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80화
메인 던전 - Lv.9981 천상의 도시(2)
메인 던전은 멸망한 왕국이다.
그리고 왕국이 멸망하려면 그만한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미궁이 만들어둔 왕국의 순환은 생각보다 공고하다.
그게 무너지고 마침내 왕국이 왕국으로서 기능하지 못하여 새로운 메인 던전이 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지구가 핵전쟁으로 멸망하려고 해도 핵은 개발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든 메인 던전은 어떤 식으로건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던 세계다.
그 중 [빛과 어둠의 경계]는 신앙이 고도로 발달한 세계였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우리 헨리 혼돈의 신이 가지는 것처럼 숭고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규율의 신이 수확하던 시스템적 힘에 더 가깝다.
최초에는 우선 마법이 고도로 발전했다.
그리고 마법은 신좌에 닿았다.
신좌를 해체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된 유배자들은 이윽고 신이라는 개념을 없애 버렸다.
정확히는 의도적으로 없애 버렸다기보다는 신좌의 힘을 활용하려고 하다 보니 신이란 자리에 가치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신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숭배할 것이 필요했다.
어느 순간 숭배의 대상은 신이나 신좌가 아닌 미궁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눈부시게 발달한 마법은 잊혔다.
다른 세계에서 모여든 유배자라는 그들의 기원도 잊혔다.
남은 것은 쇠락해 가는 문명뿐이었다.
* * *
순교자들의 은신처라고 불리는 곳들은 흔히 비밀통로를 탑재하고 있기 마련이다.
대천사 노인은 친절하게도 그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래서 메인 던전에 진입하기 전에 리셋을 한번은 해야 한다.
그 메인 던전에 내가 처음으로 발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면, 먼저 온 다른 유배자들이 심어둔 인식 덕에 변수가 늘어난다.
저런 인물이 유배자들에게 어떤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 쓸모가 없어진다.
살얼음판을 걷듯 빠듯한 메인 던전 공략에 있어 그런 변수를 안고 간다는 것은 구멍 난 배를 타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최초의 진입자가 되는 게 가장 편하다.
하지만 노인이 알려준 지하 은신처에서 이어지는 지하 통로도 그다지 평온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천상의 도시로 갈 수도 없는 몸인 노인들이다.
그들은 특별히 비밀통로를 관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세계에서는 오랫동안 방치된 곳에 이상한 것들이 싹트는 법이다.
“그렇다곤 해도 시작하자마자 가는 지름길이 이 꼴이라니 좀 너무한데요.”
“지름길이라기보단 이렇게 안 가면 저 도시로 진입하는 게 거의 불가능할걸?”
“하긴, 고레벨 천사들이 득실거릴 테니까.”
[언더 그라운드] 유적과는 또 다르다.
그곳의 기천사들은 휴면 상태였지만 이곳의 천사들은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것들이 아니다.
악마들의 기습을 경계하여 도시 주변을 순찰하고 있는 치천사와 대천사 무리는 정말로 많다.
“거기에 인간형 천사만 있는 것도 아니라서.”
“악마도 플레이어블 악마는 사실 그렇게 강력한 종족이 아니라고 했었죠?”
“[지옥]의 그것도 다 악마였잖아.”
각 개체 하나하나가 단일 종족인 것들이 있다.
진정으로 인외의 존재이자 보스급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천사 역시 마찬가지다.
성서에서도 천사를 묘사할 때 무수한 날개와 날개에 달린 수많은 눈 따위로 묘사한다.
천사고 악마고 결국 인간이 아닌 괴물이다.
“저도요?”
“너는 아니지. 유배자는 모두 인간이니까.”
“후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결국 모두 인간. 그런 거겠죠.”
희우가 웃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항상 자신만만하게 웃는 대신 어딘가 수줍음이, 그리고 가련함이 있다.
바깥을 잘 몰라 불안해하면서도 나를 믿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그런 아기새 같음 모습.
갑자기 나이를 더 먹은 것 같다.
지금의 모습은 스스로 그리던 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여고생으로서의 희우니까.
생각해 보면 만화 주인공 같은 모습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치기가 나왔겠지.
부끄러워 죽고 싶어 할 테니 언급은 하지 않는다.
“버겁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적들이 굉장히 괴상한데요. 이거 어둠의 원소인가요? 빛이 잘 드네.”
