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72화
왕국 - 폐허 위에서(3)
침공이 시스템적으로도 종료된 이상 새로운 적이 몰려드는 일은 없다.
말하자면, 한바탕 디펜스 캠페인을 진행한 후에 주어지는 넉넉한 시간에 해당하겠다.
다음 침공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몇 백 년은 후다.
다만, 그 잔당들은.
특히 미친 요정들과 통제를 잃은 하이브 마인드의 자식들은 숫자가 아주 많다.
무법지대라면 본래도 치안이라는 것이 그다지 널리 미치지 않는 무법지대였다.
하지만 적어도 같은 유배자였다.
이번은 일말의 협상조차 불가능한 완전한 무법의 땅이다.
그러니 새로운 인간의 영역은 일단 아주 좁게 시작했다.
최초의 유배자가 이 왕국에 발을 들였던 그 시절처럼,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작은 [리프트]와 왕국의 문 하나를 중심으로 말이다.
“사망자는 얼마나 늘어날까요?”
「정화의 신은 이럴 때를 대비하여 신앙을 최대한 아끼게 했는데 말이지.」
“지옥의 마력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군요. 예측할 수 없는 문제에요.”
「많이 죽겠지. 어쩔 수 없어.」
[지옥]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후유증을 앓았다.
지옥의 마력은 하이랭커급에게도 유의미하게 유해하다.
벨제뷔트가 제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짧은 시간동안 완전히 안전한 곳을 만들 수는 없다.
유해한 마력이란 결국 방사능과도 같다.
가난해서 인간으로, 약한 인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부터 천천히 죽어가리라.
그런 사실에 대해 분개하는 이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들도 올라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게 되자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천지가 뒤집히고 세상이 무너져 내렸구나.”
“신께서 모두를 벌하셨다!”
대충 저런 발언들이 곳곳에서 수집되고 있다.
SF의 영역에 도달한 서버의 기술들은 왕국 전체를 초토화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런 이들이 왕국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개인이 가진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통일된 미래의 서버도 그 막강한 함대를 모두 한 번에 왕국으로 이동시킬 방도는 없다.
서버 측에서 역으로 왕국을 공격한다면 강력한 소수가 되어야한다.
우주 전함이 리프트를 통과하는 건 어딜 보아도 무리지 않은가. 그건 애초에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서버는 미래로 갈수록 과학적 발전을 이루며, 과학의 힘은 개인에게 집중되지 않는다.
그러니 왕국은 미래의 서버로부터 안전하다.
그 대전제가 깨진 모습이 지금 성직자의 나라, 아니 ‘성직자의 나라였던 것’에 보여 지고 있다.
우주 시대의 함대가 지상에 남김 상흔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못해 실감조차 나지 않을 정도의 것이었다.
희우가 흥미롭다는 듯이 말한다.
“새로운 성직자의 나라는 분지가 되겠군요.”
「이게 분지냐? 구덩이라고 불러야하지 않을까?」
“그게 거대하면 분지죠 뭐.”
「그건 그래.」
고블레타리아 연방이 투사한 화력은 행성 파괴가 목적인 탄두들은 아니었다.
관통력 높은 성형작약탄에 가까운 물리적 병기들이었기에 이 정도에 그쳤다.
[콜로서스]의 거상들이 직격으로 얻어맞았고 지반은 그 여파를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
그럼에도 집중된 포화는 전체적으로 지반을 가라앉혀버렸다.
지옥에 닿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지대 자체가 훨씬 낮아져 거대한 크레이터가 형성되었다.
이전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고블린 건축업자들이 기도를 올렸다.
“위대한 혼돈이시여. 다층 구조의 도시 설계도가 나왔나이다. 지금 공물로 바치겠습니다.”
급조된 제단으로 설계도가 올라온다.
디테일은 전문가들이 해두었으니 내가 보는 것은 큰 틀에서 이게 좋은가일 뿐이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해서 원본은 루시에게 갔다.
나와 레미, 그리고 교단의 중진들과 각 길드의 대표들이 모두 모여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회의를 했다.
곧 건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량의 난민들은 고블린 함대가 가져온 식량선에서 식량을 배급하며 버텼다.
농사도 목축도 모두 침공으로 인해 날아가 버렸다.
