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46화
메인 던전 - Lv. 17500 [여명의 달빛, 가브리엘גַּבְרִיאֵל](4)
길고 긴 세월을 살아온 천사는 지쳐가고 있었다.
알 수가 없다.
이제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체감으로는 아득하고도 긴 시간이었으나 고위의 존재로서 발휘할 수 있는 메타 인지 능력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가브리엘은 10만년 같은 10분을 보냈다.
그녀는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하지만 팔 한쪽을 잃은 암살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휩쓸리지 않고 있다.
인간형의 자신을 돌이켜보아도 이런 힘의 격류와 분출, 그리고 신화적인 장관이라고 보아야할 파괴적인 현상을 이겨낼 수단은 없다.
맞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다면 죽어야 한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공포는 점점 부풀어간다.
이 인간들은 사실 그녀보다 강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힘만으로 찍어 눌러 그녀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으면서도 가지고 노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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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힘과 기술을 동원한 이런 재해와도 같은 파괴를 어떻게 아직도 버텨내고 있는가.
공포에 질려본 적이 없는, 그것을 넘어 감정이라는 개념조차 희박한 고위 천사에게 이 감정은 너무 낯선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처음 하는 일을 잘할 수는 없다.
가브리엘은 공포를 이겨내지 못했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감각.
직관이나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며 피부에 소름끼치게 와닿는 그 감각.
그걸 도저히 견딜 수 없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 앞에 가브리엘의 정신은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실제로 어떤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아지고 있다.
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유배자들은 무시무시한 공포의 화신이었다.
거대하고 위대한 천사는 억겁 같은 10분동안 마모되어갔다.
부끄러움도 추함도 없다.
자긍심도 사라지고 있다.
가브리엘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은 육신으로도 드러난다.
당당 빛나야할 여명의 달빛이 그 힘을 잃고 있다.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에덴]이 침식해 들어온다.
더 이상 이 영역을 유지하기도 힘들어지고 있다.
빨리 어떻게든 해야 한다.
조급함이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하다.
‘이거 아니야. 이거 정말 아니야. 나 그냥 다시 돌아갈래. 세피로트에 앉아서 라파엘이랑 노닥거릴래. 왜 이렇게 된 거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이미 정신적으로는 엉엉 울고 있다.
자신이 언제나 다른 것들에게 가하던 압박을 처음으로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눈이라고 볼 수 있는 빛나는 부분에서 액체가 흐르기 시작한다.
나는 바짝 긴장했다.
[새로운 패턴이 올지도 몰라.]
그런 일은 없었다.
[뭐죠? 우는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일어난 적 없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래도 다시 볼 때마다 소름끼친다.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다. 제발 만사가 아는 대로만 좀 진행되면 좋겠는데.
어쨌건 가브리엘의 행동이 달라지진 않았다.
아니, 사실은 달라졌다. 조금 더 둔화되고 활기를 잃었다고 해야 할까.
몸의 빛과 크기가 줄어들며 누가 봐도 확연히 약화되고 있었다.
다시 달빛이 흘러나온다.
다대한 해일을 구사하기 위해 필드에 존재하는 물의 원소가 바닥났다.
미아가 악착같이 보존해둬 해일에 끌려가지 않은 물들이 렌즈를 구축한다.
각자 하나씩 만들기엔 여의치 않아서 순간적으로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야 했다.
[긴장 풀지 마.]
그렇게 모두에게 고한다. 집중력을 잃는 순간 끝이니까.
블랑쉐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희우가 블랑쉐의 볼을 잡고 죽죽 늘이면서 정신을 차리게 한다.
미아는 상태가 더 안 좋아보였다.
마법 구사 자체는 사실 체력을 그렇게 많이 소모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정도의 연속된 공간이동을 서커스하듯이 오래 지속 중이다.
대답할 기력도 없어 보인다.
제니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미아양의 체중이 줄었는데요.]
[아……. 그거 사실일걸.]
볼이 홀쭉해졌다.
정말로 한계까지 체력을 짜내는 중.
주변에 떠다니던 노심도 이미 개수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
작은 드래곤의 형태인 실피드가 걱정스럽게 미아의 얼굴을 핥는다.
그러는 실피드도 이제 은빛의 용이 아니다. 발갛게 달아오른 분홍빛의 모습으로 열기를 내뿜고 있다.
