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83화
메인 던전 - Lv.6543 기계무덤(2)
기계무덤은 그 이름처럼 한때 이 세상을 구성했던 온갖 것들이 퇴적되어 있는 곳이다.
분위기는 심연과 비슷하지만 심연처럼 살아 있는 생체가 뒤틀린 느낌과는 조금 다르다.
“여기는 어떻게 이렇게 된 거예요?”
희우가 같은 기천사로서, 그리고 로스엘의 담당자로서 말을 걸었다.
로스엘이 그래도 동족인 희우를 다른 이들보다 좋아해서였다.
“그러게. 가장 처음 신좌를 찬탈한 이들이 만든 것들이 이런 거였어.”
그러면서 가리키는 것은 흐릿하고 어두운 이 거대한 공간 사이에서도 눈에 확 띄는 탑이다.
“저게 처음부터 저 모양은 아니었어. 한 2천 년쯤 전에는 탑이라기보단 신전이었지. 저건 기둥 중 하나야.”
희우가 멈칫하더니 입을 떡 벌렸다.
“얼마나 큰 신전이었던 거예요?”
“온 왕국에 신좌의 힘을 흩뿌리기 위한 장치였다나 뭐라나. 거대한 신앙 공장 같은 거였어.”
“그걸로 뭘 할 수 있는데요?”
로스엘의 눈이 향수에 잠기듯 아련해졌다.
“뭐든지.”
“뭐든지?”
“그래. 정말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어. 침공을 막아내는 것조차도 식은 죽 먹기였지. 지형부터해서 모든 것을 주물러 댈 수 있었으니까.”
“미궁 클리어만 빼고요?”
“맞아. 메인 던전으로 간다는 것은 다른 왕국으로 가는 거니까. 거기선 신도 힘을 잃지.”
로스엘이 잠깐 침묵했다.
“그래. 저건 신이었어. 유배자였던 신을 몰아내고 진정으로 전지전능한 기계장치의 신을 만들어낸 거지.”
지금 길잡이는 로스엘이다. 그녀는 기계무덤의 구석구석을 파악하고 있다.
나로서도 그녀보다 더 잘 알 수는 없다. 메인 던전의 영역까지 온다면 체험해 본 것보다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더 많아진다.
어쩔 수 없다. 모든 회차에서 메인 던전에 도전한 것도 아니며, 테마는 36가지나 되니까.
그래서 나도 로스엘의 뒤를 따르며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도 이 테마는 처음이 아니다. 그러니 오랜만이었다.
로스엘을 만나 저런 이야기를 듣는 것도 말이다.
내가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는 동안 파티원들은 로스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이 테마의 배경 설정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하지 않았다.
패턴 숙지와 피해야 할 상황을 설명하고 그에 따른 연습을 진행하는 것만 해도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파티원들에게 로스엘의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다들 좋은 청자가 되어주고 있다.
로스엘은 지금도 굉장히 즐거워했다.
“몰락은 갑자기 닥쳐왔지. 저걸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고 생각해?”
“엄청 오래 걸렸을 것 같네요.”
“맞아. 그리고 저런 걸 만들어낼 시간이 있을 만큼 침공에 대한 대응도 잘 되어 있었지. 그래서 이 왕국은 좀처럼 리셋 되지 않았거든. 그러면 어떤 인구가 늘어날까?”
희우가 생각했다.
그녀는 이제 한 왕국의 영웅으로서, 그리고 레미의 친구로서 왕국이라는 세계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어느 정도 안다.
“유배자가 아닌 인구가 늘었겠네요.”
“정답.”
그 이후의 일은 모두들 상상할 수 있었다.
많은 곳에서 유배자는 지배계급으로 군림한다. 가진 힘이 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이미 자리 잡은 유배자가 아닌 뉴비들은 그리 강하지 않다.
기껏해야 튜토리얼이나 겨우 통과한 수준.
그런 이들은 왕국에 이미 존재하는 마인드맵 없는 NPC와 비교해도 특별히 더 강하지 않다.
하물며 하이랭커라도 저 신이라는 것에게 저항하기는 힘들다.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인식이 변해갔어. 유배자가 어느 순간 대단한 이들이 아니게 되었고, 그러다가 마침내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들이 되었지.”
정확히는 불경한 자들이 되었을 것이다.
신규 유입 유배자들로서는 저 신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었을 테니까.
다른 무수한 세계에서 그들은 신좌에 앉은 선배 유배자를 신으로 여기며 지내왔다.
갑자기 그걸 다 때려 부수고 진짜 신이라며 저런 걸 소개하면 무슨 생각이 들까?
불신자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이미 미궁의 시스템을 자기들 마음대로 뜯어서 좋을 대로 고쳐둔 이들에게는 그것이 신이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불신자다.
그런 식으로 차곡차곡 누적된 인식은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 유배자는 왕국의 적이 된다.
유배자 입장에선 재수 없기 짝이 없는 일이다. 왕국의 문을 통과하자마자 노예가 되어버리는 그런 왕국이 간혹 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왕국의 주민들은 자신에게 유배자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마저 싫어하게 되었지.”
