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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447화 (518/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447화

메인 던전 - Lv.17500 [여명의 달빛, 가브리엘גַּבְרִיאֵל](5)

누군가에게는 끝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연속되는 일련의 과정 중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는 바빴고, 승리를 자축할 시간도 없었다.

의식을 잃은 미아를 제외하고도 다들 기진맥진한 가운데 내가 천천히 가브리엘이 무너져가고 있는 곳으로 걸었다.

나라고 멀쩡한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면 한 번 쯤은 부활 스택을 소모할 각오로 몸을 혹사시켰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섬광의 스택을 더 쌓아올렸다.

희우 역시 그랬다.

에길이 단 한 방에 벗겨낸 가브리엘의 외피 속으로 파고들어 신성의 근원에 더 가까운 것에 온 힘을 다해 공격을 휘두르고 힘을 휘두른다.

그 끝에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다 싶을 때, 섬광 재생이 일제히 발동했다.

따로따로 들어가면 끝을 못 내는 수도 있었다.

게임스럽게 말하자면 가브리엘은 메인 던전의 시나리오 보스급답게 막대한 실드와 빠른 HP리젠을 가진다.

여기서 실드는 에길이 벗겨낸 외피를 의미한다.

그리고 HP리젠은 딜 집중을 통해 깔끔하게 마무리 짓지 못하고 시간을 주었을 경우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 * *

작정한 기믹보스 수준은 아니지만 충분히 빠르게 다시 회복해버리니까.

이런 걱정이 기우라고는 할 수 없다.

정말로 그렇게 공략대가 터지기도 해보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다면 문제없다.

마지막 순간 스킬을 아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돌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더 돌발 상황인 참이었다.

모든 것을 퍼부은 끝에 가브리엘은 확실하게 쓰러졌다.

푸르스름한 은하수와 함께 세상이 저물어간다.

거대한 에너지체의 천사는 점점 분해되어가며 사라지고 있다.

위대한 힘의 조각도 그렇게 흩어진다.

[Fragment Of Greatness Slain]

[편린이 당신들에게 깃듭니다.]

문구까지 뜬다. 레벨 업에 의한 완전 회복같이 편리한 것은 없다.

발을 질질 끌면서도 천사가 무너져 내린 곳으로 간다.

가브리엘은 죽지 않았다.

다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에너지가 흩어지고 세상이 무너진다.

은하수가 흐려지며 빛을 잃는다.

바닥에 고여 있던 물도 형체를 잃고 사라져간다.

사방을 포위하고 있던 거대한 파도는 얼어붙은 채로 지워지고 있었다.

아직 남아있던 모든 위협들이 허상처럼 무너져 내린다.

그러면 바깥에서 이 공간을 새로이 먹어 들어오는 것이 있다.

푸르른 풀밭과 식생들이 사방에 퍼진다.

새가 지저귀고 강물이 반짝였다.

에덴 속에서 은발의 천사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왜 이렇게 행복해보이지? 배경이 에덴이라 그런가. 기분이 굉장히 나빠지지만 가서 검을 들었다.

이건 일종의 이벤트 씬이다.

세피로트에 앉아 있던 고위 천사들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들의 본질은 괴물스러운 신적 존재지만, 그들이 뒤집어쓰고 있던 껍데기는 조금 다르다.

필멸자인 로스엘이 기계신의 힘인 [세피로트]를 통해 신적 존재와 유사하게 변해갔다면 이 천사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고위 천사가 죽으면 평범한 천사가 남는다.

인간이 카드를 사용해서 변모할 수 있는 그런 천사.

가브리엘은 마법계열이었기에 대천사다.

나는 기분 좋게 자고 있는 천사를 보며 검을 역수로 쥔다.

죽이고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장비를 루팅하면 된다.

그리고 가슴에 꽂아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금빛의 잔을 소중하게 품속에 안고 있다.

“성배……?”

에덴 때문에 눈치를 못 채고 있었지만 도시 기능이 정지해있다.

그렇다면 이 성배는 구도심에서 왔다.

그렇군. 지키는 역할을 포기할 수는 없어 아예 들고 오셨다?

그 때문에 멈칫하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지쳐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대신, 희우가 기만과 협잡이라고 표현하던 부분이 가동하기 시작한다.

그래. 죽이는 건 언제 건 할 수 있다.

어차피 진짜 가브리엘은 죽었다. 여기 남은 것은 고위 천사로서 죽은 자의 찌꺼기일 뿐이다.

노골적으로 말해 평범한 천사다. 병사인 천사보다도 약한 존재.

“라파엘 상대로 방패막이가 될 수 있으려나.”

필멸자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상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

사용처가 있을지도 모른다.

게임에서는 사실 이대로 살려서 어떻게 데려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때는 그냥 컷씬 마냥 저렇게 누워있는 가브리엘의 껍데기를 제거해야 다음으로 진행이 가능했다.

