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55화
왕국 - Lv.7764 대혼돈의 요정(2)
미친 요정들은 용의주도한듯 하면서도 어딘가 나사 빠진 행동 패턴을 보인다.
그들의 머리로 짜낼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수가 있다면 그게 얼마나 악랄하건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미쳐있어서 그런지, 혹은 원판이 천진난만한 요정이어서 그런지, 또 그리 치밀한 계획 같은 건 없다.
그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나도 나사를 빼고 생각해야 한다.
블랑쉐의 작명이 좋은 자극이 되었다.
그렇게 나사를 몇 개 풀고 생각해 보니까.
[난민 사냥부터 한다고 생각하는 건, 저쪽이 예측할 수도 있겠군. 그보다는 대피하지 못한 변방 시골을 노릴 수가 있을 거 같은데.]
여전히 비행 중인 기천사들에게는 최대한 전투를 자제하라고 일렀다.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적들이 결코 아니다.
PVP에 가까운 악랄함을 보여준다곤 하나 미친 요정들의 평균 레벨은 루시와 유사할 정도다.
마인드맵의 보정을 떼고 생각하더라도 신에 준하는 수준의 유배자 다수와 PVP를 벌이는 것과 다름없다.
반드시 이쪽이 더 많을 때, 싸워야 한다. 아마 그래도 제법 많이 죽을 것이다.
이번 침공에서 감당할 웨이브 중 실질적으로는 가장 어려운 테마다.
‘계획은 제대로 있는 거냐? 물론 믿고는 있다만.’
「걱정 붙들어 매시죠. 요정왕을 할 때 제일 큰 골칫거리는 미친 요정들이었거든요. 요정이 전쟁을 하면 맛이 가버리는 놈들이 꼭 생기죠.」
다루는데 익숙하냐면 익숙해질 수 있는 녀석들이 아니라고 말하겠다.
그러나 행동 패턴에 대응 자체는 가능하다.
그렇기에 [다차원 연속체]를 통해 도달한 곳은 왕국의 까마득한 상공.
[외계]의 영역에 도달하자 드라간과 악룡이 싸웠던 흔적이 보인다.
거대하고도 거대한 외계의 영역이 크게 베어 먹힌 듯 텅 빈 동공으로 변해 있다.
가장자리는 아직 남아 있겠으나 그쪽에서 내려오는 괴물들은 거주지와는 거리가 있다.
침공에 섞여 들어올 것이다.
악룡은 외계까지 활용해 왕국을 완벽하게 멸망시키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결국 그곳에서 드라간과 싸우며 상당수의 잡졸들을 자신이 제거했다.
스펙에서 오히려 압살하는 만큼 대량의 잡졸을 상대로는 악룡이 누구보다 유리하다.
신으로 플레이할 때 그런 괴물급 유닛이 존재한다면 정말 편해지는데, 아쉬울 따름이다.
하지만 혼돈의 화신 역시 그 이상 가는 영웅 유닛이다.
날개를 펼쳐 비행을 유지한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날은 밝았으나 구름이 끼는 바람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들이 많다.
치워 버리자.
몇 가지 마법을 캐스팅하여 투창의 꼬리에 붙였다.
유성과도 같은 투창이 허공을 비스듬히 날아 지나고 그 주변으로 구름이 모두 갈라져 흩어진다.
그 작업을 조금 더 하자 아래쪽이 훤하게 들여다보였다.
천사들이 정찰하는 것은 국지적인 영역이다.
나는 전체를 본다.
화신의 장점은 어쨌건 이런 상황에서도 내 본체는 신좌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 기능을 이용할 수 있단 점이다.
신언을 내릴 시간은 없으니 메시지를 통해 교단 전체에 연락을 돌린다.
혼돈의 교단은, 그리고 그 수장인 레미와 헨리는 최초의 최초부터 침공에 대한 대비를 해왔다.
둘 모두 연차가 낮아 어떤 것인지 잘 모르면서도 충실하게 따라줘서 고맙기 그지없다.
연락망은 확실하다.
혼돈의 교단은 애초에 성직자의 나라를 비롯한 상위 유배자들보다는 하드스록의 슬럼을 비롯하여 왕국 하층의 약자들을 중심으로 교세를 넓혀갔다.
그들의 지지는 평소에는 쓸모없을지 몰라도, 왕국 전체가 하나가 되어 방어하는 침공의 상황에서는 중요하다.
왕국은 넓다.
유배자가 아닌 이도 많다.
도시에서 태어나 슬럼의 주민이 된 이들도 많지만, 최초의 개척자들이 정복한 땅 곳곳으로 퍼져 농업이나 목축에 종사하는 이들이 더 많다.
마인드맵이 무엇인지 모르며, 게이트를 본 적도 없고, 유배자는 그저 귀족 같은 상전으로만 여기는 민초들.
왕국의 NPC인 그들은 그야말로 NPC로 살아간다.
