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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370화 (370/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70화

왕국 - 폐허 위에서(1)

레미는 당연히 바빴다.

공부보다는 이게 더 쉽긴 하지만 업무량 자체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그 덕에 처음으로 이런 일이 힘들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깜짝 놀랐다.

“과연, 이게 재능인가?”

레미도 서서히 인정해 가고 있다.

왠지 모르지만 자신이 남들 위에 서서 지시를 내리고 큰 틀을 짜는 데 대단한 재주가 있단 사실을 말이다.

내성적인 여중생이던 바깥에선 발굴하기 힘든 재능이었다.

“신전장님, 이건 어떻게 처리할까요?”

“조시에게 물어봐요.”

“신전장님! 악마 측에서 이런 불편을 호소해 왔는데…….”

“거기 벨제뷔트와 연락 좀 해주겠어요?”

혼돈의 신도 중 누군가가 척척 마도구를 사용한다.

레미의 앞에 떠 있는 화면이 하나 늘었다.

침울한 표정의 벨제뷔트가 화면을 보며 눈을 든다.

“미안하군. 나도 통제를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아뇨, 이해합니다. 우리가 너무 빨리 요청한 거 같기도 하고요.”

“지옥의 정리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난민 내려보낼 테니 받을 준비 좀 해달라고 하니 말이지.”

어조부터 은근히 뼈가 있는 말이었다.

레미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고 지옥의 새로운 지배자에게 대꾸했다.

“뭐 그래도 다행이죠. 서로 좀 죽는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천만이 넘는 인구가 갑자기 지옥으로 내려왔다.

벨제뷔트가 휘하의 악마들을 총동원하여 지옥의 마력이 옅은 공간을 만들었으나 그게 쉽지는 않다.

사실 오래 있다면 난민 대부분은 죽을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 남아 있다면 거의 확실하게 죽는다.

이미 처음부터 상황은 차악에 불과했다.

“우리가 손님이니 악마 측의 편의를 봐줘야겠죠. 그쪽 구역은 사용하지 말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유지하기 위해 배치된 악마들이다. 누가 먼저 시비를 텄건 사상자가 나온 이상 잘잘못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불만이 있으면 와서 말하라고 그럴게요.”

“자네는 참 냉정하군.”

“아니면 아무것도 안 굴러가잖아요?”

애초부터 생존율 예측도 하고 시작한 대피다.

많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레미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그런 자잘한 트러블이 아니었다.

좀 여럿 죽었으니 여기까지 보고가 올라왔을 뿐이다.

다른 쪽 연락은 받는다.

“금융 자료는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거 맞죠?”

“지금 막 검토가 끝났습니다. 등록된 이들의 재산은 안전합니다.”

“사업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신용을 잃어요. 믿고 있었어요.”

사망자에 대한 위로금부터 명예를 위한 여러 가지 행사 등, 민심을 달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우선은 열광적인 선동에 힘입어 다들 으쌰으쌰 했지만 지나고 나면 밟히는 게 많을 거다.

유배자가 언제부터 이타적인 생물이었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곧 들어설 새로운 체제에 대한 신뢰 그 자체다.

아직 굳건해지지 않은 혼돈의 교단에 의한 왕국 지배는 사상누각과도 같다.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인상을 새겨줘야 한다.

전후처리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초췌한 표정의 학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상당수의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연구 자료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고 있네.”

“세상에. 죽냐 사냐의 기로에서요?”

하나하나 챙길 시간은 없었다.

개인이 가지고 다닐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은 포장이사처럼 싸매서 들고 왔다.

제대로 보존이 안 되는 것들도 많으리라.

딱 그것에 대한 불만이었고, 지금 꺼내봐야겠다는 불만이었다.

“어떻게 다시 들고 올라가려고?”

“음……. 마법사라는 것들이. 이성적이지만 이성적이지 못한 존재라.”

곧 죽어도 세상의 진실 하나를 더 파헤치겠다는 광인들이다.

레미는 한숨을 내쉴 시간도 아까워서 그냥 뜯어보라고 허가했다.

그 이후까지는 책임질 생각 없다.

“폭발 같은 건 안 일어나게 해주세요. 그럼 다 죽어요.”

“그건 내가 확실히 통제하도록 하지.”

“예예, 믿을게요.”

지금은 위에서 구르고 있을 얼굴마담 루시도 생각을 해야 한다.

