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52화
왕국 - Lv.10646 콜로서스(4)
해가 떠오르고 먼바다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허공에는 두 개의 이질적인 태양과 두 개의 불길한 검은 태양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주변의 모든 자연물을 압도하고 있다.
나라라고 불릴 정도의 거대한 도시건만 그곳의 주민이건 그곳으로 향하는 난민이건 눈에 비치는 것은 결국 하나다.
일식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강렬함에 마법을 모르고 전투를 모르며 유배자도 아닌 이들은 얼어붙었다.
그것이 적이 아닌지도 모르며 설사 적이 아니더라도 휘말리는 일 정도는 얼마건 있다.
지치고 고단한 삶에 공포는 소리 소문 없이 스며든다.
난민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마법이 그 난민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든 것은 미궁의 슬픈 단면이다.
랭커란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도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말하는 것들이다.
목숨이 달린 시점에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격렬한 공포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잔잔한 패닉이 퍼져 나갔다.
왕국은 결코 미궁의 낙원이 아니다.
유배자조차 아닌 이들에게는 조금 더 넓고, 약간의 기회가 더 주어진 지옥이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짙은 법.
행복을 갈구하는 이들은 많지만 이룰 기회라도 손에 넣는 자는 거의 없다.
난민 행렬은 멈춰서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일어난 이변이 무엇인지 알지조차 못한다.
이미 거대한 [드래곤 피어]에 한번 질려 버린 마음이다.
그 드래곤이 이미 숨을 거두었음조차 모르는 이들에게 포기는 아주 손쉬운 것이었다.
입을 벌리고 비명을 지르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삶을 포기하게 되는 순간은 어떤 소음도 징조도 없이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그렇게 퍼져 나가는 절망의 잔물결 속에서 한 명이 일어섰다.
“와…….”
열 서넛이나 겨우 된 것 같은 그루터기 요정 소녀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두려움에 찬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저 광경이 아름답게 보였다.
미지는 공포다.
하지만 그것에 공포가 아니라 흥미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재능이라 불리는 것이다.
소녀는 비틀비틀 손을 뻗으며 걸어 나갔다.
그 어머니가 따라간다.
신의 이름을 되뇌인다.
그림자의 신이시여 부디 우리를 지켜주소서.
신이 실존하는 세계에서 그 기도는 그만큼 무거워진다.
한번 기적을 겪은 모녀는 다른 이들보다 더 세상을 신뢰할 수 있었다.
하늘 높이 떠 있는 불길한 힘의 구체들을 보고도 그것이 자신들을 지키리라 믿을 수 있다.
“저길 봐요! 엄마! 마법이에요!”
“그래. 그림자의 신께서 우리를 지켜주시려는 모양이구나.”
밤을 갈라놓은 빛의 구체, 그것을 삼킬 듯 덤비는 어두운 구체.
먼동이 터오는 저 하늘마저 지워 버리고 존재감으로 온 하늘을 뒤덮은 그것은 충분히 신의 이적으로 해석될 만한 그림이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았다.
소녀가 들떠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저런 거 본 적 있어요? 정말 대단한 마법인가 봐요!”
하늘에 뜬 4개의 태양에 마음이 빼앗긴 요정 소녀는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았다.
드래곤이 나타났을 때, 곧바로 기절하는 바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지 못한 탓도 있다.
하지만 절망에 물결치는 행렬에 그런 소녀의 존재는 조용한 파문이 되어 퍼져 나갔다.
마법의 도시 아케인.
그리고 하늘을 덮은 위대한 마법.
그것이 그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인식.
모든 것을 내려놓은 순간에도 인간은 희망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찾지 못해 무너지려는 것이지 찾기 싫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그런 인식은 무엇보다 달콤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때맞추어.
「마법의 여신이 고한다. 신도들이여 주변의 모두와 협력하라. 마법의 나라가 그대들을 지킬 것이다.」
장엄한 신언이 주변에서 달려오던 마법의 신도들에게 울려 퍼졌다.
