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29화
메인 던전 - Lv.12500 [천상의 도시 - 구도심](2)
지붕처럼 덮인 신도심 아래의 그늘로 접어든다.
그럼에도 적은 나타나지 않고 도리어 을씨년스러울 정도의 밋밋한 거리가 보였다.
그늘이라고는 해도 이곳 역시 밝다.
위층인 신도심의 바닥이 빛을 내뿜으며 주변을 비추고 있다.
천상의 도시라는 이름에 어울릴 만큼 밝고 화사한 모습은 그대로다.
그러나 인공적인 모습에 더해져 벌레 한 마리, 새 한 마리 존재하지 않고 가다듬어지기만 한 흰색이다.
포근하고 따뜻한 것이 아니라 차갑고 불길함만을 가중시킨다.
“여기가 보스전 필드인 것 같군.”
아서가 담담하게 하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모두가 느낄 때 쯤이었다.
내가 무언가 정리를 해야 한다.
“계획이나 예측이란 건 원래 자주 박살난단 말이죠.”
배제한 것을 다시 불러와야할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면 그에 맞춰 대전제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원래 이런 건 죄다 끼워 맞추기다.
단서가 늘어나다보면 결과물의 모양이 점점 바뀌다가 종래에는 전혀 다른 것이 되기도 한다.
“단순히 난이도적으로 상상해서 필드전 잡몹이 재배치 된 것이라 여긴다면 그만큼 강력한 보스전이 기다린다는 뜻이겠지만.”
* * *
* * *
반대로 미궁이 지금까지 지켜오던 일관성을 개나 줘버렸을 수도 있다.
“모두 그 메시지 보았잖아요.”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대신격들이 일제히 보내온 것.
그 뜻을 지금 해석하는 것은 포기했다.
결과적으로 끝에 도달한다면 알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으니까.
이미 지난 회차에, 혹은 왕국에서 끝마친 번민에 쐐기를 박아주는 확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이번 메인 던전 공략이, 혹은 이번 왕국이, 어쩌면 이번 회차가.
특별하다는 뜻이기는 하다.
“그럼 천상의 도시의 모든 전력이 저기에 모여 있을 수도 있다거나, 지금 상황 자체가 거대한 함정이거나 그런 가능성도 존재하는 거네요.”
“아주 부자연스러울 정도는 아니겠지. 난 미궁이 그렇게까지 똥겜은 아닐 거라고 믿어.”
자조적인 의미의 망겜과 진짜 망한 게임은 다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경우는 배제한다.
“내가 현실화된 메인 던전은 패턴을 알아도 위험하다고 했던 이유 기억나지?”
“문자 그대로 수천 년간 살아 숨 쉰 현명한 존재가 적이기에.”
“산달폰과 아후라 마즈다는 사실 그게 적용되는 보스는 아니었거든.”
능동적으로 사고하는 설정을 가진 보스는 아니었다.
“사대천사라면 좀 다를 거란 말이야. 개개인이 지금까지보다 힘들 수가 있어.”
현역 세피로트의 천사이자 천상의 도시의 수장들 셋.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격으로 치자면 아후라 마즈다와 동격인 명박한 후반 보스다.
산달폰은 약화되고 이성도 흐릿한 열화판이다.
아후라마즈다도 격만 같을 뿐 기믹 보스에 해당하기에 경우가 조금 다르다.
천사와 악마가 주된 적으로 등장하는 테마다.
그곳의 가장 큰 걸림돌은 당연하게, 세피로트의 천사들과 클리포트의 악마들이다.
“그러니까 거기서부터 진짜란 말이지.”
그리고 그것들이 한 번에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그럼 좀 생각을 바꿔야겠지?”
완전한 야생이다. 메인 던전의 선형적 구성을 포기해버렸을 수도 있다.
미궁이 그렇게 했다면 방법이 없다.
천천히 전진하고 있자 로스엘과 리온이 돌아왔다. 퇴로를 확보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적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보지 못했다는 모양이다.
미아가 제안했다.
“마법을 사용해볼게요.”
나는 일행을 멈춰 세웠다.
