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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439화 (510/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439화

메인 던전 - Lv. 12500 달의 눈물 [가브리엘](1)

오빠가 아는 미궁의 원본.

그 게임은 고전게임 특유의 집요한 현실성 추구를 미덕으로 여기는 종류였다.

짐을 나를 때 무게 이외에도 부피의 개념이 존재한다거나, 손상되는 부위에 따라서 이동 속도나 공격 속도에 디버프가 붙는다거나.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되면 그 현실성은 더 강화되기 마련이다.

게임의 틀을 벗어나 현실 그 자체가 되어버린 미궁에서 다수를 상대로 소수가 대적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무쌍난무는 엄청난 스펙 차이가 동반되어야 가능하다.

그런 스펙 차이에서 이루어지는 전투는 승리해도 별 이득이 없다.

미궁은 끊임없이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적과 마주하는 것을 강요한다.

그래서 수의 폭력은 강력한 보스 이상의 위협이 될 수 있다.

보스는 최소한의 합리성을 담보한다.

클리어를 위한 시련으로서 단독 배치된 강대한 존재기에.

하지만 다수의 잡몹으로서 구현된 자잘한 병력들은 그런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 * *

* * *

애초에 미궁의 전투 대부분은 무작위로 결정된다.

그러니 전투 시의 잡몹 개체 수는 정확하지 않고 정밀한 밸런싱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숫자야말로 그 무엇보다 큰 폭력이 된다.

전쟁터에서 장수가 수십의 병졸을 위압하고 동시에 상대해 승리하는 일은 있을 법하다.

하지만 수백이라면?

수천이라면?

나아가 수만이라면?

그리고 병졸들이 장수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신체 능력의 소유자들이라면?

차라리 일기토가 쉽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이 그런 종류의 것이다.

악착같이 피해온 군대와의 전면전을 잠깐이나마 해내야 한다.

희우는 최대한 동시에 대치하는 적의 수를 줄여야 한다는 것을 안다.

제일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지상이 제대로 폐쇄되었는가.

누아르의 장렬한 희생은 계획되어 있었다.

천사의 도시를 마법으로 붕괴시키긴 힘들다. 그들의 적이 마법사니까.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강렬한 물리공격.

그러나 에길이나 희우, 혹은 아서의 공격은 분산되는 파괴가 아닌 한 점에 집중된 필살에 더 가깝다.

공격이 아니라 파괴가 필요하다. 지형지물을 으깨는 것은 역시 군대의 병기가 좋다.

오빠가 아는 내구력대로 계산하여 부분적인 붕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완전히 무너져도 좋다.

그렇다면 천사들이 들어오는 데 한참이나 더 걸릴 테니까.

하지만 신전은 생각보다 더 튼튼했다.

직격당한 곳이 폭삭 주저앉았을 뿐 전체가 으스러지진 않았다.

[이쪽은 클리어. 입구 셋 다 막혀있어요. 뒤로 들어갈 공간도 없음.]

[갈라져 생긴 다른 틈도 없음을 확인했네.]

[위쪽에 바리케이드 설치도 끝났소.]

[좀 더 두텁게 할게요.]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할 일을 잘 알고 있다.

원래 디펜스의 입구였을 신전의 입구 쪽을 그냥 완전히 무너뜨리며 최대한의 피해를 적에게 강요한다.

그리고 나무가 뻗어나가는 구멍, 지상이 아닌 공중에서만 접근할 수 있는 또 다른 입구 하나만을 남겨둔다.

[거기도 쏴야 했는데.]

[완전히 무너지는 것은 그것대로 위험부담이 크니까.]

그래서 천장을 쏴버릴 수는 없었다.

이제는 시간도 없다.

[제니! 천사들 마무리 부탁해요. 일어서서 움직일 것 같은 녀석들만 모가지 슥삭 하고 사지가 안 멀쩡한 애들은 그냥 둬요.]

[알겠슴돠.]

[말투 왜 그래.]

[베테랑 같지 않아요?]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방금 전에 적의 지휘관을 철저하게 계획대로 제압하지 않았나.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이고 있다.

그래도 아서는 우려를 표했다.

[하이 랭커들이 왕국에서 대놓고 패악질을 부리지 않고 눈치를 보긴 하는 것은 숫자를 감당 못 함을 알아 서지. 이번이 가장 고비일 수도 있네.]

[넵. 조심할게요. 다들 정신 바짝 차리죠!]

희우도 그 사실에는 공감하고 있다.

아마도 이 디펜스는 오빠의 생각대로 정석 루트라고 치더라도, 이렇게 공략하라고 만들어 두진 않았을 확률이 높다.

미궁의 의도를 읽어보자면 더 많은 준비, 더 많은 스펙을 쌓고, 심지어 더 많은 숫자의 파티원을 이끌고 들어오도록 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잠입 액션이었겠지.

무엇이건 시간과 준비가 지금 파티 오르골이 했던 것의 열 배는 필요한 행위다.

파티의 수가 늘어나면 수에 비례해 무언가 뒤틀리는 것은 메인 던전도 리프트와 공유하는 페널티니까.