마법을 사용할 줄도 모르며 단지 아케인 근방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신도가 된 이들에게 귓가에 울리는 여신의 목소리는 충분한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으로 그림자가 피어오른다.
허공에 검은 연기를 뿌리며 나타난 사내가 히죽 웃었다.
그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모두의 귓가에 뚜렷하게 울렸다.
“그림자의 신 역시 고한다. 앞으로 나아가라. 너희들은 여기서 죽지 않을 것이다.”
멈췄던 행렬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걸음씩 다시 내딛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림자의 신은 그 모든 것의 시작이 결코 신언이 아니었음을 안다.
때로는 한두 명의 평범한 사람이 많은 것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미궁은 뒤틀릴 대로 뒤틀린 곳이었으나.
그럼에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그는 그 작고 어린 신도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딱딱한 신좌에서 단순한 숫자로서의 신도들을 보던 것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었다.
* * *
노심이란 건 당연히 몸에 해로운 것들을 뿜어내기 마련이다.
흔히 말하는 위험한 방사선이라는 것들도 결국 방출되는 마력의 일종이다.
에너지를 띈 입자는 더 잘게 쪼개어보면 결국 마나로 귀결되며 그것의 흐름이 곧 마력이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도 같다.
그리하여 원자로야말로 조금 다른 형태의 마력로인 셈이니 이 노심이 인체에 얼마나 해로운 영향을 끼칠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고레벨의 초인이라면 모를까, 민간인들에게는 아주 유해하다.
그러니 사람 사는 곳 상공에 이런 게 지속적으로 노심을 번쩍이고 있는 것은 좋지 않았다.
미아는 그 사실 역시 이해하고 있었다.
실피드가 등장한 시점부터 술식에 급격한 가속이 일어난다.
상대는 콜로서스.
그에 대한 정보는 알려준 적이 있으나 디테일하지는 않았다.
미아는 마법사이니만큼 다른 클래스처럼 일단 때려보고 적의 성질을 판단하는 수를 쓰기 힘들다.
그것도 극심한 소모가 될 테니까 말이다.
미궁의 법칙에 따라 적이 어떤 내성을 지니고 어떤 공격에 약한지 어림짐작할 눈썰미가 필요하다.
그러니 나는 침묵하고 지켜보았다.
지식이라면 있다. 어떻게 추측할지 볼까?
대량의 마력을 운용하는 술식이 복잡해야 할 필요는 없다.
도리어 힘이 클수록 섬세하게 다룰 필요성은 줄어든다. 그냥 때려 박기만 해도 어떻게든 될 테니까.
하지만 [메인 던전] 수준의 적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노심을 운용하는 수준의 마력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소용없어지는 것들이 적으로 나온다.
번외 던전인 [지옥]의 거대 지네, 오만의 말로 같은 것도 중간보스에 불과하다.
하물며 [콜로서스]는 개체 수가 적은 대신 그런 것들이 떼 지어 나온다.
지금 걸어오는 거상들 역시 그렇다.
미아가 구축하는 술식을 느낀다. 몇 가지 아쉬운 발상이 보일 때마다 살짝 조절을 해준다.
계산은 완벽하다. 하지만 마법 역시 일정 수준 이상이라면 창의력과 경험의 문제다.
제 마력과 술식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느낀 미아가 살짝 움찔하며 내 의도를 살핀다.
논문의 첨삭 같은 것이라 깨달은 미아는 다시 내 수정의 의도를 살피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구축의 방향은 물리다.
실피드를 가진 만큼 바람을 최대한 활용할 모양인데, 콜로서스는 바위에 가까운 적들이니 바람만으로는 타격이 적다.
그리고 일점에 집중하는 형태의 물리력 투사.
빛과 어둠은 바람이 뚫는 길 사이를 통과하여 내부로 침투할 것이다.
거기서 미아가 생각한 방향성을 깨달았다.
거대한 골렘형의 적이니까 내부를 조져놔야 한다는 사고다.