[메인 던전] 공략에 직접적으로 나서지는 않을 거라는 모양이다.

과거의 상징이자 새로운 미래의 상징으로서, 왕국 최강의 하이랭커이자 유배자로 우뚝 설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메인 던전] 공략에 나서는 파티 오르골에게 보내는 성원의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이건 또 군중을 다루는 부분이다. 쉽지 않다.

그때 어떤 요정 하나가 서둘러 달려와서 병을 하나 레미의 집무 책상 위에 놓았다.

전혀 모르는 병이라 고개를 들었다.

요정이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접촉을 해도 되겠냐고 물어왔다.

곧바로 깨달았다. 자연의 신이 뭔가 할 말이 있구나.

「그걸 마시며 하도록 하지. 벌써 일주일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지 않나.」

“꽃잎 요정은 체력이 아주 좋은걸요? 괜찮아요.”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로한 것이야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지만 일이 망가질 정도는 아니다.

「그건 마력으로 체력을 억지로 유지하는 것이다. 지속되면 좋지 않아. 적어도 마력이라도 공급해야지.」

“이게 뭔데요?”

맑은 액체다. 그리고 자연의 신이라면 생각나는 게 있다.

“요정의 꿀술이에요? 취한 채로 일을 어떻게 해요?”

「알코올은 걸렀다.」

“음? 그게 되나요?”

「나는 바깥에서도 연금술사니까.」

“좋네요.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말하자면 에너지 드링크 같은 무언가렷다.

따서 한 호흡에 들이켰다.

목을 타고 넘어가자 활력이 돈다기보다는 마력이 돈다.

“으음~, 이거 좋네요. 이제 저도 만들 수 있죠?”

「꽃잎 요정의 육신은 어떤 의미로건 식재니까 가능하지.」

“다음에 제 거도 드릴게요.”

자연의 신이 멈칫했다.

이야기를 전달하던 요정도 눈이 커졌다.

「……기대하도록 하지.」

“저는 맛있을걸요?”

레미는 그 반응을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마지막 말도 그냥 농담이었다. 애초에 깊이 생각할 정신도 없다. 그냥 감사일뿐이지.

그날 밤, 옆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다른 요정 하나가 설명해 주었다.

요정의 왕족인 꽃잎 요정은 혼약을 위해 서로 술을 교환하는 관습이 있다는 모양이다.

“예?”

레미는 별생각하지 않고 넘겨 버렸다.

뭐, 오해라고 생각하겠지.

* * *

지상에 남아 마지막까지 싸웠던 신들과 전사들은 고블레타리아 연방의 환대에 일단 크게 당황했다.

규율의 신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러니까 이길 수가 없지. 정말 대단한 신앙심이군요.”

다른 신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신이라 함은 신앙의 대상이다. 그리고 사실 그 신앙의 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미궁의 시스템은 단순한 머릿수로만 신앙을 집계한다.

따라서 이렇게 열광적인 광신도를 만들 필요성은 딱히 없었다.

기복 신앙만 되더라도 충분하다.

결국 미궁은 그것도 신앙의 머릿수로 판정하니까.

“그래도 이건 좀 부러운데…….”

어느 신의 발언에 다른 신들도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른다고 그냥 갑자기 전 함대를 끌고 나타났다.

여긴 다른 세계다.

그것도 자신들을 무던히도 귀찮게 하던 유배자들의 근거지다.

유배자의 힘도 잘 알 것이며, 그 위험도 알 것이다.

하물며 그 유배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더 강한 적들에게.

그런데 그걸 구원하고자 신의 말만 듣고 곧바로 이렇게 낯선 세계로 몸을 던질 수 있는가?

자신들의 신도는 그럴 수 있는가?

절대 아니었다.

규율의 신조차 그에 느끼는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과연……. 시대는 충성층 마케팅의 시대인가. 신앙을 단순히 머릿수로만 생각하고 효율을 추구하는 것, 그 이상이 있다라…….”

옆을 본다. 이 함선은 접대를 위한 여객선에 가까운 것이기에 바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라운지도 있었다.

포화가 쏟아진다.

거상들이 그냥 당하고 있지만도 않았다.

돌덩이를 던지고 팔을 내뻗고, 그러면 격렬한 회피 기동이 동반된다.

격추되고 목숨을 잃는 고블린들도 충분히 많았다.