“정령화된 원소지. 그리고 신성한 분노가 증폭된 느낌 들지 않아? 여기 테마 이름이 빛과 어둠인 이유가 있어. 다른 원소는 힘을 잃어가는 세계니까.”
“어둠 정령 같은 게 맞구나.”
비밀 통로를 개척하는 것은 희우와 나 둘이서만 했다. 다른 파티원들은 다른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
군데군데 무너진 곳 사이로 지하가 아닌 다른 것들이 보인다.
“13층에서 본 어둠의 정령왕이 떠오르네요.”
“찾아보면 여긴 그런 게 꽤 많을 거야.”
“잡몹인가요?”
“아주 그냥 발에 채이지. 야생 짐승 같은 것들이거든.”
희우가 다시 신음한다.
나는 통로를 조사하고, 희우는 어둠의 찌꺼기라고 부를 만한 원소 덩어리들을 처리한다.
상성이 잘 맞으니 저렇게 쉬이 처리하는 것이지 왕국 중심부에 갑자기 떨어뜨린다면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다.
저런 찌꺼기조차도 수치상으로는 레벨 3천을 넘보고 있을 정도니까.
“좋아. 불안정하지만 한동안 쓰는 건 문제없겠군.”
“대체 왜 지하가 이렇게 가라앉아서 어둠으로 가라앉고 그런 거야.”
희우는 한편으로는 투덜거리는 일도 많아졌다.
천재니까 할 수 있어요, 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같은 식으로 사고가 전환된 모습이다.
내가 좋아하던 아이와, 새롭게 좋아하는 아이의 모습이 섞여가고 그 다른 점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다.
“이게 어디로 나가는 거지?”
점점 붕괴되어 어둠 속에 떠있는 공간이 줄어들고, 건축 양식이 안정화된다.
먼 옛날에는 천상의 도시 일부로 지어졌던 지하 통로를 나중에 증축한 모양이다.
멀리서 본 천상의 도시와 같은 재질의 반듯한 흰색 지하실이 나타났고 그 위로 뚜껑 같이 생긴 트랩 도어가 보였다.
“살짝 열고 나가서 보고 와. 밑에서 기다릴게.”
희우는 천사이기에 누군가의 눈에 띄어도 문제없다.
인간인 나는 그랬다간 큰일이 날 수 있다.
물밑에서 움직이는 동안엔 그 이점을 최대한 누려야 하는 법.
얼마나 오래 안 썼는지, 문짝이 끔찍하게 뻑뻑하다.
곧 희우가 돌아왔다.
“굉장히 외진 곳의 작은 신전 같던데요. 버려져있는 것 같았어요.”
“외진 곳인 줄은 어떻게 알았어?”
최근 많이 신중해진 희우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창밖으로 도시 중심부가 보이는데 아직 멀었어요. 그 빛기둥이 치솟고 있는 곳 맞죠?”
“맞아.”
“조용히 숨죽이고 소리도 들어보았는데 쥐새끼 한 마리 움직이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희우도 반쯤은 암살자다. 기천사의 신체능력으로 그렇게 신경 썼는데 없다면 없는 게 맞다.
굳이 칭찬하지는 않았다. 칭찬할 시기는 지났다. 이미 어엿한 도전자이자 공략자다.
한 가지 확인해야할 분기.
“교회 내에 베데스다의 문장이 있었어?”
“네네. 흑백의 톱니 문양 말이죠? 없었어요.”
“좋아. 밖으론 안 나가봤지?”
“내부만 둘러보고 돌아왔어요.”
우선 돌아가서 미아 앞에 섰다. 미아는 여러모로 대단한 발전을 이룩한 상태다. 단순히 유틸리티라면 이제 나보다 능숙하다고 봐도 좋다.
실피드가 동원된다면 말할 것도 없지.
약 한 시간에 걸친 대공사 끝에 고레벨 천사들도 속일만한 위장이 만들어졌다.
미아가 그림을 취미로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정교한 환영은 그런 조형적 재주 역시 요구한다.
등에 나타난 치천사의 날개는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
땀을 닦는 미아를 쓰다듬어주고 지하실로 돌아온다.
오는 길에 또 어둠의 찌꺼기들이 리젠 되어 있었다.
“이거 꾸준히 청소해야 해요?”