연출일 뿐이었지.

지금은 다를 것이다.

성배를 챙기고 가브리엘을 들쳐 메며 다음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우선 확실한 것 하나.

파티가 모든 것을 소모해버렸다.

비장의 수단은 여전히 온존하고 있는 파티멤버가 많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평범하게 공수를 주고받을 기력이 남은 인원이 전혀 없다.

라파엘과 이대로 연전을 벌이는 것은 적극적 자살행위다.

정비가 필요하다. 문제는 로스엘인데 로스엘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멀어서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번쩍이는 섬광들이 비춰질 뿐이다.

미아는 완전히 뻗어버렸으니 다른 마법사를 찾는다.

블랑쉐도 기진맥진하여 주저앉아 눈만 깜빡이고 있다.

이대로 이곳에 계속 있으면 결국 전멸한다.

천사 병력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우리를 어떻게 하기 전에 빠져나갈 필요가 있다.

격전의 여파는 여전히 대부분의 천사들이 우리를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조금씩 이쪽을 주목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비틀비틀 걸어가다가 성배가 생각났다.

라리사와 리온은 상대적으로 멀쩡했다. 지쳐 보이는 것은 정신적인 문제에 더 가깝다.

“세계의 구멍 찾을 수 있겠어?”

라리사의 옆에서 두리번거리던 쥐새끼가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고개를 젓는다.

[여긴 이미 다른 공간이지 않습니까! 이 풀밭이 거두어지기 전까지는 무리입니다요!]

제길. 그랬었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는다.

그때 라리사가 내가 들고 있는 성배를 보았다.

“선생님. 그거 성배죠?”

“응? 아. 그래.”

옆의 리온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여기 있는가 부터해서 몇 가지 의문이 지나간 후에 잽싸게 말한다.

“그걸 이용해보겠습니다.”

“좋아. 그래 봐. 고마워.”

그렇게 한 후에 나도 주저앉았다.

라리사가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성배의 신성이 뿌려지며 조금씩, 믿을 수 없게도 상처가 아닌 체력마저 회복된다.

엎어져서 흐느적거리던 희우가 눈을 꿈뻑이며 고개를 들었다.

에길과 아서도 비틀비틀 일어선다.

모두 마지막 순간 모든 힘을 다했다. 정신적인 기력이건 체력이건 모조리 소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딘가 어루만져주는 듯한 신성한 빛은 효과가 정말로 좋다.

“이게 되는구나.”

“아까 해보면서 느낀 게……. 이것도 될 것 같아서…….”

성기사를 정식으로 영입해봐야 하나?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끼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니엘의 공격은 받는 이를 아주 성가시게 한다.

온갖 상태이상이 떡칠된 눈부신 이펙트들이 사방에 터져 나온다.

그 이펙트들에 현실감은 없다.

밑도 끝도 없이 연출을 위해 터져 나오는 하트와 별모양들이 맞으면 치명적인 일격일 뿐이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하트모양 풍선을 불사르며 라파엘은 분노했다.

“하니에에에엘! 네놈은 항상 이랬지! 장난하는 것 같이 말이야!”

문제는 그런 주제에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엘은 동시에 확신할 수 있었다.

약하다. 이전 같은 힘을 지니고 있지 않다.

하니엘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며 급하게 제 힘을 되찾은 척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세피로트의 나무]에 걸려있던 봉인이 온전히 일하였는지, 혹은 그저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운 탓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크어으악!”

옆구리에 나타난 무지갯빛 천사가 옆구리를 걷어찼다.

멀리 날아가면서 몸을 잠식하는 분홍빛 기운에 몸서리친다.

“러브! 데스! 롸벗!”

알 수 없는 구호와 함께 하늘에서 언급된 것을이 떨어져 내렸다.

하트에 치이고 해골에 맞은 다음 로봇에게 밟혔다.

하니엘은 사랑의 천사, 그리고 감정에 기반을 둔만큼 현실적이지 못한 현상들이 주를 이룬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고 대응할 수도 없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을 뿐이다.

라파엘은 분노로 몸서리치며 화염을 끌어올렸다.

풀로 뒤덮이고 있던 사막이 다시 열기를 피워 올린다.

아지랑이와 함께 주변을 먹어 들어가던 푸르디푸른 자연들이 시들어 사라진다.

그 자리를 뜨거운 모래가 삼켰다.

강렬한 태양에서 눈부신 광선이 쏘아졌다.

그대로 풀밭과 함께 하니엘을 지지려고 했다.

일곱 가지 빛깔의 화살들이 수십으로 분열하며 시야를 가득 채웠다.

검을 휘둘러 불사른다. 과장된 폭죽 같은 이펙트가 사방을 점한다. 라파엘은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그냥 잠깐 세피라에서 내려갈까?’

과거 하니엘이라면 본모습의 라파엘과도 대등 이상으로 싸웠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잠깐만 세피로트의 좌에서 일어선다면, 그러면 불태워 세상에서 지울 수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지금의 그가 원래의 라파엘과 동일한 존재인가?

