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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448화 (519/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448화

메인 던전 - Lv.4151 기계무덤의 캠프(4)

파티원들의 상태는 그야말로 처참하다.

라리사가 성배를 쥐고 마치 잔다르크마냥 치유의 빛을 내뿜더라도 일시적으로 움직일 기력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했다.

“그, 다시 깨고 나갈 힘을 회복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무리지.”

딜각을 만들어내는 것까지는 미아가 수고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극딜 타이밍이 잡힌 순간에는 모두가 수고했다.

어떻게 탈출한 후에 캠프까지 가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초인 중의 초인인 고 레벨 유배자들은 지금만큼은 패잔병이 따로 없다.

사실은 이겼는데도 몰골만 보면 누가 보더라도 간신히 목숨만 건진 것으로 보리라.

“이건 정양이 필요하겠군.”

“그래도 반나절 정도면 어떻게 전투 수행은 가능하겠군요.”

“그래야 하나?”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힘과 체력의 분배는 아주 중요하다.

에길은 순간의 폭발력에 모든 것을 걸었다.

* * *

힘의 한계를 마지막까지 짜내는 식으로 일격을 날리기도 했지만 그 전에 이미 거의 탈진 상태였다.

공감각을 유지하며 자신과의 싸움을 벌인 셈이다.

아서와 희우, 그리고 나는 인생에 다시없을 정도로 공격을 퍼부었다.

샌드백이 된 가브리엘이더라도 그 위압감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 끝내지 못하면 역으로 우리가 끝난다. 마법사가 다운된 시점부터 다들 절박할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피로는 꼭 육체에서만 오지는 않는다.

아무리 지능 스탯이 높더라도, 기초 스탯이 높더라도.

목숨을 건 싸움에서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그것도 그야말로 우주적인 권능을 선보인 괴수와의 싸움에서 간신히 승리한다면 뻗어버리기 마련이다.

심지어 적은 하나 더 남아 있는데 못다 이루고 도망쳐 오지 않았나.

누적된 피로는 극심했다.

“일단 다들 뭐 좀 먹죠.”

수척해진 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다들 그 짧은 시간 동안 체중이 줄어들 정도로 몸을 혹사했다.

각자 비상식으로 가지고 다니는 것을 어떻게든 입에 흘려 넣는다.

여러 증상이 보이고 있다.

미아는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저혈당 쇼크였던 모양이다.

악마의 몸은 인간보다 훨씬 강하지만 저대로 두면 죽는다.

종족 자체가 물리 방어력이 높으면 주삿바늘도 잘 들지 않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우리 파티의 구호물품을 고블린들이 각별하게 신경 쓴 이유다.

미아의 상태가 진정됨을 느낀 후에 다른 파티원들의 몸을 살핀다.

라리사는 계속 기력을 회복시키는 빛을 내뿜고 있다.

저건 작동 원리가 대체 뭘까? 영양분이라도 공급해 주나?

블랑쉐는 미래인이자 전문가답게 스스로 조치를 하고 제니를 봐주고 있었다.

기천사는 특히나 반쯤은 기계인 존재라 더 애매하긴 한데, 생물의 생리를 아주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기에 효과는 있다.

전체적으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모두 움직이기는 하지만 혈관이나 심장마저도 인간을 초월한 성능을 내기에 살아 있을 뿐이다.

에길이 조용히 말했다.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 사투를 벌이는 게 낫겠군. 그때는 죽으면 발할라에 가리라는 확고한 믿음이라도 있었는데.”

“나이가 처음으로 체감되는군. 리더. 내가 좀 더 젊을 때 나를 찾아오지 그랬나.”

“아니, 그건 인간을 좀 더 빨리 포기하셨으면 되는 문제 아니었습니까.”

“크흠.”

희우는 가만히 주저앉아서 손을 떨고 있었다.

자의는 아니었다. 근육이 너무 긴장한 탓이다.

“지구에 있을 때 좀 더 이렇게 열심히 살았다면 어땠을까 싶네요.”

그러다가 문득 나를 본다.

“오빠는 아직 인간 아니에요? 아무리 [용사]여도…….”

생각해 보니 그랬다.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지는 기분.

희우가 펄쩍 일어서서 달려오는 게 보인다.

어쩐지 땅이 일어서는데.

“운동량이 너무 많았으니까. 횡문근융해증도 조심해야 해……. 혹시 과하게 어지러운 사람…….”

“오빠잖아요!”

그대로 기절했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블랑쉐는 다방면에서 유능한 인물이다.

