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24화
왕국 - 첫 번째 리프트(1)
왕국 중심부, 본디 성직자의 마을이 있던 곳에 거하게 세워진 새로운 도시의 이름은 고블린 시티다.
고블레타리아 왕국과의 공식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기념해서인지 뭔지 어쩌고 그랬지만, 본질은 고블린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레미는 고블레타리아와 파티 오르골은 어차피 한 몸이니까 그런 식으로 인식을 가꾸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일종의 전쟁 준비다.
우리가 메인 던전을 공략하다보면 어떤 식으로건 다시 침공과 마주하게 된다.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어, 드라간 같은 일부를 빼면 말이지.
어쨌든 대다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의 불평을 최대한 억제하고 가슴 속에 뽕을 가득 채워 왕국 방어에 임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다.
효과는 생각보다 좋아보였다.
적어도 이 왕국은 전쟁을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외부의 조력도 있다.
“어서 오십시오! 대전사님!”
나를 아직도 대전사라고 부르는 고블린 급사는 연방 출신이다.
그 서버의 고블린들에게 왕국은 천국이나 에길이 말하는 발할라에 가까운 곳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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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공헌을 하고 나이가 들어 은퇴한 고블린들이 왕국으로 오게 된다.
철저한 내부 심사를 거친다고 하는데 거기까진 자세히 모르겠다.
“고생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이 나이든 급사는 연방에서 일류 기술자였다고 하는 모양이다.
그곳에서 받던 대우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기색은 없다.
이 왕국 기준으로 고블린은 더 이상 몬스터가 아닌 취급을 받고 있다.
플레이어블 종족이어서 이전에, NPC가 명확한 이들도 레미의 정책에 따라 우대받으며 지낸다.
파티 오르골과 고블레타리아는 한 몸.
그런 의식을 더 강조하고 새기는 작업이라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에는 마찬가지로 나이든 고블린과 리온이 있다.
“서기장님, 대전사님을 모셔왔습니다.”
“어허, 이제 난 서기장이 아니야.”
그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마왕 아르바리온이 나를 심드렁하게 본다.
“오래간만입니다. 선생님.”
“그래, 이제 이쪽으로 완전히 옮기겠다고?”
“네. 46서버에서 해야 했던 일도 끝났으니까 선생님의 고향으로 오려고 했습니다.”
“골치 아프지?”
“말도 마세요. 세상에 대한 신뢰를 잃을 것 같은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말 안 해도 안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개인이란 것은 그렇게 흐를 수밖에 없다.
뒤에서는 더스번과 함께 연방이 될 고블린 부락을 돌봐야하며, 앞에서는 용사의 스승으로서 인류 최전선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돌고 돌아서는 끝내 팽 당한다.
용사라는 족속들의 끝이 좋은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유배자와 비슷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탓도 있을 것이다.
규격 외의 힘은 누구도 보유하지 않는 편이 옳다.
리온의 성격이 회유가 될 것 같았다면 달랐겠지만, 이런 정통파 용사들은 보통 배신으로 그 생을 마감하지.
“용사는 잘 지내?”
“……이번에 결혼합니다.”
“오…….”
수줍게 청첩장을 건네준다. 결국 해냈구나 용사 아가씨.
사실 마왕이기에 늙지 않는 것이지 지금 리온의 나이는 생물의 규격을 조금 벗어나있기는 하다.
용사 아가씨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연방을 키우고, 연방의 뒷배가 되고, 더 이상 암약할 이유도 사라졌으니 은퇴한 셈이다.
지금의 이론은 단순한 나이도 세 자리 수겠지.
“참석하지 못할 것 같은데.”
“미궁의 끝을 보기 위한 원정을 떠나셨다죠. 그래도 드리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청년 같다.
확실히 정신은 외형을 따라가는 면이 있다.
고블라초프 전 서기장이 헛기침을 했다.
“대전사님. 아마 이번 식사가 제가 대전사님을 뵙는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자네 나이가 몇이었지?”
“아흔이 다되어 가는군요.”
고블린으로서는 장수했다.
정말로 떠날 때일지도 모른다.
“트동트 영감님이랑은 잘 지내시나?”
“시대가 달라도 그린 스킨은 그린 스킨인 법이지요. 소일거리로 주술을 조금 배우고 있습니다.”