옳은 판단이다. 다만 그런 식이면 한둘을 확실히 파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체적인 전황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단지 하나나 둘을 쓰러뜨리는 것이라면 다른 딜러들도 있다.
마법사는 소모적인 만큼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노심을 배분하는 윤곽이 드러난다.
내부에 넣어서 폭파시키는 방식보다는 재가공을 하고 있다.
침투성이 높고 넓게 퍼져 나가는 형태다.
빛이고 어둠이고 어딘가에 스며드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는 것들이다.
다른 원소와 달리 물질적이지 않은 성질이기에 고려할 것이 적다.
지금까지 그려온 술식들이 하늘에 넓게 펼쳐진다.
모두가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고 장엄한 마법이다. 규칙성이 있는 모든 것들은 그 크기가 거대해지면 장엄해진다.
하늘에 떠오른 태양 같은 노심들 주변으로 구형의 거대한 입체가 점점 퍼져 나간다.
하늘을 도화지 삼아 그려내는 그림이다.
미아가 큰 틀에서 계산하여 던지면 실피드가 디테일을 구체화한다. 나와 계약한 정령왕이니 그 정리는 흠잡을 곳이 없다.
효율 좋고 가성비 좋게 짜면 겉으로 드러나는 술식의 양은 줄어든다. 그럼에도 층층이 쌓여가는 마력의 실들은 오로라마냥 하늘을 비춘다.
환상적이고도 장엄한 광경이었다.
미아는 계속해서 술식을 중첩해 간다.
같은 마력을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노력이다.
노심에서 쏟아져 나오는 힘들을 수집하여 쌓아올린 술식들에 공급한다.
이제 점차 밤하늘에 빛이 더해졌다.
여명도 황혼도 아니다.
또 하나의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검고 하얀 빛들이 하늘을 비춘다.
세상이 어떤 색의 빛을 받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 보인다는 사실을 아는가?
지금 아케인이 그랬다.
흑백의 조명을 받아 현세가 아닌듯한 황홀함을 연출한다.
입을 쩍 벌리고 올려다보고 있는 학장과 주변의 마법사들이 보였다.
미아는 모두의 지지를 받는 마법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주목 받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술식의 구체가 이제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순간 미아의 생각을 깨달았다.
술식 자체를 구형으로 쌓아 올린 이유가 있었다.
거기에 흘려보낸 마력으로 5개의 노심을 통합하여 하나의 노심처럼 운용할 생각이다.
어째 점점 불필요한 것들을 짜 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안전할까?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위력의 증폭보다는 한 번에 묶어서 처리하기 위한 구성이다.
따로따로 하는 것에 비해 조절은 힘들지만 힘을 집중하기에는 더 좋다.
이건 실피드를 슬쩍 보았다.
마법적 지식은 나와 공유하는 정령이다. 희우의 모습을 한 실피드가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좋아, 연산만큼은 나보다 뛰어난 둘이니까.
가만히 더 보고 있자 폭발의 형태를 유도하는 것도 보인다.
의미 있는 행위다.
거상들의 거대한 몸속에서 널리 퍼뜨린다면 내부에서 소규모의 연속된 폭발이 일어나는 편이 더 좋다.
밀폐된 거상들의 몸속에서 폭발은 널리 마력을 전달하리라.
하지만 거기에 투입되는 것은 어둠뿐이다.
빛은 다른 형태로 가공되어 가고 있다.
광선이다.
바람만으로는 관통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이것도 좋은 생각이다.
그렇게 4개의 태양과 실피드를 위한 바람의 노심이 한데 뭉쳐 새로운 거대한 무언가가 되었다.
시각적으로는 하얗게 타오르는 구체에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는 느낌.
마법적으로는 바람을 중심으로 빛이 형태를 이루고 어둠이 그것을 감싸고 있다.
이건 나도 참고해 볼 만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회차의 천재들은 가르치면 제각각 새로운 발상을 해낸다.
나는 무수한 천재들의 도움을 받아 나를 발전시켜 왔다.
미아 역시 그렇다.
