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359화 (359/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59화

왕국 - 웨이브 [2-1](1)

앞으로 왕국이 굴러갈 틀은 모두 잡혔다.

소문을 들을 게 많은 고레벨 유배자들은 루시와 기존 하이랭커 파티들을 통해 틀어쥔다.

힘들게 사는 NPC들은 신앙과 각 교단의 힘으로 틀어쥔다.

난리통에도 제 생업을 유지하는 자들은 많기에 기자들이 찍은 사진들은 불티나게 돌아다녔다.

먹고살 만한 중간층의 유배자들은 이제 위와 아래의 여론에 흔들리다가 넘어올 것이다.

지금부터는 온전히 전투만 신경 쓰면 된다.

왕국 내에서 날 귀찮게 할 일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잘 처리될까? 우려를 하고 있던 일들이 모두 깔끔하게 풀렸다. 교단도 동료들도 하나같이 유능하다.

나는 비로소 완전히 세상을 관조하는 전지전능한 신의 기분으로 돌아왔다.

나는 RTS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미궁에 집중하느라 대단한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내정까지 디테일하게 구현되어 있는 게임은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왕국을 정리하는 일은 매번 끔찍하게 피곤한 일이었다.

대신 해줄 누군가가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많이도 했다.

그러나 그땐 배신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배신당했다.

이젠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레미가 그럴 것 같지도 않아 보이며 헨리가 그걸 좌시할 리도 없다.

루시는 때때로 본심을 내비치곤 하는데, 어디까지나 자신이 세운 것이나 다름없는 이 왕국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이다.

희우는 당연히 내가 가고자 하면 어디까지나 따라오겠지.

에길과 아서에게도 이런 일 자체가 일종의 대모험으로 여겨지는 느낌이다.

둘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은 모두 모험의 주인공이었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블랑쉐와 제니는 확실한 동기부여를 통해 묶여 있다.

모두가 그들 나름대로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나도 그럴 수 있다.

게임이니 뭐니 하는 생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나니 한 바퀴 돌아서 게임 하는 기분이 된다.

부담은 없다. 나만 잘하면 된다.

이미 왕국의 모든 것이 내 손아귀에 있으니 말이다.

천천히 용의 소재를 통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장비를 배분한다.

이미 소모되어 새로운 물품이 필요하던 유배자들이 환호했다.

생김새는 투박하고 볼품없지만 1만 년 묵은 드래곤의 소재는 그냥 모양만 그럴싸해도 압도적인 재질이 된다.

카베도 합류하여 무언가 뚱땅거리기 시작했다.

마법사와 전사, 그리고 사수들을 전선에 배분한다.

이미 체험한 전투와, 팽배한 분위기를 통해 클래스 간의 반목을 들이미는 이는 없었다.

시대는 영웅을 필요로 했고 내가 만든 영웅들은 각지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런 이름 아래에 사람들은 점점 결집되고 있다.

불편한 점은 뭐든지 레미가 이미 긁어줄 수 있게 준비를 끝마쳐 두었다.

하지만 겨우 첫 번째 전투였을 뿐이다.

이제부터는 모두가 서서히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사기를 유지하는 것이 레미와 루시, 그리고 전장에서 빛날 다른 우리 파티원들의 역할이다.

다시 밤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다음 날 밤도 찾아왔다.

나와 동료들이 한 최선의 노력 끝에도 조금씩 전쟁과 생존이라는 실감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한다.

* * *

전쟁이란 결국 누구도 승리하지 못하는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적들이 한 치의 인간성도 없이 미궁에 의해 빚어진 몬스터라는 차이가 있다.

대체로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다.

[메인 던전]은 테마에 따라 내부에 아군과 적군이 공존하며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어떻게든 목표를 성취해 내는 식이 된다.

목표는 룬이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무언가이며, 미궁을 클리어하려면 필요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여기까지만이라면 어떻게 해도 상관이 없을 수 있다.

