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365화 (365/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65화

왕국 - 최종 웨이브(1)

두 번째 웨이브와 마지막 사이에는 시간이 좀 넉넉하게 주어진다.

모든 디펜스 게임의 클리셰가 그렇듯, 진정한 위기와 보스급 적들은 마지막에 몰려나오는 법이다.

그리고 그걸 대비하기 위한 시간도 그만큼 노골적으로 길게 주어진다.

통상적인 왕국이 이 시점에서 이미 와해가 끝나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태에 돌입한 왕국은 끔찍하다.

하루라도 더 연명하고자 날뛰는 이들이 난립하고, 아직 유배자로서의 기한이 남은 이들은 자살을 고려한다.

전혀 처리되지 못한 웨이브의 몬스터들은 왕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생존자들을 척살하며 자신들끼리 싸운다.

그것들의 목적은 결국 여러 세계가 교차하는 왕국이라는 이 땅덩이를 손에 넣는 것이다.

그렇게 야망에 불타는 [메인 던전]들의 괴물들이 미쳐 날뛴 끝에 왕국은 개척해 둔 영역만 빼고 문명적으로 초기화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다면 침공의 3세력은 결국 거의 공멸하게 된다. 애초에 그런 식으로 밸런스가 맞추어져 있다.

그런 환경에서 [메인 던전]의 포탈은 추가적으로 열리지 않으며, 유배자는 충원된다.

생존한 고레벨들과 새로운 유배자들이 힘을 합쳐 새로운 세상을 일구기 시작한다.

신들은 그 사이클에서 자유롭다. 그들은 남아서 다시 유배자들이 자리 잡는 것을 돕게 된다.

이것이 왕국이라는 땅에서 돌아가는 사이클이다.

때로는 낮은 확률로 어느 세력이 왕국을 지배하는 상황이 나오기도 한다.

재수가 없는 케이스다.

그 경우면 보통 새로운 유배자는 노예로서 왕국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고, 혁명을 일으키거나 다음 회차로 탈출하게 된다.

어쨌건 이런 사이클은 일반적인 유배자들 대부분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침공을 겪을 정도로 왕국에서 오래 산 유배자는 다음 회차가 없어 알리지 못하며, 혹여 남은 시간이 있는 자들이라 해도 랭커인 이들은 소수다.

그렇게 튜토리얼에는 다시 신과도 같은 30년 차 이상의 고참들을 찍어누르는 70년 차 이상의 초고참들이 풀리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참 그럴싸하게 잘 만들어진 설정이다.

게임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르게 말하면 애초부터 현실이었기에 그런 설정이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개발자 놈들은 뭘까? 뭐 이상한 전파라도 수신한 걸까? 미궁의 위대한 의지 그런 거?

알 수가 없군.

일단은 눈앞의 일이다. 대신격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면 뭐건 알 수 있겠지.

그리고 왕국에는 마지막 공세를 대비하기 위해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졌다.

신좌를 비워뒀던 신들 역시 모두 돌아갔다.

그럼에도 루시와 드라간은 남았다.

* * *

항거할 수 없는 재앙에서, 극복할 수 있는 시련이 되었다.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전장에 폭발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대단하던 고레벨은 위대한 방어자로서 이름을 날렸으며, 전장의 영웅들은 세계의 영웅으로 받들어졌다.

그저 신으로서 군림하던 신들 역시 더 실감 나고 곁에 있는 존재가 되었다.

놀라울 정도로 폭증하는 신앙을 느끼며 마지못해 협력하던 신들도 점점 태도가 진실되게 변하고 있다.

이걸 보면 신앙이란 묘하게도 민주적이다.

별것 아닌 것 같은 하나하나의 투표가 모여 의사의 총체가 되듯이, 별것 아닌 하나둘의 신앙이 모여 어떠한 힘이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신이라 함은 어떤 의미에선 선출직과도 같다. 쟁취함은 자신의 힘이나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민중의 선택이다.

반면 미궁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그야말로 약육강식.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철저하게 주입한다.

신들은 오랜만에 상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먼 과거, 혹은 단지 무수히 많은 신도들을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들을.

현대 문명이라는 것을 말이다.

유배자 절대다수는 현대 지구 계열의 세계에서 왔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건 문명이란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왕국이란 곳이 야만과 뒤섞인 기이한 도시국가 형태로 자주 출현하는 것은 미궁이 주입한 교육 때문일 것이다.

물론 신들만이 아니다.

“놀랍네요. 치안을 굳이 유지하지 않더라도 눈에 띄게 좋아졌어요. 이건 그냥 순찰대를 늘린다고 가능한 게 아닌데.”

