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62화
왕국 - 웨이브 [2-2]
첫 웨이브의 3파는 처음 같은 희망을 고스란히 남겨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점점 파멸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웨이브는 더 크게 들이닥쳤고 더 강한 전력으로 왕국을 유린했다.
완전히 막아낼 준비는 처음부터 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만을 끊임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정도는 예상의 범주 내였다.
끊임없이 이벤트를 일으켜야 한다.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용맹하게 맞서 싸울 생각이 들게 할 이벤트를.
어느 임계점이 넘어간다면 왕국의 멸망은 한순간에 일어난다.
차라리 나 혼자 어디 몸을 숨기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같은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누군가 그 생각을 하고, 그것을 실천하고, 그 모습이 다른 이들의 눈에 띄기 시작한다면 끝이다.
그대로 끝장이다.
다만, 내가 준비하지 못했음에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악룡의 유산이 많은 일을 해결해 주고 있다.
그는 침공에서 제 한 몸 살아남을 자신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인원은 함께 생존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이 리셋된 가운데 신들의 주목을 받으며 곤란에 처했을 테니까.
그렇게 시작의 세 파티가 만들어지고 악룡은 그 뒤에 숨었다.
[아케인], [하드스록], [더 시티즌]은 제 나름대로 살길은 마련해 두고 있었다.
대놓고 모두를 위했던 전사의 나라, 명목상은 모두를 위했던 마법사의 나라.
그 둘과 다르게 민첩 클래스들은 과연 민첩하고 교활한 방식으로 대비를 했다.
「몇 개나 있는 거야?」
“나도 모른다. 분명히 이거보다는 많다. 두 배 정도는 많겠지. 최측근에게도 숨기고 끊임없이 빠져나갈 굴을 만드는 게 그 남자다.”
블랑쉐는 대활약한 통신기이자 고양이 핵가방의 손을 붙잡고 말하고 있다.
심연의 권속이 되어 실시간 연락이 불편해진 점이 조금 아쉽다.
「이 정도면 정말로 살아남을 수 있었겠군. 편집증적인 안전 추구야.」
“외계 쪽에도 본래 이것저것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날아갔겠지.”
「그럼 이건 나눠서 써먹어야지. 알파와 베타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
“감사…….”
블랑쉐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그리고 한마디 더했다.
“내 새로운 부하들은 아직 ‘감사’라는 개념을 잘 모를 것 같군.”
「우리 블랑쉐 많이 컸다. 애기들 보고 그런 소리도 할 줄 아네.」
“나는 끝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날 죽이지 못하는 시련을 더 강하게 만들 뿐이지. 육체적으로건 감정적으로건 말이다.”
멋있는 말을 했다는 그 표정을 보며 오랜만에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표정에서 드러나는 그늘을 보면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생이 심한 모양이었다.
“알파와 베타, 그리고 나머지 모두들은 감정적으로 거세된 기계와도 같다. 이 멍청이들에게 뭐부터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
깊은 한숨과 함께 나온 말이었다.
과거의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기분이란 건 그럴 수밖에 없지.
지금의 태도로 보아, 사춘기가 지나면 더 부끄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도 같지만 그건 그때의 일.
투덜투덜하는 블랑쉐의 푸념을 들어주며 다른 일도 같이 한다.
내가 지정해 둔 영웅 유닛들의 단축 인터페이스들을 사방에 띄우고 살핀다.
킬 수를 보며 피로도를 어림짐작해 보고 전선을 얼마나 물리며 시간을 벌지도 생각해 본다.
마지막 웨이브는 정면상대하지 않는다. 거기서는 최소한의 실리만을 챙긴 후 빠져나갈 것이다.
경험치 3배 이벤트도 두 번째 웨이브까지다.
그 뒤는 평범하게 [메인 던전]의 테마 보스급이 등장하기 시작할 것이다.
북유럽 신화 계통인 [신들의 황혼]으로 따지자면 그때야말로 수르트가 출현한다.
그리고 수르트는 그 테마 내에서도 그리 강한 존재는 아니다.
여러 가지 환경이 맞아 떨어졌을 때, 난공불락의 괴물이 되어 유배자를 맞이하는 일종의 기믹 같은 것이다.
그래서 아마 그때의 암살자가 보았던 게 수르트였던 거겠지. 그의 수준으로 목격 후에 살아남을 수 있는 한계는 그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요행으로 그가 본 것이 펜리르나 가름, 혹은 최초의 거인 이미르였다면…….
뭐, 사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몽환의 숲이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것대로 어찌 빠져나갈 수는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사실 [신들의 황혼]은 [메인 던전]을 구성하는 테마들 중에서 어떻냐고 한다면 제법 쉬운 축이다.
아스가르드의 우호적인 신격들이 존재하는 시점에서 진행의 자유도가 생긴다.
잠깐 생각에 잠긴 동안 블랑쉐가 푸념을 끝냈다.
그리고 제니 전화기와 대화하고 있었다.
“지지 않겠다. 제니.”
“후후. 노력하시죠. 블랑쉐.”
