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87화
메인 던전 - Lv.12000 쌍둥이 천사 [산달폰סנדלפון](2)
기믹 보스라는 것은 보통 동급의 보스보다 높은 스펙을 가진다.
그 대신 스펙과 무관하게 그것을 어떻게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다.
산달폰의 경우는 2페이즈까지는 포격형 사수 보스다.
방어력과 체력이 낮아 화력 집중으로 녹여버리기는 쉽지만, 그 화력 집중을 할 기회가 적은 타입.
하지만 3페이즈에서는 갑자기 본연의 대천사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산달폰은 원래 전사다.
심연에 잠식되어 영락한 모습이 저런 끔찍한 날개달린 눈알일 뿐이다.
성서에서 일어서면 머리가 하늘에 닿는다고 묘사되는 그 모습은 거인조차 명함을 내밀 수 없는 수준이다.
그리고 거인은 플레이어블 종족 최강의 물리 공격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
3페이즈의 산달폰은 메타트론과 쌍둥이이자, 영원한 전쟁 초기에 이름을 떨친 전사로서의 대천사다.
이런 반전은 게임 시절에도 당황을 유발하는 요소로, 고난이도 보스인 [위대함의 편린]을 공략하고자 모든 리소스를 투입한 유저들에게 큰 엿을 먹인다.
아니, 그야.
보스가 강력한 마법사라고 판단하면, 마법 저항을 1mg이라도 더 가져오려고 노력하게 된다.
장비도 마법 저항으로 둘둘 말고, 경우에 따라선 포인트도 소비할 것이며, 마법에 강한 종족으로 종족 변경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3페이즈부터는 전사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게 무슨 폭거인가 싶지만, 미궁은 이미 힌트를 제공했다.
로스엘이 말하며, 순교자의 은신처에 있는 늙은 천사들도 말한다.
산달폰은 영락하여 저 기둥에 모이는 자잘한 신앙을 받아먹고 있는 존재라고.
그리고 메시지로도 알려준다.
[영락한 산달폰]이라고 하다가, 갑자기 히브리어 까지 옆에 박아가며 진정한 대천사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게 가능했다면 처음부터 그러고 있지 않았을까?
이런 의심을 해봐야 미궁을 헤쳐 나갈 수 있다.
나는 의식이 제대로 들자 마자 소리쳤다.
“도망쳐!”
성공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1페이즈는 되면 좋다의 영역이었으며, 2페이즈는 스킵하지 못하면 후퇴한다의 영역이었다.
3페이즈는 정석 공략 자체가 기둥에서 이미 멀어진 산달폰을 상대하지 않고 시간을 끄는 것이다.
블랑쉐의 분신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기동성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미아가 열심히 드래곤 하트를 씹는다.
“이리로!”
“제니! 살아서 봐!”
미아가 제니에게 인사하고 제니도 발동한 스킬들의 지속 시간이 남아있는 동안 서둘러 도망쳤다.
반면 에길은 너무 가까웠다.
희우가 아서를 불러 지원하러 간다.
나는 버프의 반작용으로 걸린 디버프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그대로 도망친다.
뒤편에서 산달폰이 불타는 검을 휘둘렀다.
하반신밖에 보이지 않을 크기다.
그것은 검이라기엔 너무나도 컸으며 차라리 산사태 따위가 덮쳐오는 재해에 가까웠다.
쾅하고 지형이 평탄화된다.
미아가 이어둔 통신의 실도 모조리 날아갔다.
지금부터는 각자 살아남아야한다.
시뮬레이션은 많이 했다.
동료들을 믿자.
“마력 융통해줄게.”
“고마워요. 아빠.”
파티원 중 태생적으로 마력을 많이 보유한 케이스는 나와 블랑쉐.
신좌에 앉아있는 동안 나와 그걸 할 여유는 없었으나 블랑쉐와 미아는 오랫동안 서로의 마력을 공유하는 연습을 했다.
마법사의 마력 탈진을 막고, 추가적인 유틸리티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연계다.
클래스에 맞춰서 종족을 세팅하다보면 꼭 마력이 남아도는 파티원이 생기거든.
