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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382화 (382/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82화

메인 던전 – Lv.6543 기계무덤(1)

기천사는 기계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고장이 날 수가 있다.

너무 오래전부터 기천사였던 것들은 상태가 이상할 수 있다.

선주문명의 기술력도 버그를 완전히 잡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로스엘처럼 오래 산 기천사는 어딘가 이상하다.

“상층의 인간 같지도 않게 생긴 녀석들은 너무해. 그냥 자기보다 급 아래인 천사다 싶으면 바보취급이나 하고.”

“유배자였어?”

“그건 아니야. 하지만 유배자였던 것들의 삶은 본적이 많지. 언더그라운드 유적에서 잠자고 있으면 엄청 따분하거든.”

희우가 잠깐 멈칫했다가 되물었다.

“유적에 있었어요?”

“응, 맞아. 거기서 휴면상태로 거길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 날 누가 찾아와서 깨어났어. 그런데 강하더라고. 한바탕 한 다음에 따라갔지.”

“따라갔다고요?”

“사실은 잡혀갔어. 그런데 거기도 괜찮더라고.”

희우가 따라가기 어지럽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로스엘은 아주 말이 많은 천사다.

미궁의 떡밥 중 상당수는 이 천사 NPC가 풀어낸 것이다.

오래 살아서 아는 것도 많고, 말이 많으니 그걸 자꾸 풀어놓는다.

“그런데 너희들은 이제 뭐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싸운 거야? 안에서 보고 있었는데 누굴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보통은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로스엘은 상관없다.

“너를 기다리고 있었지.”

“뭐? 세상에.”

원래도 있는 질문에 선택지에도 있는 대답이다. 로스엘은 혼자 엄청나게 박장대소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나 정도면 유명할지도 모르지. 위병들이 매일 이를 갈고 있을 테니까. 아, 저기 몬스터다. 너희들 싸움 잘하던데 좀 도와줄래?”

로스엘은 유배자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은 기천사다.

사용하는 어휘에서도 느껴지는 편이다.

“혼자였으면 20분은 걸렸을 텐데. 고마워.”

짧은 전투 후에는 흥얼거리며 걷는다.

그동안 오랜만에 돌아온 기계무덤을 살폈다.

이곳은 물리적으로는 천상의 도시 아래가 아니다.

그보다는 시스템 자체가 망가진 세계가 점점 허물어지며 [심연]과 맞닿아버린 곳이다.

주변을 살피면 심연과 굉장히 흡사함을 알 수 있다.

물리적 지형은 있으되 거기에 쌓여있는 것은 대부분 옛날 번성했던 시절의 흔적이다.

천상의 도시를 지탱하던, 혹은 그것을 건축하는데 필요했던 여러 설비들도 존재한다.

이제 천사도 악마도 낡아 부서진 이 무덤의 기계들을 재현할 수 없다.

찬란했던 옛것들이며, 그렇기에 무덤이다.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까지는 왕국도 참 살만한 곳이었는데. 이제 유배자도 없고, 남은 것들이라고는 전쟁놀이하는 천사랑 악마. 히히. X같은 세상.”

말이 지리멸렬하고 횡설수설해도 저 발언 자체는 진심일거다.

로스엘은 언더그라운드 출신 기천사가 왕국의 주민으로 적응한 드문 사례다.

희우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속삭였다.

“저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데요.”

“갑자기 왜?”

양손 검지를 맞대고 비비며 말한다.

“그, 저, 사실 처음에 저런 느낌 아니었어요?”

“기억이 있는 공개 수치 플레이구나. 플래시백 되고 그래?”

“으으으으으으. 저 녀석 입 좀 다물게 해주세요.”

1층에서 희우를 처음보고 내가 가졌던 감상이 지금 로스엘에게 비슷하게 나오는 모양이다.

혼자서 궁금하지도 않은 온갖 이야기들을 잔뜩 떠들어 대었는데, 생각해보면 친구의 연애 이야기 같은 건 아마 죄다…….

제 입으로 떠들며 실시간으로 설정을 만들고 있었던 걸까. 처음의 그 고양감은 그런 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블랑쉐보다도 오히려 희우가 이불을 걷어찰 날이 올줄이야.

부끄럽다는 건 정말인지 고개를 푹 숙인채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있다.

“언젠가 지옥의 성채도 가보고 싶어. 용암이 펄펄 끓고 있는 현무암으로 지어졌다는데, 거기서 비치베드 펴두고 있으면 일광욕하는 기분일까? 태양이 뜨지 않은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어. 해가 그립다.”

혼자 한참을 더 횡설수설한다.

기계무덤 내에서는 공간이 크게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처  이 얼마건 걸을 수 있다.

