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61화
왕국 - 웨이브 [2-1](3)
제니는 제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민트색 고양이 털 같은 것이 폴폴 흩날린다.
잎사귀 요정은 대체로 동물의 특징을 강하게 가지는데, 고양이가 당첨된 제니는 아무래도 털이 날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색이 민트인 건 어째서일까? 미아가 피에서 민트초코 맛이 난다고 했던 것과 연관이 있을까?
“으우웨엑.”
옆의 아젤리아가 마력 탈진이 오기 직전에 정령왕을 역소환 했다.
제니는 일단은 미아가 없는 지금 전장에 나선 정령사의 호위로서 이 자리에 있다.
투입되는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다.
“저기, 저기. 나 좀 잡아줘.”
“아, 네.”
미아 덕에 익숙하다. 다만 미아의 자그맣고 귀여운 몸집과 달리 아젤리아는 훤칠한 요정이다.
같은 잎사귀 요정.
고위 종족은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구할 수 없다.
그러니 대부분 주력 종족, 쉽게 구할 수 있는 카드의 종족을 정하고 살아간다.
정령사라면 역시 동물 귀와 떨어질 수 없는 클래스다.
아젤리아의 강아지 귀가 축 처졌다.
제니는 부축하여 앉혔다. 한동안 이 정령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전으로 회복할 틈도 없이 매번 혹사당하는 중이다.
그래도 마법으로 퍼 올리는 것보다야 훨씬 효율적이니까 괜찮다.
본인이 그렇게 말했다. 마지막까지 효율을 쥐어 짜내야 한다고.
처음의 낙관적인 분위기는 점점 가라앉고 있다.
이 전쟁은 어렵다. 이기지 못할 확률이 여전히 높다.
영웅들의 독려도 잠자고 다시 일어나면 사그라드는 법이다.
주변에 죽은 이들, 사라진 동료, 뜯어 먹히는 충격적인 비주얼 등.
제아무리 익숙해지고 또 익숙해져도 한계가 있다.
그리고 그런 아래의 분위기는 소위 영웅이라 불리는, 리더가 영웅 유닛이라 부르는 이들에게도 전염되고 있었다.
카베가 굳건하니 괜찮을 뿐이다.
조금씩 더 많은 적들이 새어 나간다.
감당하지 못하고 흘리는 적들이 늘어난다.
첫 번째 웨이브의 세 번 만에 그것이 느껴졌다.
그냥 붙어 이길 상대가 아닌 것을 최선의 효율과 효용을 추구하여 간신히 이겨내고 있을 뿐이다.
제니는 영웅이 아니라 아래쪽의 사람으로서 그 사실을 절절히 공감했다.
리더를 통해 듣는 것이 있으니 더욱 그렇다.
잔인하게도 제니에게 어떤 상황인지 어떻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지를 낱낱이 공유하고 있다.
제니는 정말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마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제니의 스킬셋을 만진 후에 리더가 마지막으로 속삭인 말.
「원래 디펜스는 영웅으로 하는 게 아냐. 죽어나가는 무수한 일반 병사들이 있고 그 위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영웅이 될 뿐인 거지.」
제니는 얼어붙은 채 그 이야기를 들었다.
어조가 너무나도 침울했다.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건 조금, 그때의 그 학살과도 같은 때의 이야기다.
누군가를 희생으로 몰아넣어야만 하는 상황일 때의 목소리.
하지만 그럼에도 그때보다는 나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전이 말 그대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학살이었다면, 이번엔 누군가들을 죽음으로 내몰 준비를, 그것도 자발적으로 그런 걸 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제니 너도 알 거야. 어중간한 유배자들이 얼마나 몸을 사리는지 말이야.」
잘 안다.
제니와 로건이 누구보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난 너를 미끼로 써야 해.」
제니는 그 순간 더 이상 듣지 않겠다고 했다.
리더를 신뢰한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적도 없다.
사심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제니는 파티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리더는 제니가 필요했다.
