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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443화 (514/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443화

메인 던전 - Lv. 17500 [여명의 달빛, 가브리엘גַּבְרִיאֵל](1)

라리사는 그래 봬도 전사에 기반을 두고 있는 클래스다. 성기사니까 당연히 그러하다.

반면 리온은 마검사에 가깝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마법에 조금 더 집중했다.

[마왕]이라는 스킬 자체가 마법사에 더 가깝기도 하며 역할을 나누기에도 그편이 더 옳았기 때문이다.

소녀 성기사와 그 곁에 있는 강력한 마법사.

그러니까 라리사는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고 안긴 몸을 틀어서 바닥에 닿았다.

공간이동으로 도망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뒤틀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 잘못 사용하면 그대로 심연의 깊은 곳으로 골인이다. 죽는다.

아직 물이 고인 바닥에 멋지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슬라이딩.

리온이 그것에 당황하는 틈에 얼른 배를 때려 몸을 접게 하고 둘러멘다.

동시에 버프가 끓어오른다.

성기사는 본래 신앙의 힘을 사용하고 온갖 클래스 전용 버프로 범벅이 되어 전사 이상의 힘을 내는 클래스다.

기본적인 스탯 보정은 전사에게 밀릴지언정 버프 떡칠을 하는 순간만큼은 최강의 물리 클래스다.

* * *

내딛는 순간 충격과도 같은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몸이 앞으로 미끄러지듯이 뻗어 나갔다.

전투 기술이라면 어떨지 몰라도 단순 신체 능력이라면 이 파티 내에서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가는 선생님의 동료들은 훨씬 더 빨랐다.

이게 말이 되나 하는 생각을 뒷전으로 하고 선생님이 돌아보는 모습을 본다.

손가락이 탁 하고 움직이더니 눈앞에 원형의 링이 여럿 생겨난다.

가속 관문.

단순히 달려 도망치는 것도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니 눈물이 조금 흐르는 기분이 들지만 가속에 몸을 맡겼다.

세상이 일그러지고 달리는 게 아니라 거의 날듯이 전진한다.

이걸 공격에 활용한다고?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그냥 얌전히 집에서 기다릴걸.

나 말고 다른 성기사도 많을 건데.

은혜고 나발이고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지금 표정을 보면 아주 가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리온은 내가 옮길까?]

그때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

낯익고도 잊을 수 없는 목소리들 중 하나다.

어딘가 목소리에 에너지가 담겨 있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발랄한 소녀의 목소리.

이제 액면으로는 동년배로 보이지만 그녀가 아주 어린 아이일 때부터 같은 모습이었던 천사다.

그리고 리온의 첫사랑.

[아아아아니요오오오 괜찮아요!]

쥐새끼를 툭툭 치자 호응하여 신성한 힘을 가득 흘려보내었다.

치유도 증폭할 수 있었으니 버프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겠지.

[으이이이이이익!]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 천사에게 남편 될 리온을 맡기고 싶지는 않다는 분노가 끓어오른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신성과 함께 앞으로 쭉쭉 전진했다.

선생님이 황당하다는 듯이 돌아본다.

[왜 그러는진 모르겠지만 잘했어. 그 상태 유지하고 있어!]

[예? 네에?]

[정화의 신의 권능 중에 치유계 최상위인 거 사용할 수 있지?]

라리사는 소수 정예 정화의 신의 성기사로서, 대전사의 직위까지 올랐던 몸이다.

이제는 내려놓았으나 신과도 친밀한 관계이며 어지간한 성직자보다도 더 우월한 신앙 사용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

[그거 그래봐야 느릿느릿한 광역 치유인데요?]

[그걸 더 멀리 뻗을 수 있다는 거 배운 적 있잖아!]

기억하고 있다.

용사로서의 입지와 명성을 세우기 위해 온갖 기적을 흩뿌리고 다니던 나날들.

그중 일부는 철저하게 쇼맨십을 위한 것이었다.

비효율의 끝판왕이지만 라리사라는 소녀 용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신의 기적을 보여줘야 했던 순간이 몇 번 있었지.

[쥐새끼 파워로 그걸 하면 즉사기 대책이 될 거야!]

그 순간 이해했다.

원래는 넓게 그냥 느긋한 치유의 빛을 내뿜는 것일 뿐이지만 방금 팔이 즉시 재생되는 것을 보았지 않나.

역재생도 아니고 그냥 팟 하니까 갑자기 팔이 돌아와 있었다.

죽은 자의 소생을 넘어 죽고 싶어도 못 죽을 수준의 회복 속도다.

라리사의 생각에 그건 회복의 샘에 몸을 풍덩 담그고 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선생님이 농담처럼 거기 잠수하고 있으면 행성이 쪼개져도 살아남는다고 했었는데.

아마 선생님 성격상 진담일 거다.

[언제 하면 되는 거죠?]

[누가 봐도 지금이다 싶을걸!]

라리사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면 그런 것이다.

누가 봐도 지금 안 하면 다 죽을 것은 순간이 있을 게 분명했다.

뒤를 돌아본다. 공간이 폭죽처럼 터져 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 근원은 들여다보인다.

