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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371화 (371/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71화

왕국 - 폐허 위에서(2)

에길은 많이 지쳐있었다.

전사란 그렇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치고받으니 체력도 빨리 동난다.

제 아무리 초인이더라도 상대 역시 동급의 괴물이라면 결국 지치는 법.

산을 무너뜨릴 괴력도 산 그 자체와 싸우면 근육통을 불러오는 법이다.

에길은 그래서 고블레타리아 연방의 인공 온천에 누워 휴식을 만끽했다.

그러면서 마지막 전투를 복기해본다.

에길은 무수한 전장을 넘었다. 불패는 아니었지만 본디 살아남은 자가 강한 세상.

그럼에도 이번 같은 전투는 생소했다.

미궁에서 구른 경력도 아주 짧지는 않다. 전투를 피한 적은 없고 오히려 발할라에 가기 위해 죽음을 무릎 썼다.

물론 이제 그 인식은 조금 희미해진 감이 있다.

바이킹으로서 살아온 지난 수십 년간보다 이 파티에서 지낸 몇 개월이 인생에 남긴 족적이 더 크다.

그는 리더의 사고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것이 효율적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사상이라고 해야 할 부분까지도 어느정도 공감하게 된다.

[게이머]가 추구하는 효율은, 단적으로 말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저 북해의 노르드와 데인들, 바다 건너 브리튼 인들.

누구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것이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과, 목숨에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은 다르다.

죽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비는 하지만, 리더의 방식은 그럼에도 어딘가 죽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이 느껴진다.

유배자들은 모두 그러리라 믿는 이도 있겠으나 실제로 생각만큼 그럴 수 있는 이는 잘 없다.

그리하여 승리하고 죽지 않을 것이라 여기기에 가능한 결사의 전법이다.

바이킹은 죽어서 발할라로 갈 것이라 믿고, 유배자는 그리하여 살아남을 것이라 믿는다.

리더는 어떤가?

그의 방식에서 느껴지는 가혹함은 죽는다면 어쩔 수 없다에 더 가깝다. 비슷하지만 확연한 인식의 차이가 있다.

살고 싶다라는 것이 어딘가 희미한 그런 방식.

그렇기에 더 효율적이고, 상대에게는 더 예상외다.

바이킹으로서도 낯설 정도의 무시무시한 전술이다.

에길이 시행한 것도 그랬다.

거대한 괴물의 몸속으로 뛰어들어 그 속에서 생존하며 내부를 갈아엎어 죽인다.

상상할 수는 있지만, 보통은 실행할 수 없는 종류의 전투다.

레비아탄의 내부는 끔찍했고 유배자같은 초인에게도 적대적인 환경이었다.

죽기 전에 죽인다가 생각나는 온전하게 미쳐있는 시도였다.

그리고 에길은 살아남았다.

이후로도 전투는 지속 되었고 그곳에서도 살아남았다.

에길은 의외로 그런 식의 전투가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신 남아있는 것은 손맛.

지금까지는 스킬에 대하여 그리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니크 스킬을 얻더라도 스펙 강화 위주였으며 그저 자신의 육체와 기술을 믿고 싸움을 벌이는 타입이었기에 그렇다.

액티브라 불리는 필살기는 그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사용하여 대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라고 쓰지 못할 것은 없다.

간단하고도 단순한 논리.

그렇지만 그 또한 흥미롭다.

손을 움직여본다.

유니크 액티브 [아수라파천무]

강했다.

정말로 강했다.

전사로서가 아니라, 그가 지금껐 맞섰던 괴물이 된 기분.

이것이 인간이 아닌 괴물의 기분인가.

그 힘인가.

그런 생각이 들만큼 강했다.

리더는 그 감각을 잘 기억해두라고 했다.

[아수라파천무]는 사용하면 다시 여러 가지 동작으로 쪼개진다.

그 전체가 한 사이클인 [아수라파천무]로서 돌아간다.

리더가 이미 익히라고 말했던 그 비정상적인 액티브 동작 보정의 중첩을 이용하기에는 최적이다.

쿨다운의 공백을 다른 액티브로 계속 이어나가기만 한다면, 점점 더 강해지고 흉폭 해지는 칠흑의 힘을 휘두르게 된다.

처음부터 충분히 강했고, 그랬기에 미궁에 어렵지 않게 적응한 에길로서는 의외의 사실이었다.

액티브는 강하다.

어째서 진작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에길이 미궁의 시스템을 최소한도로만 이해하고 더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탯을 찍을 때도 아무 생각 없이 힘만 찍다가 최근에는 민첩에도 투자를 하기 시작한 참이다.

전사로서 그것이 더 옳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리더에게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었군.”

너무 유능했기에 미궁을 현실로 보지 못했다.

에길은 너무 강했기에 미궁을 미궁으로 보지 못했다.

“어떤 점에서 말인가?”

갑자기 그렇게 들려온 목소리는 조금 나이들고 깐깐한 느낌의 노인이다.

이미 알고는 있었다.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지만.

“제 자신의 고정관념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서.”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군.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

어떻게 아나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노기사 역시 기묘한 통찰을 보여줄 때가 있다.