하지만 이 파티는 그럴 수가 없다.

다시 트라이한다면 또 침공을 막고 또 테마를 리셋하고, 다시 새로운 경험이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왕국이 먼저 무너질 것이다.

백 년 이상의 대계를 가지고 해야 할 공략을 짬과 힘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 희우가 느끼는 현 상황이었다.

불안정하다.

하지만 괜찮다.

지금까지도 그랬다.

언제나 그렇듯이 승리할 것이다.

순식간에 지휘관을 일었다는 사실을 천사들이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곧 좁은 통로로 비둘기 떼가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일회성 소모품.

그 범주는 아주 넓다.

충분한 재력이 있다면 이걸 소모품으로 쓴다고 싶은 것조차도 소모품으로 끝낼 수 있기에.

고블레타리아 연방의 기술이 총동원된 즉석 바리케이드들이 그랬다.

이미 지상에 한 번 설치되어서 영거리 포격의 여파를 완화해 준 이것들은 각자의 주머니에 잔뜩 남아 있다.

적의 행동을 제약하거나 엄폐물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오히려 보스전에서는 쓸모가 없다.

보스의 공격은 회피를 전제로 하는 것이 맞을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다수의 잡몹들을 위한 환경 제어용에 더 가깝다.

이 바리케이드들은 명품이다.

순간적인 내부 폭발을 통해 제아무리 단단한 벽이어도 파고들며 신성이 깃든 구조물 못지않은 내구력을 단기간 발휘한다.

가뜩이나 좁아터진 통로의 입구가 더 좁아진다.

그 앞에 아서가 버티고 섰다.

에길은 아서가 흘리거나 아서의 위기에만 반응할 수 있도록 도끼를 들고 바로 옆에 대기한다.

제니 역시 에길처럼 보조적인 지원을 위해 입구의 옆에 선다.

희우는 암살자로서의 면모를 발휘하여 들어오는 천사를 즉시 녹여 버릴 것이다.

충돌이 시작되었다.

아서는 버텨내는 싸움에 일가견이 있다.

대검을 자유자재로 놀리며 들이닥치려는 천사들을 저지했다.

제압이나 상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다. 위협적인 검로로 심리를 제한하고, 그럼에도 충돌하며 뒤로 밀친다.

간혹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것들은 다른 셋에게 재깍재깍 당하여 떨어져 내린다.

언뜻 잘 막아서는 것 같아 보이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숫자의 폭력은 본래 지루하고 뻔하다. 그럼에도 절대적인 것이다.

조금씩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

결국 뚫리는 때가 오리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점점 의식이 아래의 마법사들에게 향한다.

약속된 움직임이 줄어든다.

전투가 아니라 싸움이 되어간다.

전술과 사고가 점점 죽어간다.

기계적으로 천사들을 막아서며 피해도 조금씩 상처가 누적되어 가기 시작했다.

포션을 들이켜기 시작한다.

희우는 아서와 교대했다.

양쪽의 지원을 받으며 정신없이 손을 놀린다. 무기를 쳐내고 또다시 쳐낸다.

파티원들이 지쳐가는 만큼 날개를 뜯겨 추락하는 천사들도 늘어난다.

바닥에 시신과 부상자들이 쌓여서 또 하나의 바리케이드처럼 보이기 시작했을 때, 블랑쉐가 올라왔다.

[아래는 리온에게 맡겼다.]

[일어났구나!]

[……여긴 맡겨주세요.]

디스트로이어가 애옹을 내뿜기 시작한다.

곧 에길이 교대했다. 기천사는 전면전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상정한 종족이다.

천사 중 가장 내구력이 낮다.

에길은 비록 방패 마스터리는 없으나 단순히 근력으로 가장 방패를 들기 좋은 인물이다.

방패를 든 에길은 적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전경들이 시위 때 하듯 그저 살아있는 방벽이 되기 위해 힘을 발휘한다.

그럼에도 마스터리를 위해 한 손에는 도끼를 들고 있다.

가능한 작고 가벼운 것으로.

실제로는 짧겠지만 정신적으로는 하루 종일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희우는 아래를 보고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몇 놈 잡은 거지?]

라리사가 세고 있다.

하나하나 확인 사살 하면서.

[70개체 정도요.]

[제단의 마력 방벽 유지해 줄 수 있지?]

라리사는 용사로서 대부분의 수단에 능통하다. 일단은 오빠를 마법 스승으로 모신 용사가 아닌가.

교대가 이루어졌다.

리온은 비틀거리며 팔을 내밀었다.

[에길, 교대 시간이에요.]

마왕의 권능이 발해졌다.

타락한 용사는 세상을 뒤덮을 군세를 일으킬 수 있게 된다.

서버에서라면 절대적인 힘이겠으나, 대상이 천사 같은 초상적인 존재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는다.

[마왕]의 유니크 액티브가 입구에서 치명상을 입고 떨어진 천사더미에 발해졌다.

언데드 천사.

말만 들어도 모순이다.