천상의 도시 내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행위는 당연히 위험하다.
게다가 미아는 실제로 악마다.
정말로 큰일이 날 수도 있다. 어쩌면 단지 다른 곳에 가있을 뿐인 천사 대군이 한 번에 몰려올지도 모른다.
이런 부분은 일종의 맵 기믹이라고 봐야하니 미궁의 융통성이고 뭐고 없다.
“서로가 정보를 쥐는 게 더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되긴 하군.”
위치를 들키지 않고 잠입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차라리 상황을 파악한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주변을 경계한다.
제니가 미아를 안고 움직일 준비를 한 채로 마력 탐지를 시작한다.
미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멀리까지 강렬한 마력의 기류가 동심원을 그리며 뻗어나갔다.
가까운 곳에서는 물리적 압력마저 느껴질 정도다.
건물이 조금씩 흔들린다.
그리고 불길한 마력광을 내뿜는다.
저레벨 지역이라면 마력 탐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타격을 줄 수 있는 일종의 마력파 공격에 가깝다.
천상의 도시의 벽들은 마력을 곧잘 흡수한다. 그 바람에 제대로 탐지하려면 소모도 크다.
사방에서 각자의 한계에 도달한 마력의 파동들이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워낙 짙고 뚜렷한 파문이기에 중심이자 근원인 미아가 아닌 나조차도 정보를 짚어낼 수 있었다.
“두 명뿐이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하다. 마력이 그대로 돌아와서 둘의 존재를 알려준 것이 아니다.
미아를 본다. 옆에서 어느 정도 재킹하여 읽더라도 정밀도는 시전자 본인을 이길 수 없다.
미아가 미간을 찌푸린다.
“저 안쪽에 성배는 그대로 있어요. 그 곁에 남녀 한 쌍이 있네요. 둘 다 천사고……. 공허한데요.”
“마력이 돌아온 게 아니라 비어있지?”
“네……. 반향이 있어서 알게 된 게 아니라 부자연스럽게 아무 반향이 돌아오지 않아서 두 명이라고 알 수 있었다고 해야 하나.”
미아가 좀 더 자세하게 묘사한다.
“남자는……. 무기가 지팡이 같은데요. 복장도 경장이고, 마치 여행자 같은 차림이에요. 여자 쪽은 중장갑에 지팡이와 홀을 차고 있어요.”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이제 저쪽도 우리 위치를 안다,
“라파엘과 가브리엘이다.”
둘이 함께 있다?
동시에 상대하라고 만들어둔 보스가 아니다.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
“로스엘, 그 구멍 어디죠? 지금 당장 튀어야 해요.”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휩쓸고 지나감을 느끼며 가브리엘이 일어섰다.
“최근 하층에 나타난 것들이 베데스다의 사도가 맞나보군.”
“메타트론 그 늙은이는 아직도 헛된 꿈을 포기하지 않았나.”
가브리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난 메타트론의 의견도 그리 틀리진 않다고 생각하는데.”
“미카엘이 들으면 슬퍼하겠군.”
“새삼스럽게?”
라파엘이 눈짓했다.
“성배는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쫓아내고 오도록 해.”
“쫓아내다니. 지금 박멸해야 앞으로가 편하겠지.”
라파엘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가브리엘의 날개가 펼쳐진다. 사방이 불타오르듯 서늘한 빛이 뻗어나간다.
일반적인 천사의 날개가 아니다. 빛으로 이루어진 흐릿한 안개 같은 푸른빛의 집합이다.
[세피로트]는 외부에서 온 천사들인 그들을 이곳으로 묶어두는 자리이자 힘이다.
그리고 신좌의 집합체가 만들어낸 새로운 신좌다.
외부에서 온 천사들의 힘을 여과 없이 이 가련한 왕국에 풀어두는 것은 너무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가브리엘은 사라졌다.
하늘에 달이 떠오른다.
달이 떠오른다.
세상이 어두워진다.
눈부신 어둠이 지상에 강림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일식을 생각하면 편하다.
어두우나 밝다.