게임 시절에는, 흠. 한동안 이런 말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큰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로스엘이 NPC이긴 하겠지만 뭐 어떤가. 여러모로 자유로워진 기분이다.

어쨌건 게임 시절에는 저렇게 어마어마한 텍스트를 띄워 올리며 천천히 느긋하게 걷기만 하는 로스엘을 공격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야 뭐 죽이면 떨구는   있는 게임이니까 말이지.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따라가면 새로운 루트 하나가 열린다.

로스엘 같은 오래된 인물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서사다.

물론.

“저기. 너희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을 안 쓰네? 물어보지도 않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지?”

그대로 따라갈 생각은 없다.

그건 너무 느리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알아. 기천사인건 사실이겠지만 노예로 지내다가 탈출한건 뻥이구나? 그럼 너희들은 그거겠네 그거?”

여기까지는 통상적으로 로스엘이 보일 수밖에 없는 반응이다.

“너희들 유배자구나? 어떻게 들어왔어? 왕국의 문도 리프트도 모두 닫혔는데.”

택도 없는 논리의 비약이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게임 시절의 플레이어 캐릭터도 그런 모습을 보여줄 틈 따위는 없다.

이건 눈치가 빠르니 같은 문제가 아니다. 그냥 로스엘은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것이다.

유배자가 좋아서 왕국에 자리잡고 그대로 왕국의 마지막까지 이 세상 아래를 지키고 있는 천사.

원래 존재하는 루트대로만 가면 그 감정이 자주 폭주하고 고장나서 굉장히 민폐 캐릭터일 수 있지만.

“맞아. 유배자야. 천상의 도시를 박살내고 싶은데 도와줄래?”

게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선택지.

로스엘의 성격이라면 받아들일 것 같은 선택지다.

언젠가의 희우처럼 로스엘의 눈이 빛난다. 그대로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뭐야 그거, 완전 좋아!”

* * *

로스엘의 역할은 본래 기계무덤의 길잡이다.

공간이 마구 뒤섞여있는 이곳은 아무래도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마법이나 각종 방법을 총동원한다면 어느 정도 예측이야 가능하지만 나로서도 기상청 예보 수준이 한계다.

미궁의 시스템을 애초에 벗어나있기 때문이다.

그런 고로 로스엘은 아주 중요한 NPC다.

그녀는 어딘가 고장나있고, 그런 고장은 때로는 굉장한 장점이 되기도 한다.

“나는 말이야. 이유는 모르겠는데 세상에 난 구멍을 감지할 수 있어. 그러다보니 어디에 생길지도 알 수 있겠더라고.”

“우와. 정말요?”

희우가 영혼 없이 맞장구 쳤다.

“여기서 한 3천 2백년 정도 떠돌면 그렇게 되는 거야. 그보다 너 유배자라고 했지? 이리 와 뽀뽀 해줄게. 아유 귀엽다. 너.”

“어, 잠깐만요. 잠시만. 힘은 왜 이렇게 세! 오빠 살려줘!”

“진정하세요. 제겁니다.”

“앗, 그래? 너희들 그거야 그거?”

희우가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럼 볼에만 할게!”

“으아아악!”

저것까진 나도 못 말리겠다.

어쨌든 일단 로스엘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으니 귀환한다.

낡은 교회의 지하까지 다시 자잘한 잡몹을 처리하며 돌아오자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정교한 위장이 서서히 분해되며 사라졌다.

“정말로 인간이네?”

“물론 인간이지. 더 있어. 우리 파티를 소개해줄게.”

비밀통로의 문은 성지보다 더 아래로 내려간 구석에 있다.

구불구불한 길을 건너 돌아오자 입구를 마주보고 있던 미아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좋아, 한명은 아주 잘 해냈어. 앞으로 많이 쓰게 될 거니까 잘 부탁해.”

“후우. 실피드를 이런데다 쓰려고 계약한거군요.”

실피드는 이미 돌아갔다. 마법사 최종테크의 보조 연산장치인 정령왕은 전투보다 도리어 이런 유틸리티를 극한까지 추구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된다.

게임으로 치자면 마법의 실패율을 제로로 만들고 효과에 더 보정을 넣는다.

정령왕으로 직접 공격을 하느니 이렇게 쓰는 편이 더 효율적이다.

장기와 바둑을 두고 있던 아서와 에길도 불러왔다.

천사 노인들은 새로운 천사의 출현에 굉장히 의아해했다.

특히 대천사 노인이 뭔가 알아본 듯이 기겁했다.

“뭐지? 기천사? 천상의 도시에서 만들어진 기천사가 아니군. 어떻게 아직 남아있지?”