지금까지 해온 것도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메인 던전]의 룬은 대체로 교섭 같은 것으로 얻어 내는 게 아니다.

일반적인 서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인외의 마경 속에서 끝없이 싸우고 사실상 그 테마의 모든 것을 절멸시킨 후에나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심지어 환경도 [지옥]이나 [외계] 이상으로 더럽다.

번외는 번외다.

그것들은 일종의 프리뷰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목적도 얻을 것도 많지 않은 그저 존재하는 땅이다.

[메인 던전]은 명백하게 유배자에게 적대적이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다.

그곳의 적들은 각자 부여된 어떤 설정에 따라 유배자와 왕국을 적대한다.

방치하면 결국 침공이 들어온다는 것은 왕국을 침공해오지 못하게 막는 어떤 기믹이 마침내 붕괴했다는 뜻이다.

문득 생각하기를, 악룡은 어쩌면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항거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었을지도.

그도 아마 클리어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온갖 노력도 했다.

루시도 모르고, 드라간도 모르고, 파라켈수스도 몰랐겠지만.

처음에는 그랬을 것이며 그러기 위해 드래곤 카드를 손에 넣었다.

친분은 없지만 그 정도의 자존심 없이 내 바로 다음가는 순위를 지키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가 부딪힌 것은 절망.

이제 다음 생이 없는 상황이니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

드래곤을 먹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루시에게 말한 왕국의 지배도 언젠가의 공략을 위한 포석이었을지도 모른다.

겉으로야 어떻게 보였건 그는 게이머로서의 자존심을 위해 미궁을 클리어하고자 물밑에서 누구보다 노력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마 안 되었겠지.

단순히 스펙이 높다고, 드래곤이 되었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어느 순간 절망은 포기가 되고 그 순간부터 세월은 악룡의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차라리 악당이 되어 왕국을 짓밟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죄다 내 추측이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고작 98년을 향해 다가가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1만 년씩이나 되는 거대한 세월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다.

지난 98년은 너무 끔찍했다.

앞으로 9902년은 얼마나 끔찍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일단은 현실의 끔찍함 역시 마주해야 한다.

유배자 병력은 꾸준히 줄어들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점점 누군가가 죽는 것 자체는 어쩔 도리가 없다.

신들이 앞장서서 노력하였으나 결국 사상자는 생긴다.

피해 없는 완벽한 승리는 불가능하다.

선의로 뛰어든 자원자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내가 직접적으로 의도하여 몰아넣었으니 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런 생각도 난다.

이번 회차에서도 과거 회차에서도, 단순히 레벨링을 위해서 희생시킨 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나는 무엇을 했는가.

상상만 해도 한숨이 나왔다.

“긍정적인 면을 보라구요!”

희우가 제니의 손을 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요즘 자주 이 천사의 통신기로서 기능하고 있는 제니의 표정이 떨떠름해지고 있지만 희우는 개의치 않는다.

“경험치가 산더미예요. 그 덕에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구요.”

맞는 말이다.

죽은 이는 죽지만 남은 이는 막대한 경험치와 파밍을 홈그라운드에서 누리고 있다.

본래 모 MOBA 게임도 3라인 전부 슈퍼 미니언이 몰려오고 있고, 그걸 버틸 수만 있다면 경험치 3배 이벤트인 법이다.

안주할 수가 없게 된 모든 이들이 강제로 도전자가 되었다.

투쟁하고, 싸우고, 이겨내고, 그 끝에 더 강해진다.

「그래. 그래서 요즘 부하 천사들 마인드맵 봐준다는 건 잘되고 있니?」

희우에게는 꾸준히 미궁의 법칙 그 자체인 것들을 가르쳐 왔다.

모르면 물어보고 알면 아는 대로 제 부하가 된 천사 정찰대를 상대로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

에리나는 시큰둥하지만 동시에 그 컨설팅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요! 악룡이 토해놓은 유니크 스킬들이 너무 많았어요. 이것만 제대로 풀려도 침공을 잘 막아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예요.”