블랑쉐의 강렬한 눈빛에 제니가 또 움츠러들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대범하게 받아친다.
블랑쉐는 또 그 모습을 보고 엄지를 날리더니 가버렸다.
라이벌 성립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새로운 고양이 전화기 사용자가 나타났다.
“제니! 뭐예요! 최고잖아! 어제 완전 멋있었어요! 아케인에 졸라서 영상 받아봤잖아!”
희우가 포로롱 날아와 제니의 두 손을 잡더니 마구 회전했다.
이거 그 천사 허리케인인가 하는 그건가?
음주가무를 거친 것 같은 괴이한 퍼포먼스가 끝나고 고양이 전화기가 켁켁대며 쓰려졌다. 희우가 폴짝폴짝 뛰며 제니와 하이파이브 했다.
“어지러워요!”
“그렇지만! 제니 이제 진짜 우리 파티원이네요?”
“지금까지 아니었어요?”
“제니가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이건 뭐. 희우는 그런 걸 잘 아는 아이다.
서브리더를 하고 있는 건 그래서지.
나는 항상 능력으로 자리를 배분한다. 친하다는 이유로 중용하지는 않는다.
“……알고 있었어요?”
“제니의 작은 마법사도 알걸요.”
“윽…….”
제니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무 전조도 없이 그냥 그랬다.
희우가 싹싹하게 닦아주면서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파티의 필살기가 생겼네.”
“흐으앙. ……고양이 전술핵으로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쿠훌쩍.”
“어라? 제니, 이제 고양이인 건 인정해요?”
“귀 달리고 꼬리 달렸으면 맞지 않을까요?”
어째 대화가 기묘하긴 하다.
희우는 제니를 달래고 있지만, 그 머릿속에서 무언가 짱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제니가 자신감을 가짐으로써 다르게 할 수 있는 포지션 따위를 생각하는 거겠지.
본래는 미아의 세트 같은 것이었으나, 독립적으로 활용할 방안이 생긴 셈이다.
아마 나중에 나에게도 의논하러 올 것이다.
자신의 생각에 문제는 없는지, 혹시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이야기해 보자면서.
[침공]의 방어는 [메인 던전]에서 있을 전투에 미리 적응할 수 있는 좋은 이벤트다.
지금은 우리의 본거지로 저들이 공격해 오지만, 다음은 저들의 본거지로 우리가 공격해야 하니까.
그 사실을 이해하고 난다면 미궁의 클리어가 아직 나오지 않은 이유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잘 모르면서도 스펙으로 찍어 누르려면 루시가 부대 단위로 있어야 할 것이다. 머리가 아픈 일이고, 머리가 아파져야 정상이다.
다른 파티원들도 각자의 방식을 바쁘게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메인 던전] 진입 이후의 이야기다.
한동안 희우와 제니가 이야기할 것 같기에 다른 화면으로 눈을 돌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다음 웨이브가 시작된다.
두 번째 웨이브의 1파는 이미 쉽지 않았다. 아케인 방면의 [콜로서스]는 성벽 덕에 간신히 막아내었다.
앞서 공격해 온 거상들의 시체로 쌓은 성벽이었다.
이젠 무너졌다.
새로운 거상의 시체는 성벽이 되기엔 너무 잘게 분해되었다.
그만큼 격렬했던 탓이다.
그 결과로, 현재 아케인 방면의 바다는 허옇게 말라붙어 가며 끓어오르고 있다.
한동안 죽음의 땅이 될지도 모르겠다. 과도한 마법의 투사는 마력재해를 일으킨다.
그렇게 되기 직전의 상태다.
성직자의 나라는 루시와 드라간을 필두로 굳건하게 지켜내고 있다.
미친 요정들은 분명 강하지만, 그렇게 미쳐 있기에 생기는 허점이라면 나 역시 빠삭하다.
다만, 웨이브가 끝나도 이곳저곳 잠복해 있는 녀석들이 많으리라는 점은 어쩔 수 없다.
바보가 아니기에, 제 나름대로 숨어 기회를 노리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그걸 잘 관리해야 한다.
루시와 드라간이 활약하는 동안 다른 신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또 아니다.
자연의 신, 파라켈수스는 다음 웨이브를 대응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연락용 혼돈의 신도 하나가 붙어 있다.
「신좌 부품 수집은 잘 되어갑니까?」
“방법을 아니 그리 어렵기만 하진 않군. 대체 이런 걸 왜 알고 있나?”
「어떤 의미지요?」
“게이머는 처음이 아냐. 하지만 이런 걸 아는 이는 없었는데.”
그건 뭐, [게이머]라고 분류되어 태그를 달고 나타나는 이들이 꼭 게임을 깊이 팠으리란 법은 없어서다.
왕국에 가 본 적이 없어도 게이머다. 구매해서 플레이를 해보았다면 말이다.
「어설프게 아는 게 더 가혹할 수도 있죠.」
“그런가. 자네는 게이머로서도 최고였다고 했지.”
「그럼요.」
“쉽지 않겠군.”
