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67화
왕국 - 최종 웨이브(3)
위에서 숫자를 지켜보는 지휘관으로서, 혹은 앞장서는 영웅으로서 싸우는 것.
왕국을 지키기 위한 수천만의 병사 중 하나가 되어 싸우는 것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로건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후회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들의 역할은 이미 들어서 안다.
이 수많은 인원들의 역할은 전선을 형성하는 것 그 자체다.
이 막대한 물량의 괴물들이 저 머나먼 뒤편의 왕국을 유린하지 못하게.
그리하여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마력이 고갈된 땅으로 만들지 않게.
그리고 이렇게 고지된 사실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신뢰를 주었다.
끝난 이후를 고려하고 있다.
이미 그 자체로 승리를 의심치 않는단 뜻이다.
하이 랭커들도, 신들도,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지휘하는 혼돈의 신도.
승리할 것이라 믿고 있다.
그 믿음은 모두에게 전해졌다.
그렇기에 죽음으로 이 전선을 지킨다.
다만, 정말로 죽음뿐인 것은 아니다. 진짜로 고기방패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다면 누구건 도망쳤을 것이다.
신들이 내린 온갖 축복이 뒤섞인 가운데 로건은 일찍이 없었던 수준의 힘을 느꼈다.
지금이라면 랭커급이 아니라 진짜로 랭커와 싸워 이길지도 모른다.
아낌없이 소모된 신앙은 그만큼 거대한 신성의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물경 수천만에 달하는 인원들은 얼어붙은 수평선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 전체에서 색색이 빛나는 무지개가 걸렸다.
왕국에 존재하는 모든 활동하는 신들의 신성이 흩날린다.
불꽃처럼, 꽃잎처럼.
화려하게 물든 하늘이 이쪽을 비춘다.
반면 비슷하게 수천만, 아니, 듣기로는 수억, 수십억에 달하는 벌레떼들은 칙칙한 무채색의 무언가였다.
세상의 빛을 꺼뜨리며 다가오는 벌레 군단.
등 뒤로는 무너져 버린 기나긴 산맥.
눈앞에는 수평선을 뒤덮은 잿빛 벌레떼.
수백㎞로 이어진 전장에서 인간과 괴물들은 끝없이 서로를 죽이고 있다.
사슬낫을 길게 쓸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일단은 휘두르고 찌르고 막아내며 탱커의 본분을 다한다.
그러다 주변에 누가 위험에 처한 것 같으면 사슬을 집어던졌다.
우습게도 그 어느 때보다 실수할 자신이 없었다.
온 사방을 메우고 빛나는 버프들 중에서는 숙련도나 정신력에 관계된 것들도 있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냉정하게.
베고 또 베고.
막아서고.
차고 때리고, 구르고.
그러다 누군가 부딪혔지만 서로 눈인사만 빠르게 건네고 다시 싸운다.
피가 튄다.
사람의 붉은 피도, 벌레의 맑고 투명한 채액도.
그리고 다시 바닥에서 그 색이 흐려지며 무채색으로 변한다.
그렇게 색을 빼앗긴, 마력을 빼앗긴 땅은 한눈에도 거무튀튀하게 죽은 땅으로 보였다.
그렇다. 로건은 지금 죽음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교대시간이 되었다.
“로건! 이제 물러나! 고생했어!”
로건은 옛 동료이자, 다시 현 동료가 된 부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전선의 후열까지로 밀려나 있었다.
힘이 달리는 탓이다. 제아무리 온몸에 버프를 바르고 지급 받은 좋은 재질의 장비로 날뛰고 있다지만 이런 전투에 익숙하진 못하다.
아니, 사실 누구도 익숙하진 못할 것이다.
수천만 대 수십억이라니.
그럼에도 왕국의 병력은 벌레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로건은 자신이 전선에 뒤처졌음을 깨달았고, 그래서 교대할 수 있음을 알았다.
“못 찾을 줄 알았네.”
“고생했어.”
주변은 전혀 질서정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선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어쨌든 후방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혼돈의 신은 자원하는 무수한 왕국의 주민들을 통제하거나 명령을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여러 길드들을 지정하고 그들의 자율을 보장했다.
길드라 함은 집단이며 집단전에 능할 수밖에 없는 숙련자들을 말한다.
그런 곳의 높은 이들은 제각각 무수한 자원자들을 성향에 맡게 받아서 전략을 짰다.
이런 교대 방식은 전선의 일부, [검은 곰] 길드가 담당한 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다.
“고생했다! 물러나라! 이제 3진이 맡는다!”
익숙한 목소리, 블랙 타이거가 말한다.
버티는 것이라면 탱커 전문 길드로 유명한 [검은 곰]을 따를 자들이 없다.
그렇기에 이곳은 전선의 한가운데, 최고의 격전지다.
“얘들아 가자!”
그런 소리를 배경으로 들으며 로건은 비틀비틀 움직였다.
임산부인 동료가 포션을 딴다. 로건은 왜 그러는지를 보고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옆구리가 크게 베였다.
뜯긴 상처 같다.
