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348화 (348/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48화

왕국 - Lv.4972 은하 포식자(2)

돌고 돌아 이렇게 된 것이지만 이렇게 외곽에 요새를 설치한 카베의 판단은 옳았다.

왕국의 영토는 충분히 넓었으며 침공 자체는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전진 배치되어 막아서는 곳이 있다면 다른 곳과는 시간 차를 가지고 전투를 벌이게 된다.

전력이건 권능이건 아무튼 돌려막을 시간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신좌로 돌아와서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에길의 차례는 오늘이 아닐 것 같다.

조금의 여유를 가지고 다른 곳의 상황을 살핀다.

시티즌의 난민들은 최대한 구출하려고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죽은 이들에게 애도를.

아무리 그래도 저들까지 구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일단 다른 곳에 공격이 오고 있지는 않은가를 파악한다.

아서에게 화신해 있는 동안 나는 신좌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온갖 메시지들과 신에게 올리는 진언들이 도달해 있다.

개중 서버의 일에 관한 것을 일단 제쳐놓고 왕국의 것들만 빠르게 정리한다.

아케인은 아직 공격받지 않았다.

그곳에 파견된 신도 중 하나가 나의 눈이 되기 위해 대마탑의 높은 곳에 올라서 있다.

망원경을 동원하여 바라보는 경치는 아름답다기보다는 장엄했다.

먼 곳에서 침공의 군세가 보인다.

그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나는 신음했다.

저게 아케인 방면으로 온단 말이지.

수평선 너머 펼쳐진 망망대해의 너머에서.

산이 걸어오고 있었다.

두 발 달린 산이었다.

왕국은 지구와 달리 행성이 아니다.

이곳은 완전한 평면으로 끝없이 이어진 세계다.

그러니 멀어진다고 해서 상대가 점점 가라앉는 일 따위는 없다.

그러니 제아무리 멀더라도 상대가 충분히 크다면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다.

하지만 저것들은 아마 출현함과 동시에 관측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콜로서스]가 이쪽이라면…….”

대부분의 이들이 ‘오르골’의 철저한 통제로 [메인 던전]에 접근하는 [키 아이템]을 확보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얻기 힘든 것들을 교류의 중심인 시티즌을 장악하고 통제하니 우연이라도 들어갈 일은 없었으리라.

그러니 오직 카베와 동료들만이 현재 열려 있는 던전의 테마를 알고 있었다.

[은하의 포식자], [콜로서스].

그리고 [대혼돈의 요정].

“그걸 늦게 맞이해도 되어서 다행인지 아닌지…….”

뭐 다 장단점이 있는 거지.

일단 현재 가장 까다로운 던전의 웨이브인 저것은 가장 마지막에 성직자의 나라 쪽으로 도달할 것이다.

“그래도 할 일은 똑같지.”

신언을 내린다.

「베키, 들립니까?」

거대한 블랙 드래곤의 사체를 보고 입을 쩍 벌리고 있던 베키가 혼비백산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다시 그녀를 불렀고 베키는 굳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듯이 나에게 응답했다.

“오, 혼돈의 신이시여. 저는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요키입니다.”

머릿속을 잠깐 뒤진 끝에 [무기고]의 길드 마스터로서 대외적으로 사용하던 명칭이 요키였음을 떠올렸다.

「이름은 왜 바꿉니까?」

“이제 베키로 남아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 이름으로 절 부르던 이들은 모두 사라졌네요.”

사소한 설명이 이어지려 했으나 대충 알 것 같아서 그만두게 했다.

무기 장인들은 여러모로 노림을 받는다. 그러니 다양한 이름을 대며 장사를 한다.

길드 마스터라는 직위를 나타내는 것에 가까운 이름이 요키였던 모양이다.

그런 이름들은 저렇게 세습되는 경우가 있다.

「알겠습니다. 요키.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니 그 무릎 꿇고 기도 올리는 자세는 그만두세요. 앞으로는 뚱땅거리면서 대화합니다.」

“예? 하지만…….”

「어차피 나는 신좌에 영원히 앉을 생각도 없으니까요.」

요키가 갈등하기에 가벼운 신벌을 내렸다.