「어떤 것이?」
“그런 자네도 실패하던 것이 미궁의 클리어 아닌가.”
「이번엔 될 겁니다.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군. 우선 하던 일을 마저 해야겠지.”
화면 속의 파라켈수스가 사방으로 마법을 흩뿌린다. 달려들던 용인들이 갈가리 찢기고 있다.
신좌 부품은 각 서버에도 곳곳에 흩어져 있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그 어떤 대륙의 주민들도 도달하지 못하는 그런 비경은 얼마건 있다.
숨겨진 것이 정말 많은 세상이다.
이건 일종의 스노우볼링이다.
눈덩이를 만들면 굴려서 점점 키워 나가야 한다.
전력도 그렇다. 오래된 왕국에는 이미 즉시 전력감인 유배자들이 참 많다.
그러므로 나는 마침내 오랜 기간 침묵하고 있는 친구 하나에게 연락을 넣었다.
기다리는 동안 희우가 제니를 온전히 전화기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오빠 성분이 부족해!”
「계속 신좌에 있을 건 아니니까, 곧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잠자리가 시려요. 옆구리에 아무것도 없어!”
「코까지 골며 디비 자는 걸 내가 본 것 같은데.」
“헉! 어떻게 알았지?”
「우리 딸이 보고 있었다.」
대충 정기적인 농담 따먹기 같은 거다.
희우는 대체로 모두의 활력소로 기능하지만, 희우는 나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것, 그게 아마 모두가 말하던 것이겠지.
「잠 한숨 안 자고 활동한 지 또 이틀이 지났네. 좀 자는 거 어때?」
“아직은 괜찮은 것 같아요. 사실 천사한테는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꼭 필요해. 인간의 정신은 그렇게 튼튼하게 되어 있지 않다고. 날 때부터 천사가 아니잖아.」
“그럼 튜토리얼에서도 쉬라는 제 말 좀 들어주지 그랬어요?”
아, 할 말이 없군.
그래도 심각한 피로가 아니라면 괜찮다.
어차피 다들 무리하고 있다.
지금 무리하고 있지 않은 이는 하나도 없다.
도리어 우리 파티원들은 이런 일에 익숙한 편이라 놀라울 정도로 피로가 적은 편이다.
제니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야, 이 파티가 하는 일은 한 번도 이따위가 아니었던 적이 없으니까…….”
“맞아요. 제니. 자랑스러워하도록 하세요. 파티 오르골의 발걸음은, 나아가 우리 [천사의 눈물] 길드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위대한 신화로서 새겨지는 거예요!”
「방금 좀 블랑쉐 같았어.」
“이럴 수가! 하지만 언니도 좋아하니까!”
꽤나 자주 신기한 일이긴 한데.
희우는 어떻게 이렇게 그늘이 없을까? 사람이 이럴 수가 있나 같은 생각이 든다.
어쩌면 평소의 태도 자체가 무리인 건 아닐까?
그러면서 제니의 시선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희우가 눈치채고 방긋방긋 웃는다.
“앗, 쳐다보고 있죠? 예뻐서 그래요?”
「그건 맞지.」
봐도 모르겠다.
제니가 투덜거렸다.
“커플 다 죽었으면.”
“어쭈, 제니 많이 컸어요.”
“어, 잠시만. 방금 전이랑 말이 다르지 않아요?”
“그건 오빠와 저 사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경우죠!”
뭐 저런 이야기를 하는 와중 메시지가 하나 날아들었다.
[규율과 금전의 신]
떠오른 신명은 악룡이 패한 이후 쥐 죽은 듯이 조용하던 녀석이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원래 같으면 반드시 사족을 붙일 인물이다.
그것이 현재로썬 최대의 이윤 추구니 어쩌니 하면서 설명을 하며 여유롭겠지.
단순명료한 대답이 이미 이 신이 몰린 궁지를 나타낸다.
[교단의 활동을 중단시키고 다른 신들을 풀어주도록 하겠습니다.]
혼돈의 교단이 아무리 커졌다고 한들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던 규율의 교단을 찍어 누를 수는 없다.
그러니 어르고 달래서 항복하게 만들어야 했는데, 이 경우에는 규율과 금전의 신이기에 오히려 쉬웠다.
그저, 가장 이득을 볼 수 있는 수를 제한해 주면 된다.
손쓸 방법이 없이 죄어오지만 결국 자신이 무엇을 골라야 할지 아는 기분은 어떨까?
금전의 규율은 손해를 용납하지 않는다.
신좌에 앉은 이상 신은 불멸이다.
내가 각 서버의 기반을 박살 내고, 이미 잠식 중인 왕국에서의 기반마저 날려 버리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항복 문서에 사인을 하는 게 더 이익이다.
그렇게 만들어버리면 된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게다가 규율의 신은 알고 있을 것이다.
마음을 먹는다면 신좌로 쳐들어가서 그 불멸을 끝장낼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혼돈의 신좌에 종속되겠습니다.]
이로써, 규율이 이미 거느리고 있던 하위 신들까지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적대적 인수합병으로 흥한 자, 돌려받아 망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