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364화 (364/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64화

왕국 - 마지막 전투를 기다리며

지구와 미궁의 사회는 여러모로 큰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회차에서 왕국에 치안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문명사회의 기준을 외출 시의 목숨 걱정으로 잡는다면 그건 틀림없이 야만의 땅이다.

이곳은 조금 오래되었고 체계가 잡혀 있다.

하지만 그래도 미국 슬럼가 수준의 치안이 대부분이며, 더 안전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기도 하는 곳이다.

그렇게 살아오고, 그런 이들과 부대끼고, 심지어 때로는 정말로 목숨을 잃어 처음으로 돌아가고.

그런 역사가 쌓여가면 어떤 경향을 만든다.

미국이 처음에 열악하다고 평가받았던 땅을 개척하여 일구어내고, 그 정신이 백년이 넘도록 전해지듯이.

왕국에도 비슷한 개척 정신 같은 것이 있다.

최초의 왕국은 텅 비고 괴물들이 가득한 땅이다.

그것에 어떤 식으로건 처음 발을 들인 유배자들이 개척을 하고, 새로이 발을 들인 유배자들도 그것을 돕는다.

마인드맵도 없고, 튜토리얼도 겪은 적이 없는 서버 출신의 NPC거나.

마찬가지로 겪어본 고난이 적은 왕국에서 태어난 유배자의 후손들이라 하더라도.

그들 모두 공유하는 시대정신.

그건 어찌 보면 지구에서의 미국이 그렇게 추앙하는 프론티어와도 일맥상통한다.

살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죽는다.

결국 왕국의 주민들이란 모두 저 튜토리얼에 내던져지고도 도전을 멈추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위해 투쟁한 끝에 왕국에 도달했다.

안주하더라도 과거에는 그런 치열한 삶을 살았던 자들이다.

지쳤기에 멈춰서 있을 따름이다.

유배자는, 나아가 왕국의 주민들은 모두 발톱을 숨긴 맹수다.

그런 이들에게 거창하게 하나 된 왕국 같은 표어를 끊임없이 되새겨 주는 것도 효과적이겠으나,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상기시키는 것이다.

과거의 자신을, 혹은 자신의 조상들을.

그 험난했던 삶을, 그 꺾일 줄 몰랐던 의지를.

그리고 마침내 왕국에 도달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던 기쁨을.

남의 것이 아닌 이 왕국.

내가 사는 이 왕국.

나의 것인 이 왕국.

내 발로 도착한 바로 이 왕국을 지킬 수 있도록.

단지 그 등을 떠밀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움츠러들어있던 지친 맹수는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깨닫는다.

그리고 항거할 수 없는 적에 대한 공포는 서서히 다른 것으로 물든다.

분노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공격당한 분노.

내 가족들이 위험에 처한 분노.

내 삶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분노.

유배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미궁에 민족이 있다면, 그것은 미궁의 민족이다.

독기와 악기로 가득 차서 무슨 고난과 역경이 닥치더라도 이를 악물고 일어서는 그런 민족.

그리고 수십 년간 수백 수천 번의 죽음을 겪고도 꺾이지 않은 인간의 의지다.

* * *

나와 레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단지 분노한다고만 해서 아무렇게나 나서는 것은 어리석은 자다.

당연히 뒷일에 대한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지구에서 가장 전쟁을 많이 하는 나라인 미국은 그것을 위해 어떤 수단을 이용해 완화했는가?

죽은 자의 명예였다.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전사한 군인들.

그들을 예우하는 국가.

군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존경을 받고 자리를 양보받는다.

훈장 수훈자가 탑승한 비행기는 기내 방송으로 그 사실을 알리며 자랑스러워한다.

공항에서 내린다면 승객들과 항공사 직원들이 기립박수를 쳐준다.

헌신에 대한 명예.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명백하게 누릴 수 있는 대가.

혼돈의 교단은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하여 준비해 왔다.

다른 모든 교단의 암묵적인 인정 끝에, 혼돈의 교단이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럴 시간이 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국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제 아무리 입으로 추켜세워도 실리가 없다면 인간은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서기 마련이니까.

누구라도 알 수 있도록, 바보라도 깨달을 수 있도록.

왕국을 위해 싸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최고의 상황이 갖추어졌다.