노인답게 순백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나부낀다. 하지만 그 아래의 육신은 나이를 말해도 믿지 못할 만큼 강인하다.

세월은 아서의 몸이 아니라 얼굴만을 스쳐 지나간 것 같다.

“미궁은 이상한 곳이야. 아주 이상한 곳.”

“그걸 속속들이 알고 있는 리더도 이상한 사람이고요.”

“좋지.”

그러고는 대화가 잠깐 끊어졌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문화는 어느 세계에나 있다.

마력이 흐르는 인공 온천은 단순한 온기 이상의 효능을 가지기도 한다.

조용히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물속에서 각자의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아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나에 대한 사실을 딴 유니크 스킬이 존재했기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네. 이상하긴 하지만 이걸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사용한다는 건 더 이상했으니까.”

“그렇긴 하겠습니다. 저는 그런 계기도 없으니 미궁을 더 깊이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았죠.”

둘은 고정 NPC로 간주된다.

그 사실에 대해 유감이 없냐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무수히 많은 또 다른 자신들의 존재는 어딘가 께름칙할 수밖에.

하지만 이제는 그 이상으로 개의치 않을 수 있는 믿음이 있다.

일전의 전투가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제대로, 그래 정말로 열심히 치열하게 배워야할 것 같군.”

“단순히 강해지기 위한 기술로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안 그러면 죽을 거야.”

그간 자신감이 붙은 참이었다.

그들은 바깥에서도 강자였다.

미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미궁은 언제나 그 이상의 시련을 준비해두고 있다.

[메인 던전]의 보스급 존재들.

지금으로서는 손쓸 수도 없는 괴물들이었지만 언젠가는 그것과 동급의 존재를 맞서서 쓰러트려야 한다.

영웅적이라기보다는 절망적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도 아니며, 안주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리더는 그런 것과 싸우려고 하고 있다.

“뭐, 그렇게는 말해도 아직도 이 마인드맵이라는 것이 돌아가는 방식은 잘 모르겠군.”

노인에게는 힘들다.

하지만 전사로서 중년에 접어드는 나이에 미궁에 진입한 에길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이 곧잘 그렇구나 하고 하는 ‘스킬트리’니 하는 것도 너무 낯설다.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기에 작동 원리를 배워도 그것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장담하기 힘들다.

“저도 그렇습니다.”

“나만 바보가 아니라 다행이군.”

“그래도 젊은 친구들이 알고 있으니까요.”

“서브 리더가 정말 열심히 공부하던데. 리더는 정말로 다양한 상황에 대비하는 모양이야.”

“그래야겠죠.”

그리고는 신들과 정보를 공유하며, 동시에 리더에게 추가로 배우며 알게 된 사실로 이어졌다.

전사란 결국 강해지는데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다.

무의식적으로 제한하던 수단마저 풀려났으니 더더욱 말이다.

리더는 결코 전사계 신들에게 직접 어떤 정보를 주지 않았다.

리더의 모든 정보는 우선 파티원들에게 전해졌다.

그 후,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파티원들의 자유다.

아서도 에길도, 그것을 어떤 식으로건 민심을 장악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서열 정리라고할 것은 아니다.

다만 신들 사이에서도 입지를 확실히 하라는 것이겠지.

“그 동작은 이걸로 잇는게 더 좋을 것 같군.”

“리더는 그걸 추천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자네 체형은 리더와는 다르지 않나.”

옳다. 꼼수라고는 하나 아주 섬세한 것이다.

같은 동작을 하더라도 체형에 따라 미궁이 보정하는 부분도 있다.

누군가에겐 완벽한 연계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상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종족을 바꾸란 말은 없던가?”

“그렇군요. 특별히 들은 적이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엔 분명 종족도 포함될 것이다.

아서도 에길도 아직은 인간이었다.

“나는 추천 받은 종족은 있지. 악마였는데.”

“의외군요? 그건 마법사 아닙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천사는 기동성이 중점이 되는 경향이 있다더군. 반면 악마는 물리에도 강할뿐더러 간단한 마법 정도는 보정만으로 구사할 수 있게 되니 말이야.”

“복잡하군요.”

“그렇지.”

리더가 있기에 그 절망적인 보스들을 보고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대체로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화제는 또다른 것으로 바뀐다.

“자네는 아직도 발할라를 바라나?”

“사실 이제 잘 모르겠습니다. 제 세상만이 세상은 아니더군요. 발할라라 함도 믿음일 뿐이지 정말로 실존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나도 그렇네. 카멜롯은 지구라는 계열 유배자들에겐 전설일 뿐이더군. 나조차도 말이야.”

“전 그래도 실존 인물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 같았지만.”

둘은 아마도 가짜다.

하지만 점점 그마저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궁의 깊은 곳은 보면 볼수록 괴이하고 있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설령 가짜더라도.

이 미궁은 그 모든 것을 다 진짜로 만들 힘을 가지고 있다.

“멀린. 아직 살아있어야 할 텐데.”

탄식처럼 흘러나온 아서의 말에 에길은 빙긋 미소지었다.

