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03화
메인 던전 - Lv.3796 파티 오르골(2)
로스엘은 개판이 나기 시작한 지도를 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제 똑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혼란에 빠져 어쩔 줄을 모르는 로스엘의 눈에 아직 움직이고 있는 블록들이 보인다.
그리고 현현한 기계신은 그것을 향해 새하얀 빛들을 모아 뿌리기 시작했다.
중심의 도가니가 터져 나가고 눈부시게 빛나는 가운데 그곳에서 뿌려져 나가는 셀 수 없이 많은 광탄.
로스엘은 저것의 위력을 안다.
고도로 집적된 빛의 원소는 천사라도 맞으면 충분할 정도의 타격을 입을 것이다. 악마라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도 싫다.
그리고 너무 많았다.
셀 수가 없다.
밤하늘의 별을 세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어쩌지. 어쩌지. 유배자들이 다 죽을 거야. 죽는다구.”
고장난 기천사의 패닉 상태를 복구한 것은 화면 속의 움직임이다.
그녀가 걱정하는 그 유배자들은 상황의 어려움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전히 추격하는 몬스터들을 따돌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광탄의 방패삼기까지 한다.
* * *
* * *
아주 먼 곳에서 날아오는 것임에도 꼬박꼬박 반응하여 구조물 뒤에 숨거나 마주 타격하여 받아낸다.
화면 속이다.
작고 꼬물꼬물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로스엘은 어느 순간 안절부절못하는 대신 그것을 보고 있었다.
빨려 들어갈 듯이, 그리고 혹여 놓칠세라 집중하여.
그리고 그러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아.”
작은 탄식.
“맞아. 유배자라는 건.”
이런 일에 죽는 이들이 아니다. 로스엘이 기억하는 찬란한 도전자들.
무수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도전하고 도전한 끝에 스러져 가던 목숨들.
어느 시대나 그런 이들이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완전히 멈춰 버리기 전에는 말이다.
로스엘은 그것을 꽤 자주 보았고, 그저 보고만 있었다.
그녀에게 메인 던전 클리어의 동기는 없었으니까.
지금은 그것을 후회하고 있다.
차라리 그들과 함께 스러졌다면 어땠을까? 천사의 불멸에 가까운 수명은 그만큼의 후회를 쌓아가며 그녀를 짓누른다.
“뭔가 해야 해.”
뭔가 할 수 있는 자리다. 그렇다면 뭔가 해야 한다.
사고뭉치 로스엘이 아니라 파티 오르골의 객원 멤버 로스엘로서.
로스엘은 이제 다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내가 무얼 할 수 있지?
그러다가 깨닫는다.
어느 순간부터 블록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그녀가 앞길을 막는 블록을 치운다면 동료들이 타고 있는 블록은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
어딘가에 부딪힌 후, 더 이상 누구도 블록을 조작하지 않고 있다.
로스엘은,
로스엘은.
자신이 그것을 해야 함을 깨달았다.
“어, 하지만 나는 그렇게 똑똑하지 않은데.”
작동법은 안다. 하지만 능숙하게 할 수 있는가?
조작하던 파티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그 파티원은 어떻게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까?
우선은 움직인다.
다행히 기천사의 손은 매우 빠르다.
생각한 대로 파바밧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멈춘 블록들이 제각각 움직인다.
그러다가 로스엘은 깨달았다.
손은 빠르지만 생각이 그 손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지도는 너무 넓었고, 블록도 너무 많았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것만 해도 본디 수백 칸으로는 나뉘어져 있었을 바둑판이다.
그리고 블록마다 이상한 게 올라타 있기도 했다.
로스엘은 그중 몇몇을 알아챘다.
강력한 어둠의 정령이라거나, 몹시 강력해 보이는 쥐라거나.
블록은 나아가다가 어딘가에 부딪히면 멈춰선다.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부드럽게 말이다.
그렇다면 보스급 존재가 있는 블록을 부딪치게 한다면…….
그대로 보스전이 시작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지나치게 가혹하다.
동시에 로스엘은 무언가 다른 것들도 보았다.
도움이 될 만한 요소들.
낡은 포탑이 보였다.
아직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기계신의 집요함은 최대한 기계들의 기능을 살려둔 모양이다.
애초에 이 통제실이 작동하지 않는가.
회복의 샘을 흉내 낸 분수도 보인다.
미궁의 섭리가 깃든 진짜 회복의 샘만큼은 못하겠으나 유용하리라.
로스엘은 머리가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혼자서는.
혼자서는 이걸 해낼 수 없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정신이 어지러워지니 손도 꼬이기 시작한다.
방향 실수가 생기기 시작한다.
로스엘은 결국 손을 멈추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생각할 시간.”
눈이 핑핑 돈다. 머리를 너무 써서 증기라도 나오는 것 같다.