루시는 담담하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어떻게 이용한다고 생각하진 않아. 도리어 이렇게 애도할 자리가 주어진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네.”

폭풍의 신이 어떤 인물인지는 사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오래된 신인 그의 교단은 최소한의 규모로만 운영되었다.

신도로부터 신앙을 수급하여 입지를 다지기보다는 그저 살아감에 만족하는 그런 이들.

교단의 구성원들 역시 한때의 영광을 뒤로하고 쓸쓸하게 변해가는 신전을 보며 어떤 감상을 품곤 하던 이들이었다.

지구에서라면 역사 속으로 잊혀져 가는 신의 신관이 살아 있지 않겠으나, 수명이 긴 종족은 얼마건 있는 곳이 미궁이다.

폭풍의 신이 관에 담겨서 도착했다.

대신관과 대전사가 오열했다.

폭풍의 신은 치천사였다.

관을 열자 갈기갈기 찢긴 날개가 드러난다.

덕분에 신체는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나이든 대전사와 대신관은 자신들의 신이 죽었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얼마 없는 신도들 역시 그랬다.

저 작은 교단은 생각보다 더 깊은 관계로 맺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수많은 이들이 목격할 수 있게 그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동시에 함께 죽은 수많은 이들이 기려졌다.

그런 분위기였다.

이미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더라도 왕국은 충분히 지키기 위해 죽은 자들을 애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장례식은 널리, 아주 널리 알려졌다.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왕국의 전역으로.

이제 왕국이라고 불러도 될 영역이 충분히 좁아진 덕이기도 하다.

* * *

로건을 포함한 제니의 옛 동료들은 자신들을 환대하는 분위기에 당황했고, 곧 적응했다.

자원자들은 모두 아주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경의를 표하는 이들이 많았다. 미궁에 발을 들인 후, 이렇게까지 존중받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모두 혼돈의 신도들이었으니 그런 방침인가 보다 했으나, 당연히 기분은 더없이 좋다.

거기에 훌륭한 장비가 자유롭게 제공되었다.

대부분은 구경조차 해본 적 없는 드래곤제 장비다.

심지어 1만 년 이상 묵은 고대룡의 파츠라고 했다.

그 시점에서 그들은 당연하게도 그날의 드래곤 피어를 떠올렸다.

“죽었구나. 그 드래곤.”

“그걸 어떻게 물리쳤지?”

웅성웅성하는 가운데 로건도 그렇게 생각했다.

제니도 그렇다면 그 싸움을 거들었을까?

최근 들어 대단한 기상 이변은 많이 보았다.

갑자기 기온이 확 올라갔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지진이 일어나며, 운석이 만든 먼지가 해를 가렸다.

세상이 멸망하는 것이 조만간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그래서 세상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물론 자원자는 제니의 옛 동료 말고도 많았다.

하지만 제니는 이미 영웅이었고, 그 동료였던 로건 일행의 합류 역시 영웅적 행위였다.

그것은 그들의 레벨이 그리 높지 않았기에 더욱더 대단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배치되기를 기다리는 잠깐 동안 로건은 장례식에 대해 알게 되었다.

온 사방이 그 이야기로 가득했으니 모를 수가 없다.

로건은 향수를 느꼈다. 그의 동료들도 그도, 그리고 제니도 모두 한때는 미국인이었다.

“바깥에서는 저랬지.”

“항상 그랬어.”

“내가 군인이 되어볼 줄은 몰랐는데.”

“훈장이라도 노려봐야 하나.”

“퍼플하트는 안 된다.”

어쩐지 앞으로 있을 고난이 뻔히 보임에도 농담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긴장이 풀렸다.

혹여 자신들 중 누군가가, 아니면 또 다른 누가 죽더라도.

남은 이들이 저렇게 애도해 줄 것이다. 기려줄 것이다.

그렇다면 되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공포가 희석되고 마음에 위안이 찾아온다.

“내 사망연금은 너희들 거야.”

“하하, 연금이라 해봐야 5년 정도 지급되는 거잖아.”

“그게 어디야. 우리 다 서로를 지정한 거 아냐?”

로건은 문득 지구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전쟁은 없었어도 이렇게 문명사회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래. 인간은 원래 이렇게 살아갔던 것이다.

* * *

신의 죽음이라는 사실 자체는 또 다른 파급을 가져왔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유배자들에게는 신이라고 해도 조금 많이 높으신 유배자에 불과하다.