갑옷을 무처럼 베어버리고 씹어 삼킨듯하다.
언제 이걸 당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탱커들은 앞에서 맞는 거만 좋아하지.”
“그렇지는 않아.”
로건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동료의 안위를 확인했다.
후방에서 사격을 날리는 역할인 둘은 멀쩡해 보였다.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수천만이라니. 왕국에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내던질 수 있을 줄도 몰랐군.”
시체가 밟힌다.
누구지는 모를 오크였다.
부서진 갑옷과 이가 나간 도끼가 그의 용맹을 증명한다.
그리고 또 걸을때마다 시체가 밟혔다.
전선이 밀고 지나간 곳에는 피와 시체만이 가득하다.
벌레의 시체도, 왕국의 인간의 시체도.
“살아남아서 다행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밝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망 보험금 안타서 다행이야.”
“운이 좋았지.”
주변에 함께 돌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울고 있었고 누군가는 지쳐 있었다.
동료를 잃은 것 같아 보이는 이들도 많다.
[검은 곰] 길드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소리 높여 그들의 방향을 유도하고 있다.
그래도 다들 밝은 표정 같아 보였다.
이곳은 누가 언제 다른 이의 뒤통수를 칠지, 코를 베일지 걱정해야 하는 왕국이 아니다.
살기 위해 하나가 되어 싸우는 유배자의 낙원이다.
* * *
최소한의 지휘권을 가진 입장에서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블랙 베어는 단 한 번도 이 정도의 병력을 휘하에 두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유배자는 정말로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
자원자 중에서도 장교는 많았다.
애초부터 군인이란 것은 튜토리얼 통과율이 아주 높은 직업 중 하나다.
의욕이 넘치는 군사교육 이수자들은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애초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지원했던 직업일 것이며, 그렇다면 이끌려 나온 향수에 의해 기억도 되살아났을 것이다.
왕국 전체가 미쳐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비정상적인 열의의 방향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튜토리얼을 오를 때가 생각난다.
꽌시 같은 것이 생길 수밖에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모두 너무 힘들고, 살길이 막막하니까.
그러면 자연히 뭉치고 울타리를 친다.
그 바깥의 사람은 어떻게 들일 수가 없다. 그럴 여유가 없으니까.
지금만큼은 모든 왕국이 하나의 울타리로 묶여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도움이 되고 싶어 하고 힘이 되고 싶어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이상적인 상황을 만든다.
아마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상황이다.
침공을 막아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만지며 주변을 살피는 삶으로 되돌아간다.
모두가 그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현재에 진심이다.
길드원들은 정신없이 싸우고 지휘하고 통제했다.
유배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그것에 잘 따라 주었다.
길드원 중 누군가에게 이야기가 전달이 되지 않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죽었구나 생각하며 다음 일을 한다.
그러다가 블랙 타이거도 사라졌다.
오랫동안 함께한 의형이다.
드디어 갔구나.
그런 생각만 하며 다시 전장에 뛰어든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가끔 먼 곳을 보면 거대한 괴수들이 잔뜩 나타나고 신들이 뛰어들었다.
권능이 작렬하고 비행중인 마탑들의 포격도 작렬하고, 그런 끝에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진다.
이곳과는 전혀 다른 전장이지만 어쨌든 저기서도 이기고 있었다.
함께 대형을 이루고 유지하던 옆의 길드원들도 조금씩 줄어간다.
괴물들은 아직도 끝이 없는 것 같았다.
“하아. 하아.”
교대할 블랙 타이거가 없으니 그가 계속 전선에 서 있어야 한다.
“이놈들아! 막아! 막으라고! 뒤로 보내지 마라!”
뒤편에는 사수들이 있다. 뚫리면 좋은 일이 일어나진 않는다.
방패로 후려치고 머리로 두개골 두께 대결을 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방패도 놓치고.
주먹을 휘두른다.
갑옷은 너덜너덜하고 몸도 너덜너덜하다.
물경 수천 레벨에 달하는 괴물들이 떼로 덤비면 하이랭커의 스펙으로 온갖 버프를 둘둘 감고도 어쩔 도리가 없다.
여기까지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을 던지는 것은 멈추지 않는다.
탱커란 본디 그런 존재.
죽음으로 전선을 만들고 딜러들에게 딜각을 주는 자들.
[도발]의 쿨다운이 돌았다.
인생 마지막 외침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을 느낀다.
“날 봐라아아아!”
어쩐지 후회는 없었다.
유배자란 모두 그렇다. 고향이 있고, 그 고향을 떠나왔다.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다.
왕국에 적응하여 이곳을 고향삼아 살고, 힘을 손에 넣고, 그러더라도 결국 허무해지는 것이다.
아무리 여기에 정을 붙여도 그게 진짜 고향에 비할 바겠는가.
죽어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온 세상이 낭만에 미치자 그 또한 미쳐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단련된 육신과 본능은 다가오는 벌레들의 이빨과 발톱에 대응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렇게 최후를 직감한 다음 순간.
“고생이 많았습니다. 하이 랭커.”