블랑쉐는 마력을 거의 활용할 이유가 없는 클래스기에, 마법의 종족인 악마의 특성대로 넉넉한 마력만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용사인 나 역시 마찬가지다.
미아가 능숙하게 연결한다.
디버프가 있는 나보다는 멀쩡한 미아가 하는 편이 더 좋겠지.
시야가 확보되는 것이 느껴진다.
무수한 힘의 격류 속에서도 파티원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볼 수 있는 [원소의 눈]은 유틸리티 마법사로서도 최고의 스킬이다.
그리고 대천사의 모습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산달폰은 바보가 아니었다.
곧, 마법이 간섭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대천사가 우리를 노리기 시작했다.
디버프는 해소된 후였기에, 문제 없다.
산달폰은 오랫동안 우리 파티와 두더지 잡기를 해야했다.
* * *
로스엘은 그 모든 과정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멀리서 볼 생각은 아니었지만 엄청나게 정색하고 저기 멀리 꺼져 있으란 말을 들은 이상 척은 해야했다.
유배자들은 저걸 이길 수 있다고 말했으나 정말로 될까 하는 의문은 계속 존재했다.
유배자란 도전하기에 아름답다.
하지만 도전에는 필연적으로 실패가 따른다.
그렇게 스러지는 것마저도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도 옛날이야기.
불멸에 가까운 존재이자 주인 잃은 기계인 로스엘은 그렇기에 유배자를 좋아했지만, 동시에 그렇기에 이 오랜만에 보게 된 유배자들이 살아남았으면 했다.
그들이 극구 말렸음에도 슬금슬금 다가와 가까운 곳에서 보고 있었던 것은 그 탓이다.
저렇게까지 영락한 산달폰은 로스엘을 기억할까?
아닐 것 같다.
하지만 저쪽이 저렇게 마지막을 불태워 한때의 찬란한 모습을 되찾았듯, 로스엘 역시 그럴 수는 있다.
이 쇠락해가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그만두고 말이다.
그 정도면 의미 있는 최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네?”
그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산달폰의 전성기가 어떠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때의 그 모습으로 나타나 대적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나타난 유배자들은 누구도 죽지 않았다.
“하하…….”
로스엘은 눈가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러면 스스로 기름 샌다면서 낄낄대곤 다시 웃었는데.
그랬던 적이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어딘가 망가진 마음 한구석에 여러 추억들이 스쳐지나간다.
빛이 스러진다.
기계장치의 신이 수집하는 신앙도 세상이 더더욱 쇠락해가여 줄어만 갔다.
산달폰이 본능으로만 맴돌며 축적해온 신앙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본래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얼마 되지 않는다.
“안녕. 산달폰.”
들리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점점 힘을 잃고 쓰러져가던 거대한 천사가 이쪽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로스엘은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어 날렸다.
산달폰이 그것을 받았을지는 모르겠다.
얼른 눈물을 닦고 날아갔다.
* * *
“와아아아아! 미쳤어! 3만년 평생, 아닌가? 더 되나? 한 4만년 살았을지도? 어쨌든 그 평생 중에 이렇게 놀란 건 처음인거 같아.”
포르르 날아온 로스엘이 그야말로 펄쩍펄쩍 뛰면서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멀쩡한 몰골의 파티원이 없는 관계로 아무도 호응은 하지 못했다.
미아는 마력 탈진으로 눈을 감고 신음 중이었으며 아서와 에길은 시커멓게 그을린 채로 장비를 손질 중이다.
희우와 블랑쉐는 외견은 상당히 멀쩡했지만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공중에서 둘이 함께 시선을 분산하기 위해 엄청나게 기동력을 발휘해야했다.
산달폰은 단지 검을 휘두르기만 했지만 그럼에도 그 범위는 어지간한 광역 마법의 10배는 되었으니 별 수 없다.
“천사가 된 후로 그런 곡예비행은 처음 했어요…….”
“맞아! 나도 기천사가 그렇게까지 아크로바틱하게 날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어!”
로스엘이 희우를 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결국 희우가 토했다.
정말로 멀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었겠지.
죽음 그 자체도 문제지만 이 날을 위해 너무 많은 준비를 했다.
“후아아.”