다른 모든 빛이 사그라진 가운데 하늘에 오롯한 조명 단 하나가 번뜩이며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이름은.
[위대함의 편린]
[달의 눈물, 가브리엘]
어우 씨, 이름만 봐도 오싹하네.
“상대해서 승리할 가능성은 없나요?”
“라파엘도 끼어드는 순간 불가능해져.”
“그럼 어떡하죠?”
“방법은 있어.”
저들의 수장은 미카엘이다.
미카엘은 이 자리에 없다.
가장 충실한 동료인 둘이 여기에 배치되어 있다.
그렇다면 미카엘은 우리의 존재를 의식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배자는 하잘 것 없는 존재일 뿐이다.
날때부터 고위종족, 그것도 플레이어블조차도 아닌 저 하늘 끝의 괴물이다.
천사나 악마나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현상에 가까운 존재인 것은 똑같으니까 말이다.
위대함의 편린이라 일컬어지는 존재들은 다 그렇다.
유배자가 그들을 상대로 공략이 가능한 것은 기본적으로 이쪽을 하찮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보스들은 제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각자의 목적에 있어 유배자가 같이 하잘 것 없는 존재가 끼어드는 것은 대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엘과 릴리움처럼 다른 방법이 없는 이들이나 우리에게 의지하는 것이며 주도권을 빼앗기기도 하는 거지.
그러니까 미카엘이 우리를 의식하고 있다는 이 상황은 이미.
“X된 거에요?”
“개X된 거지.”
다만, 그래서 협상이 끼어들 여지는 생기겠다.
미카엘은 천상의 도시의 지배자.
그런 이가 유배자의 존재를 의식했다?
악마측도 그렇겠지.
이 테마는 결국 빅빅 세력전이다.
사이에서 암약하며 깽판치고 오해와 갈등을 부추겨 싸움을 붙일 수 있다.
이렇게까지 자유도가 해금되어있다면 더더욱.
번뜩 생각이 떠오른다.
릴리움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나아가서 어쩌면 유리까지도.
좋아. 좋아. 순간의 영감이지만 해법이 떠오른 것 같아.
“우와아아! 뒤에 저거 뭐죠?”
“저게 필드 바꾸는 거야. 저기 휘말리면 못 도망쳐.”
푸른 안개가 뒤편에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흘러오고 있다.
말이 안개지 쓰나미에 더 가까운 광경이다.
그 뒤편은 모두 얕은 물이 고인 끝없는 평야다.
“로스엘! 구멍 어디있어!”
“거의 다 왔어!”
일단 지금 무사히 탈출하면 다시 생각해본 다음에 릴리움을 통해서 나헤마와 접촉하면 어떻게 극적인 갈등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도?
“오빠! 이 와중에 딴 생각하고 있지? 지금 저기 뭐 날아오는데?!”
희우가 존댓말을 때려치웠다.
고개를 돌리니 눈부신 빛 무리들이 쏟아져 내린다.
물리적인 유성우라기보다는 마술쇼 같은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광경이지만 맞으면 죽는다.
“우리를 노리는 게 아닌데요?!”
미아가 비명을 질렀다. 제니가 끅 소리를 낸다.
빛무리를 어떻게 쳐내려고 준비하던 아서와 에길이 당황한다.
그대로 앞으로 날아가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이라고는 하지만 소리 없고 조용한 퍼짐에 더 가깝다.
빛이 흩뿌려지며 은은하게 빛나는 원을 그린다.
그 안에는 찰랑거리며 물이 고이기 시작하며 달빛이 비친다.
“저거 장판이야! 달빛에 닿으면 아파!”
“아픈 수준으로 안 끝날 것 같은데?”
로스엘이 입맛을 다시며 달빛을 본다.
“그게 아니라 죽을 걸?”
“빛이 매개면 못 뛰어넘잖아요?”
“돌아서 가야해.”
이게 문제다.
원래라면 저게 우리를 향해서만 날아와야한다.
그런데 진로를 방해한다는 생각을 보스가 한다.
보스가 한다고.
찌이이이잉.
불길한 소음이 울렸다.