이 서기장…….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살지도?
조금 기다리니 레미가 찾아왔다.
꽃잎 요정이 된 후로는 항상 반짝반짝하는 것 같다.
보통은 저렇게 드러내놓고 다니지 않고 그루터기 요정인 척 하는 경우가 많은데, 레미의 경우에는 거리낌이 없다.
연인이 생겨서 그런가?
“늦어서 죄송해요.”
“제일 바쁠 텐데 뭘.”
“일단 빨리 일 이야기를 해볼까요?”
다음 전쟁, 그러니까 왕국 방위 계획에 대한 회의가 시작된다.
희우는 서브리더로서 파티에 필요한 물자들을 구하러 다녔다.
포션이 봉인되었다.
그러면 다른 회복수단이 필요하다.
애석하게도 유배자들은 회복수단에 큰 관심이 없다.
그야 그럴 것이 만능의 회복약이 항상 어딘가에 샘솟고 있지 않나.
“의존도가 높은 게 이렇게 문제가 될 줄이야…….”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유사 포션도 결국 병에 담을 것을 상정하니까 다른 방식으로 유통하기는 힘들군.”
아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희우는 12층에서 있었던 포션 장사를 떠올렸다.
유배자들이 있으면 샘이 있고 샘이 있으면 그걸 팔 수 있다.
어떻게든 효력이 다하기 전에 배송하여 판매했다.
그곳의 보스였던 샤크마는 그런 식으로 부를 긁어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유통망을 확보하여 조달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다.
메인 던전의 [리프트]는 1회용이다.
왕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지만, 정비를 끝마치고 다시 던전에 돌아가면 영원히 비활성화 되게 된다.
리프트는 총 4개.
그 중 하나를 지금 소비했다.
귀중한 기회다.
“성직자를 한 명 임시로 구해야겠죠?”
“그 수밖에 없겠군.”
“이렇게 될 줄은 오빠도 몰랐을테니…….”
새로운 루트.
포션 금지.
게임 시절에는 존재했던 적이 없는 기믹이라는 모양.
그래서 성직자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된다.
미궁의 성직자는 보조라기보다는 전투직이다.
스탯에 따른 클래스 분류로는 지능 계열 클래스.
신앙하는 신의 권능을 극대화할 수 있으며 그 본인은 신앙에 맞는 전투력을 가질 수 있다.
규율의 대성녀가 보여주었듯이 천사와 유사한 힘을 휘두르는 마법직이다.
지금까지 파티에서 배제되었던 것은 솔직히 말해서 애매한 성능 때문.
느린 템포의 저스펙 전투에서야 전투 시간이 길고, 포션도 헛되이 소비되기 마련이라 치유 능력이 의미를 가진다.
메인 던전 수준에서는 거의 의미가 없다.
포션이 동난다면 치유를 받기 전에 이미 끝장나는 게 보통이다.
무엇보다 치유 능력 자체가 포션보다 고성능이 아니다. 회복은 느리고 더디다.
그래서 통상적인 힐러라는 개념 자체를 포션이 대체하고 있는 곳이 미궁이다.
그래서 성직자는 전투직이다.
“그래도 전투력은 어차피 기대 못할 거고.”
“파티 경력도 문제지만 테마가 테마인지라.”
신성하고 또 신성한 테마다.
악마도 신의 적이라기보다는 신의 다른 면이다 보니 그냥 딜러로서의 능력은 전무하다고 보아도 무방.
보조 역시 제니와 아서, 그리고 마법사들 선에서 대부분 해결되니까…….
“순수 힐러로 성직자를 뽑아야하다니. 미치겠네요.”
“일단 갑자기 메인 던전으로 향한다는데 기꺼이 나설 유배자가 있을 지부터 의문이기도 하군.”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모든 성직자가 치유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림자의 신의 성직자가 치유 능력이 있는 것도 우습지 않겠는가.
“정화의 신이나, 접미를 따져야 하는데. 그렇게 따라와 봐야 그냥 생체 포션 역할이니까 지원자가 있기는 할지…….”
아무리 프로파간다를 펼쳐도 하이랭커급 유배자들은 알만큼 안다.
