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97화
메인 던전 - Lv.7799 가라앉은 영광(6)
로스엘은 오래 살았다. 이 도시라면 대충 안다.
왜냐하면 그녀는 실제로 이 [가라앉은 영광]이라는 지역의 주민이었으니까.
여기가 어디지? 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뿐이다.
곧 익숙한 장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쓴웃음이 입가에 걸린다.
[가라앉은 영광]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은 지금 저 위에 살아서 싸우고 있는 천사와 악마들이다.
부서진 기계신을 고칠 지식도 능력도 없고 모든 것이 잊혀진 채, 남은 것을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녀석들.
로스엘이 기억하던 천사나 악마는 훨씬 더 고상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렇다 해도 참 많이 뒤섞여 있네.”
익숙한 지형이나 건물이 좀 보인다고 해서 그녀가 아는 모든 것이 그대로는 아니다.
원래는 더 넓고 더 거대했던 도시다.
지금 이곳에서 눈을 돌리면 지평선이 보여야할 정도였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잘 모르는 물이 들어찬 공간이 먼 곳에서 아련하게 보인다.
지대도 평평했던 곳이 중심부인 이곳만 기이할 정도로 우뚝 솟아 있다.
계단식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는 성채 혹은 탑과도 같은 모습이다.
그래 탑이 더 옳겠다.
저 아래에 보이는 해자 같은 공간과 그곳에 들어찬 물, 더 멀리는 드문드문 보이는 도시의 조각들.
더 멀리는 끝 모를 바다와 이름 모를 괴물들.
그리고 그 괴물들은 이 몰락하고 뒤틀린 도시 전체에서 날아다니고 있다.
바로 이 탑 곁에도 말이다.
“애초에 중심부의 일부만이 남아 있구나.”
더 아름다운 도시였으나, 이렇게 쇠락한 곳에서 느껴지는 쓸쓸한 감상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지내던 기계무덤에서도 이렇게 형체가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들을 발견하곤 기뻐했으니까.
“자자, 그럼 우리 귀여운 유배자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데.”
그녀가 나온 곳을 돌아본다.
유배자 파티의 리더가 그녀를 어떻게 빼돌린 문은 낯이 익다.
[도가니]
이 도시가 아직까지 기능하던 시절, 기계장치의 신이 힘을 잃어가며 세상에 심연이 드리우기 시작하던 시절.
그때 만들어진 시설이었다.
“과연. 이걸로 기천사들을 찍어내고 있었지. 끝에는 새로운 천사를 만들지 못해 복제하게 되었던 건가.”
천상의 도시의 사정에는 어둡다. 잘은 모르지만 이 시설을 흉내 내어 천사들을 만들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기천사들은 전쟁이나 일이나 어떤 식으로건 노예로 부려진다는 모양이다.
로스엘로서는 그 근처도 얼씬하기 싫다. 자주 세계의 구멍을 통해 들여다볼 뿐.
“일단 날아가 볼까?”
날개를 펴고.
어깨 펴고.
눈물 닦고.
로스엘은 언제나 현재를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니 이런 과거를 추억하긴 하되 거기 매몰될 생각은 없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이 세상이 완전히 심연으로 무너져 내렸으면 했다.
이렇게 이어지다가 몰락하느니.
“내 손으로 부숴 버려야지.”
알고 있다. 베데스다의 사도들은 어떤 식으로건 이 세계의 결말을 짓기 위해서 온다.
그것은 [메인 던전]을 겪어본 로스엘도 잘 알고 있다.
아마 선택지가 여러 가지겠지만.
그녀를 골라주었다.
그럼 도와줘야지.
로스엘은 아래를 보며 동료들을 찾기 시작한다.
그렇게 말하며 그 단어의 낯섦을 깨달았다.
“뭐, 상관없나?”
뜻을 같이하면 동료지 별건가.
그래도 오랜만에 떠올린 단어였다.
다만.
“음?”
기기긱 기긱 기이이익
괴상한 소리와 함께 나타난 두 천사를 보며 로스엘은 머리를 긁었다.
“이건 생각 안 해봤는데.”