미아가 필살기급 마법을 갈길 때도 들리곤 하는 마력의 공명음이다.
꼭 마력이 아니더라도 막대한 힘이 한번에 움직인다면 저런 공간 자체가 진동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미아야! 공간이동!”
저 멀리 뒤편의 어느 곳에서부터 우리가 있는 위치를 관통하는 푸른 광선이 그어진다.
미아가 어찌나 급한지 소매틱까지 사용한다.
0.1초라도 빠르게 마법을 구현한 것은 정답이었다.
그대로 어떤 공간의 개변에 가까운 무언가가 푸른 광선이 있던 자리를 지나갔다.
다시 달빛이 비치며 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푸른 광선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리더, 마치 우리를 가두려고 하는군?”
아서가 이 와중에도 진중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것도 대단한 재주다.
“가두기만 하면 무조건 이긴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야!”
보스가 게이머처럼 사고하고 패턴을 응용하면 이런 문제가 생긴단 말이야.
“구멍에서 멀어졌는데?!”
로스엘이 소리친다.
미아가 너무 다급했다.
“그 구멍 위치가 어디죠?”
대답 대신, 위치를 아는 리온이 마법을 짜기 시작한다. 마왕의 검은 마력이 피어오르며 로스엘이 아는 구멍의 위치로 인도한다.
그리고 갑자기 그 공간의 균열이 툭하고 끊어지듯이 닫혔다.
대신 그 균열에 푸른 빛이 깃든다.
누군가 그곳에서 머리를 내민다.
서늘한 푸른빛이 감도는 은발, 이지적이지만 무감각한 눈빛.
외견상으로는 십대 후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달빛 같은 천사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너희들이 베데스다의 사도니?”
순간 모두가 저 천사가 저기로 나오게 내버려두면 안 된다고 느꼈다.
의견교환도 필요 없는 순간적인 화력투사가 이루어진다.
공간 째로 때려서 닫는 듯한 충격이 펼쳐졌다.
실제로 공간을 닫았다.
“공간이동 추적도 하는데요?!”
“그거 리온이 못해서 그래. 넌 마법 쓰지 마라.”
리온이 황망하게 대답한다.
“네? 네에.”
“미아야, 공간이동 막아. 블랑쉐도!”
정확한 위치 완전히 걸렸다.
좌표를 봤으니 여기로 계속 나타나려고 한다.
마력의 실이 뻗어나가며 무언가와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로스엘이 앞장서고 기계무덤으로 통하는 구멍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단 도망치려고 드는 우리의 움직임은 멀리서 보면 너무 단순해보인 모양이다.
다시 푸른 광선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다.
거대한 개변이 지나가고 로스엘이 비명을 질렀다.
“구멍이 지워진 것 같은데?!”
“조졌네. 응전합니다. 새로 좀 찾아봐요. 리온, 라리사. 로스엘 쪽에 붙어. 쥐새끼 너도.”
“어어? 그럼 저기서 어떻게 나오게?”
“방법이 있으니까 빨리!”
밀쳐내다시피 쫓아 보낸다.
게스트들이 멀어지고 파티원들은 멈춰 선다.
달리는 것을 멈춘다. 뒤쫓아 오던 안개가 우리를 덮쳤다.
천상의 도시였던 곳이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한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거대한 달이 떠있고, 그것이 수면에 비친 몽환적인 공간.
먼 곳에 시리도록 푸른빛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나는 누구보다도 호전적인 제스처를 취하며 입으로는 에길에게 말했다.
“드라간한테 공간 때려 부수는 법 제대로 배웠죠?”
“뚫어보겠네.”
“그렇게 쉽게는 안 될게 분명하니까 다 같이 해요. 저 혼자 시간 끕니다.”
아직 1페이즈니까 혼자 시간 버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다.
그렇다고 믿자.
라파엘이 갑자기 날아오진 않겠지?
일단 아직도 저쪽은 로스엘이 우리 쪽에 있는 줄 모른다.
이 영역 자체를 부수고 나갈 방법이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달려들면 얌전히 상대해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