빛기둥이 떨어졌다.
그리고 온 사방에 내리 꽂히기 시작했다.
“이제 물러나시죠. 당신들은 역할을 다했습니다.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가세요.”
재수 없고 짜증 나게 생긴 면상이네.
안경이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게 속이 아주 음험할 거 같다.
블랙 베어는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상대방이 불쾌해했다.
“방해되니 얼른 꺼지세요.”
빛기둥이 창살처럼 내리꽂히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앞의 안경 쓴 남자의 손짓에 따라 일제히 밀어버린다.
달려들던 벌레들이 밀려 찌그러지고 베이기 시작했다.
블랙 베어는 비로소 후퇴 명령을 내렸다.
다른 쪽도 살피자 신들이 하나 둘 문을 열고 나오고 있다.
왕국에 얼마나 많은 신좌들이 있던가.
신은 또 얼마나 많던가.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신들부터 유명한 신들까지 모두 직접 내려와 나서고 있다.
신앙을 바닥까지 긁어 소모한 신들이 이제 신좌에서 일어서 지상에 내려오기 시작했다.
신좌에 도달한 이들의 공격은 이미 어떤 식으로건 광역기다.
블랙 베어는 서둘러 달려가는 와중에 마법사로 보이는 다른 어떤 신이 손짓하는 것을 보았다.
거대한 전송 마법진이 이미 펼쳐져 있다.
아마 이 전장에서 아주 먼 곳까지 이어져 있을 것이다.
“모두! 살아남은 녀석들 모두! 저 속으로!”
그를 구해준 신은 가장 유명한 신들 중 하나였다.
규율과 금전의 신.
* * *
신들의 숫자가 많긴 하지만 모든 전선을 커버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기에 점진적으로 후퇴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시티즌 방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
그 와중에도 루시는 혼돈의 화신으로서 미친 요정들의 군세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혼돈의 화신으로서의 루시는 중간 보스급 정도는 빠르게 척살하고 이탈할 수 있다.
다수의 군세를 상대로 개인이 게릴라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두 가지를 동시에 시야에 넣으며 마왕 아르바리온을 닦달했다.
「빨리! 빨리 빨리!」
“이렇게 큰 걸 갑자기 언데드로 되살리라고 하면서 너무 재촉하는 거 아닙니까!”
「뒤지게 급해!」
리온이 투덜투덜하면서도 유니크 스킬 [마왕]으로서의 권능을 최대한 발휘한다.
루시도 아슬아슬하다.
시간을 끄는 것도 한계가 있다.
숫자 앞에서는 누구도 장사가 없다.
루시가 우는 소리를 낸다.
“나만 혹사당해! 나만 힘들어! 맨날 나만 너덜너덜해져!”
「저쪽 전선에 사망자가 얼마나 많은데요! 배부른 소리 하지 마!」
“야! 너 내가 신일 때 대전사인 너한테 그렇게 대하디?!”
그렇게 틱틱거리면서도 실제로는 능숙하게 해내고 있다.
옷이 너덜너덜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습적으로 지휘관급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고 다시 이탈하는 솜씨는 예사롭지 않다.
저 멀리 하드스록 쪽 전선을 막아서고 있는 신들도 이제 서서히 물러서고 있다.
시간이 맞아야 할 텐데.
그리고 드디어 리온이.
용사가 되지 못한 [마왕]이 이미 죽은 거체를 일으켜 세웠다.
비늘도 이빨도 모두 뜯겨 나가고 심장마저 잃은 너덜너덜한 고깃덩이지만, 너무 오랜 세월 막대한 마력을 머금고 있던 육신.
단단한 갑주는 이제 남아 있지 않음에도 부패하지 않고 도리어 사방에 마력의 잔재를 풍기며 마력 재해를 일으키려는 기세로 드러누워 있던 몸길이 3㎞의 괴물이 고개를 든다.
다양한 신체 부위가 소재로서 소모되는 바람에 차마 봐주기 힘들 정도의 몰골이지만, 그럼에도 그 위압적인 크기만큼은 당당하다.
아직도 신선해 보이는 혈액들이 폭포가 되어 쏟아져 나온다.
「야야! 그거 용혈 다 빠지면 약해져! 막아!」
“으아아! 진짜 미치겠네!”
리온이 발작하듯 권능을 발휘하여 악룡의 언데드를 감싼다.
검은 기운이 점차 퍼져나가면 잃은 비늘 대신 원래의 검은 드래곤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 역시 남은 신앙을 총동원하여 혼돈의 힘을 두르게 만든다.
거대하고도 거대한 몸이 몸을 일으키고 이리저리 찢겨 나간 날개가 펼쳐진다.
쿠오오오오!
마왕의 꼭두각시로 부활한 의지 없는 고대룡이 [드래곤 피어]를 떨치며 포효했다.
「빨리 몰고 와! 여신님 돌아가신다!」
“안 죽거든?!”
루시의 비명 같은 소리와 함께 한때 이 왕국의 지배자였던 드래곤이 왕국을 지키기 위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