“인구가 지금 몇으로 추산되고 있어요?”

오랜만에 파티 오르골이, 그리고 [천사의 눈물] 길드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이제 하나같이 어떤 의미로건 유명하다.

“원래의 추정은 5천만 가량이었는데 그 집계가 많이 틀렸었던 모양이야.”

음지에서 바쁘게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첩보조직을 거느린 블랑쉐가 산간 오지까지 탐색한 결과를 말한다.

유명하지 않은 멤버는 스스로 그러길 원한 이 친구뿐이다.

“신앙을 가진 인원들은 신이 통계를 낼 수 있으니까 어떻게 맞힌 건데. 상상 이상으로 허술했던 모양이네요.”

내가 레미의 말에 대답했다.

「중국도 자기네 인구를 정확하게 모르는데 왕국에서 그걸 어떻게 알겠어?」

아서가 한마디 거든다.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위정자 입장에서는 말이야.”

레미가 투덜거렸다.

“그건 중세 농경사회 때의 이야기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게 될 거 같아요.”

레미의 투덜거림은 이해가 간다.

미궁이 유배자들에게 부여한 야성을 깨우는 데는 성공했다.

폭증하는 자원자들로 부대를 편성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다.

폭풍의 신이 너무나도 멋있게 죽어줬다. 그는 개척시대의 삶대로 지금까지 살아왔고, 그 방식대로 최후를 맞았다.

왕국은 전의로 들끓고 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다른 것도 깨워냈다.

레미가 그것을 입 밖으로 내었다.

“애국심이라. 그런 게 미궁에 있을 줄이야.”

“나는 알 것 같다. 노르만의 시대는 무수히 많은 세력들이 반도에서 꿈을 꾸던 시기였지. 그러다가 새로운 섬까지도 공격해 가고 말이야.”

지극히 바이킹적인 관점에서 에길이 말했다.

“그 와중에도 의리와 명예는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

“그건 공감할 수 있는 말이군. 그 어느 전란의 시대에도 인간은 인간이기에 인간이었다. 그러니 지금 같은 일도 일어나겠지.”

아서 역시 기사도적 관점에서 그의 의견을 말한다.

생각해 보면 우스운 것이 이 둘은 의외로 가까운 관계다.

아서는 전설 속의 대왕이자 전설로서 역사에 남았고, 에길의 시대에 이교도 대군세를 통해 브리튼에 도달한 노르만족들 역시 그 전설을 받아들였다.

서로 다른 세계이겠으나, 같은 땅의 다른 시대가 교차하는 듯하다.

희우가 정리했다.

“애국심이라기보다는 조금 다른 걸로 하죠. 어차피 우리 모두 원래는 인간이었잖아요?”

「메인 던전의 테마에 인간은 없다. 아니 있긴 하지만, 그건 좀 특수하지. 그래서 침공해 오는 일은 없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들 같은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건 우리의 싸움이다.”

맞는 말이다.

미궁은 어쩌면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바라며 인간만을 납치해 오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타락시키고, 그것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왜 그런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대화가 오가는 와중,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미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제니가 조용히 미아의 귓가에 대고 그것을 해설하기 시작했다.

루시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입 다물고 듣다가, 제니의 속삭임을 같이 듣겠다고 비집고 들어갔다.

레미가 말했다.

“어쨌든 이런 식이라면 리더가 말한 형태로 새로운 왕국을 재편하는 것도 더 쉬워질 것 같아요.”

「유배자로서의 투쟁심이 깨어나자, 더 먼 과거의 현대인으로서의 삶도 깨어나다니. 추억이란 원래 그런 거지. 줄줄이 사탕이야.」

일단 이건 완벽하게 의도다.

다만 의도보다 너무 잘 이루어진 것이 의아할 뿐이다.

지금의 왕국은 그야말로 인류의 역사가 혼재되어있는 꼴 비슷하게 바뀌어가고 있다.

세계 대전기나 냉전기의 비장한 애국심 같은 것도 고취되고 있다.

그리고 몇몇 신들이 약삭빠르게 민주주의적 개념을 도입한 후, 그것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지금까지의 고압적인 중세의 신정보다 현대적인 이 방식이 더 좋다고 여기는 것이다.

신도들은 자연스럽게 더 많은 이익을 약속하는 신들에게 몰려들고 있다.

신앙의 시대라면 신앙의 시대니까.

“미궁 최초의 현대국가가 왕국에 탄생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제가 위정자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에이 언니, 지금처럼만 하면 되는 거지! 찾아보면 유배자 중에 대통령 정도 해본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를 고용하는 거지.”

“쉽지 않네.”

언니라는 말에 블랑쉐가 움찔했다.