그거면 된 것이다.
에길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다시 입술을 깨문다.
트동트가 최근에 했던 말을 떠올리며 주먹을 쥔다.
그때 주저앉아 있던 아젤리아가 비틀비틀 일어서서 망루 바깥을 본다. 현재의 위치는 전선 한복판이 아니다.
그보다 좀 더 뒤에 떨어진 망루였다.
마법사나 정령사를 위한 망루다. 아젤리아는 자신이 만든 전장, 필요에 의해 조성된 환경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봐, 고양이.”
“예?”
“난 사실 지금 혼돈의 신이 된 그 사람이랑 별 접점이 없단 말이야.”
강아지 귀의 요정이 고양이 귀의 요정을 보며 으르렁대듯이 말했다.
그러나 침울하게.
“하도 다들 대단하다고 그러고, 카베 영감도 믿는 거 같고 그러니까 입 다물고 있는 거지, 수상쩍기 짝이 없어.”
“아……. 네.”
그렇겠지. 전부 레미와 리더가 뒤에서 뭔가 해서 만들어낸 허상이다.
신뢰도 그 신뢰를 뒷받침할 무언가도 급조된 것뿐이다.
제니의 신상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는 사람들은 안다.
이전의 제니를 아는 이들이 지금 제니가 있는 곳을 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서 눈을 비빌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는 전사인가 하며.
“그래도 말이야. 난 상관없어. 그냥 제대로 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제대로요?”
“응, 난 처음엔 그냥 살려고 여기 왔거든. 정령왕은 쓸모가 많으니까.”
정령왕과의 계약은 사실 어느 정도 운이라고 할 만한 일이다. 아젤리아의 인생은 활짝 피는 대신 알지 못하던 외력에 의해 구깃구깃 구겨졌다.
“그런데 너희 파티가 날 쫓던 놈들을 다 치워줬어. 그러니까 대단한 게 맞겠지. 그 혼돈의 신이란 사람도, 그리고 여기 보내진 너도.”
강아지 귀 요정이 축 처진 귀를 조금 세웠다. 제니는 어쩐지 아젤리아의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아젤리아가 다시 망루 밖을 본다.
두 번째 웨이브다. 첫 번째와는 비할 바 없이 고레벨이며 많은 물량들이 밀려들고 있다.
이것을 다시 세 번 더 막아내야 한다.
처음처럼 보스급 개체들만 슥삭슥삭 정리할 수도 없다.
너무 많으니까.
지난 세 번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그런 하이브 마인드의 분노가 여기까지 전해져 오는 듯하다.
“살려고 여기 왔었는데, 이젠 다 같이 살아남고 싶어졌어. 그런데 내 힘으론 그게 안 되네. 오르트와 함께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미궁은 역시 쓰레기 같은 곳이야.”
강아지 요정이 고양이 요정의 손을 잡았다.
“이길 수 있겠지? 뭔가 있겠지? 운이 좋아서 정령왕과 계약할 수 있었던 내가 못하는 무언가가 있겠지?”
아젤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니는 문득 깨달았다. 이 사람도 자신과 비슷하다.
아마 이전에는 대단히 능력 있는 정령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번이 처음이다. 랭커니 하이랭커니 하는 것 모두 말이다.
“그러니까 넌 대단한 유배자가 맞지? 뭔가 보여줘. 제발……. 다들 죽어가고 있어.”
제니는 비로소 다른 파티원들이 하고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이제 자신에게도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 온전히 깨달았다.
파티 오르골은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
제니조차도.
“그럴게요.”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제니는 그냥 영웅 유닛이 아니다.
영웅이다.
그렇게 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것이다.
* * *
때가 왔다.
꽤 많은 희생이 있었다.
적의 자잘한 병력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 신들을 위시한 하이랭커 이상의 전사들이 적들의 기함, 보스급 개체이자 하이브 마인드의 신호를 수신하는 거대 비행괴수들의 위치를 조절했다.