유배자 파티의 리더가 쥐새끼 사냥에 돌입하기 전에 말했다.
여긴 굉장히 위험한 곳이라고.
왜 위험한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 지금 다시 생각하니 당연히 뭔가 유배자를 위해 몬스터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저기! 저기! 친구들 안녕? 나도 기천사인데 우리 같이 친하게 지내지 않을래?”
본인도 기대하진 않았지만 쾌활하게 말해보았다.
핀인지 날개인지 모를 뒤틀린 기계장치를 그대로 드러내고, 때때로는 팔다리도 개수가 이상한 고장난 천사들이다.
로스엘이 흔드는 손을 따라 눈이 움직인다.
그리고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 그러니까 여기 바로 뒤가 보스룸인가? 그럼 여긴 보스룸 바로 앞이고.”
그거 완전 잡몹 레벨 가장 높은 지역이잖아.
“내가 바빠서 이만!”
날개를 펴고 전속력으로 추진했다.
팡 하고 소닉붐이 터져 나온다.
동시에 뒤틀린 천사들도 날아올랐다.
멀쩡하지 않아 로스엘만큼 빠르지는 않았지만.
“뭐야, 저거 왜 저래?!”
반쯤은 날개의 추진력으로, 나머지 반쯤은 힘으로 건물 위를 날아다니며 쫓아오기 시작했다.
싸울까?
그 생각을 하는 순간 기천사 하나가 디딘 바닥이 우지끈하며 무너졌다.
가뜩이나 뒤틀려 형태가 이상한 시가지의 건물이 그대로 무너져 쓰러진다.
로스엘은 약하다.
지금은 그냥 빠르게 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많이 없다.
마법이라면 모를까 저런 물리적 타격을 받았다가는.
튀자.
“천사 살려!”
그런데 소리를 질렀더니 더 많은 뒤틀린 천사들이 그녀를 발견했다.
“으아앙!”
* * *
희우는 맵 기믹에 대해 생각했다.
오빠의 말에 따르면 이 맵은 그때그때 어느 정도 랜덤으로 형성되지만 미궁이 늘 그렇듯이 고정적인 오브젝트도 있다.
그러니까 찾아야 할 요소들은 정해져 있다.
그리고 지하수로는 대부분이 물에 잠겨 있는 지역이다. 그 속에서 싸우려면 수중전이 강제된다.
물론 맵 환경인만큼 지하수로의 물을 뺄 수단도 있긴 하다.
일단 얕은 물로 들어갔다.
물이 맑고 투명해서 수면 아래의 시야도 맑다.
쥐새끼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쪽입니다! 이쪽으로 들어가면 도시 아래로 들어갈 수 있어요!]
“보그르륵 보그륵(평소에 자주 사용하나 봐?)”
[네?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블랑쉐가 아차하는 표정으로 통신 마법을 연결했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무수한 환경이 존재하는 이상 파티 플레이에서 필수에 가까운 마법이다.
희우는 블랑쉐를 탓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개별행동을 하는 것은 모두 처음이다.
마법은 언제나 미아가 담당했고 블랑쉐는 필요에 따라 도울 뿐이었다.
능동적인 마법사의 역할을 수행하기엔 아직 멀었다.
[평소에 자주 쓰나 봐?]
[여긴 위험한 생선 놈들이 많아서, 제 친구 쥐들도 이렇게 피해 다니죠.]
[친구가 있어?]
[지하수로의 대장들입니다. 여긴 쥐들이 많이 살거든요.]
그래서 이 전기쥐를 아군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지하수로에서는 싸울 일이 없어지니까.
엄지를 들고 칭찬해 주었다. 쥐새끼를 쓰다듬자 털이 부드럽다. 나쁘지 않은걸.
전기는 통하지 않는다. 번개의 형태로 발현되지만 본질은 신성이니.
그리고 출발한 쥐헤엄은 의외로 빨랐다. 파티원들이 그 뒤를 따라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막대한 유체 사이를 헤쳐 나가는 것은 시천사의 날개로는 쉬운 일이다.
블랑쉐는 다리 아래를 지느러미로 바꾸고 따라왔다.
그렇게 잠수하자 아래쪽으로 거대한 폐허가 보였다.