하지만 경험이 적다면 실수 역시 한다.
너무 거대한 힘을 담기 위해 지나치게 크고 촘촘하게 짜 올려진 술식의 구체가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건 감의 영역이다.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론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그냥 그런 것도 있는 법이다.
“어어어?”
그리고 미아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미아의 몸을 장악했다.
‘앗아아아아! 아빠! 갑자기!’
「딸아. 욕심은 좋지만 과했단다. 이건 내버려 두면 터질 거야. 어떻게 하면 더 안정화시킬 수 있는지 나중에 의논해 볼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되긴 하지.」
정령왕은 훌륭한 술식 보조 장치로 기능한다.
하지만 실피드에게 창의성이나 감은 없다.
그저 지식 그대로 정석적인 결과만 만들어낼 뿐이다.
미아가 한 것은 지나친 변칙이며 실피드가 커버해 줄 범위를 넘어서 있다.
그렇다면 직접해야 하지만 미아는 실피드를 너무 사람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실피드의 씁쓸함이 전해져 왔다. 도움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이런 것을 느끼니 정령의 본질에 대한 오해가 생기지.
「많이 해봐야 해. 이론과 지식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 이상을 하려면 말이야.」
어디가 문제인가를 아는 것은 어느 정도 감각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진짜로 틀렸다기보다는 어딘가 어색하다고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직감.
미아 역시 내가 술식 구체를 손보는 것을 보며 그것을 느끼면 좋겠다.
「여기 봐봐. 이거 어색했지? 이제는 깔끔하고.」
‘어엇, 그런 거 같기도?’
「이건 원래 말로 설명 못해. 그래도 뭔가 왠지 알거는 같지?」
‘이상하긴 한데……. 왠지 이건 엄마가 더 잘 알거 같아요…….’
예리하군. 희우는 대체로 감과 본능에 맡기는 편이다. 그 아이가 마법을 익혔다면 미아와는 전혀 다르게 활용하겠지.
이럴 때는 도리어 유리할 것이다.
「근데 너희 엄마는 이런 거 못 만들어.」
‘그건 그래요!’
자신에 대한 의심을 가질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다면, 그다음은 쉽다.
미아는 더 발전할 것이다.
누군가 어디서 막힌다면, 그것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서니까.
방향을 가리켜 줄 표지판만 있다면 충분하다.
「하려던 게, 이거 맞나?」
‘감사합니다!’
예의바르게 인사한 미아가 다시 화신의 주도권을 되찾는다.
몇 가지 불가해한 방식으로 불안정해졌던 술식이 마찬가지로 불가해한 방식으로 안정화되었다.
저런 미지의 영역 역시 연구한다면 밝힐 수 있겠으나, 몰라도 쓸 수 있다면 꼭 알 필요는 없다.
그래도 미아는 나중에 밝혀내려고 하겠지.
나는 연구자가 아니니 거기까진 미아의 취미로 남겨두자.
미아가 조준했다.
보조 마법진들이 마구 떠오른다.
중첩된 원형의 마법진이 총구처럼 층층이 쌓여간다.
일종의 마법 포구와도 비슷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물리적 실체인 부분은 하나도 없다. 마법의 신기한 점이다.
조준 역시 스스로 익혀야 한다. 미아도 일단은 워메이지니까.
정확히 다섯으로 분할된 빛이 발사되었다.
아래쪽으로는 차폐막이 펼쳐진다.
거대한 마력이 방출되는 순간 사방으로 흩어지는 방사선을 막기 위해서다.
이런 세심함은 점수를 더 높게 줄법하다.
지켜야 할 것까지 공격에 휩쓸리게 둘 수는 없으니까.
빛이 뻗어나갔다.
그것은 너무 거대한 마력이었기에 공간을 왜곡시키며 전진했다. 그 일그러짐 속에서 광선은 마치 영원히 날아가는 듯 보였다.
빛이지만 바람이며 동시에 어둠인 광선이 가장 앞서가는 거상 다섯의 다리를 노렸다.
