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02화
메인 던전 - Lv.3796 파티 오르골(1)
중앙에서 수상한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을 때, 아서는 일단 부정했다.
젊을 적부터 군주였으며, 그렇기에 품격이라 부르는 오만함 또 한 가진 바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아서는 리더를 신뢰했다.
지난 반년간의 행보, 그리고 [하드스록]을 쓰러트린 위업.
자신을 쓰러트린 것을 위업이라 스스로 말하기는 좀 부끄러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레벨 2000 남짓으로 1000 이상 높은 자신을 상대로 승리한 것은 온전한 진실이다.
생사를 걸고 싸우는 상황이었다면 또 모르겠다고 하겠으나, 부활 스택을 그때 한번 날려먹지 않았나.
판정패도 그런 완벽한 판정패가 없지.
고집스러운 기사는 그렇기에 리더를 신뢰했고, 사실 어느 순간부터는 신뢰의 범주를 넘어서서 신앙했다.
아서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으나 어느 순간 절로 그리 되었다.
리더 바라기인 서브리더.
리더에게 말을 거는 것이 찔려 자신과 에길을 더 자주 찾아오는 고양이.
딸이라는 자신의 위치에 아주 만족하는 마법사.
정서적으로, 그리고 인연이 있기에 틱틱 거리면서도 잘 따르는 암살자.
* * *
* * *
그런 파티 속에서 [하드스록]과는 또 다르게 자신의 자리를 발견했다.
그러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서는 언젠가부터 파티의 큰 어른이었다.
공경 받고 존중 받는다.
낯익은 장면이었다.
[하드스록]의 아서는 왕이었다.
카베라는 리더가 있어도 노쇠한 그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군림하는 것은 아서였다.
바깥에서도 하던 일,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래서 그저 하던 대로 했다.
지금의 이 파티는 조금 더 과거.
아직 젊고 미숙하던 시절, 왕이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던 시절의 자신을 생각나게 한다.
원탁의 기사들.
그들과 아서는 동료였다.
왕과 신하 같은 게 아니다.
카롤리나 멜메르도 아서는 동료라 생각했으나 그들도 그랬냐고 한다면.
사실 어느 정도는 아니다.
아서라는 강력하고, 또 강력한 노기사에게는 언제나 경외가 함께 했다.
이 파티에서는 달라졌다.
모두가 동료임에도 그 경외는 파티 리더인 한 남자에게 향한다.
평생 누구를 섬겨본 적 없는 아서도 자연스럽게 수긍할 만큼 대단한 인물이다.
바로 그렇기에, 아서는 무의식적으로 이 상황을 부정했다.
안이했다거나, 당황했다기보다는 리더가 말한 것이 틀린 적이 없기에 일어난 관성적인 사고다.
그리고 아서도 깨달을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났다.
[행운의 여신이 결국 여기까지 도달한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심연의 신이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은 꿈이라고 말합니다.]
[시간의 신이 미궁은 명료한 현실이라고 이릅니다.]
[세 명의 신이 말합니다. 당신의 시련은 이제 시작되는 것이라고.]
세상이 멈추고 신들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아서는 그 메시지의 뜻을 이해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미궁의 불가해함은 이미 충분히 많이 겪었다.
그가 느낀 것은 단지 지금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는 사실 그 자체다.
리더에게 언질조차 받은 적이 없다.
완전한 이상사태.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고는 했으나 지금까지 잘도 맞춰왔다.
틀린 적이 없다.
혹여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오차 범위 내일 뿐.
[하드스록]이나 악룡조차도 오차 범위 내인 남자였다.
그러나 이번은 명확히 그렇지 않다.
다음 순간 시간이 돌아왔다.
[되살아나는 영광]
먼저 필드의 명칭이 변한다.
그래서 새롭게 메시지가 떠오른다.
어렴풋이 기억난다.
이것은 페이즈가 넘어가는 상황에서 뜨는 메시지.
이 경우의 보스는.
[위대함의 편린]
[기계신 - 아후라 마즈다]
리더는 종종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했다.
미궁의 이상한 점.
대표적으로 서브 리더의 존재.
그런 식으로 행운의 관심을 받는 경우는 리더가 아는 내에선 없었다고 한다.
그 우려는 길게도 이어졌다.
아서 역시 어딘가 인식의 어긋남을 느낀 적은 있다.
심어진 기억일지라도 30년차가 넘는 기억이 있다.
그 기억 속의 미궁은 이번 회차에서도 마찬가지로 유지된다.
미궁은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아서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30년차에는 없는 것이 많았다.
이번 회차에 처음 겪는 것이 너무 많다.
리더가 만약 아서나 에길, 그리고 블랑쉐와 같은 존재라면?
그 의심이 지금 확신이 되었다.
쫓기는 것도 잊고 멍하니 서있는 에길과 제니를 보니 모두 같은 메시지를 보았던 모양이다.
“에길, 제니. 정신 차려라.”
나직하지만 울림이 있는 목소리는 파티원의 귓가 깊숙이 파고든다.