물속에 잠긴 문명은 아주 고즈넉했다.
한때 사람이 살았을 것 같은 작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나폴리나 베네치아마저 생각날 정도로 아름답다.
이 세계의 왕국은 미적 감각을 상당히 중시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고위종족이 되고 싶어 했겠지. 천사나 악마나, 아주 아름다운 고위종족이니까.
물이 어찌나 맑은지 빛이 저 아래까지 닿았다.
골고루 비추는 것은 아니지만 빛줄기가 곳곳에 천상의 기둥마냥 아름답게 세워져 있다.
비치는 곳은 반짝이며 비치지 않는 곳도 반사광을 받아 은은하게 자태를 드러낸다.
멸망한 도시라기보다는 처음부터 물 아래에 지어진 것 같았다.
인어가 헤엄치며 노래할 것 같은 그런 도시.
다만, 세월의 흔적은 역력히 남아 있어 자세히 보면 무너지거나 해초가 엉겨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낡았거나 을씨년스럽다기보다는 신비로워 보인다.
그래도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희우는 잠깐 저곳에 잠들어 있을 아이템들의 파밍을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오빠의 사고를 따라하다 보면 어딘가 너무 나갈 때가 있다.
부부는 닮는…….
그 순간 생각을 강제 절단한다. 쾅 하고 머리를 옆에 있는 제니에게 박고.
제니가 어리둥절해하며 이마를 매만지는 동안 생각한다.
파밍이라니. 효율 중시도 정도껏이지, 그런 사람은 파티에 한 명이면 족하다.
거기에 욕심은 유배자의 덕목이 아니다.
앞장서던 쥐새끼가 말했다.
[이렇게 조심조심 지나가면 저 녀석들은 모릅니다!]
쥐새끼가 자신만만하게 앞장섰다.
당연히 그렇게 쉽진 않았다.
거대한 뱀장어? 뱀? 어쨌든 길고 긴 괴생명체가 아래를 지나갔다.
희우는 곧바로 판단했다.
이렇게 세 명이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빠르게 지나가야 한다.
다만 쥐새끼가 패닉에 빠졌다.
[어어, 저놈이 왜 여기에?]
희우는 냉정침착한 유배자답게 대처했다.
쥐새끼의 조인트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뒷다리 관절을 발로 까며 정신을 차리도록 유도한다.
[헛소리 말고 빨리 전진. 저거 더럽게 세 보이는데 들키면 곤란하지?]
쥐새끼가 허둥지둥 앞장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희우는 그 와중에 불길함을 느꼈다.
어쩐지 말이야.
이런 상황이면 항상 저놈한테 들키지 않아?
오빠에게 들은 필드 보스 목록을 생각해 본다.
위대한의 편린이 아니더라도 자잘한 필드 보스는 셀 수 없이 많다.
[리프트]나 튜토리얼에서도 많이 만나 본 존재들.
그저 그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짐승이나 몬스터에 해당하는 그런 존재다.
그래도 지금은 안 싸우는 게 좋다.
가장 소중한 것은 목숨이다.
하지만 희우는 이미 어딘가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휘감은 행운의 뒤틀린 사랑은 결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대로 수로로가서 아군과 얌전히 합류할 상황을 잘 내어주지 않는다.
메인 던전에서부터는 대신격들이 주시하기 시작한다고 했던가.
해방.
어쩌면 그 해방에 대신격들도 해당할지도 모르지.
그래서 희우는 아래의 거대한 뱀장어와 눈이 마주쳤을 때.
인지부조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대신 블랑쉐와 제니에게 지시했다.
[제니, 저거 돌진하면 한 번은 막을 수 있을까요?]
[노력해 볼게요.]
블랑쉐도 핀을 퍼뜨렸다.
[위대함의 편린]도 아니다.
저 뱀장어 정도면 꼭 싸워서 이기지 않더라도 지나갈 만은 할 것이다.
희우의 판단은 정확했다.
뱀장어는 몸을 수축시키더니.
입을 벌렸고.
다음 순간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제니와 희우가 함께 뱀장어의 아가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쥐새끼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누니이이임!]