「그렇게 쉽진 않아. 일단 아래쪽이 잘 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긴 해야지.」

역대급으로 선전 중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니터 너머로 왕국을 누비던 시절에도 빠르게 휘어잡은 후에 철저한 준비를 해야 마지막 웨이브까지 온전히 막아낼 수 있었다.

사실 마지막까지 지금처럼 손실 없이 방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 일단 네 거 좀 볼까?”

“후후후.”

제니의 눈으로 희우의 마인드맵을 열람한다.

본인의 동의가 있다면 신좌의 기능을 통해 칭호와 레벨 따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제단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면 더 깊은 곳도 볼 수 있다.

무슨 스킬을 가졌는지 같은 것 말이다.

일단 레벨이 눈에 확 들어온다. 드디어 2천 중반대를 넘어가고 있다.

여기서 3천 정도까지 강제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리고 마인드맵을 살펴보면 깔끔하다. 굳이 리셋 돌릴 필요도 없고 만족스럽다.

사실 유니크 스킬을 복잡하게 세팅할 게 아니라면 이게 맞긴 하다.

「좋아, 배운 대로 잘했군. 그렇게 스펙을 올리는 패시브 스택 위주로 쌓으면 되는 거야.」

“심심하긴 하지만, 결국 더 중요한 건 스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해요.”

「난무하는 기술들을 단검 하나로 가르는 게 원래 제일 멋있고 강한 거지. 나중에 가면 제일 센 건 평타캐라고?」

“그나저나 마인드맵을 안 열고도 어떻게 공감각으로 진입할 수는 있게 된 것 같아요. 자유자재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점점 익숙해지고 있네요.”

「마인드맵을 순간적으로 여닫을 수 있도록 연습하라고 한 건 다 그거 때문이긴 했어.」

“2층부터 생각했던 거군요. 과연. 혹시 오빠가 튜토리얼에서 보여준 것도 다 그걸 활용한 건가요?”

「그렇지. 몸에 배는 기술은 남는 법이니까.」

희우도 블랑쉐도 부하를 거느리게 되었다. 종횡무진하고 있는 와중에 만날 짬도 잘 없다.

대신 그 위명만은 널리 떨치고 있었다.

희우는 그, 뭐랄까, 은익의 돌격 천사 뭐 그런 느낌으로 불리고 있는 모양이던데.

천사 정찰대는 인원이 확충되면서 기동대로서도 활용되고 있는 탓이다.

불리한 전장을 구원하러 날아오는 천사 부대라고 하면 벌써 로망이 넘치는군.

블랑쉐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원래 [더 시티즌]이었던 이들을 장악했다.

그들은 전장 이외의 곳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아서는 대체로 신들과의 친분을 다지는 방향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그는 전사계 신들에게 내게 배운 것을 틈틈이 가르치며 본인의 숙련도 역시 높여가고 있다.

에길도 거기에 동참하여 도끼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다만 에길의 역할은 아서처럼 균형 잡힌 방향이 아니기에 조금 있다가 이야기해 볼 생각이다.

바쁜 희우가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이젠 날개를 다루는 것도 완전히 익숙해져서 걷는 대신 저공비행을 하며 바람처럼 사라진다.

제니만 남았다.

“기도할까요?”

「그래 보도록 해.」

제니의 마인드맵이 열린다. 중구난방에 아주 혼란하여 비효율투성이던 과거의 마인드맵은 많이 완화되었다.

혼돈의 권능은 육성 과정에서는 아주 효율적으로 기능한다. 깔끔하게 갈아엎기 위해 귀중한 신앙을 제법 많이 투자했다.

「이제 유니크 스킬 세팅을 만질 건데 말이야.」

“유니크……!”

처음부터 빠르게 필살기를 손에 넣으면 아무래도 더 강해지기 힘들다.

그걸 갈기면 되는데, 쿨다운만 벌면 되는데.

생각이 그렇게 흐를 수밖에 없다.