제니도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몸에 상처는 없다. 마지막에 제니의 역할은 의무병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그렇게까지 심한 위기에 처한 파티원이 없었다.
“뭐 저딴 게 다 있어요? 저건 영락한 버전이라고 했죠? 그럼 처음부터 진퉁으로 나오는 녀석들도 있어요?”
“그럼, 당연하지.”
“왜 아무도 못 깼는지 알겠네. 이걸 깨라고 만든 건가. 미궁은 미치광이야.”
뭐, 나는 이 정도면 가능은 하다고 생각하는데. 약점이 확실하게 존재하지 않나.
기믹이 있고 그걸 파훼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되는 법이다.
“또 이런 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 응? 앗?!”
그리고 갑자기 제니의 꼬리가 팟하고 섰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귀도 꼿꼿하게 솟는다.
마지막으로 꼬리의 털이 펑하고 폭발하듯이 부풀어 올랐다.
다른 파티원들도 움찔거리거나 안색이 바뀐다. 희우는 토하다가 삼켰다.
미아는 반쯤 기절한 상태로 경련했다.
모두의 몸에 산달폰이 흩어지며 발생한 빛이 깃들고 있었다.
[Fragment Of Greatness Slain]
[편린이 당신들에게 깃듭니다.]
내게도 그랬다.
경험치는 쾌감이다.
그간의 레벨링에 무뎌졌다곤 하더라도 메인 던전 내부의 [위대함의 편린]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경험치를 많이 준다.
파티원들끼리 분배하더라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양이다.
마지막으로 제니가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로스엘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너희 정도 인원으로 저런 걸 쓰러트린 케이스는 거의 없을 거야. 당연히 엄청나게 분배받았겠네.”
내가 그래서 물량 공세를 포기했다.
대량의 인원을 통한 공략은 어느 정도 수월해보일 수 있으나, 성장이 없다.
그럼 갈수록 인원만 소모되며 점점 힘들어진다.
거기에 그 누가 전쟁을 좋아하겠는가?
몇 번의 레이드 성공 이후에 충분한 보상을 얻은 이들은 다음 레이드에 참가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피가 끓는 싸움이었다. 마지막의 그 천사와 무기를 맞댈 수 없었던 것이 좀 아쉽군.”
“허, 자네 도망만 다녔으면서 무슨 말을 하는가.”
에길이 말하자 아서가 날카롭게 찌른다.
“검격을 피하며 좀 공격을 넣어봤소. 손맛이 괜찮던데.”
“흠. 그건 그랬어. 어쩌면 정면으로 싸웠어도 이겨낼 방도가 없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랬다면 부활 스택을 좀 소모했겠지.”
“이제 시작한 것이니 무리해서는 안 되지 않겠나.”
파티의 연장자로서 상당히 친하게 지내고 있다.
그리고 다음을 두려워하고있지도 않다.
축 늘어진 다른 파티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만들고 싶던 파티다.
그리고 하늘에서 카드가 팔랑거리며 내려왔다.
10장이나 되었다.
“최대치가 떴네. 최소치는 5장인데.”
산달폰이 쓰러진 먼 곳에 빛을 내뿜으며 내려온 10장의 카드들이 멈춰선다.
로스엘이 물었다.
“힘들어보이는데 내가 가져올까?”
“아니요. 파티에 뽑기 담당이 있습니다.”
이건 게임 시절에도 로스엘을 살려서 클리어하면 반드시 물어보는 선택지다.
로스엘이 가져오게 하면……. 기천사만 10장이 된다.
희우가 다시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카드 뽑아올게요. 무조건 천사나 악마만 나온다고 했죠?”
“반은 악마 나오는 게 이상적이야. 다 천사면 우리 망해.”
“네네네. 노력해보겠습니다.”
희우가 침을 꿀꺽 삼키고 날았다.
* * *
사도들이 자리를 비우고, 열려있는 성지의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대천사 노인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함께 성지를 보고 있던 나이든 여성 치천사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왜 그러나?”
“…… 산달폰이 죽었군.”
“사도들의 짓인가?”
“짓이라고 하기에는…… 그것이 순리겠지.”
치천사 노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애도나 표하면 되겠군.”
“그래, 이 멈춰선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모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