어느 순간 소중해진 이 감정이 그와 함께 증발하여 별 것 아닌 걸로 치부된다면?

그 사실을 지금의 라파엘은 견딜 수 없다.

“으아아아악!”

다시 사방에서 싱싱한 풀밭과 말라붙은 사막이 격돌했다.

“하하하하하! 사랑의 천사에게 맡기면 해결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에에?”

“닥쳐어어엇!”

깐죽대는게 너무 잘 먹혀서 로스엘이 더 신나하고 있다는 사실을 라파엘은 전혀 몰랐다.

반면 로스엘은 지금 꽤나 골치 아픈 상태였다.

그녀의 에덴은 아주 넓은 범위를 덮고 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발생한 가브리엘의 영역도 인지할 수 있었고, 이내 사라졌음까지도 안다.

그녀의 파티원들은 몹시 지쳐보였고 로스엘을 구하러 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일주일 정도는 이러고 있을 수 있겠지만…….’

단 둘인데다가 라파엘이 페이즈를 넘어가버리지 않는 다면의 경우다.

그 사이에 미카엘이 찾아올 수도 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가브리엘이 죽었다면 라파엘이 필멸자의 거죽을 뒤집어쓰려고 할까?

아니겠지. 그럼 로스엘도 죽는다.

‘어떡하지. 로스엘. 리더를 믿어. 나를 믿어. 리더가 믿는 나를 믿어! 난 똑똑하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어!’

실제로 로스엘은 지금 아주 현명한 상태였다.

오랫동안 누적된 잔고장은 다시 하니엘이 되는 순간 대부분 사라졌다.

정신에 흔적을 남길지언정 멀끔하게 수리된 새로운 육신이나 다름없다.

맑고 깨끗한 정신 상태로 러브 크리스탈 파워를 외쳐대며 로스엘은 고민에 빠졌다.

시간은 많지 않다. 라파엘도 결국 눈치 챌 것이다.

그리고 로스엘은 자리에 주저앉은 리더의 어깨에 가브리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나.

살아있어?

자세한건 모르겠지만 살려둔 채로 승리한 모양이다.

로스엘의 두뇌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라파엘!”

물론 상대는 가능하면 들은 척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다면 듣지 않을 수 없는 말을 하면 된다.

“너의 연인 가브리엘은 우리가 생포했다!”

“……?”

로스엘은 제자리에서 하트를 흩뿌리며 회전한 후, 최대한 멋진 포즈를 취했다.

날개가 활짝 펴지며 연출을 거든다.

“후후하하! 돌려받고 싶다면…….”

어디로 오라고 하지?

일단 악당 같은 대사를 해보자.

“미카엘을 대동하지 않은 채! 혼자서!”

그렇지 다구리는 악당의 소양이다. 일대일은 주인공들이나 하는 거지. 로스엘은 먼 옛날에 보았던 만화들을 떠올린다.

항상 악당이 좋았다.

그나저나 어디로 오라고 하지?

에잇, 별 수 없지.

기계무덤으로 부르자. 메타트론이 좋아하려나?

“심연의 구렁텅이로 찾아와라!”

“무슨 개소리…….”

거기서 말이 멈춘다.

라파엘의 공격도 멈춘다.

지금 공격하면 틀림없이 다음 페이즈를 부를 수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인간성을 저버린 괴물이 나타날 뿐이다.

로스엘은 어째서 파티원들이 아직 탈출하지 않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답은 곧바로 나왔다.

가브리엘의 영역에서도 힘으로 강제로 부숴서 탈출할 수 있었다.

에덴 속에서는 힘들 것이다.

“히야아아아압!”

멍하니 라파엘이 가브리엘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게 둔 채로 영역을 잽싸게 거둔다.

사방이 사막화되기 시작했다.

이건 막아야지.

부분적으로만 전개하며 점점 줄여나간다.

그리고 전속력으로 날았다.

“친구들! 구멍 찾아줄까?”

그리고 로스엘은 깨달았다.

고장이 해결되어서 구멍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어라라?

[제가! 제가 찾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라파엘이 기겁하여 날아오기 시작하기 전에 쥐새끼가 구멍을 찾아낸 모양이다.

로스엘은 마지막으로 에덴을 완전히 거두며 사막이 구멍을 뒤덮기 전에 어떻게든 몸을 구겨 넣었다.

파티원들의 등이 보인다.

로스엘은 마지막으로 부리나케 달려오는 라파엘에게 멋있는 대사를 날렸다.

“우리 파티의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도록 하지! 서둘러야 할 것이야!”

이러면 딴 생각 못하겠지?

아닌가?

일단 저질렀으니 리더에게 말해보자.

세상이 찢어질 듯 한 절규가 들린다. 하지만 로스엘은 그대로 세계의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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