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88화
메인 던전 - Lv.10250 순교자의 은신처(1)
희우는 긴장된 표정으로 날아가 카드에 손을 뻗었다.
뭉쳐 있는 미확정 종족 카드 10장은 각각이 하나의 빛무리 같았다.
악마 카드가 반드시 한 장은 있어야 한다.
두 장이면 더 좋다. 그래도 꼭 세 장일 필요는 없다.
제일 이상적인 것은 딱 반반이 나와서 적절하게 분배하여 천상의 도시와 지옥의 성태 두 방면을 동시 진행 가능한 경우다.
이 순간 가장 긴장한 것은 희우일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운의 어그러짐은 이미 많이 겪어보았다.
왕국에서 지난 반년간 서브리더로서 활약하면서도 수없이 증명되었다.
희우 덕에 키 아이템을 아주 경제적으로 사용했다고만 해두겠다.
그게 메인던전에서도 먹힐까?
먹힌다면 그건 이득일까 손해일까?
일단 잘 모르니까 모든 경우를 다 고려하고 있다.
사실 전투 이전에 산달폰의 존재하면 안 되는 4 페이즈도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산달폰이 최후의 발악에 가까운 시한부 완전체가 아니라, 진정으로 부활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기둥이 파괴되며 그 힘을 가지고 뭐 더 곤란하고 위험한 존재로 승천해 버린다거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보험은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 친구 로스엘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나서서, 후퇴할 여유를 벌어주었을 것이다.
로그라이크답지 않게 본격 패턴 파훼 레이드가 들어간 메인 던전이다.
마찬가지로 로그라이크답지 않게 안전장치가 몇 개씩 존재한다.
이번 경우에는 로스엘.
우리가 산달폰에게 전멸할 위기에 처한다면 저 고장 난 기천사는 자신의 마지막 생명을 불태워 후퇴할 시간을 벌어주고 산화한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결과가 아니다.
이번 테마에서 다시는 로스엘을 볼 수 없게 되며 관련된 모든 인카운터와 분기점이 싹 날아간다.
그렇게 되면 [빛과 어둠의 경계]라는 테마의 난이도가 더 올라간다.
반드시 살려야만 한다.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희우가 손을 뻗었다.
빛무리들이 빨려들 듯 희우의 품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빛이 벗겨지며 각각의 카드에 새겨진 문양이 드러난다.
희우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대로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로 날아왔다.
음속으로.
소닉붐과 함께 희우가 내게 카드를 내민다.
뻣뻣하게 굳은 것 같은 손이다.
“괜찮겠죠?”
“일단 줘봐.”
희우가 안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이었다.
나로서도 갈등이다. 확인하기 전까지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과연 우리 서브 리더의 뒤틀린 행운은 파티의 걸림돌일 것인가.
이 파티에 없는 편이 더 공략에 유리할 것인가?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된다면, 한결 마음이 편해지리라.
카드를 받아서 보지 않고 덮었다.
마력을 이용해 허공에 띄운 채 뒤집어두었다.
앞의 문양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무슨 카드인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촤르륵 펼치고 그대로 한 번에 뒤집는다.
“깔끔하군.”
“정확히 반이네.”
희우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행이다. 이번에는 좋은 쪽으로 일한 게 아닐까요?”
“계속 그럴 수 있다면 좋겠는데.”
“불안한 소리 하지 마세요…….”
그래도 확인할 수단이 생길 것이다.
블랑쉐가 심연의 목소리를 듣고 온 것도 그렇고, 본래부터 메인 던전은 대신격이 주시하는 곳.
행운의 신에게 직접 물을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희우는 대체 무엇인가를 말이다.
구경하던 로스엘이 방긋방긋 웃었다.
“카드를 얼마 만에 보는지 모르겠어. 산달폰을 잡으면 그런 게 나오는구나. 내가 잡았어도 나왔을까?”
“글쎄요? 아마도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지. 미궁의 주인공은 유배자니까.”
로스엘은 대신 말했다.
“혹시 내가 악마가 될 수도 있는 건가? 그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악마 해보고 싶습니까?”
“천사를 너무 오래 한 것 같기도 해.”
나는 피식 웃었다.
“꿈도 꾸지 마세요.”
게임 시절에도 로스엘과 대화를 많이 하다보면 발생하는 선택지다. 악마 카드를 줘서 종족을 바꿔보는거 어떨까? 하는 것.
그런데 그건 배드 엔딩 분기다.
개노답 삼남매를 아무나 하겠는가. 잘못 건드렸다간 큰 틀에서 전개가 마구 꼬이는 친구들이니까 개노답 삼남매지.
다른 두 놈도 세심하게 지뢰를 피해야 하는 귀찮은 놈들이다.
* * *
“우선은 예비 도끼다만. 나는 이제 더 이상 필살의 물리 어태커로서 기능할 수 없겠군.”
“그것도 천사 장비였음을 잊지 마세요. 에길.”
“물론 리더는 믿고 있다. 그저 정든 도끼가 사라져서 아쉽다는 이야기지.”
에길은 정말로 섭섭해 보였다.