자기를 부르는 줄 알았을까.

그 바람에 무릎에서 졸고 있던 디스가 눈을 뜨고 울음소리를 낸다.

블랑쉐가 무표정하게 고양이를 돌본다.

레미와 헨리, 그리고 혼돈의 여신이던 루시와 함께 계획한 것은 원대한 계획이었다.

나로서도 처음 시도해 보는 일이다.

이 세계가 현실임을 인정하고, 그렇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시작한 것이다.

어쨌건, 현대의 체제들인 인류가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발견한 것들 중에선 가장 나은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레벨로, 힘으로 더 높은 지위를 가진 초인들이 있음에도, 그들을 하나로 묶을 어떤 가치가 있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그러니 그것을 만들어보자.

모두 한때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보았던 이들이 아닌가.

그런 발로였다.

그리고 내 이상적인 계획에 가장 회의적이었던 중학생 출신 소녀 레미가, 이제는 가장 기뻐하고 있었다.

“저 어쩌면 이쪽이 적성에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의사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데요?”

변한 것은 모두다.

레미 역시, 살아남기 위해 찌들어있던 처음의 그 그늘이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도저히 중학생이라고 볼 수 없는 권력을 잡고 있는 지금이, 가장 그 나이 때 아이처럼 보인다.

그래도 이건 좀 무서운 일인데.

저 세계의 일본은 위대한 정치인 하나를 잃은 게 아닐까?

잡담은 이만하고,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럼 이제 각자의 레벨을 좀 알아볼까요? 제가 신좌에 있는 동안, 이 절망 접미의 보정을 최대한 활용할 겁니다.」

꼭 마지막 전투를 위해서가 아니다.

결국 공략하게 될 [메인 던전]을 위해 슬슬 엔드 스펙을 염두에 둔 세팅을 돌볼 필요가 있다.

* * *

고블라쵸프 서기장은 퇴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노쇠했으며, 예전의 총기도 더 이상 발휘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그의 삶에 만족하며 떠나갈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바르바로이 국장도 마찬가지다.

뱀파이어의 수명은 육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서기장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그 뱀파이어는 그와 함께 늙어갔다.

다른 시간 속을 살았지만 국장이 보았던 것은 연방의 설립, 나아가 혈족의 안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서기장은 아직 삼파전의 대립이 심화되던 시대에 태어나서, 그 끝을 본 지도자다.

국장은 연방의 탄생부터, 이 우주 전체를 발아래에 둘 때까지 본 셈이다.

지칠 만도 하지.

그래서 그냥 그렇게 국장과 대화를 나누던 참이었다.

신탁이 내려왔다.

[혼돈의 신이 연방의 군대를 왕국으로 불러들이겠다고 말합니다.]

[혼돈의 신이 이것은 연방이 치르는 최후의 성전이 될 것이라 말합니다.]

위대한 혼돈의 어머니께서 그에게 마지막 사명을 내리셨다.

* * *

[지옥]의 수장인 벨제뷔트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부터 이곳으로 대피시킨다고?”

「부탁하겠습니다. 지상은 좀 끔찍한 일이 일어날 예정이라.」

“준비가 제대로 되었을지 모르겠군.”

「완벽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도 지옥의 마력에 노약자들이 사망하는 일만은 막아줬으면 합니다.」

“결국 그래서 규모는 어느 정도지?”

「음, 1천만 정도?」

“미치겠군.”

그의 부하들은 많은 노력을 하고 있긴 하였다.

하지만 1천만이면 거의 지옥 전체의 악마 인구에 육박하지 않나.

“수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도록 하지.”

「정말 감사합니다.」

“지상을 지배하는 신에게 이 정도로 빚을 지워둘 수 있다면 남는 장사지.”

* * *

마왕 아르바리온은 용사가 되지 못하여 타락한 그 저주가 몸을 옥죄는 만큼 늙지도 못하고 영원한 세월을 살아가야 한다.

사실 바라지는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제자로서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용사를 길러내고 그 덕에 은인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용사 역시 그의 사명을 끝내고 그의 곁으로 돌아와 함께 작은 오두막에서 지내는 와중이다.

남녀가 함께 그렇게 살아감에도 별다른 일은 없다.

첫사랑의 쓰디쓴 추억은 이제 슬슬 세월에 잊혀져 가고 있으나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낼 만큼의 준비는 되지 않았다.

애초에 너무 바빴다.

그리고 첫사랑이 찾아왔다.

“짜잔! 리온 안녕! 오랜만이야!”

“어……? 어어어?”

천사가 손을 내밀었다.

“네 도움이 필요해!”

옆에서 용사가 도끼눈을 떴지만 희우는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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