결국 모두 유배자의 후손이다. 그 사실이 참을 수 없는 것이 되기까지 오래 걸렸겠지만, 그렇게 되었다.
희우가 깨달았다.
상황도 잊고 박수를 치며 놀란다.
“그래서 다들 천사나 악마가 된 건가요?”
신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달리 말하면 신좌와 가장 가까운 종족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신과도 가장 가깝다.
“비슷하면서도 달라.”
로스엘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대화가 끊어졌다.
“아, 옛 친구들이네.”
“천사예요?”
“맞아. 천사였던 것이라고 해야 하나?”
기습은 아니었다.
의지도 자아도 잃은 검게 물든 타천사들이 비틀거리며 나타난다. 그 사이에는 검게 보이는 어둠의 정령들도 섞여 있다.
악마가 영락하여 짐승이 된다면 천사들은 타락하여 이지가 없는 기계 같은 존재가 된다.
다만 비척거리며 나타난 그것들은 좀비처럼 신음도 내지 않았으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리지도 않았다.
그래도 무언가가 생각나긴 했다. 더 더럽고 뒤틀려 있으나 그럼에도 다른 무언가와 흡사했다.
“기천사 같네요.”
“그러니까 다들 기천사를 배척하게 되었지.”
“신을 만들어낼 만큼 눈부셨던 마법들은 다 어디로 간 건가요.”
“신덕에 필요가 없어져서 잊혔어. 세상이 망해가면 이성과 합리는 쓸데가 없거든.”
로스엘은 이 전투마저도 신나는 모양이었다.
“혼자서는 못 이겨서 피해다녔는데 지금은 우리도 사람이 많네. 우리! 우리라니 정말 훌륭한 울림이야. 잘 봐봐. 내가 선배로서 저놈들 어디가 약점인지 보여줄…….”
희우가 로스엘의 입을 막았다.
보여주겠다고 저 사이로 뛰어들어 산화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은 충분히 일러두었다.
그 입막음은 물리적인 것이었다.
로스엘보다는 희우의 키가 더 크다.
자연스럽게 제압하는 형태가 되었다. 로스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희우가 손으로 로스엘의 입을 막은 채 말한다.
슬며시 웃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자자, 그건 우리도 잘 알아요. 싸우는 건 맡겨두세요. 로스엘이 다치면 안 돼요. 우린 길잡이가 필요하니까.”
제발 나대지 말고 얌전히 구경만 하라는 말이지만 로스엘에게는 다르게 와닿은 모양이었다.
“맞아. 이게 유배자지. 싸움에 미친 전투기계! 난 유배자가 너무 좋아.”
로스엘이 싱글벙글하는 가운데, 희우가 나만 보이게 눈을 찡긋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희우는 원래 저런 아이가 맞다. 사람 사이에 쉽게 스며들고 쉽게 친해진다.
로스엘은 얌전했다. 내가 한 번도 본적이 없을 정도로 얌전했다.
희우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로스엘을 감시했다.
로스엘은 보고만 있어도 신나는 모양인지 희우에게 뭔가 한참을 떠들고 있었다.
우리 파티가 불안해 보였다면 기꺼이 참전했겠으나, 그리 보이지 않도록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덕이다.
전투가 끝나고 지친 표정의 희우에게 엄지를 들어주었다.
* * *
이곳의 모든 천사들과 악마들은 저 신의 권속이었다.
그리고 신은 이제 간신히 세상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미궁의 의지였으며 이 왕국의 선택이었다.
미궁은 시스템을 어그러뜨린 이 왕국에 더 이상 유지력을 부여하지 않는다. 도리어 새로운 던전이 생겼음에 기뻐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중계 수단을 어그러뜨렸으니 하고 싶어도 부여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래서 이 세상을 유지하는 것은 저 몰락한 신이다.
의지도 없고 그저 비는 것들의 소원만을 이루어주는 신좌의 집합체 말이다.
그러나 당연히 미궁 자체의 서포트가 없는 신좌 시스템의 일부는 홀로 세상을 감당하지 못했다.
기계장치의 신은 서서히 몰락해 갔다.
그리고 그 권속인 받은 천사들도 악마들도 심연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신이었던 것의 일부인 기둥 주변으로 갈수록 적의 수가 늘어난다.
그야 어쩔 수 없는 것이 타락한 천사란 것은 신이 몰락하며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것들은 아마 아직도 저걸 지키려고 할걸? 막상 저 위에 있는 천상의 도시나 지옥의 요새들은 저 신의 존재조차 잊었어.”
희우가 미간을 찌푸리고 로스엘에게 물었다.
“대체 그 몰락이 얼마나 이전에 일어난 건데요?”
“글쎄? 1만년이 넘고 나서는 세지 않았어. 다들 미쳐 버릴 만큼 긴 시간이긴 했지. 모든 게 잊힐 만큼도 긴 시간이었고.”
“오, 세상에. 인류사가 몇 년이더라.”
블랑쉐가 고개를 갸웃하며 끼어들었다.
“그럼 로스엘은 몇 살이냐.”
“그러게? 1만은 넘었겠지? 그것도 세지 않은지 너무 오래 지난 것 같아.”