뭐, [타오르는 날개]는 로망이 넘치는 무기기는 하다. 단 한 방에 대가리를 찍어버리는 그 손맛은 모니터 너머 도트로도 느껴졌으니까.
보스전에서 환경이 제대로 갖추어진다면 그보다 좋은 무기도 드물다.
하지만 드물다는 것은, 있기는 있다는 뜻이다.
“한동안 산달폰처럼 메인 던전의 진행과는 관계가 없는 놈들을 먼저 썰고 다닐 겁니다. 그래야 왕국에서 막을 침공이 짧아질 테니까요. 우린 충분히 파밍한 후에, 단숨에 돌파할 겁니다. 그러니 에길의 다음 무기도 구할 수 있어요.”
애초에 에길에게 탑재한 유니크 스킬은 [천마]다.
무한정 계속되는 전투에서 밑도 끝도 없는 지속딜을 뿜어내기 위한 스킬이다.
단 한 방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는 세팅이며, 무기빨도 상당히 적게 탄다.
게다가 그런 지속적인 물리 딜링이 필요한 보스도 널려있다.
아서가 씁쓸하게 자신의 등에 매여 있는 검을 만졌다.
“남일 같지가 않군. 엑스칼리버도 이제 거의 끝이 다가오고 있으니.”
“음…….”
에길도 그 발언에는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왕으로 선택받은 이유이자 아서의 인생과 함께 해온 보검이다. 아서의 심정이 어떨지는 나도 잘 알 수 없다.
“이런. 내가 분위기를 좀 가라앉혔나? 괜찮다네. 난 이 검이 멀린보다 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아서는 이미 설명을 들은 적이 있기에 안다.
멀린은 심연의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아서와 만나기 전에 먼저 사망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것은 그렇게 정해져 있는 인카운터다.
아서는 그 사실을 듣고도 어떤 그늘짐도 없었다. 그저 담담한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충분히 작위적임에도 군말하지 않는 그 태도는 아마 에길이나 블랑쉐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리라.
사실 우리 파티의 분위기는 자신들의 삶이 어떤 거대한 의지에 놀아난다고 해서 절망하는 쪽이 아니다.
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고자하는 모습이다.
어쨌건 아서는 아직도 멀린을 다시 만나고 되찾을 그날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분위기가 묘해지기에 내가 화제를 전환했다.
“일단 말입니다. 여기까지 왔으면 카드를 귀중품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소모품이에요.”
“아껴서 똥 된다는 말과 같은 거군.”
“메인 던전에 진입한 시점부터는 원래 필요에 따라 종족을 마구 넘나들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종족 유니크 스킬을 별로 안 좋아해요.”
항상 희귀한 소모품을 죽도록 아끼는 유형이 있다.
그렇게 아까워서 안 쓰다가 최종보스를 때려잡고 엔딩 스크립트가 흘러나오는데도 가방에 그대로 들어 있는 사람들.
물론 미궁은 아낀다고 아껴질 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메인 던전 쯤 왔으면 정말로 모든 것이 소모품이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파티원도 그렇다.
물론 이번 회차에서 내가 파티원을 소모품으로 여길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해봤는데 그렇더라고.
항상 물량 공세만이 정답은 아닌 법이지.
로스엘은 흥흥거리며 희우와 노닥거렸고 정신이 헤롱헤롱한 미아는 제니에게 업혀있다.
다들 여기저기 그슬리고 처참한 몰골이었지만 표정만은 밝았다.
로스엘의 인도에 따라 어둠과 맞닿은 비밀통로까지 돌아왔다.
되짚어서 성지까지 도달하자 두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대표로서 행동하던 대천사 노인이었고 그 옆은 다른 치천사 노인이 있었다.
대천사 노인이 고아한 마법사처럼 늙은 백발의 천사였다면, 그 옆의 치천사 노인은 지혜로운 마녀 같은 느낌이었다.
인간이 아니지만 둘 모두 참으로 곱게 늙었다.
이곳에 존재하는 다른 천사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사도들이여. 미안하네. 내가 그대들을 의심하였네.”
어떤 보스건 하나 정도 처리하고 돌아오면 이런 식으로 태도가 바뀐다.
일단은 믿는 모습에서, 진짜로 예언이 실행됨을 느끼는 것이다.
악룡은 아마 이런 기본적인 루트를 모조리 어그러뜨림으로써 메인 던전의 진입을 막았을 것이다.
“늦었지만 통성명을 하지. 나는 조엘이라고 하네.”
그 옆의 치천사 노인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나이든 여성의 목소리는 어딘가 지적으로 차분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공손하게 인사한다.
“저는 릴리움이라 합니다. 사도들이시여. 우리가 이런 처지임에 결례를 범했으니 부디 노여워 마시길.”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건 이럴 때는 웃어야 한다.
“괜찮습니다. 유배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본인들만큼 잘 아는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믿을 수 없지.
설정상으로도 우리가 최초의 사도는 아니다.
이전에 와서 이들을 실망시킨 유배자들은 존재한다.
그러니 한 번쯤 검증을 거칠 수밖에 없다는 식이다.