지금 와서 이 유명한 파티에 들어가는 것은 독이 든 성배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성직자가 고스펙일 리도 없고!”
아서로서도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카베와 그의 인맥을 총동원하더라도 적당한 성직자가 없다.
애초부터 마법사가 적은만큼 성직자 역시 인구가 적은 클래스기도 하다.
“어떡하지…….”
준비할 것은 최대한 준비한 후, 오빠와 레미 언니에게 의논할 문제인 것 같다.
미아는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그 옆을 에길이 따라오며 봐주고 있다.
“좋다. 거의 다 와간다!”
“흐익. 흐악. 흐에엑.”
숨을 몰아쉬는 소리조차 뭉개지고 있다.
디스트로이어 이하의 체력은 그다지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았음에도 현기증을 불러온다.
“좋아! 골인!”
“흐엥. 흐엑. 흐엑.”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바닥에 엎어졌다.
땀이 흥건하다.
데몬이라는 미아의 종족을 생각하면 있기 힘든 일이다.
미아는 발라당 누워서 하늘을 본다.
땀에 젖은 은발이 이마에 달라붙어있다.
에길이 차가운 수건으로 슥슥 닦아주었다.
“좋아. 조금 쉬면 다시 회복될 테니까.”
“네에에…….”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데몬의 육신이 인간에 비해 월등히 우월하다는 점.
단순히 신체 능력의 문제뿐만 아니라 회복력도 좋다.
회복력이 좋다는 것은, 인간의 경우 긴 시간이 걸릴 체력 단련도 훨씬 더 효율적이고 빠르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트레이너 에길이 미아의 기록을 체크한다.
“흠, 빠르게 나아지고 있군.”
실제로 그랬다. 조금씩이지만 바로 직전의 기록보다도 조금 더 낫다.
미아는 왕국에 돌아오자마자 쉬지 않고 운동과 휴식, 식사를 반복했다.
인간이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혹사지만 악마의 빠른 회복력이 최소한의 근섬유 파괴와 재생을 이루어내고 있다.
물론 그만큼 미아는 더 자주 고통스럽다.
“우웨엑…….”
미아가 구토했다. 멀건 위액이 쏟아진다.
건강밖에 신경 쓰지 않은 식단을 섭취한지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소화가 끝났다.
에길은 트동트 영감님과의 트레이닝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약한 종족은 맞군.”
근성장의 관점에서 확실한 최약체다.
쓰러진 미아를 보자 이제는 호흡도 제법 빠르게 돌아온다. 미아는 노란 하늘을 보며 잠깐 눈을 감았다.
“에길 아저씨.”
“그래.”
“저 많이 나아지고 있나요?”
“네가 찾아보았다는 논문대로다. 오늘 하루 정도 노력하면 인간이 일주일은 열심히 한 것과 비슷한 운동효과가 나겠어.”
“으으……. 그럼 3일만 어떻게.”
리프트를 통해 왕국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불과 3일.
돌아가면 그 동안 메인 던전의 시간은 흐르지 않겠지만, 그래도 촉박하기 짝이 없다.
에길은 그래도 꽤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미아의 체력은 병자의 수준이었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사실 재활에 더 가깝다.
인간이 아니니 이리 과격하게 해도 될 뿐이다.
그러니까 3주면 걷다가도 지쳐서 죽을지 모르는 수준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목표는 고양이 미만의 체력을 고양이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
위대한 마법사 미아는 비틀비틀 일어나서 에길이 건넨 쇠뭉치를 들었다.
그리고 덤벨 컬을 시작했다.
“마인드 맵 가지고 싶어요오오…….”
그럼 그냥 포인트를 힘에 투자하면 될텐데.
회의 중에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너네 용사 있잖아.”
리온이 눈을 돌린다.
뜬금없기는 했지.
“예, 말씀하시지요.”
“정화의 신을 믿는 성기사였지?”
“클래스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흠.”
몇 가지를 따져보았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힐 셔틀로만 쓸 거란 말이지. 그것도 아마 다음 리프트까지만 쓸 확률이 높다.
결국 샘을 되찾아내긴 할 테니까.
“스펙이 어느 정도지?”
“무슨……?”
“전투와 기도 스펙.”
정화의 신에게도 한번 물어봐야겠군.
강제 징용의 시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