권위주의적 신들은 이게 문제다. 신좌에 앉은 것을 긴 세월 간 고통받은 것의 보상으로 생각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그런 행태가 정착하면 모두가 신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게 된다.

사실 [무기고]의 영향력이 제아무리 크더라도 신에 미치기는 힘드니까 어쩔 수 없기도 하고 말이다.

신벌로 떨어진 검은 번개가 옆을 스치자 깜짝 놀란 요키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효율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알겠어요?」

여성 바위 난쟁이 특유의 크고 둥근 눈이 빠르게 좌우로 움직인다. 마치 무언가를 살피듯.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 신이 되기 전처럼 대하면 되나?”

「좋지. 우리 교단은 원래 이따위니 얼른 익숙해지도록.」

“대전사가 신좌를 찬탈하는 건 듣도 보도 못했는데…….”

「그것이 혼돈이다.」

요키가 마지막까지 시티즌에 남았을 뿐, 그녀의 장인들은 빠르게 대피했었다.

즉 시티즌의 가장 큰 공방은 손실 없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막대한 양의 드래곤 재료를 눈앞에 둔 채로 말이다.

「가공할 수는 있을 거라고 믿어. 다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우리 길드원과 살아남은 다른 모든 공방의 장인들이 힘을 합쳐도 10년은 걸린다고밖에 말할 수 없네. 아다만타이드보다 단단한 재료가 이렇게나 많으니까.”

일반적인 기준에서 가장 단단한 재질이 아다만타이드다.

드래곤 본, 스케일, 티쓰 등 생체 재료들은 대개 각 클래스를 대표하는 금속들보다 약하다.

대신 그 모든 특징을 골고루 가지고 있으며 자체적으로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블랙 드래곤은 너무 오래 살았고, 그렇기에 현재 왕국에 존재하는 모든 재질의 상위호환 격이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한다면 내가 저 사체를 제공한다는 것만으로도 국적과 클래스와 원한을 넘어 모든 생산직의 대통합을 이룰 수 있다.

이건 의외로 중요한데, 세상이 파멸하는 마당에도 제 자존심이 우선인 자들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장인이란 보통 어딘가 맛이 가 있기 마련이라 더더욱 그렇다.

「좋아, 그럼 재가공을 염두에 두고 당장 쓸 수 있게만 만들어.」

“장인들이 그걸 납득할까? 최고의 재료라면 최고의 품질을…….”

「그런 놈은 쫓아낸다고 해. 우리 교단이 도와줄 테니. 전권을 가진 건 너야.」

“그건 참 마음에 드는군. 혼돈으로 개종하길 잘했어.”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라고 했잖아?」

교통정리 같은 자잘한 일을 내가 맡긴 책임자들이 해낼 것이다.

레미는 혼돈의 교단을 정말로 체계적으로 키워냈다.

업무적으로 유능한 이들은 많다. 가끔 그 수완이 두려워질 정도다. 일개 중학생이었다고? 정말?

요키는 꽤 오래전에 개종했다.

그녀는 원래 규율의 신을 따르고 있었다.

금전교는 장사꾼에게 최적이니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어느 순간 규율에게 더 큰 이득은 자신의 몰락임을 깨달았으리라.

혼돈과 자유의 여신은 그녀가 규율로부터 도망칠 최선의 길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굴러들어 오는 복을 삼키지 않을 이유도 없기에 받아들였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어지럽게 띄워진 신좌 시스템의 최상단에 떠올라 있는 나의 신명을 본다.

[혼돈과 절망의 신]

절망이라.

별다른 고정 접미나 조건만 맞으면 저절로 특정 접미가 달리는 신좌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제외한다면 신명의 접미는 신좌에 앉은 자의 마인드맵과 행보를 그대로 반영한다.

절망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 접미다.

일단은 이 접미를 본 자들에게 절망을 준다.

어지간히 파괴적인 행보를 걷지 않았다면 달 수 없는 접미다.

게임으로서의 미궁을 말해보자면 왕국에 도달했을 때, 절망의 교단이 있다면 그건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벌집이다.