그래서 아무 보스나 하나 잡고 돌아와야 하는 건데, 위대함의 편린을 잡고 돌아온다면 약간 더 편의를 봐주게 된다.
첫 보스로 그걸 잡는 놈들은 드물거든.
게임 시절엔 대화 텍스트도 조금 달라지는 식이지만 지금은 그런 디테일까진 느낄 수 없다.
어차피 살아 있는 존재들인 만큼 그때그때 조금씩 다른 건 당연하다.
물어본다면 성배의 위치를 친절하게 알려줄 것이다.
필요하다면 도움을 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필요 없다.
노인들을 돌려보내고 성지의 문을 닫았다.
바깥으로 새어나가 좋을 것 없는 이야기들을 해야 한다.
“이미 말했지만 성배부터 찾으러 가는 건 안 할 겁니다. 꼭 안 가도 되는 필드가 상당히 많거든요.”
오히려 즉시 성배를 찾으러 떠난다면 보통은 죽는다.
메인 던전은 그 자체로 각 서버나 홀수 층에서 구할 수 없는 귀중한 재료들이나 막대한 경험치를 주는 보스들이 널린 곳이다.
시작부터 저들의 인도에 따라 천상의 도시나 지옥의 성채에 꼬라박는다?
이 테마는 그렇게 무수한 유배자들을 삼켜왔을 터.
“다들 자기 레벨부터 좀 불러보시겠어요?”
하나하나 확인에 들어갔다.
평균적으로 300 정도의 상승이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수준의 레벨링이다.
“지금부터는 레벨에 너무 연연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종족 바꾸면서 떨어졌다 올랐다 그럴 거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경험치를 퍼주나요?”
“맞아, 상성에 맞는 세팅으로 계속 갈아타면서도 손해 보지 말라는 소리지.”
그래서 메인 던전이 깡스펙으로 밀 수 없는 곳이다.
순수하게 스펙으로 싸운다면 이길 수 없다. 만약 동레벨이어도 각종 기믹에 의한 보정은 저쪽이 더 빡세게 받는다.
잔뜩 파밍하여 5만 레벨 정도를 달성한다면 모르겠다.
그런 딜찍누로 해결하려면 우리 왕국이 새로운 메인 던전이 될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서버가 열리는 간격이 있으니 말이다.
일단 카드를 배분한다.
“다들 좀 익숙해질 시간은 필요할 테니 며칠간 쉽니다.”
희우는 이미 천사니 상관 없다.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종족의 카드를 받아든다.
스펙이 좋은 고위 종족이라 그런 부분도 있지만, 우선은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위해서라도 천사나 악마가 되어야 한다.
에길은 치천사.
아서는 데빌.
미아는 데몬.
그리고 제니 앞에서는 잠깐 멈칫했다.
“흠, 고양이 귀가 없는 제니라니. 너무 어색할 것 같은데.”
“무 무 무슨 말이에요?”
다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쨌건 제니는 기천사.”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야기한 다음에 밖으로 나왔다. 한 명씩 성지에서 종족을 바꾸고 몸을 움직일 적응 기간을 거친 후에 밖으로 나온다.
마지막으로 제니가 나왔는데.
“대체 왜……! 귀가 안 없어지는 거죠?!”
제니의 머리 위에는 고양이 귀가 그대로 있었다. 꼬리도 있다.
하지만 핀 형태의 날개와 링도 떠있다.
“고양이 천사가 되었네?”
사실 기천사는 형태상 어떤 종족으로도 존재할 수 있는 종족이라 그렇다.
종족이 바뀌더라도 직전의 외형을 그대로 따라가거든.
그리고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나는 이미 단기 결전 평타 캐릭터니까 [용사]를 굳이 유지할 필요는 없다.
용사의 장점은 종족 제한이나 스탯 제한과 무관한 조합으로 필살기 여럿을 보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용사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다른 액티브들로 슬롯을 채웠다.
[다차원 연속체]는 당연히 메인 던전에서는 그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다.
사용을 물리적으로 막아둔 것은 아니지만, 이 테마에 존재하는 모든 [위대함의 편린]들이 우리의 존재를 눈치챌 것이다.
쓰면 편리하지만, 난이도가 올라간다. 결과적으로는 손해다.
아서에게 훔쳐온 [랜슬롯 : 아론다이트]나 카베에게서 훔쳐온 [최후의 전쟁]도 분명 좋은 스킬이지만, 그저 강한 스킬일 뿐이다.
방어 무시는 필요하다면 다른 곳에서 구할 수도 있다.
애초에 아서가 파티원이기도 하고 말이지.
아쉬운 것은 사용하지 않은 슬롯 하나와 [섬광 재생]이다.
이쯤 되면 자주 이런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일단 조금 더 신중하기로 결정했다.
“좋아. 일단 저는 그럼 [용사]를 유지하겠습니다. 천상의 도시에 당장 들어갈 것은 아니니까요.”
그 외에도, 파티원을 믿기에 하는 결정이다.
미궁답게 여긴 종족이 인간이어야만 발생하는 이벤트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