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53화
왕국 - Lv.7764 대혼돈의 요정(1)
심연의 신앙은 본디 쉬이 얻을 수 있게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정말 어중이떠중이의 손길마저 닿을 정도는 아니다.
블랑쉐는 나름대로는 고생했다.
심연의 신전을 이고 다니는 거대한 골렘은 쉽게 자신의 위로 뛰어오를 수 있게 해주지 않았다.
가뿐하게 날아올라 도착하려던 블랑쉐에게 대공포를 연상케 하는 포화가 쏟아졌다.
달라붙어 기어 올라가려고 했더니 격렬하게 움직이며 떼어내려고 한다.
공간 마법이라면 제대로 배웠기에 그걸 활용해 보려고 했다.
택도 없다. 바로 마법전이 걸려 들어왔다. 공간의 틈새가 뒤틀리며 이상한 곳의 문이 열릴 뻔했다.
종족 특성에 의지해 마법을 구사하는 블랑쉐는 빠르게 마법을 포기했다.
고민이 필요했다.
골렘을 올려다보며 약간 더 고민을 한 끝에 그냥 멀리서부터 도움닫기를 하여 뛰어올랐다.
쏟아지는 포화는 몸으로 때우며 어떻게 굴러 착지하는 것에 성공했다.
멋있다기 보단 볼품없는 구르기였기에 아쉽지만 목표는 달성했으니 문제없다.
“후우. 심연, 과연. 쉽게는 안 되는가.”
쉬이 손에 넣은 힘은 그만큼 보람이 없는 법.
블랑쉐는 옷을 털며 만족스러워했다.
어찌 되었건 악마에게 대단히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정도의 공격은 아니었다.
제법 너덜너덜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블랑쉐는 그 사실을 외면했다.
심연의 신전은 세워졌다기보다는 자라난 것 같은 형상이었다.
광물이 세월이 흘러 점점 결정화되며 솟아난 그런 모습.
언뜻 보기에는 흑요석 같지만 흑요석은 이렇게 다양한 색으로 빛나지 않는다.
애초에 자체발광하지도 않는다.
떼서 서브 리더에게 가져다주면 예쁘다고 좋아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리더의 딸, 파티의 마법사를 담당하는 흡혈귀 소녀도 떠오른다.
신나서 들고 가 마력적 성질을 체크하지 않을까?
“후후.”
블랑쉐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웃었다.
대신격이란 것들은 신도에게 무관심하다.
신언은커녕 메시지조차도 누군가가 받아보았다는 소문이 있을 뿐이다.
거의 도시 전설에 가까운 이들.
단검을 들고 다른 단검을 하나 더 꺼내서 망치와 정처럼 내려쳤다.
단단하다.
약간 고민을 한 후 단검 두 개를 던진 후 각을 맞추어 허공에 돌려차기로 때려 넣었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무지개 흑요석이 툭툭 갈라진다.
좀 더 예쁜 모양으로 갈라진 것을 챙기다가 커다란 것도 하나 더 주웠다.
리더가 이걸 가지고 뭘 할지도 모른다.
이젠 이 왕국의 유일한 오르골이 된 남자다.
그리고 한편으론 진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는 블랑쉐에게 유일한 의미를 부여해 준 남자.
친부에게는 한때 충성을 바쳤다.
리더에게는 다르다. 충성이라기보단 친구나 동료로서의 감정이 있다.
이대로 순탄하게 미궁의 끝을 본다면 아마 리더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겠지.
그때가 오면 각자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서로 축복하며 흩어지는 그런 장면을 상상해 본다.
언젠가부터 블랑쉐도 그것을 그리게 되었다.
선명한 상상은 현실이 될 확률을 올려준다. 블랑쉐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때가 온다면 블랑쉐는 웃으며 돌아가, ‘오르골’이 아닌 ‘블랑쉐’로서 그녀의 여동생들을 구할 것이다.
“좋아. 열심히 해야겠지.”
감상을 잠시 내려놓고 움직인다. 차원 수납 주머니에 무지개 흑요석을 집어넣고 심연의 신전 내부로 들어갔다.
[심연]답지 않게 제법 밝다. 벽면에 맴도는 은은한 빛이 시야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조명이 된다.
제단이 보였다.
짙은 보랏빛에 물든 비석이 둥실둥실 떠 있다.
그 앞에 무언가를 바치거나 혹은 자신을 바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블랑쉐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방법은 안다.
아직 혼돈과 자유의 여신의 신도인 블랑쉐는 배교하더라도 신벌이라는 시스템적 페널티를 받지 않는다.
심연의 신도가 되고, 최초로 주어지는 약간의 신앙으로 탈출의 권능을 사용한다.
