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33화
메인 던전 - Lv.7554 [천상의 도시 - 신도심](3)
미궁에는 다양한 형태의 퀘스트가 구비되어 있다.
물론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퀘스트는 아니다.
게임 시절에나 스크립트대로 흘러가는 무언가였지 현실이 된 후에는 언제나 변수가 가득한 우당탕탕 의뢰였으니까.
그런데 그 퀘스트라는 것은 사실 명확하게 제시되는 게 아니다.
이건 게임 시절에도 그랬다. 근본 로그라이크라고 불리는 게임들은 보통 고전 게임이다.
그리고 고전 게임들은 공통적으로 엄청나게 불친절하다.
네가 알아서 찾아내고 알아서 사용해. 우린 알려줄 생각 없어.
이 게임의 개발사도 그런 철학을 고스란히 적용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 상황이 퀘스트 라인의 일부라고 생각 중이다.
[호송 미션!]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럴 확률이 높아. 아니, 왜, 그. 라파엘이랑 가브리엘을 정면에서 붙어서 이기라고 배치했을 리가 없잖아.]
[상식적이요? 그런 게 상식이 맞나 싶긴 한데요.]
미궁의 상식은 원래 그따위지. 암.
어쨌건 타당한 추론이다.
* * *
* * *
미궁은 결코 활로가 전무한 상황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 활로가 뒤지게 꽁꽁 숨겨져 있어서 이거 맞아? 싶은 생각이 들 수는 있지만 그래도 활로는 활로다.
[그래서 이게 활로라고 판단하는 거군요?]
[재료는 다 준비되어 있잖아. 이것 외의 다른 길은 아주 시간이 길게 필요한 것들뿐이란 말이지.]
[솔직히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의심스럽긴 했어요. 오빠 말이니까 아무도 토는 안 달았지만. 지금까지도 항상 그랬으니까.]
즉시 출발하여 시간을 맞추는 게 더 중요하기에 대강 작전 개요만 설명하고 그대로 실행했다.
구체적인 이유는 말할 틈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돌파하는 와중에나 간신히 의중을 털어놓는다.
아무 말 없이 따라와 준 것은 고맙지만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다. 파티원들은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쑤라고 하면 쑤는 게 아닐까?
[아마 다른 방법도 있을 건데, 그건 악마 측이랑 연계해서 수작질을 부려야 할 거야.]
[시간이 걸리겠네요.]
[뿐만 아니라 베데스다 종파의 생존자들이 위험할 수 있지.]
[타임어택이 걸려 있을 수도 있겠네.]
[그것이 미궁이니까.]
역지사지는 언제나 옳다.
내가 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
그러나 그럼에도 방법은 있는 고통.
처음부터 그렇게 접근해야 답이 나온다.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때라거나, 현실이 된 미궁에서 에길을 신으로 모시며 막막해할 때나.
그리고 이번 회차의 튜토리얼에서도.
언제나 방법은 그냥 X같음 게이지를 최대한 오른쪽으로 당겨놓은 것을 상정한 후에 나왔다.
항상 최악을 가정하는 편이 좋다.
[저 그럼 이제 다음을 알 것 같은데요.]
[알겠어?]
[세피로트 그거 작동에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맞아.]
[디펜스네.]
틀림없이 그렇다.
로스엘이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하니엘의 자리에 다시 접속하는 동안 우리가 시간을 끌어야 한다.
만약 이 작전이 조금 늦어졌다면 비극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막아야 할 적들에 사대천사의 둘이 섞일 테니까.
그러면…….
사실 못 막는다고 봐야지.
아마 시간을 지체했기에 봉쇄되는 루트에 해당할 것이다.
머릿속의 복잡한 퍼즐을 실시간으로 짜 맞추면서 달리고 계속 달린다.
[자, 그럼 자투리 시간에 설명 다 했으니까 이제 집중!]
[초병은 제거했다. 이제 어디로?]
[내부 구조를 확실히 모르니 파악부터 합시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다시 쪼개어 쓴다.
미궁의 원본이 되는 게임은 턴제 게임이었다.
한 턴에 할 수 있는 행동은 어디까지나 하나다.
그러나 그것을 쪼개서 쓸 수는 있다.
불속성 광역기로 적에게 대미지를 주는 동시에 불을 붙여야 할 곳에 붙이고, 물을 끓여 수증기로 만드는 등의 턴 활용이다.
응용과 창의력은 게임 속에서도 얼마건 요구되는 것이었다.
현실이 된 미궁은 실시간인 만큼 그와는 조금 다르다.
그저 눈썹이 휘날리도록 빠르게 움직이며 숙련도와 사고루틴까지 최적으로 끼워 맞추면 된다.
[좌우 갈림길이다. 나눠서?]
[오케이. 반반. 게스트는 이쪽 따라와.]
[병력이 많다. 이쪽에 포격 지원 바란다.]
[숙여.]
누아르의 포격이 빛을 발했다. 좁은 통로에 피할 곳은 없다. 기사단원이고 뭐고 그대로 죽 밀려났다.