정령왕에게 저런 부하를 거는 건 쉽지가 않은데.
[교대한다. 내가 하는게 낫겠군. 실피드 이쪽으로 와.]
그렇게 말하는데 실피드가 고개를 저었다.
[끝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 말에 다시 미아를 본다. 표정은 없다. 의식의 어딘가로 완전히 가라앉아있는 모양이다.
이미 마지막 술식을 구축중이긴 하다.
확실히……. 넘겨받는 것은 효율이 나쁘다. 미아는 그다지 술식에 주석을 다는 편이 아니다. 하여간 천재들이란.
다시 흩어지기 직전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표정 근육이 슬며시 미소를 만들어낸다.
뭐지, 의식은 아직 가라앉아 있는 것 같은데.
조건 반사인가?
[저 해일이 닥쳐올 때 한번에 처리해야해. 만약에 그 타이밍을 놓치면 우리도 끝이겠네.]
가브리엘은 그렇게 생각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에길은 아주 멀리서, 진작부터 라리사와 리온과 함께 합류해있었다.
닥쳐오는 해일을 얼려 살아남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지만 두 신혼부부가 어떻게든 해냈다.
그렇다고 이쪽이 꼭 평온했냐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수학을 잘하는 바이킹 천마는 충분한 딜링을 가하지 못한다면 공략 실패라는 사실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다.
그 딜러는 에길 자신이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했다.
두 부부가 어떻게든 이쪽으로 날아드는 투사체들에 대응했다.
에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고, 공간 균열을 만들어 덮어씌우는 식으로 위치를 이동시킨다.
거리가 멀고 실제로 포커스 당하는 중인 것은 더 가까운 곳의 파티원들인 덕분에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그동안 에길이 무었을 했는가 하면.
“마음은 명경지수.”
검은 기류를 휘감은 도끼가 움직인다.
리온과 라리사, 그리고 쥐새끼는 계속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힘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흐름이니…….”
두 역전의 용사도 처음 보는 형태의 무술? 무예? 어쨌든 그런 것이었다.
에길은 쉬지 않고 무기를 휘두른다.
그 모습은 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조용하고 절제된 동작이다.
근육으로 가득 차올라 인체 비례마저 약간 이상해보일 정도인 괴력의 사나이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지켜보니 오히려 그렇기에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에길은 무시무시한 외견과는 다르게 지적이며 교양 있는 바이킹이다.
전투시에 흥분하는 경향이 있을 뿐이다.
리온도 라리사도 에길의 동작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몰랐으나 그것에서 점점 아름다움을 발견해가기 시작했다.
단순한 힘이 아니라 그 힘을 통제하는 방식에 대한 아름다움이다.
검은 기류는 [아수라 파천무]라고 한다. 본래는 연속되고 지속적인 교전에서 스택을 쌓아가며 점점 더 강해지는 형태의 스킬.
그걸 허공에 뿌리고 있으니 낭비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벌써 쿨다운이 몇 번 돌았는지 모르겠다.
최대 스택에 도달한 후에도 계속해서 더 중첩되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스킬 본연의 효과가 아니라는 것은 모른다.
하지만 점점 짙어져가는, 조금도 퍼지지 않고 도끼의 끝에 매달려 뭉쳐가는 어두운 기운의 힘은 느낄 수 있었다.
칠흑과도 같다고 생각했던 것은 처음이다.
이제는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와도 같은 심연이다.
이미 색이라기보다는 구멍이라고 불러야 옳다.
하지만 그렇다면 무엇에 뚫린 구멍인가?
심연도 이보다 짙다고 할 수는 없다.
세상에서 가장 검은 것이 에길의 도끼 끝에 깃들어 있다.
심지어, 쌍수다.
“……괴물을 죽이는 것은 결국 인간.”
에길이 끊임없이 되뇌던 경문과도 같은 말을 멈추고 눈을 떴다.
그렇다고 동작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온 몸에 땀이 가득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너무 오랫동안 집중력을 유지해야했다.
한번이라도 그 끈을 놓치면 다시 처음부터다.
쿨다운이라는 제약이 있는 이상 그랬다간 치명적이다.
에길은 심호흡하며 계속해서 무한한 순환을 그리는 연계를 이어갔다.
다만 이제는 새로 중첩을 가하지 않는다.
[아수라파천무]의 3스택 이상을 쌓아본 적은 없다.