시간과 위치를 제대로 지정하는 일을 잊으면 안 되겠지.
기도라기보다는 사무적인 태도에 가깝게 신앙을 간청하였다.
마인드맵이 펼쳐졌다.
그 배경을 물들인 혼돈의 옅은 보랏빛이 점점 진해지기 시작한다.
다른 것으로 변하고 있다.
심연의 보랏빛은 깊은 바닷속처럼 짙고 깊어 보였다.
혼돈의 색이 얕은 것이라면 이것은 진정 저 어딘가의 무저갱을 보는 것 같다.
신앙이 변했음을 알고 눈을 뜨려고 했다.
마인드맵이 닫히지 않았다.
블랑쉐는 잠깐 멈칫했다.
곤란하다. 마인드맵이 열려 있단 것은 신체가 무방비하다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날 이유조차도 모르겠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그 녀석이 만든 가능성 중 하나로구나.」
인간이 아니라 깊고 깊은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 * *
미아가 생각한 대로 꼭 잘 풀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제대로 내부가 손상되지 않은 거상들도 있었으면 결정적으로 화력이 좀 부족하긴 했다.
공격받은 것들의 다리가 충분히 약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신들이 나서 요격했다.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굳이 고르라면 효과적인 편이었다.
그림자의 신이 특히나 활약했다.
암살자 계열 신인 그는 시티즌이 몰락함으로서 기반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비록 활동이 적다곤 하나 최소한의 영향력은 유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거상들은 제때 무너져 쓰나미를 만들었다.
바닷물이라고 해봐야 발이나 좀 적시는 수준이지만 인간크기에게는 대단한 재해다.
도시 차원의 마력 방벽이 솟구쳐 오른다.
쓰나미를 막아내는 장면을 보고 학장과 그 동료들이 수리한 대마탑의 마법이 작동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아가 해낸 것은 결국 개인 차원에서의 대마법이다.
이 왕국 마법사들의 총력이 들어갔으며 이미 죽은 노악마의 정수가 깃든 마법이 발동했다.
대마탑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마법이다.
거상의 위치에 공간이 열렸다.
이번 회차에서 본 것 중 최대 규모의 공간 균열이다.
그리고 그것이 닫혔다.
뒤편의 거상들도 상당수가 무너져 내렸다.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으나 다리를 잃었기에 도달까지 한참이 더 걸릴 것이다.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이렇게까지 지연시킨 후라면 이제 국지적인 파괴를 지속하여 산이나 다름없는 저 거상들을 침몰시켜야 한다.
대마법이 모두 지나가고 마법사들이 비행하기 시작했다.
마탑의 그랜드 마스터들은 연구자 비중이 높으나 그렇다고 파괴를 행함에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실전 경험일 따름이다.
그러니 저렇게 거대하고 살아 있는 표적을 상대로 마법적 파괴를 행사하는 것에 큰 문제는 없다.
미아가 만들어낸 방벽 너머로 학장의 공간이동이 일어나며 마법사들이 출현한다.
그대로 그들은 천천히 기어오고 있는 거체들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이제 날이 밝았으니 점심까지는 어떻게 해결 될 것이다.
날이 넘어가고 밤이 깊어지면 다음 공세가 출몰한다.
그 전에 [대혼돈의 요정]을 막아내면 제법 여유가 생길 것 같다.
보고 있는 곳을 옮겼다.
요키가 작업하고 있는 가운데 사방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다른 창을 띄우자 성직자의 나라에서 활동하는 혼돈의 교단 중진들이 보인다.
침공이 일어났고 그에 대한 소식을 뒤늦게 접하여 날뛰는 이들을 진정시키고 있다.
아마 쉽지 않을 거다.
살기 위해서는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마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무 흔하다.
하드스록은 카베가 오랫동안 준비해 온 덕이며, 아케인은 학장이 [아케인]의 리더 행세를 하며 의견을 모은 덕분이었다.
학장은 이미 몇몇 그랜드 마스터들에게는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는 모양이다.
마법의 신도 그에 관여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고.
마법의 신 하니 신참 신 두 명을 불렀다.
[이건 무엇입니까? 혼돈이시여.]
[어라? 왜 불렀어? 이런 기능도 있네?]
이건 단체 메신저 같은 건데 신좌 부품으로 버전 업된 신좌에 새로 추가되는 기능이다.
모니터 너머로 신좌 플레이를 할 때는 종속된 신이나 우호 관계인 신들을 묶어놓고 관리하는 기능으로 존재했다.
[다음에 들어오는 웨이브가 이름 보고 뭔지 알겠는 사람?]
[모르겠습니다.]
[나도.]