즉사하지 않았을 수는 있다. 전투를 지속할 수 없는 상태기만 하면 충분하다.
[여기 가속 관문.]
[몇 단이요?]
[3단.]
좁은 통로는 소수 정예로 파티를 굴릴 때, 언제나 옳다.
폭발적인 화력으로 적을 밀어버리기 가장 좋은 곳이다.
속전속결의 기본은 화력이다.
우리 파티가 가장 잘하는 것도 딜 집중이다.
소수 정예의 힘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형태의 훈련을 해왔다.
아서가 가속을 받아 앞장서며 검을 맞댄다. 고레벨일 것이 분명한 치천사 여럿이 그걸 막아낸다. 그 와중 아서를 노리는 공격이 있지만 능숙하게 스킬을 통해 받아낸다.
가속까지 하며 밀어닥친 덕에 순간적이나마 다수의 상대에게 힘으로 압박을 가할 수 있었다.
그 뒤에 그림자처럼 희우가 나타나 찌른다.
이어서 천사들이 움직이기 힘들도록 제니의 검기가 쇄도했다.
말로 이어 붙여둔다면 따로따로의 동작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대응의 여지조차 없이 가해지는 일방적인 폭력이다.
미궁에 존재하는 인간형의 적은 어떤 식으로도 HP 자체가 많지는 않다.
암살에 취약하며 기습에 취약하고 화력으로 찍어 누르는 것에 취약하다.
좌우로 갈라진 반대편에서는 내가 아서의 역할을 하고 블랑쉐가 희우의 역할을 하며, 에길이 단숨에 밀어내며 길을 뚫었다.
[에길 쪽은 돌아와. 어차피 조금 가면 중앙에서 만날 것 같은 구조다. 아서 쪽으로 합류한다. 그쪽이 더 적이 적어.]
몇 발짝 더 들어가 보는 것만으로 확신한다.
처음 와보는 곳이지만 처음 와보는 곳이 아니다.
구조가 내가 알던 것과 조금 다르겠지만 금방 짜 맞출 수 있다.
아서가 앞장선 방향으로 다 같이 달린다.
기사단의 천사들은 이런 식으로 내부가 습격당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바로 직전에 악마들의 습격이 이루어지고 어둠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 참이다.
이제 무기를 들고 출동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을 뿐인 것이다.
갑옷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녀석들도 있다.
기습의 이점은 온전히 유지되는 중이다.
[아서, 조금 아래쪽으로 자세 잡아줄래요?]
[그러지.]
[포격 지원 한 번 더.]
[그 말할 땐 좀 알아서 숙여!]
블랑쉐가 조금 짜증을 내며 누아르를 한 번 더 부른다.
다수를 상대로 개활지에서 싸우는 것은 너무 큰 변수다. 언제나 이런 식으로 좁고 중요한 곳에 침투한 뒤에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했다.
상대에게도 중요한 건물, 파괴해서는 안 될 무언가가 있는 곳.
그런 게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곳이라면 적의 수적 우위는 사라진다.
끝없는 토너먼트가 될 뿐.
소수 정예가 가장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실제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서와 에길은 돌파력을 잃지 않았다.
앞에서 먼저 쓰러진 동료들의 정보가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다시 밀어닥치니 이후에 다시 마주하는 적들도 우리의 존재를 상정할 수 없다.
[세피로트]가 보였다.
빛나는 가지가 뻗어 있는 기하학적 문양. 홀로그램 같은 반투명함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수정 같은 모습.
그러나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상하게 생긴 나무네요.]
[응, 아까 말한 대로 이젠 지휘해.]
[맡겨주세요!]
미아를 제니에게서 건네받는다. 제니가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위치를 찾아 합류했다.
어리둥절한 채로 따라온 게스트들에게 손짓한다.
로스엘이 눈을 반짝이며 달려왔다.
“내가 다시 여기 올 날이 올 줄이야.”
“혹시 바로 접속할 수 있겠어요?”
“해볼게.”
당연하지만 될 리가 없다.
로스엘은 감전된 것처럼 바이브레이션이 가득한 비명을 지르더니 털썩하고 쓰러졌다.
“……엄중하게 막고 있는 느낌인걸. 날 쫓아내고부터 계속 잠금이 걸려 있었나 봐.”
미아는 그 와중에도 세피로트를 분석하고 있다.
마법사는 이래서 반드시 필요하다. 던전 기믹들 중에서는 마법을 모르면 사용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될 거 같아?”
“시간 내에 이걸 분석해서 뚫어내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기계신이 만든 봉인이에요.”
[라리사? 쥐새끼 들고 이리 와봐.]
사방으로 눈을 굴리고 있던 용사님이 허둥지둥 달려온다. 그 품에 안긴 쥐새끼는 반대로 로스엘만큼이나 초롱초롱한 눈이다.
[리더! 제 차례입니까요?]
“그렇다. 이건 마법으론 못 뚫는 봉인이야. 더 정확하게는 마력으로는 못 뚫어. 다른 힘이 필요하지.”