번개 치듯 빛이 터져 나오고 거상 다섯의 다리에 작은 폭발이 일었다.
그리고 그대로 그 부위들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불길은 점점 번진다.
어둠이 짙게 피어올라 시각적으로 불길이 번지는 과정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가장 가성비가 좋은 도트 대미지를 구현했다.
거상의 내부에 침투하여 끊임없이 폭발하고 있으니 저 덩치들의 내부는 골다공증마냥 약해지고 있을 것이다.
적절한 거리에 다가와 아케인이 공격을 시작한다면 일제히 무너질 만큼이다.
그렇게 앞선 다섯을 기능 정지 시켜 무너뜨린다면, 그 거대한 질량을 고스란히 성벽처럼 활용할 수 있다.
미아의 구상은 그대로 시신을 장벽으로 세우려는 것이다.
마법사다운 좋은 발상이었다.
그리고 혼돈의 화신, 미아의 육신은 그대로 탈진했다.
꼼수로 보류하고 있던 마력 탈진이 본격적으로 찾아온다.
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다음부터는 탈진할 정도로 마력을 짜내지 마. 차라리 노심을 2개로 줄이는 게 더 나아.」
‘에에, 그래도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잘했다. 다중 노심을 처음 하는데도 이 정도면 정말 잘한 거야.」
‘그렇죠?’
「최고지.」
‘이히히히히.’
어째 웃는 방식이 희우를 닮았는데.
많이 닮아가는 느낌이야.
하지만 덕분일지도 모른다.
미아는 짧은 학교생활 덕에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러고도 나태하지 않고 교만하지도 않고, 도리어 그 사실을 자긍심 삼아 노력하고 있다.
희우가 꼭 그랬다.
이후 미아가 나보다 더 훌륭한 마법사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마 누가 가르쳐 준다고 이렇게 재깍 해내지는 못했을 것 같은데.
실피드가 힘이 빠진 미아의 몸을 보살피며 천천히 내려놓기 시작한다.
육신은 뱀파이어 로드지만, 그럼에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강렬한 마력 탈진이었다.
이런 일의 완화를 위해 다른 종족 카드가 필요한 시점이다.
화신의 시간은 남았으나 굳이 더 있을 필요가 없기에 빠져나갔다.
실피드도 반투명하게 흐려지고 있다.
술식의 한가운데에 있던 것이 바람의 노심이었다.
직접적으로 힘이 사용되지는 않았으나, 정령왕을 유지시키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워하고 있다.
곧 꺼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자연 상태의 바람으로 돌아가겠지.
「잘자렴.」
* * *
바람의 정령왕이 정령계로 돌아가기 직전, 제 주인을 대마탑의 상부에 내려놓은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너무 높은 고도에 있었기에 제일 가까운 곳에 두었을 뿐이다.
한번 무너졌던 대마탑은 이전보다 꽤나 작은 크기로 수리되었기에 꼭대기가 구름을 뚫고 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 위에서 장엄한 역사를 올려다보고 있던 마법사들은 곧, 그들의 가운데에 떨어지는 은발의 소녀를 받아들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트동트가 미아를 받아들었다.
트동트가 일어섰다.
아케인의 그랜드 마스터들은 저도 모르게 길을 비켜주었다.
늙었으나 여전히 거대한 오크가 아니라 그 품에 안겨 잠든 소녀 때문이다.
“내 아래에 재우고 오도록 하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어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잠든 소녀를 보며 다들 그때의 강연 같은 경외를 느끼고 있었다.
강연과는 달리 시연이었기에 어쩌면 그 충격은 더 거대할지도 모른다.
모두가 생각했다.
혹여 자신들 중 누군가가 미래에 마법의 신좌에 앉을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지금 이 왕국에는 신이나 다름 없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대체 저 파티는 어디에서 나타난 괴물들인가?
일종의 연구 과제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들의 사이를 작은 뱀파이어 소녀를 안아 든 오크 노인이 흐뭇하게 웃으며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