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93화
메인 던전 – Lv.7799 가라앉은 영광(2)
[TIP : 눈부신 원소가 가득하던 세상. 찬란하던 문명. 깊고 깊게 가라앉아 이제는 덧없음만이 남은 영광.]
로딩창의 팁 화면은 항상 친절한 척이라도 했던 같은데, 이제는 그마저도 암시적으로 주어질 뿐인 모양이다.
로스엘에게 미리 정보를 들은 상태라면 저 문구를보고 대충 어디로 이동 당하는지 눈치 챌 수 있겠지.
그것도 그 쥐새끼를 잡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긴 하다.
희우는 일단 금색의 쥐새끼를 붙잡았다.
어쩔 수 없다. 눈앞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기절해 있으면 잡을 수밖에.
그 크기는 품속에 쏙 들어올 정도.
조금 커다란 봉제인형의 느낌이다.
다르게 말하면 가지고 다니기 불편할 정도의 사이즈란 뜻이었다.
희우는 생각했다. 이 녀석을 살려둬야하는 이유는 있다.
한 번에 여기서 원하는 걸 얻지 못하고 후퇴해야하는 경우.
그렇다면 산채로 포획해둘 필요가 있다. 만약 다시 입장하려면 방법이 없으니까.
성배의 짐승 없이 외부에서 진입가능한 길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건 내부에서 열어야하는 숏컷이다.
그럼 지금은 일단 놓아주나? 그 판단 역시 쉽지 않다.
희우는 아직도 정신이 들지 않은 쥐를 끌어안은 채로 주변을 먼저 살피기로 했다.
무작위라고 해서 완전히 아무 곳으로나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러 포인트가 있고 그 중 랜덤일 뿐이다.
하물며 이동 당시의 위치도 영향을 받는다는 모양이다.
이동 당시 조밀하게 모여 있었다면 비교적 근방에서 다시 만난다.
희우와 성배의 짐승이 여기 있다는 것은 성배의 짐승과 훨씬 더 가까이 있었던 다른 이들도 근방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현재 위치는 일단 어느 구석의 작은 굴 같은 곳이었다.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고 있어 시야가 차단되어 있지는 않다.
자연물로 보이지만 군데군데 다듬어진 석재가 보인다.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는 어떤 도시들의 일부가 아닐까.
나무뿌리 사이로는 쥐새끼 하나가 지나갈만한 작은 틈밖에 없다.
애용하던 통로인 모양이다.
희우는 단검을 마체테처럼 잡고 뿌리를 베며 전진했다.
곧 빛이 비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점점 밝아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바깥이 보였다.
“이야.”
경사가 심해서 그런지 갑자기 바깥이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보인 광경은 을씨년스럽거나 우중충하지 않았다.
천상의 도시와는 다른 의미로 밝다.
“생물들이 있네.”
새가 지저귀고 난다.
어디선가 벌레소리도 들려온다.
커다란 도시의 형체만이 남아서 기울어져있건만, 그것을 지탱하는 거대한 나무들도 있다.
하늘에 떠있는 것은 태양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자연이었다.
천상의 도시의 인공적이고 무기질적인 아름다움과는 다르다.
유적임에도 훨씬 살아있고 생동감 넘친다고 여겨지는 그런 모습이 펼쳐져있다.
“흐음, 더 위험할진 몰라도 더 보긴 좋네.”
일단 주변을 살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위협이 없는가를.
다행스럽게도 그런 건 없었다.
아무리 양심이 없더라도 몬스터 아가리 속에 바로 처넣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희우가 나온 굴은 그저 도시 외곽의 무너진 건물들이 모여 만들어진 작은 산이다.
건물의 틈새는 흙이 채우고 나무가 그 위를 덮었다.
이게 한때 인공물이었다는 흔적조차 저물어가고 있다.
“우리 왕국도 만약 그 상태로 흘러가다보면 이렇게 되는 걸까?”
희우는 나름대로 애착이 생긴 그 도시를 다시 떠올려본다.
고블린들은 훌륭하게 공사해주었다.
그것이 무너진다면 이렇게 될 것 같다.
성배의 짐승은 아직 기절해있다.
희우는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에 들어오는 게 많아진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끼이이이이에에에에에엑
그림자가 지나간다.
괴성을 낸 장본인인 것 같다.
그건 천사도 짐승도 아닌 괴상한 모습이었다.
뒤틀린 그 모습에는 기계마저 보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면 저런 생물이 탄생하나 싶다.
포식자의 괴성을 듣고 작은 동물들이 얼른 어디론가 숨어들었다.
희우는 곧바로 날개를 최대한 진동시키며 지상으로 수직 낙하했다.
