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90화
메인 던전 – Lv.6211 기계무덤(3)
방향이 정해졌다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순교자들의 은신처에서 확인해야할 것이 있다.
이 은신처는 높은 절벽을 수직으로 길게 파내려간 형태다.
따라서 맨 아래에 성지가 있다면 그 위까지 층층이 쌓인 천사들의 거주지가 있다.
아이들은 곧잘 아래로 내려와서 로스엘이나 디스, 혹은 제니와 놀았으나 시간이 된다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사실 집이라기보다는 굴이라고 불러야하는 곳들이다.
남루한 거적데기들을 걸친 노인 천사들이 그런 곳곳의 굴속에 자리 잡고 있다.
아이들을 하나씩 맡아서 기르는 모양이다.
기른다는 말에 어폐가 있긴 하다. 천사 아이들은 하나같이 기천사였다. 적어도 치천사나 대천사인 노인들의 손자들은 아니다.
뛰어다니며 놀다가 돌아가려고 하는 아이 중 하나에게 말을 걸었다.
“얘야. 혹시 이름이 유리라고 하니?”
“어떻게 아셨나요? 사도님.”
아이들이 여럿 있다면 그 중에서도 대장이 생긴다.
이 경우의 골목대장은 여자아이였다.
그리고 사실 반드시 여자아이다.
이 아이는 고정 NPC니까.
“사도란 뭐든지 아는 존재니까 말이다.”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는 버릇이 있으시군요. 제가 지금껏 봐온 사도님들은 그렇게 많은 것을 알지 못했어요.”
“내가 좀 특별하다고 해두자꾸나. 네 부모님께 안내해주겠니?”
“부모라고 하지 않습니다. 저를 맡아주신 할아버지를 찾는 것이라면 안내하겠습니다만.”
겉보기로는 미아보다도 한두 살 어려 보인다. 키도 더 작다.
그리고 많은 장수 종족들이 그렇듯 정신연령은 외견을 따르기 마련이며, 천사들 역시 그러하다.
이런 침착하고 차분한 성향은 타고났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NPC는 어떤 식으로건 특별한 법이니까.
물론 지금은 유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주면 고맙겠네.”
“알겠습니다. 조엘 할아버지가 사도님의 말을 잘 들으라고 했거든요.”
배경 설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고 조엘과 그 옆에 있던 치천사, 릴리움이 이 은신처에서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스 하나를 잡고 은신처로 돌아와 그들의 인정을 받은 순간, 이곳의 거점으로서의 기능이 해금된다.
우선은 상인이다.
유리의 안내를 따라 어떤 치천사 노인이 드러 누워있는 굴로 갔다.
노인은 나를 흘깃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도님을 모시고 왔느냐. 거기 앉아보시게.”
몸을 일으킨 노인의 인상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스크루지였다.
비쩍 마른 얼굴에 이상할 정도로 깊이 패인 주름이 세월을 붙잡고 있다.
그렇게 고집스럽지만 동시에 천사처럼 인자하게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모습이다.
그는 한쪽 날개만 없는 것이 아니라 눈도 하나가 없었다. 낡은 가죽 안대가 눈에 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신가? 찾는 게 있다면 말해보시게. 없는 것 빼곤 다 있으니.”
뒤쪽에 쌓여있는 잡동사니 더미는 의외로 죄다 아티팩트거나 그에 준하는 물건들이다.
나는 일단 [왕관의 검]을 보여주었다.
“음? 조엘이 그걸 주었나. 그건 안 받아. 아니, 못 받지. 그런걸 수집했다간 조엘이 나보고 뭐라고 하겠나.”
“팔려는 게 아니라 그냥 보여드린 겁니다.”
“이런 제기랄 늙은이 재산을 뜯어가려고 하는군. 그래, 뭐 이런 세상에서 재산이라고 해보아야 취미밖에 안 되겠지만.”
생각해보면 현실이 된 미궁의 난이도를 끔찍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요소도 있다.
게임 시절에는 선택지로 검을 보여주고 한 가지 장비를 무상 제공 받는 식으로 산달폰을 잡은 보상이 책정되어있다.
그 사실을 현실이 된 이곳에서 눈치 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검색할 인터넷도 없으니 말이지.