그 역시 아직은 발할라를 바란다.

그가 소중히 간직한 [묠니르]라는 것은 위대한 천둥신 토르의 무기다.

곧 그곳에 들를 일이 있을 것이다.

* * *

고생해준 고레벨들이 휴식하는 동안 나는 고블린들에게 지시를 내리느라 바빴다.

이 충실한 고블린들은 여신의 이름으로 명이 떨어진 직후부터 온 우주의 자원을 수급하여 왕국 재건 준비를 했다.

물론, 지금은 여신님이 아니지만 일단 신좌에 앉아있는 것은 여전히 루시인 걸로 해두었다.

실제로 고블린들의 신앙이 만들어지고 굳건해지던 시기, 연방의 역사 대부분은 루시가 함께했다.

……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긴 하다.

신좌에서 46 서버를 들여다보며 내가 얼마나 많은 간섭과 조율을 했는지 대강 알 것 같아졌다.

루시가 손대지 않은 부분에서 조금씩 조금씩 루시의 이름으로 많은 부분을 매만진다.

연방의 존재는 결국 루시의 이름으로 결집하여 대장 고블린이 만들고 내가 광범위한 시간대를 내다보며 그걸 다듬은 결과다.

아니, 어째. 루시가 이런 걸 잘할 것 같은 캐릭터는 아니지.

좀 수상하다고 생각은 했어.

어쨌건 고블린들은 여전히 충성스러웠으며 그들의 경애하는 여신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루시는 덕분에 쉬지도 못하고 고블린들에게 모습을 내비치러 다녀야했다.

지쳐 보이긴 했으나 그 티를 내지 않는 점은 프로다.

그리고 거기서 노린 효과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들은 충성스러운 고블린들을 보며 여러 가지 고민에 빠진 모양이었다.

루시의 전설적인 과거에 대하여 잘 모르는 젊은 신들도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신화를 보며 어딘가 경외한다.

나와 우리 파티가 공략하는 동안 루시는 왕국을 완전히 틀어쥐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니 아주 좋은 현상이라 하겠다.

대량의 화물선들이 추가적으로 도착했다.

함대들은 루시의 환영을 받으며 왕국 귀퉁이에 착륙하여 정비를 시작했다.

함대의 피해는 극심했다. 거상들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회피기동에도 한계가 있다.

저쪽 세계에서도 죽은 이들은 기려지며 여러모로 애달픈 일일 것이다.

화물선들은 온갖 건축 자재나 자원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우선은 땅을 메워야겠지요.”

고블라쵸프 서기장이 루시의 곁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다른 전문가들도 감격에 차 여신님의 존안을 배알하며 전문적인 의견을 첨언한다.

“흠, 확실히 성직자의 나라가 있던 곳은 이제 대지라고 부르기도 어렵군.”

녹아내리고 유리화된 거대한 웅덩이다.

그 사이에 거상의 육식을 이루고 있던 것들이 무너져 쌓여있다.

“저 거대한 골렘들의 잔해를 이용하면 어떻게든 될 것은 같습니다.”

“고맙네.”

“제 삶이 위대한 혼돈께 도움이 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하나이다.”

그런 대화가 오가고 있는 와중 [지옥]으로 대피한 이들도 각지의 구멍으로 올라오고 있다.

여력이 남은 이들이 침공 세력의 잔당들로부터 호위하고 있다.

살아남은 것들 대부분은 미친 요정들이다.

그들의 신마저 쓰러졌고 돌아갈 곳도 없는 요정들은 당장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진 않으리라.

그리고 수거작업도 진행되었다.

하이브 마인드의 시체가 남아있는 곳이 우선 그렇다.

“와……. 징그럽긴한데 굉장하네요.”

희우가 천사와 악마들을 이끌고 날아가서 한 소리였다.

하이브 마인드의 육평선은 생명을 잃고 썩어가겠지만 그 몸속에 내재된 마력은 드래곤하트에 준하는 결정으로서 존재한다.

이 고깃덩이를 해체하며 캐내는 것은 이미 발굴의 영역이지만 말이다.

그건 [콜로서스]의 거상들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의 육신은 고도의 술식으로 새겨진 일종의 마력을 띈 대지다.

동시에 토양이기도 하다.

온갖 마법적 작물이나 기묘한 물건들을 재배할 수 있을뿐더러, 그 자체가 이미 동력원인 대지다.

“광기의 정령은 뭔가 안 남기나요?”

「그건 좀 특수한 걸 남기지.」

“어떤 거요?”

「13층의 어둠 정령처럼 광기의 정령도 육신을 가지고 있었지? 그건 결정화된 원소야.」

희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옆에서 듣고 있던 미아의 눈이 훨씬 더 커졌다.

“광기의 원소요? 그런 게 존재할 수 있긴 해요?”

「없으니까 귀중한 거지. 시신을 찾아봐야겠어. 흩어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가기 전에 말이야.」

성물만큼이나 귀한 물건이다.

[침공]을 한번 방어하고 [메인 던전]으로 돌입하는 빌드가 이래서 좋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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