이 낡아빠진 두뇌에 오버클럭이라도 걸 수 있다면.
“오버클럭?”
로스엘은 멈칫했고.
쿨다운을 확인했다.
때맞춰 돌아왔다.
[오버클럭 익스텐션]
로스엘의 눈동자에 희미한 기계적인 테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로스엘의 다급한 마음만큼이나.
만능은 무능과도 같다.
아서가 알기로도 그랬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특화된 분야가 없다는 것과도 같다.
아서가 지금 그랬다.
40년 전부터 하이랭커로서 쌓아 올린 경험치와 정신적 경험, 그리고 고정 NPC로서 설정된 압도적인 기초 스펙과 인생 경험.
단지 그것으로 찍어 누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원래 작은 육각형들이나 무능이 되는 법.
전사로서의 아서는 만능이다.
파티의 중심이 되는 존재.
엑스칼리버라는 비장의 무기를 등에 짊어진 채, 단단한 중갑으로 전선을 형성하며 필요하다면 화력지원, 경우에 따라서는 방어선 형성.
반면 에길은 만능형 전사라기보다는 극단적인 공격형 전사로서의 길을 걸었다.
이것이 아서와 조합된다면 굉장히 의미가 있다.
하늘에 빛이 가득하다. 여러 방향으로 갈라져 쏟아지기 시작하는 광탄들이 다시 날아들고 있다.
“빠져나갈 수 없다. 엄폐물도 없다. 제니 적을 맡아라. 에길에게 시간을 주면 된다.”
기본적으로 대검은 검과는 따로 마스터리가 존재하는 무기다. 고로 아서는 작은 병기를 사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명목상으로만 대검이라면 마스터리는 작동한다.
현재 등에는 두 자루의 대검이 매여 있다.
하나는 엑스칼리버, 다른 하나는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아다만타이드 대검이다.
반면 지금 들고 있는 것은 대검이라기엔 너무 크다.
미아라면 그 위에 넷 정도가 누워도 상관없을 것이다.
일반적인 인간보다는 오우거나 트롤이 쓰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이는 거검.
그러나, 아서는 본디 초인으로 태어나 왕으로 운명지어진 원탁의 수장이다.
인간일 때도 들고자 하면 들었으리라.
인간마저 포기한 지금은 더욱더 그렇다.
거검은 통짜 아다만타이드다.
무게는 당연히 톤 단위로 세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 점프는 가볍다.
단번에 3층 건물 높이만큼 치솟는다.
메인 던전의 바닥은 다양한 이유로 단단하다. 이런 무게로 뛰어오르더라도 온전히 힘을 받을 수 있다.
아서는 허공에서 그대로 거검을 휘둘렀다.
속도는 조금씩 빨라진다.
몇 가지 스킬이 더해진다.
[무명 : 횡베기]
광탄 수십이 그것에 반발한다.
스러진 것은 일부에 불과하나 방향은 바꿀 수 있다.
아서가 위에서 그렇게 방어를 펼치는 동안 밑에서는 제니와 에길이 괴물을 상대했다.
“에길!”
제니 역시 아서와는 다른 형태로 만능의 길을 걸었다.
자신의 생존과 누군가의 생존.
그리고 온갖 유틸리티로 적을 현혹시킬 수 있다.
본래의 제니라면 그 특성을 제대로 살릴 수 없겠으나, 스펙에 맞게 책정된 움직임은 연계를 더 날카롭게 해낸다.
몇 가지 원거리 공격과 그 각도를 통해 달려드는 뒤틀린 기천사의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제한한다.
동시에 달려들지 못하니 한 놈씩만 차례대로 제니를 노리고 다가온다.
에길의 눈앞이기도 하다.
날개가 생기고 추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의외로 큰 도움이었다.
똑같이 달려가 휘두르더라도 가속에 의한 추가적 물리력이 발생한다.
에길은 날개를 다루는 게 익숙하진 않았으나 단순 비행만큼은 어찌 익혔다.
발을 내딛는 순간 날개를 펴고 추력을 더하여 내리찍는다.
제로백은 별 것 없더라도 에길의 손에 들린 [푸른 닻]은 훌륭한 도끼였다.
휘두르는 도중 무기 자체의 기믹이 작동한다.
접혀 있던 도끼가 펼쳐져 거대해지면서 그야말로 닻과도 같은 형상으로 변했다.
우지직하며 지상이 으깨지고 뒤틀린 기천사도 으깨졌다.
그럼에도 단숨에 죽지는 않는다.
제니는 한 발 전진하며 다른 기천사 하나를 잠깐 붙잡았다.
에길은 곧바로 회전하며, 도끼에 박혀 버린 기천사 째로 휘둘렀다.
주변의 건물에 날이 스치고 조금 힘이 감소하지만 제니가 맡지 않은 다른 기천사 하나가 휩쓸린다.