신성이란 것은 어떻게 보면 마력의 상위 호환에 해당하는 에너지다.
마법보다는 주술에 더 가깝다.
마법이 세상이라는 강에서 물 한 바가지를 퍼 올려 쓰는 거라면, 주술은 지류를 파서 새 물길을 내는 것이다.
반면 신성은 그저 권능이다.
비유하건대 강물 자체를 들어 올려 움직이는 행위.
보다 상위에 있는 힘에 더 가깝다. 바가지고 물길이고 필요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순수 마법사가 자신의 마력만을 가지고 봉인을 뚫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한다고 했지?”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라고 했죠.”
“마침 우리 손에는 성배의 짐승이 있다.”
[오우! 그렇습니다! 제가 있습니다! 쥐새끼입니다!]
나는 라리사에게 쥐새끼를 받아서 원래 성배가 있었을 자리.
그러니까 [세피로트]의 나무 앞에 있는 제단에 척 하고 올려두었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동글동글하고 순해 보이는 눈이 나를 마주 본다.
“왜, 그 로켓발진 했을 때 했던 에너지 방출을 그때의 100분의 1 수준으로만 해봐.”
[어어어엇? 저한테서 뭔가가 빨려 들어가는데요?]
그야 원래 거기가 성배의 자리니까 말이지.
“힘내서 버텨!”
[넵! 노력하겠습니닷!]
“잠깐 우리한테 힘을 빌려주는 거야 알겠지?”
그사이에 미아는 실피드를 불러들였다.
바람의 원소가 부족한 이곳에서 어차피 실피드가 큰 힘을 발휘할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는 마력과 크게 다르게 움직이지는 않아. 이번 경우에는 신성의 주체가 우리에게 완전히 몸을 맡길 테니까…….”
신성을 다루는 게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미아에게 차분하게 설명하며 작업을 시작했다.
미아의 동공이 무언가를 조준하듯이 작아지기 시작한다.
[원소의 눈] 좋지. 사기 스킬이야.
희우는 가브리엘을 만난 후, 지금까지 흐른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방어하며 버텨야 한다고 직감했다.
“함정 설치해요! 함정! 아무것도 아끼지 마요!”
다들 재빠르게 움직인다.
블랑쉐가 가방을 털자 열매들이 와르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궁의 산물인 저 랜덤 열매들은 다양한 효과를 지니고 있으며, 그 효과는 대체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고블린제 지뢰도 실시간으로 던져지고 바닥을 파고든다.
바리케이드도 깔리기 시작한다.
압축된 금속이 철컥거리며 들고일어나 진지라고 할 만한 것을 형성했다.
너무 단숨에 돌파한 바람에 적들은 아직 상황을 모른다.
주어진 시간은 생각보다 넉넉하다.
“나무 주변을 둘러서 벙커형으로 깔면 되나?”
아서가 희우에게 묻는다.
지금 지휘관은 희우다.
희우가 고개를 저었다.
“입구는 일단 앞에 보이는 셋밖에 안 보이네요. 그렇게 나누도록 하죠.”
“뒤로 들어오는 공격의 가능성은 배제하는 거군. 알겠다.”
입구를 아예 막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언더그라운드 유적과는 다르다. 그때같이 다수의 탱커진을 운용할 수 없는 상태기 때문이다.
현재 방패를 든 것은 에길뿐이다.
오히려 세 곳의 입구 모두에서 거리를 두고 진지를 설치해서 화력을 집중한다.
상황을 뒤늦게 파악한 천사들이 들어오는 족족 녹인다는 마음가짐이 옳다.
“그래도 우리 빈집털이는 완벽하게 했네요?”
“메인 던전에서도 잘되는군.”
고저 없이 대답한 블랑쉐가 누아르의 모든 포대를 불러내었다.
천상의 도시 꼭대기에는 세피로트의 나무가 뻗어 있다.
본래라면 성배의 동력으로 빛을 내뿜으며 도시 상공을 방어하는 방어막이 쳐져 있을 것이다.
잠깐 성배가 자리를 옮긴 탓에 작동하고 있지는 않다.
푸른 기사단장은 공격을 한 대상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음에 당황했다.
용맹하게 저 위를 향해 돌격했던 붉은 기사단장도 굉장히 의아한 제스처를 취하며 날아오는 중이다.
적은 어디로 갔는가?
“내부인가.”
배신자?
아니, 왜?
“소수의 침투?”
그럴 이유가 없다. 지금 상층요새의 상태를 제대로 안다면 일격에 영원한 전쟁의 결판을 지을 수를 뒀을 것이다.
그가 아는 바알이라면 그렇게 한다.
악마들은 묘하게 한탕주의인 감이 있으니까.
“알 수 없군.”
그때, 나무가 빛났다.
“성배……?”
푸른 기사단장의 뇌 속에서 사고의 흐름이 다섯 바퀴 정도 거세게 회전한 끝에 일어난 일을 알았다.
마력이 펼쳐진다. 거대한 굉음이 되어 도시 전역으로 목소리가 전해진다.
[세피로트의 나무다! 나무를 지켜라! 적은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