제니가 고생하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사실 제니는 천재가 아니다.

그러니 빛나는 센스와 숙련도로 적들을 상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와 우리 파티원들의 기준이다.

배움을 포기하지 않은 이는 누구나 강해진다. 에길과 아서의 도움을 받아 이 고양이 쌍검사는 빠르게 경험을 쌓았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이제는 스펙으로 한두 수 위인 상대에게 대응할 수 있다.

그 정도 기본기가 확보되었다면, 드디어 필살기를 잔뜩 구겨 넣을 차례다.

나는 생각보다 그런 세팅에 부정적이지 않다.

스킬난무는 나쁜 게 아니다.

다만, 그것만 할 줄 아는 게 나쁜 거다.

“그런데, 리더.”

파티원들에게는 일일이 신이시여 같은 호칭을 사용하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저는 그 공감각 같은 거 안 배워도 되나요? 할 줄 몰라도 되나요?”

통신기로 활용되는 중이니 그리 생각할 만도 하지.

「솔직히 말할게. 제니가 그걸 하려면 100년은 걸려.」

“윽…….”

「하지만 그건 필요에 따른 적재적소의 문제지 그런 식의 기본기 위주 운영이 마냥 우월하기만 한 건 아니지.」

“그런가요……?”

지속력의 문제일 뿐이다.

사실 그것도 에리나가 가진 [무명신풍류]처럼 자잘한 유니크 액티브 다수를 운용하는 형태의 유니크만 도배한다면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제니는 현자타임을 가지는 스킬 포대로서 기능하게 만들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제니가 조금 우려를 표했다.

“포대라면……. 더 좋은 게 많을 것 같은데.”

파티원들의 화력을 떠올리며 하는 말이겠지.

진짜로 전함을 넣고 다니는 바보 암살자에, 하늘에서 내리꽂기만 해도 지진이 일어나는 바보 천사에, 기 모아서 내리찍으면 드래곤 마빡도 반으로 쪼개질 것 같은 도끼맨, 엑스칼리버 그 자체인 노기사.

「우리 파티에서 배우며 너무 유니크 스킬을 무시하게 되었구나. 제니.」

제니는 어쨌든 불안해하면서도 내 지시를 따랐다.

제니의 레벨도 어느덧 2천을 넘어섰다.

본인은 그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지 때때로 고장 나고 미아가 그 뒤를 쫓아다니곤 한다.

이 정도면 스펙과 필살기를 동시에 챙기기에 무리가 없는 포인트다.

아마 제니가 직접 그런 세팅을 하려고 한다면 5000레벨도 부족하겠지만, 그 효율을 잡아낼 수 있으니 고인물인 법.

내가 시키는 대로 하나하나 스킬을 찍어가다가 제니가 움찔했다.

[무오의 광휘]

“지울까요?”

「그거 띄우려고 했던 거 맞아.」

“진짜요? 제가?”

「다른 파티원들은 그거 필요 없으니까.」

조금 더 포인트를 투자하다가 제니가 다시 얼어붙었다.

[허수차원 붕괴]

“이거 맞아요?”

「맞아.」

스펙은 최소한으로 챙긴다. 어차피 미아가 무언가 할 시간을 벌어주는 정도면 충분하니까.

제니는 제단에만 있지 못하고 사방을 뛰어다니며 여러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했다.

에길에게 도끼를 빌려오기도 하고, 미아에게 마법을 두들겨 맞기도 했다.

부활 스택도 신경 써서 채웠다.

알뜰하게 모든 포인트를 소모한 후에 제니는 어지러워했다.

“이이이이 이건 마치…….”

「개쩔지?」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걸까요.”

제니는 대충 고양이 모양 드래곤 비슷한 게 되었다.

그리고 제니 역시 왕국에서 우리 파티의 얼굴로서 기능해 주어야 한다.

이번 전투에선 미아와 따로 내보낼 것이다.

영웅 유닛으로 승급한 고양이귀 쌍검사가 그 말을 듣고 울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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