그러나 [마왕]이기에 그것을 잠깐이나마 가능케 한다.

일반적인 사령술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 맞다.

파티원들이 한숨 돌리고 검은 천사들이 날아올라 입구를 막았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요?]

[길진 않아. 바리케이드도 슬슬 부서지겠군.]

검은 천사들은 입구를 막아서고 있다. 하지만 점점 소모된다.

그리고 바리케이드 자체를 분쇄하려는 시도는 계속 있었다.

점점 찌그러지고 가라앉고 있다.

[바리케이드 무너지면 어디까지 스킬을 사용할지가 문제네요.]

[이제 슬슬 가브리엘과 라파엘이 올라오고 있겠지.]

[이 꼴이 났으면 우리가 자기들을 우회해 버린 걸 알 테니…….]

그렇다면 이어지는 보스전은 거의 즉시다.

그때 스킬을 다 빼놓는다면 훨씬 힘들어진다.

쿨다운은 성능에 비하면 그리 길지 않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그래도 전투 한 번에 두 번 사용하긴 힘들 정도다.

라리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치유와 마력 방벽 유지를 동시에 하고 있다.

블랑쉐는 아직도 언데드 천사들 사이에서 사격 중이다.

한숨 겨우 돌리자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아아아앗!]

리온의 컨트롤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희우는 제 뺨을 힘차게 두드리고 날아올랐다.

[일단 다 써요! 오빠가 알아서 하겠지!]

잘 모르겠으면 토스다.

모두가 뒤섞인 난전이 시작되었다.

스킬도 아낌없이 투자된다.

마법을 구사하는 대천사들도 사방에 무언가 뿌려대고 파티원들은 각개 전투로 치고받고 싸웠다.

점점 신전 내부로 진입한 적이 늘어간다.

라리사는 보호막을 유지하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리온도 마왕의 권능을 한계까지 짜내고 있다.

아서가 쓰러졌다.

제니가 얼른 업고 와서 라리사에게 던진다.

천사 몇몇이 옅어지기 시작한 증기 속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제니는 마력 방벽 바로 앞에서 응전해야 했다.

라리사의 마법은 큰 소용이 없다.

용사는 무력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점차 제단 쪽으로 몰리기 시작한다.

유니크 액티브들이 번쩍여도 잠깐 숨 돌릴 시간을 벌 뿐이다.

적들은 너무 많다.

밀려나고 죽어도 새로운 병력이 들이닥친다.

공포라도 있으면 좋겠건만 천사들은 자신들의 성스러운 신전이 침범당한 상황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라리사도 검을 뽑아 드는 순간, 리더가 뛰어들었다.

로스엘은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친숙한 곳으로 도달했다.

“잘 모르는데 어떻게 친숙해!”

동시에 함께하던 이들이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지금 그녀는 온전히 홀로 이곳에 있다.

“죄다 반투명이네. 이러면 신비해 보일 줄 알았나?”

하지만 실제로 신비해 보였다. 입으로는 툴툴거려도 로스엘은 나름대로 감탄하고 있었다.

언더그라운드 유적과 흡사하게 직각과 직선뿐인 구조물이지만 밝고 투명하다.

어둠은 없이 빛만이 사방에 가득하여 화사해 보이기까지 한다.

시간이 없겠지.

로스엘은 우선 달렸다.

가면서 여러 가지 방들이 보였다.

이런 식으로 구현되어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로스엘이 아는 세피로트는 그저 좌.

신좌와 흡사하게 생긴 멋들어진 의자일 뿐이다.

지나가는 길에 가브리엘이 보였다.

서늘하고 꿈틀거리는 무언가 문틈으로 스며 나오고 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럼 저건 라파엘이네.”

뜨겁게 타올라 달궈져 있다.

계속 달린다.

이젠 비어있는 산달폰의 자리가 보인다.

결국 그는 이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다른 세피로트의 자리들을 본다.

비어 있는 곳이 많다.

로스엘은 자신의 자리가 어딘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은하고 따스한, 그리고 달콤한 향이 나는 곳이 있다.

로스엘은 망설임 없이 그곳의 문을 열었다.

익숙한 기억 속의 신좌가 기다리고 있다.

“저기에 앉으면 되는 거겠지?”

그럼 로스엘의 의식은 현실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로 뛰어올라서 몸을 틀며 골인했다.

“이 뜨끈하고도 묵직한 감각……. 몇천 년 만인가…….”

의식이 확장된다.

이 세상이 아닌 어딘가와 이어져 한없이 뻗어 나가며 확장된다.

세상을 넘어, 물질을 넘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에너지조차 넘어서.

어딘지 모를 어딘가로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머리털이 다 뽑혀나가는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가 그녀를 바짝 잡아당기고 있다.

어떤 의식 속의 세계.

그곳은 주인 없는 힘으로 이루어진 어떤 세계다.

그리고 세피르토의 신좌가 구현하는 힘의 세계다.

동시에 로스엘의 의식은 현실의 육체와 이어졌다.

로스엘은 [하니엘חניא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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