목숨을 걸고 적진을 헤집은 결과다.
권능으로 인한 강화와 아직도 거체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악룡의 피 도핑 덕에 가능했다.
이쯤 오면 회복 수단은 어차피 중요하지 않다.
미궁의 포션이 이다지도 고성능인 것은 어차피 가면 갈수록 한 방에 훅 가기 때문이다.
포션보다도 부활 스택.
부활 스택보다도 당장의 스펙이다.
할 수 있는 모든 도핑을 온몸에 감은 결사대가 돌아왔다.
강림한 신들 중의 사상자는 없지만, 하이 랭커 몇몇의 얼굴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더 먼저 보이지 않게 된 이들도 있다.
그리고 난 그들을 숫자로만 세고 있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낫다.
레벨링을 위해 외면하고 몰아넣었던 그 목숨들을 생각하면 속이 먹먹해진다.
이 세상은 현실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가오는 압박이다.
외면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저질렀다.
어떤 식으로도 나는 죽어서 천국에 가진 못하겠지.
그리고 숫자를 더 끌어와 전장에 집어넣기 위해 제니를 영웅으로 만들 준비가 끝났다.
적의 모든 기함들이, 적의 가장 강력한 병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잠깐이지만 틀림없이 그랬다.
이 짧은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 아젤리아와 이플릭셔스가 적의 위치를 제한했다.
그리고 병력들이 전선을 유지했고, 유인하기 위해 신과 하이랭커들이 헤집고 다녔다.
큰 거 한 방을 위해서다.
「지금이야. 제니. 그냥 스킬을 사용하는 거야. 어차피 쓰는 법 자체는 습득하며 알게 되었을 거니까. 어려운 일이 아니야.」
‘리더는 어려운 일을 너무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도 딱 아슬아슬하게 할 수 있을 정도긴 하잖아?」
‘그래서 더 짜증 나요.’
목소리에 그늘이 없다. 무슨 일이지?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거짓말이긴 했다.
제니는 그대로 망루에서 뛰어내렸다.
마법사들이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저 먼 곳, 적의 기함이 모인 곳에서 이탈하기 직전 결투의 신이 마석을 폭파시켰다.
순간적으로 마력의 공백 속에 찬연한 마나의 기운이 피어오른다.
정교하게 설계된 마법진이 한순간 피어올랐다.
마력을 집어삼키는 것들의 속에서 이 정도의 마력을 솟구치게 한들 찰나에 불과하다.
다시 금방 무력화될 것이다.
제니는 마법진 속에서 쌍검을 쥐고 있다.
어쩐지 표정이 밝아 보였다.
귀도 꼬리도 긍정적이고 당당한 형태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본래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지.
동료가 힘을 내준다면 기뻐할 일이다.
도핑이 적용된다.
용혈 포션을 삼키고, 신의 가호가 깃든다. 이 전장을 지켜보는 온갖 전사계의 축복이 제니를 향해 쏟아졌다.
그리고 제니는 빛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결투의 신이 던져둔 소모성 마법진으로 전송되었다.
결사대는 전력으로 도망치고 있다.
제니는 무수한 괴물들, 하나하나가 1만 레벨에 근접한 함대와 마주했다.
그리고 일어났다.
* * *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이 괴물들의 물리적 방어력을 흡수하는 것이다.
[끝의 대지]가 있다면 [시작의 바다]도 있다.
유니크 액티브 [바다의 대리자]
파도가 넘실거리는 듯한 이펙트가 주변에 번졌다.
[끝의 대지]가 [대지의 대리자]로 주변의 원소를 빨아들이고 자신을 강화한다면, [시작의 바다]의 대상은 생명체 그 자체다.
살아 있는 대상의 생명력이라 함은 스탯이다.
제니는 자신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규모의 힘이 차오름을 느꼈다.
개체마다 상한선도 있고 본인 레벨에 따라 한계도 있겠지만, 이렇게 예쁘게 괴물들을 모아둔 상황이라면 확실한 성능을 보여준다.