때로는 비즈니스로, 때로는 그저 전력 향상을 위하여 상대하게 되는 오래된 선배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유배자의 가닥에서 멀어졌거나, 처음부터 아니었던 이들에게 신이란 존재의 의미는 또 다르다.

신이 죽었다.

신도들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르게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

물론, 유배자에게도 충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이라 함은 어떤 의미로는 유배자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은퇴다.

신은 불멸이며 생명의 위협도 없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자리에 남아 세상을 지켜보며 그야말로 신과 같은 권능을 휘두를 수 있는 위대한 자리다.

그 자리에서 굳이 내려왔고, 그리고 싸웠다.

끝끝내는 전사했다.

누구도 그 사실에 대해 떠들지는 않았으나, 모두의 마음속에는 작은 파문이 하나 일었다.

그리고 그 파문은 배후에서 의도한 누군가의 뜻대로 점점 넓게, 소리 없이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단지 고레벨 유배자들만이 아니라 왕국에서 두발 딛고 살아가는 모두, 진정으로 모두에게 말이다.

그렇게 만들어져가는 현황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레미가 말했다.

“생각보다 너무 잘 되어가서 놀랍네요.”

「솔직히 말할게.」

“말하세요.”

「네가 너무 잘했어.」

“그런가요? 그런 공은 대장 고블린에게 돌리죠. 결국 그에게 배워온 것이니까요.”

「만났을 당시에는 생각 못 해봤었는데. 그 고블린이 정말로 불세출의 영웅이었어. 그런 고블린은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아.」

“그야말로 인민의 영웅이죠.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영웅.”

「낭만적이군.」

내가 직접 하더라도 이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내지는 못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디테일에서부터가 다르다.

대장 고블린은 단 한 번도 왕국에 발을 들여 본 적이 없음에도 유배자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와 레미가 함께 토론하여 만들어낸 결과는 내 모든 회차를 합쳐도 가장 이상적이다.

“나중에 그의 임종을 지키러 가야겠어요.”

「침공을 막으면 그러도록 하지.」

하지만 대장 고블린의 계획을 실천한 것은 레미와 헨리다.

레미는 주로 큰 틀에서, 헨리는 조금 더 작은 틀에서 일을 만들어갔다.

내가 틈틈이 돕기도 했으나 이것은 결국 이 둘이 그만큼 유능했던 덕이다.

쉽다 쉽다 그래도, 제아무리 조건이 좋더라도 이건 그런 영역의 일이다.

“이길 수 있겠죠?”

「물리칠 수 있냐고 하면 그건 아니지.」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반드시 이긴다.」

비록 전력은 내가 직접 시간을 들여 가꾸었던 과거보다 못하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적은 피해로 왕국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두의 마음에, 모두의 의지에 감사했다.

그리고 파라켈수스는 그 승리를 위해 장례식에 참가하지도 못했다.

신좌 부품을 수집하려면 게이트가 열려야 하고, 그 시간은 한정되니 가장 바쁜 것은 그일지도 모른다.

현재 내려와 있는 신들은 마지막 웨이브 때는 신좌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 그 순간 대비를 해야 한다.

* * *

온 왕국이 사명감과 분노로 들끓으며 집에서 뛰쳐나오고 있을 때.

또 다른 누군가도 그 승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갸르르릉.

블랑쉐는 디스트로이어의 턱을 만지며 능숙하게 츄르를 주입했다.

디스트로이어, 줄여서 디스는 이제 거부감 없이 그것을 받아먹고 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 있는 일이 이 고양이를 길들이는 것이다.

여궁수는 마침내 한숨을 내쉬었다.

디스는 드디어 여궁수가 없는 곳에서 먼저 블랑쉐에게 달려들어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제 사격 연습을 시키면 된다.

사실 사격 연습이라고 하는 것도 우습다.

고양이를 어떻게 들어야 더 편안하게 들고 더 제대로 조준할 수 있는가의 문제니까.

여기서 편안함의 주어는 사수가 아니다.

저 고양이 본체다.

정말로 상전처럼 모셔야 하는 무시무시한 고양이니까.

블랑쉐는 디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MISSION COMPLETE…….”

집사 자격증 획득 성공.

마지막 전투를 위한 준비가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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