성스럽다는 생각이 들 만큼 서늘한 푸른빛이 중심에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날개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오 세상에.

라리사는 신께 기도하려다가 누군가에게 낚아채였다.

[내가 들고 날 테니까 뒤를 계속 보고 있어!]

두 명분의 무게를 지고도 속력이 거의 감소하지 않는 기천사의 목소리다.

리온이 멋쩍게 중얼거린다.

[저는 내려서 달려도 되는데…….]

[느리잖아!]

[느려!]

곧바로 차단당한다. 선생님이 리온을 불렀다.

[야 걔는 나한테 던져!]

[네?]

[정화당한다!]

섬뜩해진 라리사가 리온을 휙 집어 던졌다. 가속 관문이 차례로 깔리고 그대로 선생님에게 날아가 부딪힌다.

선생님은 그걸 그대로 날고 있는 다른 고양이 천사에게 토스했다.

말 그대로 차서 날려 버렸다.

리온이 비명을 지르며 근방으로 가자 마법사가 그물을 만들어 캐치했다.

라리사는 입맛을 다시며 뒤를 관람했다.

쥐새끼도 긴장하며 응시한다.

폭죽처럼 터져 나가던 공간을 가르고 달빛의 세례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조각난 빛이라는 건 굉장히 시적인 표현이라 여겨지지만 지금은 현실이다.

수면에 산란하듯 요동치는 빛들은 온전히 공격이요 치명적인 파괴였다.

주변에 쏟아지기 시작하여 이리저리 회피가 시작된다.

충분히 멀어질 만큼 질주했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부풀어 오르는 푸른빛은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고 있고 지평선에 가득 머금어져 있다.

라리사는 아직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보면 알 정도라면 이거 가지고는 안 된다.

곧 빛줄기가 새어 나온다.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사방을 지져대기 시작했다.

격렬한 회피 기동에 몸에 둘둘 감은 버프에도 불구하고 구토감이 느껴질 것 같다.

위기 같지만 파티원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피하고 있었다.

그럼 지금도 아니겠지.

한때 사랑의 라이벌이었던 천사의 팔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눈에 힘을 부릅뜨고 보고 있다.

쉬이이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라리사는 그게 무엇인지 느끼지도 못했지만 그녀를 붙잡은 천사가 급격하게 각도를 틀고 곡예에 가깝게 비행한다.

[와. 공간에 광역으로 물리압도 실어 보내네. 이게 편린인가.]

[다들 무사해요?]

[괜찮네.]

한 바퀴 돌아 오히려 냉정해지는 느낌이다.

라리사는 감지조차 못한 어떤 위험한 공격을 다들 회피한 모양이다.

으음. 수준이 너무 다르네.

그래도 이것도 아닌가.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맞으면 죽는 거 그걸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걸까?

순간 신앙이 흔들릴 뻔했지만 다시 눈에 힘을 준다.

진짜 누가 봐도 이건 피할 수도 없고 반드시 죽는다 싶은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 와중 뒤틀린 공간은 서서히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면 끝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재편된 가브리엘이라는 보스의 영역은 더 이상 은은한 푸른 달빛이 아니다.

찰랑이던 물은 이제 우주가 비쳐 보이는 은하수가 되었다.

별의 향연이 수면에 비치고 있다.

만월이 떠 있던 하늘엔 월식이 일어나고 있다. 그림자가 달을 가리고 그 달빛도 사그라진다.

라리사는 오싹함을 느꼈다.

선생님 가라사대. 미궁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이제 끝났나 하고 안심하게 되는 타이밍.

쥐새끼를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금빛 신성이 그녀의 몸에 파고든다.

‘신이시여! 첫날밤도 못 보내고 죽고 싶지는 않사옵니다.’

일개 신좌의 신인 정화의 신은 이곳을 보고 있지는 못하리라.

그래도 라리사는 욕망과 신앙과 절실함이 잔뜩 깃든 기도를 올렸고 권능은 빛을 발했다.

어두워진 수면 끝에서 천사가 피어났다.

그야말로 여명의 달빛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초승달을 닮은 시린 달빛이 세상을 뒤덮었다.

라리사는 계속해서 기도했다.

가브리엘 3페이즈의 악질적인 점은 개막 패턴이 발광 패턴이나 다름없단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2페이즈가 비교적 넉넉한 편이며 3페이즈 개막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가장 좋고 일반적인 방법은 거리 벌리기.

발이 빠른 클래스라면 대충 페이즈가 넘어가겠거니 싶은 순간 전에 미리 준비하고, 전력을 다해 달리면 범위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도트딜을 걸어두고 그렇게 하는 편이다.

혹은 쿨하게 부활 스택 소모하기.

뭐, 이게 게임이라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부활 스택이 아무렇게나 펑펑 차오르는 것도 아니고 가능한 아껴야 한다.

이제 다들 너무 고레벨이라 레벨업이 힘들다. 포인트 관리가 훨씬 빡빡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갑자기 2페이즈로 넘어갔다.

범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기천사 정도다.

다른 이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도 거리가 멀수록 받는 대미지가 감소하니 죽어라 달릴 필요는 있다.