그것은 한 번의 쿨다운에서 그렇다.
이제 쿨다운이 세 번을 돌았다.
안전하게 3스택까지만 쌓은 파천무의 검은 기운이 다시 3번 중첩되었다.
그 사이사이는 놓치지 않기 위해 구성한 루틴의 강제 연계일 뿐이다.
에길은 자잘한 액티브가 아주 많다. 이것을 위해서다.
[슬슬 이쪽으로 이동해!]
멀리의 격전지에서 리더가 말하는 것이 들렸다.
리온은 이제 자신이 저쪽에서 미아가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을 잠깐 동안 해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도 훨씬 쉽다.
단지 에길을 단 한번만 가브리엘의 눈앞까지 옮겨주면 된다.
“먼저 가있게.”
저 멀리서 마력의 실이 뻗어 나옴이 보인다. 정확한 위치를 유도하기 위해 리온과 라리사가 그것을 끌어당긴다.
그 실로부터 에길의 눈앞으로 층층의 가속관문이 만들어진다.
치천사 바이킹이 날개를 편다.
그 가속도 더하여 달려 나간다.
리온과 라리사는 연속된 공간이동을 통해 먼저 제 위치로 이동했다.
사방에서 해일이 덮쳐온다.
이제는 풍경은 물론이요 가브리엘의 위치마저 잘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온 세상이 살고 싶어 발악하는 고위 천사의 에너지로 가득 차있다.
골치 아픈 일이지만 충분히 익숙해진 상태로 집중력을 유지중인 파티원들은 탈락하지 않았다.
미아가 만들어가던 마법이 메모라이즈 구슬화 되어 떠오른다.
술식의 완성을 실피드가 알린다.
나는 굳이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여전히 어디가 어딘지 얼른 알기 힘들 정도로 연속인 공간이동도 수행중이다.
미아는 충분히 고생해주었다.
가브리엘은 좁혀오는 해일을 보며 조금씩 고삐를 늦추고 있었다.
어딘가 그 심리가 읽힐 것 같다. 이것으로 끝.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포위망이 좁혀진다.
에길이 있던 먼 곳도 해일에 삼켜진다.
사방을 싸먹는 권능의 파도에 닿는다면 산채로 분해되는 느낌이 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피할 곳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피하지 않으면 된다.
[에길이 도착한다!]
이제 멀지만 보인다.
검은 궤적을 그으며 쌍수의 도끼를 쥐고 강렬하게 내려치는 동작을 한 채, 내가 설치한 무수한 가속관문을 통과중인 천사가.
공기저항을 대비하여 가속관문 사이의 공기마저 빼냈다.
아무런 저항 없이 가속에 다시 가속만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뒤를 해일이 뒤쫓는다.
에길은 일견 삼켜지기 직전처럼 보이지만 점점 빨라지며 거리를 벌려오고 있었다.
미아가 눈을 떴다.
멍한 눈으로 열기가 오른 한숨을 내쉬며 메모라이즈화 한 마법을 눈앞으로 띄워 올린다.
[지금.]
구슬이 산산조각 났다.
그 안에 담긴 술식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눈으로 보일 정도로 조밀하게 구성된 마법들이다.
적은 힘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내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하였다.
정령들이 역소환된다.
실피드도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그들을 유지하던 노심이 모두 터져나갔다.
미아의 몸에서 번지던 체렌코프광도 그 힘을 잃는다.
심지어 블랑쉐도 나타나서 제 마력을 끌어 보탰다.
권능에 저항하기 위한 마법이란 것은 어마어마한 마력을 요구한다.
거기에 온갖 꼼수도 모조리 동원해야할 필요가 있다.
아케인의 마스터가 가지고 있던 시간의 성물이 깨져나갔다.
시간의 권능이란 단지 시간여행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미아가 퍼뜨린 술식들이 몇 번이고 다시 생겨나 퍼져나간다.
반복적으로 계속 재생된다.
애초에 미아가 만든 것은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다.
시간의 성물은 메모라이즈 구슬이 깨진 순간부터 퍼져나갈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마법을 완성시킨다.
이렇게까지 해도 아마 이 마법이 작용하는 시간은 찰나일 것이다.
미아가 손을 뻗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시간의 권능이 그에 호응하듯 깜빡이더니 사라졌다.
품의 지팡이도 마찬가지다.