대부분의 유배자들에게 안중에조차 없으며 왕국의 경제를 돌리긴 하지만 그마저도 리프트를 통한 공급이 있기에 높이 평가받지 못했다.
인구가 이렇게 커진 왕국에서도 그들이 하는 일은 유배자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유배자는 이미 상위 계급이며, 마인드맵은 권력이다.
이번만큼은 저들을 살려낼 것이다.
유배자가 아니더라도 강해질 방법은 얼마건 있으며, 이 왕국을 지킬 힘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생존한 이들은 혼돈의 이름 아래에서 왕국을 수호하는 힘이 되리라.
「투창 잘하시던데. [지옥]에서처럼 원거리 지원 하시면 됩니다. 저는 그럼 바빠서 이만.」
‘내가 무슨 인공위성이냐?’
「그럴 리가 없죠. 루시는 행성요새 정도 되니까요.」
‘그 정도면 용서해 주지.’
화신의 주도권을 넘기고 신좌의 기능에 집중하였다.
정찰대인 기천사들은 숫자는 적어도 누구보다 빠르며 누구보다 정확하게 아래를 본다.
전력으로 날고 있는 기천사를 격추할 수단은 많지 않다.
* * *
희우에게 두들겨 맞고 정찰대로 징병당한 기천사들은 당연히 더 강한 자가 더 위험한 지역을 맡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드넓은 왕국을 6분할하여 맡아야 하니 잠시도 비행을 쉴 수가 없다.
초인적인 체력과 무한한 동력을 가진 종족이기에 가능한 정찰 영역이었다.
처음에는 삐딱했던 이들도 약간의 심경변화를 겪고 있는 와중이었다.
시작은 막무가내다.
하지만 원래 사람이 사회적인 동물인 이유는 남들에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자유비행할 일이 얼마나 있었나.
다른 근심 없이 속도에만 몸을 맡기고 눈으로 아래를 살피기만 하면 된다.
전투가 없다는 안심감도 있었으나, 그 외에도 자신들이 특별하다는 감각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밤새 여러 곳을 순환하며 지상을 살폈다.
일어나고 있는 전투, 아니, 그보다는 전쟁에 가까운 것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북부 설원의 요새에서 일어난 대전투와 마법의 나라 아케인에서 보인 여러 개의 태양이 작렬하는 모습.
그리고 쓰러지는 거상들.
높은 곳에서 모두를 살피니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건 전쟁이었다.
그들의 목숨마저 걸린 신화적인 전쟁.
그리고 시작이야 어찌 되었건 지금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그런 이야기다.
조금씩 사명감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희우는 연락을 주고받으며 두들겨 패서 마지못해 하던 다른 천사들이 점점 고분고분해지며, 적극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워낙 상황이 빠르게 변하고 있기도 했지만 인간이 근본적으로 사악한 이는 드물다는 것에 기인한 일이기도 하다.
적어도 희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강한 힘을 가진 유배자들이 이기적이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이득을 더 긁어모으지 않고서는 미래에 어찌 될지 모른다는 그런 확신.
그리고 그들을 강하게 묶어두는 소속감도 없다.
죽으면 이번 회차는 끝이다.
다음 삶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많이 겪은 이들이다.
여러모로 미련이 없다.
유배자의 사회는 그래서 불완전하다.
모두가 언제고 내팽개칠 수 있는 관계가 주류면 그럴 수밖에 없다.
오빠는 일단 판을 크게 벌임으로써 그런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침공은 일어났고, 당장은 그것을 막아야 한다.
제시된 것은 지극히 단순한 상황이다.
왕국 계층의 상위에 위치하는 유배자들은 협조하는 신들을 다수 확보함으로써 끌어들였다.
하위에 위치하는 NPC들은 교단의 무한한 재력을 이용한 이미지 관리와 버리지 않는다는 신앙을 심어줌으로써 끌어들였다.
중간계층의 애매한 유배자.
예컨대 처음 만났을 때의 제니 같은 이들은 그럼 저절로 나설 수밖에 없다.
직접 포섭하지 않은 이들이 있더라도 왕국의 전체가 하나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왕국 전체의 귓가에 속삭일 수 있는 판을 짠 것이다.
‘지금 뭐 해야 되는지 알겠지? 네가 뭘 하는 게 옳은 일인지?’
사람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단순한 생물이다.
저렇게 온 세상이 속삭이는 상황이 된다면 앞뒤를 재던 이들도 자신의 일에 집중하게 된다.
그것을 위해 이미 여러 교단의 성직자들이 나서서 각지에서 독려하고 있다.
성직자의 나라에 처박혀 다른 곳으로 잘 움직이지도 않던 이들이 말이다.
이것은 미증유의 재앙이며 막아서야 할 위협이다.
우리는 하나이며 모두의 삶이 달려 있다.
애초에 거짓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실감 나게 와닿냐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판을 이미 깔아두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이해관계를 초월한 초인 하나의 등장 덕분이다.
“우리 오빠 끝내주는데?”