여명의 달빛이 떠올랐을 때, 이쪽에서는 태양이 떠올랐다.

쥐새끼 파워가 더해진 라리사 샤이닝은 달빛에 맞서 치유의 빛을 흩뿌렸고 한순간에 라리사 곁으로 모인 파티원들은 몸이 분해되는 동시에 재조립되는 기괴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마법 통신도 실시간으로 찢겨 나가고 있기에 도리어 육성으로 대화하는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와. 갑옷 싹 날아가겠네요.”

“여기서 새로 털어서 걸쳐야지.”

“슈트가 또 사라진다…….”

여전히 첩보원 시절과 동일한 기능의 슈트를 애용하는 블랑쉐가 인상을 찡그린다.

다른 이들의 갑옷은 적당히 주워 입어도 무방한 수준이지만 블랑쉐는 주문 제작이다 보니…….

“일단 정리해 보자. 페이즈가 넘어갔으니까 적의 체력 자체는 더 줄었을지도 몰라. 쿨다운 돌아온 사람?”

“70% 정도 돌았네만.”

“그럼 조금만 버티면 되겠네요. 부활 스택 날린 사람도 없죠?”

“그럼요!”

눈물이 날 것 같다.

과거 그 어느 회차의 파티도 이런 일을 당하면 전멸했을 거다.

나만 살아남아서 허탈하게 웃으며 가브리엘의 눈깔에 칼을 꽂고 죽었겠지.

마지막으로 갈 테마인 [가장 클리어에 가까웠던 자들]에서도 제법 할 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 그럼 성물 지팡이 여기서 쓸까요?”

“일단 대기. 그건 마법사로서 미아가 판단해.”

포지션으로서의 마법사 이야기다.

마법사는 항상 파티 전체를 보고 있어야 하니까 나보다 더 잘 볼 수 있을 거다.

“시간의 신 권능은 아껴도 되겠죠?”

“정 안 되면 한 번 정도는 소모할 수 있지. 그래도 생각보다 잘 풀렸으니 모조리 처박진 말자.”

시간의 신의 신앙을 쌓는 방법이 시간뿐이다.

반년간의 시간 동안 제법 쌓였으나 남발할 수는 없다.

블랑쉐가 손을 들려고 하기에 고개를 저었다.

심연의 신도로서 뭔가 해도 되냐를 물으려던 블랑쉐가 그대로 시무룩해졌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이번엔 진짜 다치면 끝이에요. 라리사가 쥐새끼를 다 갉아먹고 있어서.”

“필요하다면 부활 스택을 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부활하면 완치되긴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그래도 각자 가진 비장의 소모품 위주로 굴려야죠.”

사실상 마지막 쉬는 시간이다.

“택틱을 약간만 바꾸죠. 섬광 스택을 최대한 쌓아야 하니까 저랑 희우 둘 위주로 공략 들어가겠습니다. 블랑쉐는 비상시에 [검은 날개]로 구조해 주고. 아서와 에길은 쿨다운 돌 때 합공으로 날려요.”

그리고 이제부터 제일 중요한 것은 미아다.

가브리엘은 페이즈가 넘어갈수록 점점 더 자신의 근원에 다가간다.

물의 천사로서의 속성이 강해지고 냉기에 더욱 취약해진다.

물의 정령왕이 있다면 제일 좋지만 필수는 아니다.

미아는 이미 정령사로서도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다.

“마법사가 활약할 시간이다. 미아야.”

미아는 에길의 뒤에서 품속의 실피드를 보았다.

실피드는 예전에나 보던 작은 은빛의 드래곤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

체적을 줄여 에길의 뒤에 숨으면 3페이즈 개막의 전멸 패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리온도 오들오들 떨며 에길의 커다란 덩치 뒤에 숨어 있다.

가브리엘의 달빛이나 라리사의 빛 어디에 닿아도 죽는 입장이다.

서로의 빛이 끝났다.

라리사가 지친 표정으로 엎어진다.

“리온, 새색시 잘 보살펴.”

“아앗, 네넵.”

다시 통신이 연결되고 미아가 손가락을 튀긴다.

은하수가 된 바다에서 물의 정령들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더 앞쪽에, 거대한 날개가 수면에서 치솟았다.

그리고 수면에서 푸르스름한 젤리, 하지만 젤리라기보다는 어떤 에너지체에 더 가까울 무언가가 나와 팔이 된다.

푸른 에너지가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몸의 중심, 가운데에 눈처럼 보이는 작은 달이 있다.

푸르스름한 에너지체 주변으로 사방으로 수십 장의 날개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달빛이라기엔 너무 밝은 것 아니에요?]

[반사하는 태양이 알파 센타우리라도 되나 보지.]

어떻게 보면 거대한 날개 달린 집정관 같기도 하고. 은하수를 배경으로 날개 달린 거대한 푸른 에너지체라.

충분히 코스믹 호러적인 광경이었다.

로스엘은 잘하고 있겠지? 그쪽도 라파엘이 인간의 형태를 포기해 버렸다면 위험할 텐데.

우리는 돌격했다.

곧바로 은하수의 수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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