출현률은 [시간의 신전]과 비슷할 정도로 낮다.

그걸 달고 있는 신은 클리어에 다가섰으나 마지막에 물러섰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메인 던전] 하나 정도는 공략하고 살아 돌아온 역사를 가진 괴물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럼에도 결국 미궁의 죄수가 되었다는 신의 절망이기도 하다.

그래, 내게 꼭 맞는 신명이긴 했다.

하지만 이걸 왕국에 도달하고 1년도 되지 않아서 달게 될 줄이야.

나쁜 일은 아니었다.

우리 자유로운 루시는 마인드맵에도 자유를 부여한다.

자유 접미는 마인드맵에 어떤 보정도 넣지 않는다.

반면 절망 접미는 그 난이도에 걸맞은 보정을 부여한다.

마법사조차 마법의 신을 대신해 전쟁과 절망의 신을 고려해 보게 만들 정도의 보정이다.

그러니까 아주 형편은 좋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씁쓸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다시금 절망할 일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요키의 화면을 치우려는데 씁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블랙 드래곤의 사체를 올려다보며 요키가 중얼거린다.

“맥, 맥. 이제 다시는 못 볼 맥. 네가 악룡의 [폴리모프]였다니.”

빅맥이 어쩌고 하기에 소스부터 직접 제조해 그 맛을 구현해 주었지.

그때까지도 상상치 못했던 정체였다.

눈치챘던 이가 과연 존재했을까?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선 꼭 빅맥 많이 처먹어라. 병신아.”

추모인지 욕설인지 구분이 힘들 정도로 씹어 내뱉는 말이었다.

아마 그녀를 베키라고 부르던 이들 중 하나가 맥이었던 모양이다.

* * *

카베는 승리했다.

전초전에 가까운 첫 웨이브지만 승리는 승리였다.

불길을 거두고 다시 고목이나 유적 같은 메마른 몸으로 돌아온 거인은 그 사실이 신기했다.

세상에는 말이 쉬운 일들이 참 많다.

그렇게 하면 된다고는 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나를 따진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들.

하이브 마인드의 의지를 중계하는 보스급 개체들을 빠르게 쓰러뜨려 제어를 잃게 만든다는 계획이 그러했다.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통제를 잃은 짐승이 된 포식자의 하급 괴물들은 쉬운 상대가 된다.

애초부터 개개의 강함보다는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큰 테마다.

통솔력이 사라지자 놀라울 정도로 쉬웠다.

가만히 앉아서 주변을 본다. 원래 그가 세웠던 계획은 첫 웨이브에서 최대한 많은 이들을 이 요새로 끌어들여 생매장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피해는 거의 없을 것이니 이후의 전망이 좋다.

그렇게 점진적으로 물러나며 하드스록으로 후퇴할 예정이었다.

아마 그 계획 끝에 남는 이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저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에 불과할 뿐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불안한 소망은 지금 이루어졌다.

지옥석 투석기에 맞아 죽어 타들어가고 있는 거대한 소 같은 괴물이나, 바닥을 훑으며 땅속으로 스며들어 오다가 찌그러진 괴물들.

셀 수 없이 많은 인간과 큰 차이가 없는 작고 사나운 괴물들.

어디로 새어 나가지 않고 깔끔하게 섬멸했다.

비행하는 것들은 주로 신들이 담당하여 여파가 지상에 미치지 않도록 했다.

주로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과거의 전설들은 자신들끼리 어느 구석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중이다.

카베는 허허하고 웃으며 다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요새는 매끈하다.

아젤리아가 정령왕을 혹사시켜 복구했으나 오늘 다시 무너질 운명이라 여겼다.

내일까지도 쓸 수 있으리라.

어쩌면 그다음 날도.

더하면 다음 주까지도.

그리고 하드스록의 시가지에는 어떤 괴물조차 발을 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게 이루어진다면 정말 기쁠 것이다.

“카베.”

이번엔 고개를 낮추어야 했다.

아서가 서 있었다.

카베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아서. 오랜만이군.”

며칠 되지 않았으나 그렇게 느껴졌다. 너무 많은 일어난 탓이다.

그의 동료가 아닌 아서도 어색했다.