“하나 골라가게.”
“그래도 됩니까?”
“알고 온 것 아닌가? 조엘이 언질한 게 아니란 말이야? 이런 제기랄. 손해 보는 장사했군. 되었어. 가져가. 그래도 다음부턴 뭐라도 주워 와서 물물교환을 하자고.”
노인의 취미란 그렇게 얕고 가벼운 것이다. 식재라 할 만한 것도 남지 않은 이 세상에 여가가 무엇이 있겠나.
천사 아이들이 제니와 디스에게 열광하는 것도, 동물을 처음 보아서다.
다른 모든 원소가 숨을 죽이고, 빛과 어둠만이 날뛰는 이곳에 털 달린 짐승은 어느 곳에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면 감사히.”
“이거 봐. 알고 왔으면서.”
나는 태연하게 에길이 한동안 사용할 도끼 하나를 골랐다.
접이식이어서 한손도끼로도, 양손도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이름이 떠오른다.
[푸른 닻]
“그걸로 하겠나?”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군. 유리야 배웅해드려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유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안내한다.
장사꾼 노인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조엘이 준 그건 열쇠검이라고도 불리는 물건이지. 오래된 유산이야. 적을 찌르면 죽을 걸세. 튼튼하진 않아도 말이지. 부디 요긴하게 쓰게나.”
지나가듯 흘리는 저런 말을 힌트랍시고 주게 되어 있는 게 미궁이다.
열쇠검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딘가의 문을 여는 수단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할 수는 있다.
그래도 참 말이야 쉽지.
밖으로 나오자 유리가 눈치 빠르게 묻는다.
“혹시 대장장이 할아버지도 뵙고 싶으신가요?”
“가능하다면 안내해주겠니?”
그렇게 [왕관의 검]을 보여주고 다니며 대장장이인 예후디엘과도 인사했다.
* * *
아서와 에길이 함께 릴리움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2대1이지만 형편없이 밀린다.
뭐, 릴리움의 정체를 생각하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래도 그것이 고스란히 친분이 된 모양이라 아서가 침통하게 돌을 던지는 가운데 릴리움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악마가 된 이 노기사는 그 모습이 곧잘 어울렸다.
원래 초인적인 종족이 나이를 먹었다면 그에 걸맞은 박력이 있는 법이다.
다만 데빌로서의 뿔은 머리카락 속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날개도 거의 사용하진 않을 것이다.
아서가 종족 변환으로 취한 것은 스펙의 상승과, 마법적성 정도뿐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도 이 최강의 고정 NPC는 충분히 강력해졌으리라.
나는 분해하는 아서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다음 행선지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요?”
릴리움이 먼저 말을 받았다.
“필요하다면 제게 물어도 좋습니다. 사도시여. 저는 아는 것이 많으니까요.”
그러면서 미소를 지우는 이 할머니는 묘하게 날카로운 인상이다. 그러나 꼬장이라기보다는 지적인 느낌.
마치 체스 마스터 같은 느낌이랄까.
애초에 보드 게임을 이상하리만치 잘하고, 또 좋아한단 말이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생각해둔 바가 있어서요. 바둑은 마음에 드시나요?”
“본 적 없는 게임이라 마음에 드는군요. 감사합니다. 사도시여.”
그리고 조엘도 충분히 좋아한다. 이건 시스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좋아하겠거니 싶어 준비했다.
확신까진 아니었으나 잘 먹혀든 것 같다.
아서와 에길이 일어섰다.
어찌되었건 괜한 정보를 흘려 이상한 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 다시 성지로 가서 문을 닫고 들리지 않게 회의를 할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이야기 정도라면 문제없다.
“어찌, 신뢰는 좀 얻은 것 같습니까?”
“잘 모르겠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질 않는 천사로군.”
“뭐, 그러니까 둘이서 털리고 계셨겠죠.”
옆에서 에길이 헛기침을 했다.
“역시 아까 전의 그 수는 너무 꼼수였소. 그거보단 정석으로 하는 게 나았을 텐데.”
“그 정도면 실수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빨리 배우는군.”
나는 피식하며 대답했다.
“차라리 장기로 하시죠. 바둑이 승산이 더 낮을 겁니다.”