맨 처음 보았던 늙은 고블린이 생각난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여신을 뵙고 나서 곧바로 저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죽을 자리가 여기라는 듯이.

“비효율적이야. 하지만 내게는 효율적이군.”

생각이 복잡해졌다.

신들과 달리 하이랭커들은 그저 이 상황이 좋았다.

살아남았음도 기쁘고 이렇게 든든한 우군이 존재하는 사실 그 자체도 기쁘다.

그리고 이 모든 함대가 혼돈의 열렬한 신도라는 것도 놀라웠다.

“46서버겠지?”

“거긴 대체 어떤 곳이람.”

당연하지만 46서버 출신 하이랭커는 없다. 파티 오르골이 전부 다.

그러니 그만큼 정보도 없었다. 사실상 이미 닫힌 서버. 그 정도가 하이랭커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도는 인식의 전부였다.

일부 길드들은 46서버 출신을 모집하여 드나들기도 했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어차피 하이랭커쯤 되면 자신들의 근거지도 있는 법이다.

“혼돈으로 갈아탈까?”

“저거 달달하긴 하겠지.”

“그런데 자유의 신으로 다시 돌아오려나?”

수군수군하는 논의는 당연히 신들에게 들리지 않게 한다.

자신들이 섬기던 신이 지금 강림하여 같은 함선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다른 이야기도 있었다.

“끝나고 나서 어떻게 되는 거지.”

“혼돈의 시대지. 아, 그 혼돈 말고.”

“어디에 붙어야 할지는 명확하지만, 그전까지도 하던 걸 보면 아마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거 같으니까.”

“너도 블랙카드 있냐?”

“그걸 받아서 일하고 있는 거지.”

시작은 그랬다.

어느 순간 그들 역시 왕국 전체를 뒤덮은 광기와도 같은 열정에 휩쓸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물론 그런 건설적인 대화만 오가는 것은 아니다.

멍한 이도 있었다.

비교적 친하던 다른 하이랭커가 그를 위로했다.

“네 동료들도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어……. 다음이 없는 친구들이었으니.”

파티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 기분은 어떤 것일까?

하이랭커를 고용하는 비용은 막대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들에게 주어질 명예와 보상도 더 크다.

남은 것을 모두 독차지하게 되었으나 홀로 남은 그는 그 사실이 눈곱만큼도 기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라운지로 가서 한참 멀리서 전투 중인 함대들을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보았다.

파괴된 대지, 남아 있지 않은 시설.

통째로 갈려 나간 것이나 다름없는 문명을 말이다.

“그래도 그 몫까지 살아가야지.”

따라왔던 친분 있는 파티의 다른 하이랭커가 그 말을 받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좋은 왕국이 될지도 몰라. 들었지? 지옥으로 피난하면서도 그간 혼돈의 교단이 기록했던 모든 것은 가지고 갔다더군.”

파티를 잃은 하이랭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뭐 하는 짓인가 했는데…….”

전부 이루어졌다.

그가 아는 것은 혼돈의 교단이, 그리고 파티 오르골이라는 파티가, 나아가 현재 혼돈의 신좌에 앉아 있는 유배자가 행한 일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어떤 회차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그런 세계가 다시 이 폐허 위에 싹틀 것이다.

문명이란 결국 사람이다.

유배자는 대체로 문명에서 미궁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있었음에도 이 세상은 계속해서 야만의 땅으로 남아 있곤 했다.

처음으로 그게 바로잡힐지도 모른다.

세계가 한번 붕괴한 만큼, 기존의 질서나 관습도 붕괴했다.

이제 살아남은 이들이 새롭게 만들어갈 세계는 이전과 다를 것이다.

전사였던 그는 다른 생각도 했다.

마법사들은 믿을 수 없었다.

믿다가 당하는 어떤 일도 세상이 보살펴 주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상성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세상에는 더 제대로 된 치안이 있지 않을까?

문득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세상에 자식이 살아가는 꼴을 보고 싶었던 적은 없다.

이제는 다르다.

무언가.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뭔가가 보였다.

그게 희망인 것 같았다.

기나긴 유배자의 삶에서 마침내 진정으로 정착할 곳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희망.

그는 그저 혼돈의 교단에게 감사했다.

이런 막대한 힘과 능력을 그들을 위해 사용해 주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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