제니는 순간적인 전능감에 놀랐지만, 놀라지 않기 위해 이를 깨문 채,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을 했다.
유니크 스킬 [허수차원 붕괴]
주변의 공간이 무너지고 일그러진다.
미처 괴물들이 대응하기도 전에 온 사방이 파괴되어 가라앉는다.
당연히 순순히 가라앉지는 않는다.
거체는 쉽게 균열에 삼켜지지 않았다.
제니는 정해진 수순을 따랐다.
유니크 스킬 [허무의 파편]
유니크 액티브 [파편의 무기]
버프형 액티브다.
속성이 없는 거대한 에너지를 무기에 두르게 해준다.
그 허무함 속에는 다른 스킬을 채울 수 있다.
말하자면, 뭐든지 인챈트로 만들 수 있는 효과다.
그 자체로는 리치가 상승하는 이상의 효능이 없으나, 조합하기에 따라 성능이 결정된다.
제니에게는 미궁 최강의 공격기가 존재했다.
유니크 스킬 [무오의 광휘]
유니크 액티브 [창세의 빛줄기]
상승한 스펙의 모든 힘을 그 속에 때려 넣는다.
모든 방어와 보호 수단을 무시하는 눈부신 빛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길게 늘어난 검신에 깃들었다.
제니는 침착하게 아서와 에길, 그리고 블랑쉐와 리더, 서브 리더에게 배운 동작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 세팅을 마쳤을 때, 마지막으로 들은 말도.
「순간적인 화력으로는 제니 네가 에길과 희우 다음이 될 거야. 우리 파티의 딜러인 셈이지.」
그 뒤에 지속성의 지 자도 없긴 하지만. 같은 말이 따라오긴 했다.
그것이 어디인가.
스킬은 불합리하다.
그러므로 제니는 스스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닌 불합리한 강함을, 지금 이 잠깐의 시간 동안 손에 넣었다.
“으아아아아! 다 덤벼어어어!”
제니는 최선을 다해 기함들을 붕괴한 공간의 균열 속으로 때려서 집어넣었다.
하나하나 죽일 시간은 없으나 빠져나오지 못하고 가라앉도록 막아서는 것은, 혼자서도 가능했다.
먼 곳의 아젤리아가 입을 쩍 벌리고 그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보기에는 공간이 갈라지고, 그 틈으로 세상을 찢어발기는 빛들이 날뛰는 것 같았다.
포식자들이 마나를 집어삼켜 무채색의 칙칙함만이 깃든 곳에 새로운 색채가 깃든다.
소용돌이치는 그것은 마력도 신성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미궁이라는 시스템이 부여한 횡포에 가까운 위력, 그 자체였다.
그 막대하고도 파괴적인 공격은 신들의 권능 이상으로 넓은 범위를 뒤덮는다.
한순간에 전선에 공백이 생겼다.
기함을 구원해야 한다는 본능을 가진 괴물들이 자연스럽게 주춤한 탓이다.
신들의 권능이 함께 작렬하기 시작했다.
전선이 점차 물러난다.
싸우던 이들이 요새를 향해 후퇴한다.
신과 하이랭커들로 이루어진 이들이 합류하여 후방을 막아서고 있다.
요새로 끌어들인다.
처음부터 생매장을 위해 만든 곳이다.
유인은 쉬웠다.
거대한 생체 함선들이 갈라진 균열에서 빠져나오려는 것이 보인다.
눈부신 섬광의 빛들이 그 기함들을 두들겨 밀어 넣고 있다.
하나둘, 균열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한다.
점점 포식자 군세의 움직임이 지리멸렬해지고 있다.
하나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이다.
통제 불능의 괴물들은 제멋대로 날뛰며 도망치는 적을 따라 함정으로 빨려들어 오고 있다.
아젤리아는 제니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혼돈의 신에게도 감사했다.
이번 전투도 아직은 이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