희우는 어려운 것은 잘 모른다. 대략의 윤곽만을 붙잡고 있을 뿐.
그러니 거시적인 디테일은 사실 잘 모른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녀에게도 이 상황은 어필하는 부분이 있었다.
신좌에 앉아 세상을 지켜만 보던 그 엉덩이 무거운 신들이 직접 강림하여 적을 막아서고 있다.
그걸 목도하고 피가 끓지 않는다?
그놈은 유배자가 아니다.
희우가 단지 왕국의 주민일 뿐이었더라도 나섰을 것이다.
그렇게 빗발치는 자원용사들을 관리하는 것은 신들과 그들의 교단.
완벽하다.
왕국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왕국을 이런 식으로 컨트롤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전 회차에서는 통합 길드를 만들었다고 했지.
그때는 힘으로만 찍어 누르는 것에 가까웠지 않을까?
이번에는 여신님도 있었으며 다른 유능한 동료도 있었다.
그리고 희우 자신이 있다.
사랑하고 있고, 사랑받고 있다.
이건 사람을 아주 달라지게 만든다.
“우히히히.”
이게 남편이 출세할 때 아내가 느끼는 감정인가?
온 세상이 희우의 오빠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희우의 오빠가 온 세상을 틀어쥐고 거대한 재앙에 맞서고 있다.
이게 사랑이지.
한 번 더 반할 것 같다.
아니, 이미 한 번 더 반했다.
그리고 그런 헛생각을 하는 동안 연락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학장은 아케인의 그랜드 마스터이며 이젠 대마탑에 존재하는 모든 귀중한 소재들을 사용할 권한마저 얻었다.
천사들이 사용하는 통신 장치는 그야말로 온 마탑들이 나서 만들어낸 마도공학의 첨단이다.
[여기는 델타. 어…… 그러니까. BH 365, 779 지점 요정 병력 발견.]
[XU 443,954 지점, 보스급 개체로 추정되는 마법사 발견.]
의외로 유배자 중에서는 군인 출신이 많다.
평범하게 그런 직업 종사자들이 고난을 뚫고 왕국까지 도달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시티즌이 터지면서 그쪽에서 유입된 인재들이 많았다.
아케인의 학장과 하드스록의 레미는 전문가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제부터 수행해야 할 것은 전쟁이다.
기왕이면 현대전의 공식을 그대로 사용하는 편이 좋다.
어설픈 점은 신이라거나 마법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법이다.
희우는 희희낙락하게 웃음 지으며 지상을 살폈다. 조만간 기천사만큼 빠르진 않더라도 충분히 빠른 다른 종족들도 징집당할 것이다.
왕국은 이미 그런 분위기로 치닫고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후배를 만들어준다면, 지금 활동 중인 기천사 정찰병들은 더더욱 소속감을 느끼겠지.
무서운 계획이다.
* * *
RTS란 원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다.
루시가 위치한 고도는 유배자의 시력으로도 지상관측이 제대로 가능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더 낮게 날고 있는 천사들이 확인한 적의 위치에다 냅다 폭격을 때려 박기엔 적절하다.
거기에 내가 가진 탄환은 루시의 투창만 있는 것도 아니다.
[실례지만 이거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뉴비 전쟁의 신이 허둥지둥 물어본다. 노련한 전사란 노련한 빡대가리일 수도 있다.
밖에서 뭘 하다 왔는지는 모르지만 신좌 조작에 영 익숙해지질 않는다.
이런 친구들은 이해를 시키려고 하지 말고 그냥 무작정 따라 하게 시켜야 하는 법.
[권능 창 띄우고 위에서 17번째에 있는 거. 범위 지정 방식은 드래그 앤 드롭. 그…… 스마트폰 써본 적 있지? 그리고 좌표는 볼 수 있겠어?]
[그건 압니다. 바깥에선 군인이었습니다. 포병이었죠.]
[전문가였군. 믿겠어.]
전쟁의 신이 오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느라 바쁜 도중에, 신참 마법의 신인 레베카는 다른 이유로 날 귀찮게 만든다.
[저기 저기, 이거 좌표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읽어?]
[이런 젠장. 아케인에 문의해.]
[쉽지가 않네…….]
혼돈의 신도는 참으로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참이다.
다른 신들도 혼란해하는 모양이지만 군인은 어디에나 있고 설명해 줄 신도도 몇 명은 있다.
각 신의 신도중에서 특출하게 발이 빠른 이들이 유도기 역할을 할 것이다.
아케인이 이미 만들어 둔 거점 지역의 공간이동 마법진들이 일제히 불이 켜진다.
대마탑 내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엄선된 신도들이 이동한 후 좌표 지점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대부분은 성직자들 중 뽑혔다.
신도가 위치에 도달하여 멀리서 요정 부대를 관측하고 나면 신이 버튼만 누르면 된다.
직접적인 공격 권능을 가진 온갖 신들의 신성한 신벌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