도저히 다행이라 말하긴 힘들지만, 식량 소비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지옥 마력의 영향은 불과 하루였으나, 그럼에도 약한 이들부터 좀먹어 가고 있었다.
개중 진짜로 다행인 점도 있다면, 고블린들이 졸지에 숭배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하늘에 남아있는 압도적인 규모의 함대, 그리고 살 곳을 마련해주고 먹을 것을 마련해주는 구원자와도 같은 고블레타리아 연방의 존재.
신앙은 일시적이라곤 하나 끝 모를 정도로 치솟고 있다.
사실상 기존에 신앙이 없었던 모두가 혼돈의 신도로 새로 들어오고 있다.
어쩔 수 없다.
침공 방어전에서 눈에 띄었던 모든 인물들이 혼돈의 교단과 관련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화신을 좀 더해도 되겠군.」
그 말은 결국 [다차원 연속체]를 뻔질나게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군인들이 물러가고 건설업자들이 더 넘어왔다.
애초부터 저쪽의 기술력은 링 월드를 건설하며 다이슨 스피어를 만드는 수준이다.
우주를 통일한 고블레타리아 연방에 한계란 없다.
그 모든 사실을 보며 규율의 신이 내게 몸서리치듯 말했다.
[당신은 대체 뭘 만든 겁니까?]
[미래시대의 유일한 통일국가. 모든 자원을 독점하고 혼돈의 신에게 절대적 광신을 바치는 집단.]
[저도 언젠가 이뤄보고 싶은 꿈이군요.]
[그럼 처음부터 키워. 밑바닥부터 돌봐주면서 세뇌해가면 저렇게 되거든.]
[흐음…….]
뭐, 그렇게 쉽게 되진 않을 거다.
대장 고블린도 있어야 하며, 바르바로이도 있어야한다.
거기에 다른 신의 개입을 배제할만큼의 능력도 있어야하는데다가, 유배자의 간섭도 최소화할 수 있는 그런 서버 환경도 마련되야겠지.
그러니까 그냥 운도 좋아야하고 잘도 해야한다.
이미 존재 자체가 일종의 기적인 집단이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어떤 것을?]
[제 신도였던 이들마저 탄압하지는 않아서.]
[재산으로만 보진 않았나보군.]
[재산으로 보기에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이지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규율의 신이라고 모든 것을 숫자로만 보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탁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
완전한 악인은 완전한 선인만큼이나 드물다.
인간은 그 자체로 복합적인 존재다.
그리고 가끔은 혼란스러운 바늘을 ‘선’으로 확 돌려놓는 일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일시적이겠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 * *
다시 반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일단은 왕국에 발을 들인 순간 모든 일이 준비되고 있었다.
전후 복구도, 그 이후의 새로운 질서도 말이다.
나는 왕국을 단순히 장악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러 교훈으로 깨달았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냈다.
새로운 왕국의 수도인 새로운 성직자의 나라가 완성되었다.
사실, 완성은 훨씬 빠르게 되어있었다.
고블린들이 수없이 왔다갔다하며 그야말로 현대적인 도시를 만들어주었다.
나머지는 정치, 법률, 치안 따위의 아주 머리 아프고도 복잡한 일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선’으로 잔뜩 당겨 두었던 바늘은 슬금슬금 원위치를 찾기 시작했고 각지에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동시에 해결도 되어가고 있다.
“반년 만에 이정도로 안정될 줄은 몰랐는데.”
학장의 말에 레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어떤 시선으로 보아도 이전보다 나은 삶이며, 심지어 많은 이들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삶을 구현해주었잖아요.”
사실이다.
이미 많은 유배자들이 알고 있는 현대 그 자체를 미궁에 끌어당기고 있다.
미궁에서 아무 쓸모도 없다고 여겨지던 여러 바깥의 경력들이 높이 평가되며 새로운 자리에 앉혀졌다.
그렇다고 기존에 미궁의 질서였던 무력이 홀대 받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미궁에는 힘의 질서 역시 존재하고 있다.
학장은 그저 웃었다.
“나는 사실 지구에서 태어나 미궁으로 유배된 이가 아니라네. 돌아가신 부모님이 가끔 이야기했던 것을 들어 알고 있을 뿐이지.”
“좋죠?”
“원래보다야 훨씬 낫군.”
