘의 격차를 보여주고 그것을 고통으로 새기는 것이 최고다.

저들의 인권을 고려할 시간도 없으니까.

“그럼 정찰 수고해!”

“엣썰!”

희우가 나를 놀라울 정도로 깍듯이 대하자 다른 천사들이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마침 루시의 몸이니까 인상을 새겨두자.

“거기 너희들은?”

스윽 훑어주자 희우도 따라서 고개를 돌리고 훑는다.

한 명이 움찔대며 경례를 올렸다.

다른 이들도 허겁지겁 따라 한다.

조금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크게 미소 지어준 후 날아갔다.

신언을 통해 헨리와 교단의 중진들을 불러모아 뒀다.

뿐만 아니라 협력 관계에 있는 교단들의 인원도 단체로 끌어모은다.

전쟁의 신도들은 신관이더라도 대체로 그 주인을 닮아서 근육이 우락부락한 그린스킨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보고를 들었다.

“뭐? 전쟁의 신이 바뀌었다고?”

전쟁과 죽음의 신이라고?

* * *

전쟁의 신이 된 데스 나이트는 가장 먼저 자신의 동료들을 찾았다.

전쟁의 신도였던 동료는 없다.

그러니 제일 가까운 지위 있는 신도를 찾아야 했다.

처음 사용해 보는 신좌의 인터페이스는 몹시 어려웠다.

갑자기 뇌리에 주입되는 온갖 정보도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그는 한참이나 헤맨 끝에 간신히 교단과 접촉할 수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성직자의 나라에 있는 전쟁의 신전은 갑작스럽게 신성의 불꽃이 다른 색으로 변한 것에 당황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전쟁과 야성의 타오르는 듯한 신성은 이제 검붉고 음울한 구체로 변해 있었다.

[전쟁과 죽음의 신이 일그림이라는 유배자의 소식을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어렵게 메시지를 작성하여 송출한 후에야 여유가 생겼다.

신좌의 기능은 다양했고 바깥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도 많았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왕국의 풍경에 그가 향수를 가지려던 참이었다.

“……[침공]?”

그런 것 같았다. 전쟁의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떤 천사 신도는 지평선 너머를 가득 채우며 몰려들고 있는 적들을 관찰하며 기록하고 있다.

하드스록에 머물고 있는 대다수의 신도들은 제각각 바쁘게 몸을 움직이고 있다.

리프트 내에 있는 인원은 단 하나도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메인 던전의 침공]이 시작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 어디 한구석에서는 거대한 드래곤 하트를 들고 있는 소녀가 보인다.

악마로 보이는 소녀는 아무렇게나 그것을 바닥에 팽개치고 그의 신도에게 다가왔다.

전쟁이 신이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는 모습.

전쟁의 신은 당황했다.

거대한 드래곤 하트에 당황했다.

저렇게까지 크고 온전한 용의 심장은 본 적이 없다.

언젠가 천신만고 끝에 잡은 5,000살 정도의 드래곤보다도 거대하다.

그렇다면 1만 살은 넘었으리라.

그런 드래곤은 하나밖에 알지 못한다.

“악룡……?”

악룡이 죽었다? 그것도 왕국에서?

하지만 침공은 시작되었고?

그럼 경영자들은? 일그림은? 저 소녀는 누구지? 하이랭커 중에는 저런 이가 없었다.

전쟁의 신은 혼란에 빠졌다.

그때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어떻게 확인을 하는지 몰라 또다시 한참을 헤매어야 했다.

시야 한구석의 소녀가 답답한 듯이 가슴을 두들기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신좌를 다루는 법을 설명하고 있는 참이었다.

얼빠진 채로 조작한다.

메시지의 명의는 [혼돈과 절망의 신]이었다.

[야 이 자식아! 너 누구야?]

혼돈? 혼돈이라면 활동을 멈춘 신좌였다.

신이 생존 중인지 조차도 알 수 없다.

구전되는 설화 같은 내용은 있었지만 그뿐이다.

정보가 거의 없었다.

전쟁의 신은 고뇌에 빠졌다.

그의 사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의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세상이 왜 이렇게 된 거지?

따라잡을 수 없는 세월의 간극이 느껴진다.

두개골의 이마 부분을 부여잡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일단 동료들이다. 그들의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

그가 신좌에 앉고자 파티를 떠난 가장 큰 이유가 동료들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만약 이미 늦어버렸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때 새로운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이번 명의는 [마법과 지식의 신]이었다.

전쟁의 신은 반색했다.

신끼리도 연락을 할 수 있다. 마법의 신은 레베카의 스승님이다.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확실한 소식을 전해줄 수 있다.

메시지를 열자 의아해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혹시 지그하르트야? 나야! 나! 레베카!]

전쟁의 신은 3초 정도 더 메시지를 노려본 후 다시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짚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