쾅 하고 날아갔다.
죽었을 리는 없으나 멀리 떨어트리면 그것으로 족하다.
“소리를 과하게 내도 되니 편하군.”
이미 사방이 개판이다. 이제 더 이상 소리에 따른 인식도 없다.
눈이 멀쩡하지 않은 것들은 갈피도 못 잡고 있는 참이다.
물론 적은 끝이 없다.
제니가 붙잡고 있던 기천사의 목에 검을 쑤셔 박았다.
확실히 벨 필요는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경험치가 아니다. 무력화면 족하다.
그와 동시에 지붕 위에서 날아드는 기천사 무리가 있었다.
에길이 달려들며 이번엔 도끼를 접었다.
변형할 때 추가적인 힘이 발생한다. 본래 도끼는 이런 형태의 기믹이 탑재된 경우가 많다는 모양이다.
크게 쓸어내듯이 휘두른다.
한손 도끼가 빠르게 펼쳐지며 공중에서 뛰어내리는 것들을 쓸어 담았다.
인간형 천사를 베이스로 한 이상 질량이 클 수는 없다.
단숨에 저 멀리까지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그곳은 블록 밖이다.
괴조들이 날뛰며 떨어진 괴물들을 씹어 삼킨다.
“또 와요!”
새된 소리로 제니가 경고했다.
에길이 다시 무기를 접는 동안 아서가 외쳤다.
“숙이게!”
쾅!
마지막 광탄이었다. 그렇다면 방향을 유도할 수 있다.
서브 리더의 무술은 동양적이었으며 그렇기에 흘리기에 특화되어 있다.
아서는 그것을 배웠다.
리더 또한 아서의 스승이 되어주었다.
공감각 속에서 모든 위치가 한눈에 들어오며 방향 제어를 가능케 한다.
멀리 괴물들이 달려드는 바닥에 광탄이 처박혔다. 성대한 폭발과 함께 빛이 산산이 분해된다.
“맞으면 확실히 뼈도 못 추리겠군.”
아서는 악마다. 이 정도 거검이 아니었다면 쳐내는 것만으로도 피해를 입었으리라.
“아직도 많이 남았어요.”
제니가 가만히 탐지계열 스킬을 발동하며 귀를 기울이더니 말했다.
날뛰는 기천사는 이 블록에 너무나도 많았다.
새로운 블록으로 옮겨 탈 것이라는 신호를 줘야 할 텐데.
이미 그 수신호는 내보냈다.
리더가 조정하고 있다면 적절한 위치에 몬스터가 적은 블록을 보내주리라.
“블록이 다가와요!”
실제로는 그들이 탄 블록이 움직이는 것이지만 멀리서 다른 환경을 가진 블록이 다가오고 있긴 했다.
숲이었다.
아름답고 싱그럽다.
그 안에 괴물은 없을 것 같다.
“일단 저쪽으로 갈아탄다!”
다시 광탄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내가 한 번은 더 막아보지.”
“아서, 거기 다쳤어요.”
제니가 포션을 들어 뿌렸다.
갑옷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광탄의 파편이 스며들었는가.
“아서, 이번엔 내가 하지. 그게 맞겠소.”
“에길은 공격을…….”
“공격으로 쳐내면 되는 것이지.”
도끼가 접힌다. 에길은 광탄을 한 번에 쳐낼 스킬 조합을 몇 가지 떠올렸다.
로스엘이 보기에 수염쟁이들의 그룹은 이미 많은 전투를 치렀다.
찰랑찰랑해야 할 포션 병이 메말라가는 것이 눈에 띈다.
그렇다면 일단은 회복이다.
수십 배로 가속된 시간과 사고 속에서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쳤다.
“일단은 보냈다……!”
회복 수단이 존재하는 숲 블록을 몬스터가 가득한 도심지 블록과 붙이는 데 성공했다.
“어어어, 너는 거길 가면 안 되는데!”
하지만 다른 쪽도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태스킹이 부족하다.
시간이 지나자 아후라 마즈다가 제어를 하고 있는 것인지 저절로 움직이는 블록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 블록의 모습이 낯익다.
서브 리더의 그룹이 지하 수로에 들어서기 직전에 상대했던 해자가, 분해된 이제는 그보다는 호수라 부를 것이 있는 곳.
그러면 그 뱀장어가, 아니, 짙은 어둠의 정령이 존재하고 있을 것인데.
쿵 하고 숲과 호수가 연결되었다.
“떼야 해! 떼야 해!”
늦었다.
먹잇감에게 실컷 고통받고 놓치기까지 한 어둠이 곧바로 숲으로 넘어가 버렸다.
“미안해.”
로스엘은 눈물을 흘렸다. 냉각수일지도 모른다. 머리에서 김이 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