“아무래도 이건 리더가 아는 대로 진행되지 않을 모양이야.”
로그뭐시기.
리더에게 들은, 그가 아는 이 미궁의 장르.
일정한 템플릿을 가진 여러 가지 사건들이 무작위로 엮여 만들어지는 진행.
지금까지는 사실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든 일은 리더가 예측할 수 있었다.
미궁의 혹독함은 그 이지 앞에서 꽤 오랫동안 잊혀졌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아는 미궁이다. 그, 리더가 뭐라고 했더라.”
에길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로그라이크.”
그랬다.
어떤 게임의 장르명칭.
동시에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이정표들이 바스러지는 단어였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그들이 원래 알던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던 미궁이다.
에길이 말했다.
“우리는 늘 하던 일이군요.”
희우 측에는 아예 설명해줄 사람이 있었다.
오르골A는 자신이 느끼는 당황과 공포에 대해 설명한 후, 넋을 놓았다.
희우는 그 모든 발언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본인도 의심하기 힘들만큼 정교한 복제가 아닌가.
그렇다면 어딘가에 있을 진짜 오빠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희우는 빨리 오빠부터 찾아내야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야 오르골A가 보이는 반응을 보면 정신이 혼미해도 보통 혼미한 게 아닐 것 같다.
“자자, 진정해요. 오빠.”
“아니, 그 진정은 하고 있어.”
약간 넋이 나간 목소리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제대로 주변에 달려오는 것들에게 대응하며 관찰 중이다.
동시에 저 멀리 출현한 보스 [아후라 마즈다]를 바라보고 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지?”
“이제부터 알고 하는 건 없다는 거죠?”
“그래. 큰 틀이 어찌 짜여있는지는 알 수 있어. 하지만…….”
“예언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는 잃었다. 더 큰 위험이 있을 것이다. 항상 하던 말이잖아요.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을 뿐이야.”
“그렇지.”
오르골A가 털고 일어난다.
희우는 어쩐지 미안해졌다.
이 오빠라고 가짜는 아니다. 이곳의 기믹은 그런 것이라 들었다.
애초부터 기계신이 받은 마지막 명령이 이런 정교한 복제를 만드는 것이었을 테니.
SF영화 같은 것에서 봤던 딜레마가 떠오른다.
이 오빠도 진짜 오빠다.
희우는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오빠가 많은 건 어쨌건 좋은 일이다.
자신이 복제는 아니니까.
음.
독점할 수 있을지도.
3대1? 어쩌면 4대1?
순간 멍청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 생각을 재빠르게 털어낸다.
“왜 이상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어. 일해야지. 침 흐르겠다.”
“맞아. 그래야죠.”
제니와 블랑쉐가 어이없다는 듯이 보고 있는 가운데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상에 빠지면 안 된다.
지금은 아주 위험한 상황이다. 모든 예상을 넘어 상정하지 않은 이상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오빠가 앞장서며 설명한다.
“지금 잡을 수 있는 녀석이 아니라고는 못해. 튜토리얼에서 늘 하던 거니까.”
담담하게 말하지만 그늘이 져있다.
희우는 왜 그럴까 생각해보았다.
사람은 변한다.
어떤 식으로건 변한다.
희우도 그랬다.
더 예전 같았다면 오빠는 틀림없이 말했으리라.
이게 게임이지.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이건 게임이 아니니까.
정말로 아니니까.
누구 하나 죽을까봐 걱정하고 무사히 미궁의 클리어를 목표 삼되, 사망자가 생길 것 같다면 포기할지도 모른다.
왕국을 돌보며, 신좌에서 세상을 굽어보며, 어떤 의미로는 이 세상 자체에 애정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아마 오빠의 기나긴 유배 생활 가운데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겠지.
문득 떠오른다. 점진적이지만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게임을 게임이라 부르지 않는 시기를 지나 이제 다시 미궁을 게임 적으로 접근한다.
게임이라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게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에, 왕국과 파티원들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에.
한순간에 흘러 닿은 생각이었다.
희우는 그 사실에 그 변화에 만족했다.
그리고 만족한다면 그것을 유지해야한다.
“좋아요! 가죠!”
“갑자기 왜 또 그렇게 신을 내?”
“곧 죽어도 신나게. 그게 미궁을 클리어 하는 방법이라면서요?”
오르골A는 그야말로 오빠처럼 흐뭇하게 웃었다.
“덕분에 힘이 나네.”
블랑쉐가 레일건을 갈겼다.
총탄이 스친다.
“바쁘다. 빨리 브리핑을.”
“오, 오케이…….”
오르골A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상정한 사태는 아니지만 이겨낼 수 없는 사태도 아니다.
메인 던전 공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력 이전에 소모를 억제하는 것.
준비해온 소모품은 산더미처럼 많으며 그 모든 것을 때려 박는다면 충분하다.
때 아닌 곳에 나타난 보스라고 상대하지 못할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럴 수 있게 준비해왔다.