저런 것의 눈에 띄어서 좋을 리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들키지 않았다.
“저게 뭐야. 미친.”
풍경에 속으면 안 된다. 여긴 메인 던전 내부다.
머리를 긁적이며 뒤도는데 다리가 보였다.
“……언니?”
뒤집혀 바닥에 처박혀있는 모습은 어딘가 낯익다. 길고 쭉 뻗은 여성스러운 곡선의 수트.
누군지 모르기가 더 힘들다.
의식이 없는 듯 허리의 탄력으로만 자세가 유지되고 있다.
정말로 허리 건강에 나빠 보인다.
희우는 성배의 짐승을 잠깐 살피고, 옆구리에 꼈다.
그리고 만화처럼 거꾸로 땅에 박힌 블랑쉐를 붙잡고 뽑았다.
무를 뽑듯이 쑤욱 뽑힌다.
진짜로 처박힌 모양인지 얼굴 상태가 엉망이기에 포션도 살살 뿌려주었다.
블랑쉐가 흙을 토하며 눈을 떴다.
“여기는?”
곧바로 평소의 냉엄한 인상으로 돌아온 채 묻는다.
“[가라앉은 영광]으로 온 것 같긴 한데요.”
“저게 그건가?”
“제가 대강 알고 있으니 숏컷 근처로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희우는 갑자기 책임감이란 것을 느꼈다.
그렇다. 서브 리더는 이런 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파티의 지휘서열은 오빠가 최우선, 그 다음이 희우 본인이다.
희우도 자리에 없다면 그때는 아서가 맡는다.
희우는 문득 아서의 얼굴과 성격을 떠올리고 더 무겁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진짜로 오빠가 없다하더라도 희우의 판단에는 아서가 많은 도움을 준다. 그는 오랜 미궁 경험이 있다.
[하드스록]의 일원으로서 쌓은 짬도 있다.
뺨을 팡팡 두드렸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여기서 누군가 쓰러진다면 오빠를 볼 면목이 없지 않나.
기대라고 해놓고, 서로 기대자고 해놓고, 의지할 만큼 되지 못하면 곤란하다.
다행스럽게도 전투 상황의 즉각적인 판단은 무한한 근자감이 존재하던 때보다 못할지언정, 합리적인 계획에서는 지금이 더 낫다.
희우는 생각했다.
나는 똑똑한 아이야!
아니지, 아이가 아니다. 이제 어른이라고.
콧김을 뿜으며 다짐하는 모습을 보며 블랑쉐가 흐뭇하게 웃었다.
머리카락엔 흙이 잔뜩 묻어있다.
“그나저나, 그 쥐새끼는 죽여 버리면 성배로 돌아간다고 했지? 위험하니 당장 처리하도록 하지.”
“앗아앗, 잠깐만요. 혹시 모르니까 기절 지켜 데리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으면 그냥 생포해두죠.”
그리고 희우는 문득 깨달았다.
“디스는 어디 있어요?”
블랑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얼른 자기가 처박혀있던 구덩이 속을 파내려간다.
희우도 도왔다.
마지막 순간까지 들고는 있었을테니 함께 옮겨졌을 것이 분명하다.
흙에 파묻혀 기절해있는 고양이를 블랑쉐가 소중하게 안아들었다.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털을 빗어준다.
이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모습이지만, 블랑쉐는 생각보다 고양이 애호가다.
“다행이군. 놀라기도 전에 기절한 것 같다.”
“그거 엄청 튼튼한 고양이네요.”
“제니보다 튼튼할 거다.”
그리고 블랑쉐가 이어서 말했다.
“그럼 그 쥐새끼가 도망치려고 하면 쏴버리도록 하지.”
아무리 빨라도 히트스캔이나 다름없는 판정의 캣틀링건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죽여서는 안 되니까 살아있었을 뿐이다.
블랑쉐가 매섭게 노려보자 희우는 옆구리의 쥐가 움찔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단 다른 파티원들을 최대한 찾아보죠. 비행은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끼에에에에엑
또 괴성과 함께 그림자가 지나간다. 심지어 아까와는 다른 개체인 것 같다.
가만 보면 멀리 도심지로 보이는 곳 주변에 비슷한 것들이 많이 날아다니고 있다.
다 저런 괴조일게 분명하다.
“확실히 그렇군. 좋다. 서브 리더 판단은 맡기지.”
“으힉.”
어깨가 좀 더 무거워지는 기분. 다들 무사할까?
숏컷으로 향하는 길은 대강 알고 있다. 어떻게 구분해야할지도 안다. 외우는 것은 대부분 그런 것이니까.