카베는 오래 살았으나 이번의 파티원들만큼 애착이 가는 이들은 없었다.

그 이전까지는 이해관계로 얽혔을 뿐이니까.

“그 파티는 좋은 곳인가?”

“좋지. 아이들이 많아.”

아이라니.

실제 나이도 그렇겠으나 미궁에서는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다.

아서가 말한 것은 조금 다른 의미일 것이다.

“혼자 이득을 누리고자 하는 계산적인 면모도 없고, 서로를 의심하는 낌새도 없지. 그러면서 꿈이 없는 것도 아니야. 앞으로 나갈 길만 보고 있는 파티야.”

중심인 두 사람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뭐, 쉬지 않고 새로운 사실들이 쏟아지니 지칠 틈도 없는 것 같군. 내게도 이상한 걸 배우라고 하지 뭔가.”

아서는 검을 휘둘렀다.

간단한 기본기가 조합되어 서로 중첩 보정을 만든다.

대검 끝에 걸린 거대한 소 같은 괴물의 시체가 베인다.

카베는 그 사실에 놀랐다.

사실 대검은 벤다기보다는 때린다에 더 가까운 무기다.

저런 고레벨 몬스터의 외골격에 가까운 외피는 깔끔하게 벨 수는 없다.

별다른 스킬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거 신기하군.”

“맞아. 빨리 숙달되라고 하더군.”

“가능하겠나?”

“해봐야지. 기사 수습생 시절이 생각나는군. 혹은 미궁에 처음 왔을 때도.”

카베가 보기에 아서는 강제로 초심으로 잡아끌려 온 낌새가 있었다.

본인이 그렇게 말하는 그 파티의 ‘아이들’에 감화된 모습이다.

카베는 그저 웃었다.

노인은 사라질 때다.

이 침공이 끝나고 [하드스록]은 해체다.

카롤리도 멜메르도 어떤 의미로건 창창한 젊은이들이니 그가 부려먹을 수는 없지.

“좋구나.”

카베의 평생 이렇게 사상자가 적은 [침공]의 웨이브는 처음이었다.

다른 방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빈다.

* * *

신들은 신들대로 담소가 아닌 진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길이 가끔 아서를 향한다.

혼돈의 화신이었던 전사이자 아주 유명한 고정 NPC다.

“뭔지 알겠는 사람?”

“대충은 알 것 같은데. 뭔가 스킬을 복합적으로 사용했어.”

“스킬? 기본기인가.”

결투의 신이 자신의 여우 귀를 긁적이며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몇 가지 기본적인 스킬을 휘둘러 본다.

쌍검에 깃든 연속된 동작에 스킬의 은혜가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게 끝나기 전에 바로 비슷한 동작으로 이어가 본다.

당연히 잘되지는 않았다.

어딘가 어색한 연결 동작이 되었다.

힘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끊어진 후 다시 시작된 형태다.

“이걸 어떻게 잘해보면…….”

다른 신도 몸이 달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검을 들고 연속 동작이나 스킬 중첩을 시도한다.

동작이 큰 만큼 더 눈에 확 들어왔다.

앞 스킬의 동작이 끝나기 전에 뒷 스킬의 동작이 한순간 겹쳐졌다.

다만 너무 억지로 한 것이기에 팔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음……. 가벼운 골절이군.”

“너무 억지 동작이었다.”

신이라 함은 모두 도전자였던 이들이다.

미궁에 도전하고 또 도전한 끝에 간신히 도달한 것이 신좌.

하물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전원 개척시대나, 그 약간 이후부터 생존해 온 오랜 신들이다.

“한 번 물어볼까?”

“좋지.”

신들이 벌떡 일어나서 아서를 향해 걸었다.

신좌에서도 내려왔겠다. 그리웠던 시절로 달아간 것 같다.

미궁에는 아직도 배울 것이 정말 많았다.

카베와 전장을 가만히 바라보며 서 있던 아서는 때아닌 신들의 습격에 당황하며 눈썹을 올렸다.

그리고 몸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일부 동작들을 어설프게 시연하기 시작했다.

세상 진지한 그 연무회에 카베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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