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49화
왕국 - Lv.10646 콜로서스(1)
내가 혼돈의 대전사로서 파티를 이끌고 날뛰는 동안 교단 자체도 바쁘게 움직였다.
레미는 효율적으로 인재를 육성하거나 찾아내어 교단에 배치했다.
처음에는 바깥에서 유사한 경력이 있는 이들 위주로 영입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큰돈을 제안받은 자들이 왕년의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전직 랭커 출신도 있었으며 각국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다가 은퇴한 이들도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노회한 너구리들이다.
내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슬슬 레미와 헨리가 한계에 부딪혀야 했다.
어느 정도 자질을 보고 교단을 맡긴 것은 사실이다.
루시가 이미 거대 교단의 주인이었던 경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온갖 세계에서 온갖 일을 하며 잔뼈가 굵은 정치인이나 행정가들 다수가 상대라면 분명히 한계가 있어야 한다.
그 계획은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오산이었다.
아주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제임스 교구장, 그건 좋은 생각이라 판단되지만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습니다. 물밑에서 작업은 하되 시행은 침공 이후로 하지요.”
“알겠습니다. 대신관이시여.”
헨리가 자애롭게 웃으며 교활한 인상의 늙은이를 내려다본다.
불편함이 있을 법도 하지만 상대는 경건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신으로서 신도의 태도를 평가할 수 있는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저들은 진정으로 헨리 대신관을 공경하고 있다.
「좋은 일 하는구먼.」
헨리가 고개를 든다.
“그렇습니다. 침공이 끝난 후에 복구하기 위한 기틀이 되겠죠. 왕국은 더 좋은 곳이 될 겁니다.”
「든든하군.」
저 공경은 헨리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다.
물론 헨리는 누구보다 신실하고 성실하며 선량한 자다.
거기에 착하기만 한 게 아니라 바깥에서의 험한 생활 덕에 나름대로의 요령도 길러져 있어 쓰기 아주 편리한 인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그뿐이기도 하다.
갱의 중간 관리자 정도는 되어봤으나 보스나 참모였던 이는 아니다.
큰 조직을 관리하는 경험은 없으며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대신관으로서 교단 전체를 틀어쥘 수 있는 인물까지는 아닌 것이다.
그 배후에 레미가, 그리고 이름 없는 대장 고블린이 있었다.
정말로 평범한 중학생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노련한 레미와 그녀가 우연히 도움을 요청하게 된 어떤 고블린 하나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교단이다.
있기 힘든 우연, 혹은 기적이다.
희우가 가져온 행운에는 분명 인복도 있다.
루시를 만났고, 헨리를 만났으며, 레미도 만났다.
지금 와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물론 사냥꾼이다.
나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는 그 상태로 떠나갔다.
시간과 심연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어떤 모형 정원으로.
당시에 나는 그것이 찝찝하고 씁쓸한 엔딩이라 여겼다.
이젠 조금 다르다.
그에겐 그것이 진실일 것이다.
나에게도 현재가 진실이다.
그 사실을 그렇게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달리 없다.
사냥꾼은 내 마음의 스승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혼돈의 교단은 나의 간섭 없이도 거대한 세력을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대장 고블린이 고블레타리아 연방을 만들어낸 방식은 왕국에서도 통했다.
그리고 레미는 그에게 배운 것을 아주 잘 활용한다.
한때 자신만의 야심 혹은 욕심을 가지고 교단에 투신했던 중진들은 이제 진심으로 혼돈의 교단을 따른다.
디테일한 과정에 대하여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당근과 채찍, 기술적 세뇌와 정보 제한.
미궁을 살아온 유배자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법한 트라우마를 틀어쥐는 것부터 하여 그다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진 않았다.
몇몇은 끝내 제거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블랑쉐나 엔젤이 가끔 움직였다.
대장 고블린이 46서버에서 해낸 것보다는 쉬운 일이긴 했다.
당근으로는 연방의 무한한 지원이 있다.
채찍으로는 드러내놓지는 않았으나 아는 이들은 아는 대전사의 소문이 퍼지고 있다.
협력하는 랭커나 하이랭커들도 있다.
똑똑한 이라면 어디에 붙는 것이 정답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의 재료.
거기에 실제로 대전사가 보이는 행보가 점점 수면 위에 드러난다.
일종의 치트키를 친 내정 운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의 대단함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나와 루시는 틈만 나면 그 사실을 치하했고 레미와 헨리는 더 열심히 일했다.
혼돈의 교단은 그렇게 다져졌다.
무결하다고는 못하겠으나 내가 지금껏 관여한 조직 중 가장 단단하다고는 말할 수 있다.
「신들의 성향은 확실히 가려졌어?」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정보는 육성으로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헨리는 입을 다물고 생각으로 대화했다.