“짜잔, 로스엘은 왕국이 아직 왕국이던 시절부터 여기 살았던 천사랍니다!”

희우가 남의 언동에 고통 받고 블랑쉐가 웃음을 참지 못하는 가운데 미아는 그 모습이 또 즐거웠던 것 같다.

“처음의 엄마 같아!”

“으윽, 딸아. 제발.”

“지금 엄마도 좋아요!”

“그래, 고마워…….”

하지만 그렇다고 노인들과 로스엘 사이에 같은 시대를 공유하는 유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이 노인들보다 로스엘이 더 오래 살았다.

게이머들 사이에서 흔히 묶어 불리던 다른 개노답 삼남매도 마찬가지다.

썩을 대로 썩은 채, 자기 세상의 말로를 지켜보고있는 서버출신의 NPC들이다.

나는 파티원들에게 로스엘을 소개했고 로스엘은 그저 유배자를 볼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싱글벙글했다.

로스엘은 심지어 아서를 알아보았다.

“킹 아서잖아! 세상에. 당신을 다시 볼 줄이야. 뭐했길래 이렇게 늙었어요?”

이게 참 우스운 부분인 게, 랜덤 NPC들은 고정 NPC를 안다.

아서는 당황하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나를 아는가?”

“그럼. 알고말고. 잊을만하면 왕국에 다시 기억 잃은 채로 나타나서 무쌍난무하던 아저씨!”

놀랍게도 그 아서가 난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천사 좀 어떻게 해달라고 하는듯하다.

희우가 얼굴을 가리고 무너져 내렸다.

미아가 신성차단 장갑을 본인이 낀 채 쓰러지는 희우를 받쳤다.

에길은 껄껄껄 웃다가 한 대 맞았다.

“어! 바이킹! 당신 이름이 그, 에 에에에……. 에베베?”

“이런.”

그 다음은 블랑쉐였다.

“너! 내 손에 많이도 죽었지. 아직 메모리에 남아있어. 어, 그러니까 147회 죽였어. 나한테 덤비길래.”

“무슨 말이냐.”

블랑쉐가 으르렁거렸다.

로스엘은 그렇게 한바탕 헤집어둔 다음에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맞아! 고정 NPC들은 이런 말 하면 싫어했는데. 내가 미안해 사과할게.”

그러면서 그대로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니 화를 내기도 힘들다.

“괜찮아! 나도 NPC니까! 어차피 너희들도 다 NPC거나 NPC일지도 모르지?”

“그거야 그렇다만.”

난 로스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녀석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죽여버린 적도 있다.

아마 그 사실을 말하더라도 로스엘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유배자란 그냥 이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것일 터였다.

“좋아, 그런데 내가 제일 먼저 도와줘야할게 뭐라고?”

나는 스윽 훑어본 후에 대답했다.

“천사카드 구해야해.”

“그렇네! 그래야 천사인척하고 스며들어서 천상의 도시를 엎어버리겠구나! 눈알 달린 날개들 다 뽑아버릴 수 있는 거지? 난 예전부터 그렇게 생긴 게 천사입네 하고 돌아다니는 게 마음에 안 들었어!”

그건 나도 그렇긴 하다. 원전의 천사가 그렇다곤 해도 실제로 그걸 비주얼로 목격하면 코스믹호러적인 괴물 이상 이하도 아니다.

지닌 전투력 또한 코스믹 호러적이다.

“우선은 기계무덤의 챌린지 보스부터 잡으러 간다.”

안 잡아도 되는 보스를 챌린지 보스라고 한다.

딱히 이 테마의 클리어와 관계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잡으면 무언가 준다.

이 경우에는 카드를 고정 드롭하는 녀석이다.

천사 노인들은 성지가 어쩌네 뭐네 하면서 항의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경건함의 경자는커녕 경박함의 경자만 찾아볼 수 있는 로스엘이다.

그녀는 또 문양을 알아보고 베데스다의 후예들이 아직 남아있을 줄 몰랐다며 붙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노인들은 이내 포기해버렸다.

다만 아이들은 좋아했다.

관심을 빼앗긴 디스가 시무룩해하더니 제니의 무릎으로 가서 그루밍을 시작했다.

그 모든 폭풍 같은 모습을 지켜본 희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죠?”

“아니지. 훨씬 얌전하고 귀여웠는걸.”

“얌……전?”

로스엘과 비교하면 누구건 얌전할 것이다.

앞으로도 돌발행동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

게임 시절에도 로스엘은 툭하면 급발진을 하는 NPC였다.

그, 왜. 살려서 호송해야 하는데 너무 호전적으로 들이대는 바람에 잘 죽는 바보 같은 그런 애들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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