“할머니였군.”
“히히히. 그렇지. 난 할망구야.”
할망구가 말했다.
“그래서 너희들이 잡으려고 하는 건 저기 있는 저 녀석이지?”
“멀리서도 잘 보일 정도로 크네요. 저것도 원래 천사였다면서요?”
“나는 모르는 녀석이지만 말이야.”
로스엘의 안내에 따라 지대가 높은 곳까지 최소한의 전투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러자 장관이 보이기 시작한다.
멀리서 탑처럼 보였던 신전의 기둥은 다가가면 갈수록 더 커졌다.
거의 하드스록의 요새가 생각날 정도다. 신전이라 함은 산맥의 스케일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한눈에 보아도 보스인 고위 천사가 기둥 주변을 맴돌고 있다.
소용돌이치는 서른여섯 장의 날개가 가운데의 비교적 작은 구체에 달려 있다.
부력을 날개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는 듯이 천천히 펄럭인다.
날고 있지만 난다기보다는 헤엄치듯, 어둠 속을 조용히 유영하고 있다.
“멀쩡한 천사는 아닌 거 같은데.”
“저것도 타락한 천사야. 신의 힘을 받아먹고 살던 녀석이니까.”
“악마는 없어요?”
“짐승이 되어버린 악마들은 다른 기둥을 지키고 있지.”
로스엘은 아까 끊겼던 이야기를 마저 하기로 결심한 것 같아 보였다.
그녀가 갑자기 포르르 날아오르는 바람에 희우가 기겁을 하고 따라갔다.
다행스럽게도 로스엘은 적진을 향해 돌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주변을 슬쩍슬쩍 살핀 다음에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돌아왔다.
심장이 벌렁이는 것 같은 희우가 얼른 로스엘을 포박했다.
로스엘은 전혀 개의치 않고 희우에게 안긴 채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까 하던 이야기인데, 모두 천사나 악마가 되려고 해도 카드가 그렇게 많이 존재하지는 않잖아?”
“저기 기둥만 남은 저 신의 힘으로도 이룰 수 없었나 보죠?”
“미궁의 영역이었던 게 아닐까? 세계를 주무를 수는 있어도 개개인을 주무를 수는 없었나보지. 어쨌건 제 몸에 흐르는 유배자의 피를 견딜 수 없었던 이 왕국의 주민들은 다른 방법을 택했어.”
내가 말을 받았다.
“바벨탑의 주변을 맴도는 고위천사와 고위 악마들을 마구잡이로 불러댔지. 그것들의 세례를 받아도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
“맞아, 서버 구석탱이에 소수만 스폰되는 녀석들을 불러들였지. 그것들은 신과도 비슷한 존재기에 이미 신좌가 사라졌음을 알고 있었어.”
아서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좋은 결과는 아니었나 보군. 외형을 보아도 특별히 인간적일 것 같은 존재는 아니다. 성스럽긴 하다만, 그건 차라리 인간이라기보단 신이라고 불러야 할 그런 느낌일세.”
“맞아. 신좌가 없는 왕국에 들어서고 세례를 내려 왕국의 주민들을 천사나 악마로 만들었지.”
그건 권속화와 다르지 않은 말이다.
신좌가 없는 세상에서 그들은 신앙을 끌어모아 새로운 신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신들에게 본래 존재하던 기계장치의 신은 방해다.
“뭔가 끊임없는 다툼의 연속이네.”
“사람이나 괴물들이나 신적 존재들이나 다 똑같은 거야.”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지금 이 테마 속의 신은 그 고위 존재들이 해먹고 있다.
기계장치의 신조차 세상을 유지하도록 방치되어 있을 뿐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괴물들의 뜻에 의하여 이 천사와 악마는 끝없는 전쟁만 벌이고 있을 뿐.
로스엘이 지긋지긋해 할 만도 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여긴 죽어 있는 세계다.
로스엘이 검게 물든 고위 천사를 가리킨다.
“그런 놈들도 저렇게 타락하는 것들이 있지. 저건 이제 신 취급도 못 받으며 영락한 잔해야. 생존하기 위해 저 신전의 잔해에 빌붙어 있는 거지. 아직도 저건 작게나마 신앙을 끌어모으고 있거든. 저놈이 살아있는 만큼 세상이 더 빨리 망하겠지만.”
길잡이는 이제 역할을 다했다.
지도도 없는 이 드넓은 곳에서 지도의 역할을 했으니 다음은 우리의 일이다.
그것을 깨닫고 로스엘이 걱정스럽게 우리를, 그중에서도 리더인 나를 보았다.
“난 유배자 중에서도 도전자를 좋아하긴 하지만 말이야. 저거 이길 수 있는 것 맞아?”
정말 자주 듣는 질문이다.
이길 수 있나?
해낼 수 있나?
나는 항상 같은 대답을 한다.
“시간을 들여 함정을 파고, 유인에 성공한 후, 실수 없이 택틱대로 하면 충분하지.”
로스엘이 활짝 웃었다.
“역시 유배자가 최고야. 이런 멈춰 있는 세상에 어떻게 너희들이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정말 고마워.”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얼른 다 때려 부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