‘그렇습니다. 규율의 신과 협력 관계에 있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대체로 마법 계통이더군요.’
「마법은 돈이 많이 들지. 마법사들이 주로 믿을 테니 교단의 유지비도 문제가 많을 것이고.」
마법의 신은 가장 스탠다드한 마법 계열 신이다.
누가 믿어도 문제는 없으나 동시에 특화되어 있지도 않다.
마법사들의 계열에 따라 더 신앙하기 좋은 신들도 존재한다.
파괴의 신과 흐름의 신이 그렇다.
「회유는 어떻게 되었어?」
‘일단은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반쯤은 협박이었기에 진심은 알 수 없습니다.’
「그거면 충분하지. 규율의 신이 몰락했음은 누가 보아도 사실이니까.」
대전사가 죽는다는 것은 교단에 치명적이다.
하물며 규율의 대전사는 그 악룡이었다.
무너져 내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이제 발악할 여지도 잘라내었군.」
‘규율과 금전의 신인만큼 모든 것이 비즈니스였죠. 사업이 무너지면 의리로 함께하는 이는 없는 모양입니다.’
「고생이 많아. 그럼 내가 마지막으로 담판을 짓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사전 작업을 알아서 척척 다 해준다.
내정이 구현되어 있는 RTS임에도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다.
오로지 전장만을 주시하면 된다.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메시지에 특별히 공을 들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레미가 어떤 식으로건 압박을 가해뒀을 것이다.
신을 상대로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아니, 그야. 신보다 더 굉장한 양반이 파티 리더인데.”
그 뒤에 양팔을 벌리더니 ‘마법의 신이 놀라고 혼돈의 여신이 감탄한!’ 따위의 헛소리를 하기에 꿀밤을 때렸던 기억이 난다.
직후에 너무 희우 대하듯이 대한 것 같아 사과했더니 오히려 희미하게 웃고 있어 의아했지.
“뭐, 아무튼. 저한테 신이라고 해봐야 유배자 평생 도움 된 적도 없고…….”
신의 위엄이나 중요성을 느낀 적이 없으니 자연스러운 존중도 없다.
뉴비가 이래서 무섭다. 중고뉴비 같은 녀석이지만 말이지.
“그리고 어차피 전 시간의 신도니까요.”
시간의 신을 섬기는 이상 어떤 신에게도 휘둘릴 필요가 없기도 하다.
신들 입장에서도 어이가 없으리라.
200레벨 남짓한 마법사 하나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고 있으니까.
곧 규율의 신과 비즈니스 관계에 있던 여러 신들이 응답해 왔다.
다양한 반응이 보였으나 규율을 손절하겠다는 선언만은 동일했다.
금전신은 별수 없다. 쉽게 아군을 만들 수도 있지만 잃는 것도 한순간.
“교보재를 보내주면 더 까불 생각을 못 하겠지.”
오래된 신은 현재 강림한 이들이 전부다. 다른 이들에게는 루시의 위명이 먹히지 않는다.
체험한 것과 소문은 전혀 다른 법이니까.
그래서 교육용으로 찍어둔 화신의 전투 장면을 전송했다.
오랫동안 왕국에 날개를 펼치며 그림자를 드리워 온 악룡과의 전투 영상이다.
사실 전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제3자의 시점에서 신좌에 기록된 그 영상은 그저 일방적으로 찍어누르고 있는 모습이다.
의도적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모든 공격을 튕겨내고 찌르는 장면 등이 담겨 있다.
루시의 모습인 것은 더욱 형편에 좋다.
경외와 신앙을 받아야 할 것은 내가 아니다.
교단의 얼굴은 이미 하던 이가 수행하는 편이 더 좋다.
루시는 혼돈의 신좌에 누가 앉건 혼돈의 교단 하면 떠오르는 존재로 남아줄 필요가 있다.
아쉽게도 나 자신에게 그런 거대한 카리스마나 인망 따위는 없다. 이건 직전 회차에 뼈저리게 느꼈던 사실이다.
그때 결국 마지막에 내 곁에 있었던 건 블랑쉐뿐이니까.
그러고 보면 블랑쉐다.
이 녀석은 언제 돌아오는 거야? 심연이 이게 문제란 말이지.
시간의 흐름이 이상하니까 신이 된 입장에서도 캐치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쪽의 시간 흐름으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관측할 수 없다.
물론 지금 그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침공]이 시작된 시점에는 모두가 왕국으로 강제 송환된다.
리프트 속으로 도망쳐 살아남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물론, 침공의 포탈이 열렸음에도 왕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남는 경우도 있다.
이미 시체가 되었거나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일 경우다.
고로 블랑쉐는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왕국의 시간에는 이미 죽었거나, 이미 돌아와 있다.