[저거 다 미친 요정들이야.]
레베카가 고개를 갸웃 하는 게 보이는 듯한 채팅을 쳤다.
[아니, 그럼 쉽지 않나? 요정이라고 해봐야 스펙은……. 아?]
[그래. 서버의 스펙을 생각하면 안 된다. 설정상 고대의 악신에 의해 타락한 요정들이야. 그리고 높은 스펙과 기존 미친 요정들의 까다로움을 함께 가지고 있지.]
전쟁의 신이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아니지, 데스 나이트니까 이마가 두개골이겠군.
[그럼 그거 위험하다는 수준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이 옳다.
[대혼돈의 요정]은 [은하의 포식자]처럼 막대한 물량과 광역기를 봉쇄하는 전술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콜로서스]처럼 압도적인 단일 개체의 스펙으로 밀고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에 비하면 스펙적으로는 도리어 몹시 애매하다고 할 수 있다.
수도 엄청나게 많지는 않으며 보스급 개체의 강력함도 상대적으로 아쉽다.
하지만.
[메인 던전 테마 중에 가장 비열한 녀석들이지.]
아마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것이다.
이성과 합리의 미친 요정들은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투원이라 부를 만한 이들을 먼저 노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아마 이미 흩어져서 정찰을 끝마쳤을 거야. 약한 쪽이나 아예 난민들을 습격하려고 하겠지.]
[평균 레벨은 어느 정도죠?]
[7천쯤?]
[뭐야 그게……. 그럼 이미 초고레벨 PVP나 다름없잖아?]
좋아. 둘 모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아서 다행이군.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야. 마인드맵도 없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 유니크 스킬을 가진 개체도 이번에는 없을 거니까.]
[나중에는 있다는 것이군요,]
[거기서 너희들이 나서야 한다. 가능한 권능은 요정들에게 몰빵해야 해.]
막아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오히려 다른 둘보다 쉽다.
하지만 피해를 줄이기는 더 어려울 수 있다.
아니, 반드시 더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는 전쟁과 마법이라는 가장 스탠다드한 권능을 지닌 신들의 도움이 요긴하다.
이런 신좌에 앉은 이들이 뉴비라는 것은 불안요소일까, 아니면 말은 잘 들을 테니 좋은 요소일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작전을 브리핑한다.
동시에 신언으로 교단의 중진들에게 그 사실을 전달했다.
시간은 이미 해가 완전히 뜬 시간이다. 새벽을 넘어 아침이 찾아왔다.
직진했다면 요정 웨이브가 진작 성직자의 나라에 도달했겠지만 아마 왕국 곳곳에 흩어졌을 것이다.
신들을 돌려 보낸 후, 루시를 깨우려고 했다.
이미 깨어나서 듣고 있었다.
「그럼 갈까요? 대전사님?」
‘나한테 다시 화신하려고?’
「상황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지요.」
‘다섯 번 쓰기도 빠듯할 텐데.’
「그럴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루시의 배치는 고민을 해보아야 한다.
비상시에는 내가 화신하여 [다차원 연속체]로 옮겨 다니며 불을 꺼야 하니까.
동시다발적으로 테러행위를 벌일 테니 여유가 있는 하드스록에게도 이미 전달해 두었다.
카베는 병력을 이끌고 요새를 떠나 하드스록 시가지로 향하고 있다.
생각. 생각을 좀 더 해보자.
드라간을 불러들여야 하나? 스스로 나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도움이 필요한 상황일지도 모르겠군.
블랑쉐는 슬슬 도착할 때도 되지 않았나?
잠깐 복잡해지는 생각을 정리한다.
희우가 보고 싶다.
신좌는 누군가를 직접 만날 수 없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자리다.
그리고 헨리의 보고가 들어왔다.
‘블랑쉐가 돌아왔습니다.’
「그래? 당장 레미에게 보내줘.」
‘해야 할 말이 있다고.’
신앙은 이미 심연으로 바뀐 뒤인 것 같다.
헨리의 시야에 블랑쉐가 비친다.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고생은 충분히 한 듯 너덜너덜하다.
늘 그렇듯이 직설적으로 말이 돌아온다.
“심연의 신이 나에게 신언을 내렸다.”
뭐? 왜?
잠깐만. 머리가 아픈데.
이건 내가 모르는 상황이다.
대신격이 이런 식으로 접촉해 오는 경우의 수는 과거에는 없던 것이다.
다시 한번 미처 생각 못 한 경우의 수가 있나 생각해 본다.
없다.
본래 대신격은 [메인 던전]의 막바지에서나 입을 열기 시작하는데.
제발 변수 좀 멈춰!
아는 대로만 합시다.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