“한 시간 만에 이렇게까지 리젠 될 줄은 몰랐는데.”
이번에는 내가 트랩 도어를 열었다.
끼익하는 낡은 소리와 함께 천장이 보이고 바닥이 보였다.
올라오자 희우도 얼른 따라왔다.
한 박자 늦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천상의 도시 – 구도심 하층]
이건 중요한 정보다. 구도심이 존재한다는 것이니까.
가끔 그런 구분이 없게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도시 내에서 발생하는 각종 이벤트의 트리거도 바뀐다.
선형적이라곤 해도 로그라이크인 법.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교회 내부를 탐색했다.
함정이나 감시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메인 던전은 한번 진입하면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곳이다.
이 위험한 곳에서 여러 가지 이벤트와 기믹을 뚫고 첫 번째 리프트까지 도달해야 비로소 우리의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멸망하기 전에는 수많은 유배자들이 생활하는 터전이었을 리프트는, 멸망 후에도 외부에서 진입한 유배자들의 탈출로이자 웨이포인트로 기능한다.
“이 도시 안에 하나는 있는 거죠?”
“반드시 있어. 애초에 유배자들이 쌓아올린 문명이니까. 유배자가 사라진 후에도 중심지였다는 상징성은 남지. 지옥의 성채에도 하나 있을 거야.”
“둘이 더 있단 거군요.”
“왕국 지리는 대강 비슷하니까 두 세력 사이의 전장에 하나가 더 있겠지.”
“거기가 원래 같다면 성직자의 나라겠네요.”
“맞아.”
탐색을 마쳤다.
내가 굉장히 제한된 마력만을 운용하는 모습을 보고 희우가 물었다.
“그 정도도 들킬 수 있나요?”
“너도 마법사용은 자제하도록 해. 악마가 무슨 종족인지 알잖아.”
“아…….”
마법의 종족인 악마와 영원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도시다.
당연히 마력 사용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대천사들은 그럼 마법을 안 쓰나요?”
“전장에서만 쓰지.”
“이해했어요.”
작은 교회는 천상의 도시 내부에 있어서 그런지 바깥의 낡은 교회처럼 무너져있지는 않았다.
꼼꼼한 탐색을 마치고 머물러도 좋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나는 내 모습을 덮은 치천사의 환영을 다시 점검했다.
“이제 나가볼까? 연기 해야 하는 거 잊지 마.”
“알았어요.”
희우가 심호흡을 하고 내가 문을 열었다.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와아.”
희우가 작게 감탄했다.
드러난 것은 눈부신 도시였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이 사방을 산란시키며 부서진다.
그렇다고 정말로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부시냐면 그것은 아니다.
사방에 흩어진 빛들은 정교하게 설계된 광학 장치들을 통해 은은하게 분산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도시 자체가 빛나는 듯한 인상이다.
“저기 하늘에서 빛 내리꽂히고 있는 건물 있지? 저게 이곳의 마지막 성배야.”
“최종보스인가요.”
“아니, 그 직전 보스.”
희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제니가 생각나는 표정이었다.
“하이브 마인드 직전에 나왔던 그거 같은 거죠?”
“맞아.”
더 타이런트, 그 거대한 괴물을 다시 떠올리면 저런 표정이 되는 게 맞긴 하다.
그때는 여러모로 정면승부가 아니었다.
강력한 조력자가 많았으며 마무리도 우리 손으로 한 게 아니다.
이번엔 우리 손으로 해야 한다.
여긴 적진이고 홈 어드밴티지는 적에게 있다.
“천사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말하지 말아야 해.”
“네.”
내가 앞장서서 걷고 희우가 입 다물고 무표정하게 그 뒤를 따른다.
천상의 도시에서 기천사는 노예 계급이다.
미궁의 선주문명이 만들어둔 진짜 기천사를 흉내 내어 만들어진 기계들 말이다.
희우는 그 중 하나인 척을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하드스록 때와는 다르게 외모로 특정당할 일은 없다.
기본적으로 천상의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천사이기에 아름답다.
혹은 지나치게 고위 천사여서 인간형조차도 아니다.
도시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동시에 위화감도 가득했다.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지저귀는 새도 없다.
인적이 드문 거리에 으레 있을법한 고양이 한 마리도 없다.
천상의 도시.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눈부시지만, 그곳에 살아가는 생물은 천사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