블랑쉐가 쥐새끼에게 설명했다.
[저런 놈은 내부로 들어가는 게 더 나은 경우가 많다.]
내장은 단련되지 않는 법이다.
아직 먹이로만 생각하고 있을 때 치명타를 입히기 제일 좋은 방법이다.
물론 그들의 파티 리더 정도가 아니라면 도무지 할 수 없는 발상이지만.
* * *
“천사……. 살려…….”
로스엘은 주관적인 시간으로 한참을 날았고, 객관적인 시간으로는 얼마 이동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보스룸 앞을 지키는 뒤틀린 천사들은 당연히 스펙이 아주 높다.
물론 잘못 만들어진 기계신의 제조물인 저것들은 결함품인 만큼 약해야 한다.
하지만 기계신의 신성이 깃든 이 공간, 아니, 아예 기계신의 신의 신성으로 유지되는 거나 다름없는 이 공간이 문제다.
한때 이 왕국 전체에 권능을 행사했던 무수한 신좌들의 집합은 당연히 강력한 신성을 행사한다.
한때 그 신좌에 앉아 있던 신들이 자신들의 신도에게 내리던 그 권능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음이다.
로스엘은 신과 가장 밀접한 종족인 천사로서, 이곳의 괴물들이 기계신의 신도로서 그 권능을 수여받았음을 느꼈다.
저 기계신은 그저 장치일 뿐이다.
그러니 단지 마지막으로 받은 명령을 아직도 수행 중인 것이리라.
오래된 기억을 뒤적인다.
“그러니까. 나를 세피로트에 앉힌 후에도 계속 그랬단 말이지.”
로스엘은 만들어진 기천사가 아니다.
아니, 기천사 자체가 만들어진 존재니 그야 아주 아닌 것은 아니긴 하지만.
적어도 제조사가 다르다는 뜻이다.
유배자들이 몰락하며 사라지고, 결국 왕국의 문도 리프트도 모두 닫히고.
많은 것이 잊혔다.
서버의 개념조차 잘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인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은 심연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줄어가는 세상에서, 남은 세상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세상을 되돌릴 법을 아는 이는 없다. 그런 지식은 세월의 지층 사이로 파묻혔으니까.
로스엘은 그때 그녀의 세계가 [메인 던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했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가야 했다.
로스엘이 세피로트의 자리에 앉은 것은 우연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여기가 그 도시라면. 그곳도 아직 남아 있겠지.”
많이 망가지고 뒤틀렸지만 결국 신이 제어하고 신이 만들었던 도시다.
그리고 기계신은 기계다.
그렇다면 통제실도 있음이었다.
그때 번쩍하고 광선이 머리카락을 스친다. 전기에 지져져 파마가 된 머리카락 일부가 바스라진다.
“그런데 얘들아! 나 좀 놔주지 않을래애?!”
로스엘은 식은땀을 흘리며 웃었다.
마구잡이로 날고 있어 솔직히 여기가 어디인지를 잘 모르겠다.
헤매고 다니다가 먼저 잡혀 죽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곧, 로스엘은 어딘가 낯익은 통로를 발견했다.
“여긴가아!”
차단문을 내릴 정도의 시간은 있었다. 이지가 없는 천사들은 한동안 문을 열어보려고 애쓰다가 사라졌다.
“휴.”
로스엘은 낡아빠진 제어판을 보았다. 그다지 미래적이진 않았다. 그보다는 마법적이다.
이 거대한 도시를 제어하는데 일일이 신전으로 가서 읍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능이 다 살아 있을까? 그보다 기능이 뭐가 있지?”
로스엘은 세피로트에 앉은 전투원이었지 관리원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냥 짬으로 이것저것 때려 맞출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적당히 이것저것 누르다보니 도시의 어딘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화면이 떠올랐다.
“오우.”
지도다.
조금 더 조작한 끝에 로스엘은 파티 오르골의 인원들 어디로 흩어져 있는지를 알았고, 화면으로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어디 보자, 수문 여는 게 어디 있더라.”
파티원 중 누군가는 지하수로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빼준다면 도움이 되겠지.
수중전이 전문인 케이스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