미아는 객관적으로 지능 20점 이상은 확실하다는 평가를 받는 NPC다.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미아는 NPC다.
유배자가 아니다.
파티원 중 유일하게, 일말의 가능성조차도 없는 가짜다.
그래서 가짜 제니에게도 동질감을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니는 영문도 모른 채 입만 벌리고 벌어지는 일을 목도하고 있다.
미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방금 전에 뜬 메시지가 암시하는 것이 무엇일까?
미아가 왕국에서 배운 것은 마법뿐만이 아니다.
어딘가 사람으로서 결여되어 있던 부분을 채웠다.
침공 이후 많은 활동을 했다. 대외적으로는 영웅으로서.
개인적으로는 다시 아케인의 학생으로서.
마법사로서의 역량을 단련하는 동시에 학생으로서도 사교 관계를 가지려고 했다.
과거 영재반에서 잠깐 스쳐지나갔던 인연들은 이제 온전히 미아의 친구다.
친구들의 응원까지 받으며 메인 던전으로 진입했다.
그렇게 인간이 왜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는지를 배워가며.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미아는 NPC다. 정말로 부정할 수 없는 명명백백한 NPC다.
고정 NPC라는 아서나 에길은 그래도 유배자이긴 했다.
미아에겐 없는 기억이다.
태어난 것도 미궁, 살아간 곳도 미궁.
어디도 그 바깥이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
모두가 아는데.
가족들이 모두 아는데 자신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느낌.
진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득 고개를 치켜드는 의구심.
단 한 번도 내색한 적은 없지만.
너무 똑똑한 아이기에, 그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한 번도 내색한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조금씩 어딘가를 좀먹어가던 의구심.
뒤늦게 싹튼 여린 자아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여파다.
미아는 지능 20점에 상응하는 NPC가 아니라, 정말로 지능 스탯이 찍혀있는 유배자이고 싶었다.
마인드맵을 가지고 싶었다.
아이는 부모를 닮고 싶어 하는 법이다.
미아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심호흡하고, 제니를 보았다.
입을 딱 벌린 제니의 옷자락을 꾸욱꾸욱 당긴다.
“제니. 제니.”
방금 떠오른 메시지.
거기서 미아는 단 한 구절에만 집중했다.
[진짜가 되기 위해, 여기까지 와라.]
가짜 제니가 돌아본다.
“가짜도 진짜가 될 수 있을까?”
이걸 이 제니에게 묻는 것은 가혹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미아와 이 제니는 크게 다른가?
나아가 아빠 역시 다른가?
어째서 몽환의 숲에 대한 연구를 가장 처음 붙잡았는지.
그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지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미아는 진짜가 되고 싶었다.
이 미궁의 끝에 도달하여.
가족들과 나란히 서서 말이다.
제니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아양이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엄격한 표정으로.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거 알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 좀 해주겠어요? [아후라 마즈다]라니. 이런 이야기는 못 들어봤는데!”
그 말에 미아는 확실하게 현실로 돌아온다.
“맞네. 우선은 그것부터.”
기억력이라면 자신 있다.
세상을 마력으로 보듯 자신의 기억 속을 훤히 들여다볼 능력이 있다.
아빠가 말한 것이라면 작은 토씨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다.
미아는 기억 속의 말을 그대로 입으로 재생했다.
“아후라 마즈다는 기믹 보스이자 정면 승부도 요구하는 보스로, 일단 저 상태의 포격형 보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통제실에서 도시를 부상시킬 필요가 있다.”
제니가 미아를 안아든다.
미아는 제니의 얇은 가슴팍에 머리를 파묻으며 계속 말했다.
“통제실에서 누군가 블록을 제어하여 보스의 공격을 회피할 수 있게 도와야한다. 그렇게 블록을 옮기고 근접전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목표는 가운데, 폭발한 [도가니]가 있던 자리.”
제니는 일단 비행했다.
먼 곳에서 알 수 없는 새하얀 투사체들이 생겨나고 있다.
저것이 어디를 노릴까?
뻔하지.
저 방향을 잘 보면 다른 파티원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으리라.
미아가 마지막으로 말한다.
“하지만 우리끼리 잡진 않을 거야. 옆에 [왕국의 문]과 [리프트]가 있으니까.”
이것은 파티 리더인 아빠의 것을 빌린 말투.
어설픈 성대모사지만 제니도 들으니까 떠올릴 수 있었다.
“원군을 부를 수가 있겠네요!”
미아가 정리했다.
“누가 통제실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블록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제대로 제어중이야. 그럼 우리의 역할은 [왕국의 문]을 찾기.”
[왕국의 문]을 통해 한때 신좌에 앉아있었던 이들이 메인 던전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멸망한 왕국에서 제 역할을 다한 튜토리얼의 문들은 이제 왕국에서 메인 던전으로 난입할 수 있는 통로로서 기능한다.
각자의 역할은 오랜 기간 숙지했다.
리더가 없는 비상사태에서도 스스로 판단을 못하는 파티가 아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파티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더의 지시는 없다.
하지만 그 행동에 흔들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