“그 정도인가?”
아서와 에길은 왕국에서 저런 보드 게임에 취미를 붙였다.
마법사들에게도 제법 메이저한 보드게임이었고, 바깥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온 유배자들도 있으니 생각보다 대진 풀은 넓었다.
아서가 투덜거렸다.
“그래서 얼마나 친해져야하나?”
“그냥 이렇게만 하시면 됩니다. 사건이 진행되다 보면 입질이 오겠죠.”
“그렇다면 이대로 하겠네.”
당연하지만 루트의 다양한 분기는 어느 정도 선까지는 동시 진행이 가능하다.
루트마다의 보상도 각각 책정되어 있으니까 싹싹 바닥까지 긁어먹는 편이 옳다.
릴리움 역시 중요한 분기점을 쥐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이곳의 천사들은 각자 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어서요.”
그래도 사실 중요한건 셋이다.
조엘, 릴리움, 그리고 유리.
다른 이들은 무언가 하더라도 그게 아주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 그 셋만 주의해서 보시면 됩니다.”
“어차피 그 유리인가 하는 어린 천사는 제니와 블랑쉐가 담당하지 않나.”
“그렇게 역할이 나누어져있긴 하죠.”
가는 길에 아이들과 놀아주느라 지친 제니를 챙겨서 성지로 들어갔다.
유리와 친해졌냐고 하니까, 아닌 척은 다 하지만 고양이를 매우 좋아하는 것 같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성지에서 간단히 회의를 끝낸 후, 포션을 확인하고 출발하려 했다.
조엘이 입구에 기다리고 있었다.
“사도님들, 성배를 찾으러 가시는가.”
당연히 나는 자연스러운 대응.
“혹시 위치를 아십니까?”
“하나는 천상의 도시 중심부에 있다고, 다른 하나는 지하에 있다고 알고 있네. 그러나 또다른 하나는 행방이 묘연하지. 나도 알지 못한다네.”
“그렇군요.”
“그대들의 앞길에 축복이 있기를.”
마지막 인사만큼은 경건했다.
* * *
“성배?”
로스엘이 되물었다.
“그런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성배의 모양이 아닐 겁니다. 그보다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모양일건데.”
“생명체라.”
단순히 그렇게 말한다면 굉장히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생명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최초에 이 곳에 도달했을 때의 절벽에서도 어느 곳 하나 숲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생명체도 적다.
천사와 악마가 아닌 생명체는 모두 절멸했으니까.
“생명체라는 게 일단 정령은 아니지?”
“그건 좀 다르죠. 유사 생명체라고 해야 하나.”
“천사를 말하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럼요.”
로스엘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원래 같으면 지금 시점에서 로스엘이 이렇게 파티원으로 합류해있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로스엘은 끊임없이 이 어둠 속을 떠돌고 있을 것이며 찾으려고 하면 몇 가지 이벤트가 아닌 이상 개고생을 해야 하는 NPC다.
그리고 로스엘이 원하는 것도 꽤 후반에나 드러난다.
하지만 어차피 다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세력이 아니라 단독으로 행동하는 분기점이니까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해서 설득이 가능하다.
어떤 점을 다르게 가져갈 수 있는가. 이것도 참 중요하지.
로스엘은 고민 끝에 무언가를 기억해냈다.
“기계무덤은 아주 넓잖아.”
“그렇지요. 세상이 퇴적되는 공간이니.”
“언젠가 아주 이상한 걸 본 적은 있어.”
“혹시 금빛 짐승 같은 거?”
로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기둥들을 오가면서 뭔가 하는 것 같던데 멀리서만 봤고 근처에서 본 적은 없었는데. 그게……. 기천사의 추력으로도 쫓을 수가 없을 정도로 빠르더라고.”
“최근에 본 적이 있나요?”
“최근……. 이건 내가 몰라서 묻는 건데 10년이면 최근이야?”
나는 머리를 긁적인 다음에 대답했다.
“최근이라고 합시다. 그게 성배입니다. 일단 찾아볼까요?”
그걸 쫓아가면 [왕관의 검]을 사용할 곳으로 도달할 수 있다.
한때 기계장치의 신이 멀쩡하며, 모든 것이 융성하던 시절의 유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