암기력만큼은 칭찬받고 있었다.
“일단 여긴 아직 [가라앉은 영광] 내부는 아니에요. 숏컷도 도시 안에 있고 전리품도 대개 저 안에 있죠. 움직입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꾸로 처박혀있는 다리를 하나 더 발견했다.
언덕을 내려오자마자 바닥에 꽂혀있고 주변에는 다람쥐들이 뛰논다.
어딘가 스파크가 튀고 있고 손상이 심해보였다.
기천사는 크게 다치면 기계적인 부분이 언뜻 드러난다. 희우는 오싹해졌다.
“제니? 아니면 로스엘? 살아있어요?”
블랑쉐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흥. 우스꽝스러운 꼴이군.”
* * *
제니는 눈을 뜨자마자 소스라치며 일어섰다.
원 덤블링으로 자세를 잡은 후에 검을 뽑고 사주경계를 한다.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한 호흡에 모든 동작을 수행했더니 팔이 돌아갈것처럼 뻐근하다.
아직 천사에 완전히 익숙하진 않다. 자칫하면 몸 내구도 이상의 근력을 낼 수 있다.
“후우우우. 조심. 조심. 좋아. 여긴 어디지?”
대충 리더가 가려고 의도했던 엘도라도인지 뭔지 같은 유적지로 온 것은 확실하다.
제니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
어디 잘 모르겠는 인조물의 지하실로 보인다.
대략적으로 이곳에 대해 미리 들은 바는 있으나 정확히는 모른다.
“큰일이네.”
진짜로 큰일이다. 파티원의 면모 개개인을 보자면 제니는 전투 지속력이 거의 없다.
차라리 누가 고양이 수류탄 취급을 하는 게 편하지 홀몸으로 이런 고레벨 존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여기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묘생을 마감하는가.
미궁 짬이 나름 되고, 자신의 한계를 알고, 더욱이 파티 오르골에서의 수많은 경험 덕에 안다.
리더가 긴장하는 곳에서 혼자 낙오된 제니가 살아남을 가능성?
갑자기 천장이 무너지고 하늘로 솟을 구멍이라도 있지 않으면 무리다.
그리고 쾅하면서 천장이 무너졌다.
“에엑?!”
제니는 생각보다 먼저 일단 천장으로 솟구쳤다.
검을 쌍으로 교차하고 솟아오른다. 왠지 모를 마력의 친숙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위대하다고 불러야할 수준의 마법사를 옆에 끼고 다닌 덕분인지 마법의 지문이라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리더도 놀랐던 사실이다. 술식도 모르면서 마법을 척 보고 누구 것인지 어떻게 구분하냐고.
제니로서는 그냥 미아의 마법은 어쩐지 알 수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솟아 올라가자 마탄들이 기관총처럼 날아온다.
천사인 제니는 따끔한 정도지 제대로 된 대미지는 입지 않았다.
“제니?”
“미아양! 여기 있었군요!”
“저거! 마법이 잘 안 먹혀!”
제니는 얼른 뒤로 돌았다.
무언가가 소름끼치게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반응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기천사가 되어서일 뿐, 잎사귀 요정 그대로였다면 무리였을 것이다.
단칼에 반으로 갈라진다.
아무리 그래도 [무오의 광휘]가 늘 제니의 공격에 부여하는 방어력 무시는 장난 같은 게 아니다.
상대가 제아무리 단단하더라도 이빨이 박힌다.
반으로 갈라진 것은 작은…….
“쥐?”
“쉿. 빨리 이동하자. 제니. 여긴 저런 쥐가 굉장히 많았어.”
제니는 습관적으로 미아를 안아든다.
작고 가벼운 몸집은 그리 넓지 않은 제니의 품속에도 쏙 들어온다.
이 마법사를 안고 다닌 지도 어언 반년.
자가용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술식 구축에 불편하지 않은 승차감과 마법 활용을 위한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다양한 안는 자세를 연구했던가.
기천사로 업그레이드까지 된 제니는 그야말로 마법사를 위한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다.
그런 능력에 약간의 자부심마저 품은 지금, 마법사를 탑재한 제니라면 이 지옥을 빠져나갈 확률이 훨씬 올라갔다.
“미아, 어디로 갈까요?”
“그건 나도 모르는데.”
“큰일이네요.”
“아마, 숏컷 방향으로 가면 아빠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잠깐 패닉으로 날아갔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런 일을 대비해서 리더는 기본적인 지도와 방향을 숙지시켰다.
“그렇네요. 리더만 만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왕국을 대충 혼자의 힘으로 뒤엎은 빠요엔이다. 정말로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제니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