제니가 얼른 다른 것 중 가장 좋은 지팡이를 두개 꺼내서 미아에게 들려준다.
퍼져나간 술식이 가브리엘의 다음 공격으로 지워져버리기 전에, 일제히 발동했다.
세상이 잠깐 멈추었다.
시간이 멈춘다는 등의 뜻이 아니다.
가브리엘의 가장 강한 속성은 물.
파문이 번져나간다.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 거대한 파문이다.
가장 먼저 물의 천사가 얼어붙었다.
바닥에 깔린 물도, 퍼져 들어오던 해일도.
모든 것이 일순간 그 자리에서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미아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마력도 끊어졌다.
완전히 소진되어 어떤 마법도 짜낼 기력이 없는 미아가 다시 기절한다.
아서가 [엑스칼리버]를 뽑아 들었다.
희우와 나도 눈빛을 교환한다.
블랑쉐는 누아르를 부르려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각자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다 동원한다.
가브리엘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 발을 묶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도 얼어붙었다.
가뜩이나 소모로 약해진 방어력에 더해 약점을 찔려있는 상태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취약해진 바로 그 순간.
에길이 도달했다.
빛과도 같았다.
내려찍는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웅장하다.
검고 짙은 기운들이 도끼 끝에서 퍼져나와, 얼어붙은 상태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리던 가브리엘의 몸통을 강타했다.
그것이 시작이다.
가브리엘은 제 몸이 얼어붙었을 때, 속성상의 약점을 제대로 공략 당했음을 눈치 챘다.
통상적이라면 아주 찰나일 뿐이라 의미 없을 것이라 여겼을 텐데, 가브리엘은 거의 패닉을 일으켰다.
죽는다.
어쩐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무슨 수를 써도 아무렇지도 않게 피하며 피해를 보지 않던 유배자들이 수작을 부려오는 중이다.
몸부림치고 날뛰고 최선을 다해 얼음을 깨고 빠져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그 약점은 일단 타고나면서부터 부여된 속성의 한계.
강대한 힘을 대가로 본질에 새겨진 상성.
아무리 비틀어도 몸을 향해 다가오는 어떤 검은 기운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가브리엘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그 공격에 노출되어야 했다.
동급의 악마들과 싸울 때나 일어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몸이 뜯겨나갔다.
거대한 충격과 거기에 깃든 공격력이라는 미궁의 보정이 가브리엘의 에너지 체 몸을 벗겨내었다.
그리고 그 속에 빛나는 별자리와도 같은 본질에 더 가까운 부분을 드러낸다.
가브리엘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아니, 나갔다.
하지만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그녀는 묶여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비명을 지르며 힘을 끌어 모은다.
간신히 팔이 해방되었다.
그래도 노출된 몸은 회복중이지 않다.
그리고 다른 유배자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실 크기 차이를 생각하면 다가오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공격하기 위해 달려오는 중일 것이다.
얼어붙어 생긴 화력의 공백은 저들에게 자유를 주고 말았다.
가브리엘은 절망했다.
그리고 느꼈다.
몸 아랫부분에서부터 위로 타고 올라오는 무수한 참격과 타격을.
셀 수도 없이 많이 이루어지는 끔찍할 정도의 연속된 공격을 느낀다.
에너지체로 보호받지 못하고 상성으로 얼어붙어 고위 존재로서의 방호력조차 상실한 채 산산이 부서진다.
아래부터 파괴되기 시작한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신성의 근원이 조각난다.
조금씩 조금씩 존재가 상실되어가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멍하니 라파엘을 떠올렸다.
꽤 재밌는 녀석이었는데.
전의는 이미 없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다.
의식이 흐려지고 갈리듯이 사라지는 수만 년의 존재가 느껴진다.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고 있다.
유배자라는 것은 고위 천사를 이길 수 있구나.
아무렇게나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점점 그 의식의 끈도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찰나이면서도 영원과도 같은 그 시간 동안 가브리엘은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재미없다.
생각해보면 고위 천사고 뭐고 다 재미없는 짓이었다.
미카엘이나 메타트론은 좋아했을지 몰라도 그녀는 딱히, 한번도…….
그리고 가브리엘은 의식을 완전히 놓았다.
조금씩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이 공포스러운 녀석들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
근원을 잃은 몸이 천천히 분해되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그것이 이제 찾아왔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