“전 죽을 거 같지만요.”
“새로운 통치자란 그런 법이지.”
“그거 하나도 즐거운 일이 아니에요.”
학장은 이제 그래도 다 끝나가지 않냐는 식으로 말하려고 했다.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는 시기다. 불협화음이 많다고는 해도 전부 무엇을 해야할지 안다.
더 나은 삶을 꿈꾼다. 이런 환경에서는 대부분의 문제가 사소해지는 법이다.
“이제 전쟁 준비를 해야겠군요.”
“아…….”
애초부터 [메인 던전]을 공략할 생각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새로운 왕국은 새로운 공격을 받을 것이다.
악룡이 의도하여 넘쳐흐른 침공보다는 약하겠으나 충분히 강력한 괴물들이 다시 이 땅을 넘보리라.
“전쟁이란 건 더 나아질 수 없는 결론이잖아요. 이 부분을 어떻게 선동해야할지 생각하느라 바빠요.”
“고생이 많군.”
그런 말을 하는 학장도 마법사들의 대표로서 바쁘기 그지없다.
지금도 그를 찾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도 모험을 하는 일이 훨씬 힘들겠지.”
“모험이요? 하긴 그때 쳐들어온 괴물들의 본거지로 모가지를 따러 가야하는 일이었죠.”
레미는 잠깐 고민을 하더니 대답했다.
“그거보단 여기서 고생하는게 낫겠네요.”
“그렇지.”
* * *
대신관 헨리는 직위가 이제 바뀔 예정이다.
나는 혼돈의 신좌에 존재하는 루시의 흔적들을 바리바리 싸들었다.
1만년의 추억이 담긴 것들인 만큼 루시는 그걸 챙겨 나오고 싶어 했다.
다만 막상 나올 때는 너무 급해서 그 생각을 못했다는 모양이다.
포탈이 열리고 헨리가 들어왔다.
“고생해라. 다음 혼돈의 신.”
“허허.”
헨리는 굉장히 기묘한 표정이었다.
그 험악한 얼굴로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여신은 루시일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고 그럴 것이다.
혼돈의 신좌는 그저 그가 대리하는 위치일 뿐.
어떻게 저렇게 성실한 사람이 갱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필요한 게 그렇다. 사람을 어느 구렁텅이에건 밀어 넣고 말지.
나 또한 필요에 의해서 움직인다.
파티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헨리가 혼돈의 신좌에 앉고, 신으로서의 모든 보정이 내 몸에서 빠져나간다.
몸이 찌뿌둥한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이야! 다들!”
“와아아아! 오빠 성분!”
희우가 달려들고 미아도 머뭇거리더니 달려와서 안겼다.
귀여워라 참.
아서나 에길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대로 나를 맞이한다.
신은 [메인 던전]을 직접 공략할 수 없다.
그러니 난 결국 내려와야한다.
일단 절망 접미 자체는 뽕을 완전히 뽑아먹었고 모두의 전력을 강화하는 것도 충분히 이루어졌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나다.
“좋아, 일단 내 레벨링부터 후딱 처리해야겠군.”
“신좌에서 방금 내려왔는데 바로 일이냐?”
루시가 자신의 짐을 받으며 묻는다.
요즘 한참 아이돌이나 다름 없는 인기를 끌고 있는 신들의 신, 전장의 아이돌.
“빨리 하는 습관이 있어서요.”
이제 얼마나 남았지?
[남은 시간 : 689일 1분 12초]
미친, 1년 좀 더 걸렸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만한 기반을 다졌다.
나로서도 스피드 런 최고 기록에 가깝지 않을까?
하지만 다른 문제도 있다.
침공으로 리셋된 새로운 [메인 던전]의 테마들이다.
그 중 하나가 참 악랄한 게 걸렸다.
[클리어에 가장 가까웠던 자들]
솔직히 말하면 침공 한 번 더 받고 테마를 다시 돌릴까 고민했다.
그러나 그건 할 짓이 못된다. 그래서 속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말하지만 정말 끔찍하게 많은 고민을 한 후에 내린 결론이다.
그래도 다시 보면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희우를 슬쩍 본다.
또 이 녀석이려나.
내가 지고 가야하는 업보로다.
“그래도 여긴 마지막에 가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