우리 암살자는 사춘기지만 바보는 아니다. 틀림없이 승리했으리라 믿고 있다.
신도로서 감지되지 않는 것은 아마 심연의 신앙으로 바꾸고 왕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하면 시간 흐름의 괴리를 피할 수 있다. 심연의 신도는 그곳에서 원하는 만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럼 귀환 장소가 파괴된 시티즌 한가운데니까 열심히 달려오고 있는 걸까?
나쁠 것 없지. 어차피 심연을 공략해야 하니 심연 신앙도 한 명은 필요했다.
그래서 심연 신앙은 대신격이면서도 쉽게 가질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공략을 위한 기믹의 일종이다.
돌아오면 바로 레미에게 보내야겠군.
하여간 신좌에 앉으면 신경 쓸 것이 너무 많다.
이제 새로운 전쟁의 신과 대화를 좀 해봐야겠군.
다른 신들은 권능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지만 이 친구는 모를 것이다.
* * *
전쟁과 죽음의 신, 지그하르트는 혼란한 마음을 추스르고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였다.
레베카는 친절하게 설명했고 이해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한쪽에서 끊임없이 날아드는 혼돈의 신의 메시지도 상황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굳이 만신전에 찾아온 일그림과 에리나가 절대로 혼돈의 신에게는 까불지 말라고 했다.
일그림은 그렇다 치더라도 에리나가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동료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날아온 영상이 있었다. 어렵사리 열어보자 어떤 전투를 담고 있다.
주인공이 혼돈의 화신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상대는 악룡이었다.
맥이 악룡이라는 사실은 이미 들었다. 믿을 수 없지만 믿어야 했다.
그러니 이것은 애도할 수도 없는 그런 죽음이다.
그리고 그런 일 같은 건 사소해질 정도의 충격이 영상 속에 담겨 있었다.
조금 회의가 느껴지는 전투, 아니,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최선을 다해 발악하는 악룡과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쳐내며 다가가는 화신이 보인다.
신좌에 앉기까지의 고생과 그 이전에 보낸 세월의 고통이 모두 회한이 되어 몰려올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러니 신참 전쟁의 신에 불과한 지그하르트는 아주 조심스럽게 선배님께 대답했다.
결코 쫄아 있는 것이 아니다. 침공으로부터 왕국을 수호하는 것은 그도 바라던 일이었다.
[그럼 저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즉시 응답이 돌아왔다.
[신앙 잔량 체크하고 몇 번이나 권능 갈길 수 있는지 확인해서 보고하도록. 필요한 권능 목록은 따로 보낼게.]
신좌를 다루는 데 익숙하지 못하므로 또다시 레베카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 일이었다.
[참, 너 뉴비지? 사용 순서와 각 권능의 효율에 대해서도 첨부할 테니 공부해서 적절한 순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참고해.]
못하면 당장 전쟁의 신좌를 찾아내 일기토를 붙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지그하르트는 아주 공손하게 두 손으로 자판을 쳐서 답장을 보냈다.
절로 고개도 꾸벅 숙여진다.
[명심하겠습니다.]
약간의 시간을 더 기다렸다.
혼돈의 신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 즉시 레베카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도와줘! 레베카! 신앙 잔량을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지?]
다급하기 짝이 없다.
* * *
블랑쉐는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심연은 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제대로 없는 곳이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다.
도리어 길을 잃은 상태가 더 정상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흐음.”
검지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린다. 어디선가 보고 따라 하는 행동이다.
“안전하게 가야겠군.”
그녀가 알기엔 루시가 외출하여 신좌가 비어 있는 상황이다. 이후 누가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블랑쉐를 불러오기엔 늦었을지도 모른다.
심연에서의 혼돈도 만능은 아니라고 했다. 심연의 신 아래에 적을 두었기에 더 밀접하게 힘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라고.
“곧바로 빠져나오지 못할 경우의 대책.”
딱히 이번 일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심연으로 추방당하는 일은 언제건 있을 수 있기에 숙지하고 있는 사항이다.
“심연의 신도가 될 것.”
가장 확실하게 시간의 흐름에 휘말리지 않고 탈출하는 방법.
알맞은 시간대로 다시 귀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그러지 않고 운에 맡기기에는 변수가 너무 커졌다.
파티 오르골에는 만능 첩보원 블랑쉐가 필요하다.
멀리서 쾅쾅 하는 소리가 들린다.
거대한 골렘이 움직이고 있다.
저 등 위에는 심연의 신전이 있다.
블랑쉐는 생각했다.
혼돈도 아주 멋진 이름이다.
하지만 심연은 더욱 멋진 이름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대신격이라고 하지 않는가.
가슴 한구석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첩보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망이다.
적어도 블랑쉐는 그렇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