파티에서 과학의 세계에서 살다온 인물은 블랑쉐뿐이기에 전투 종료 후의 의무병 역할은 블랑쉐에게 부여되어 있다.

우습게도 사람을 잘 죽이는 자는 살리는 것도 잘한다.

첩보원 활동은 그런 일도 많았다.

“포션이 있다면 전투 후의 후유증도 없지. 손상을 완전히 회복시키니까.”

“근육 괴사가 원인이라고 했죠? 제가 살짝 가서 포션을 공수해 오면…….”

“그러다 무슨 일이 생기면 더 슬퍼할걸?”

“으으음. 좋아요. 참을게요.”

우선 블랑쉐는 힐러 포지션인 라리사에게 원인과 증상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중세 판타지 월드에서 나고 자란 라리사다. 블랑쉐의 설명은 세포의 존재라는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치료할 수는 없지. 마법은 정말로 마법은 아니니까.”

“노력하겠습니다…….”

그 본질을 모르는 이들에게 블랑쉐는 여전히 두려운 사람이다. 장신의 서늘한 표정의 미인.

라리사가 노력하는 가운데 상황의 경과를 전해 듣고 어느 정도 안심한 희우가 바깥으로 나왔다.

“오빠는, 그 뭐라 해야 하지. 인간이 왜 그렇게 좋은 종족이 아닌지 증명했어요.”

“농담하는 것 보니 심각한 문제는 아닌 모양이군.”

“바깥이었다면 심각했겠지만 일단 여긴 미궁이니까요.”

유배자가 병으로 죽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유배자조차 죽일 수 있는 치명적인 세균이 존재하는 곳 역시 미궁이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포션이 없다는 것이 이런 식으로도 문제가 되는군.”

“체력을 회복시켜 주지 않더라도 병세의 수준이면 말끔해지니까요.”

그래도 이제 그건 그거고, 할 일은 할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로스엘은 내내 미소를 지으며 캠프의 한구석에 있었다.

하니엘은 언제나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년 같으면 항상 그런 상태로, 아니, 오히려 본래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 더 힘들었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돌아온 세피로트는 그리 로스엘과 그리 강한 연결로 이어져 있지 않다.

물론 로스엘은 그 사실을 좋아했다.

그리고 고장 난 모습으로 돌아온 자신을 충분히 좋아하고 있었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지. 난 그것을 굳이 거스르고 싶지는 않아.”

메타트론과 라지엘이 로스엘을 알아보지 못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일단 그럴 정신도 없었다.

희우는 노천사의 눈이 빠질 것 같다고, 갑자기 눈구멍에서 툭 굴러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엘은 그만큼 놀랐다.

“가브리엘이군…….”

“가브리엘이죠.”

“대체 어떻게?”

“전에 주신 검, 부서졌어요. 그래도 덕분에.”

대답은 준비되어 있다.

납득할 만한 대답.

로스엘 루트로 가면 이들도 결국 적이다.

하지만 지금 미리 처리할 수는 없고 결국 정정당당하게 맞서 쓰러뜨릴 필요가 있는 적.

그러니까 전력에 대한 것은 흐리면 흐릴수록 좋다.

요행으로 보이지는 않되 자신이 아는 범주 내에 있다는 착각을 주는 편이 최고다.

희우의 태도는 정확히 그것에 부합했다.

어차피 검을 숨기고 있으면 알 수는 없다.

메타트론은 그것까지 알고도 감탄하며 말했다.

“산달폰과는 전혀 달랐을 텐데.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희우는 그런 와중 라지엘, 그러니까 릴리움의 표정이 평소와 살짝 달라진 것을 보았다.

물론 티는 내지 않는다. 조엘도 그 사실은 모르고 있다.

“어차피 진짜 가브리엘은 죽었어요. 이건 남은 흔적 같은 거죠.”

“세피로트에는 그런 문제가 있지. 뒤섞어 버려. 인간이 아닌 존재를 인간으로 만들고, 인간이던 존재를 인간이 아니게 만들지. 조심하게나.”

“걱정은 감사합니다. 이 천사는 우리가 마음대로 해도 될까요?”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 뜻대로 하시게 사도들이여. 정말. 내 정말 감사하고 있으니.”

미카엘과 그 아래의 두 대천사에게 왕좌를 찬탈당했던 전 대천사가 흐뭇하게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내 자네들이 힘쓰는 동안 재밌는 것을 하나 발견했네. 나중에 시간이 난다면 들러주게.”

“리더가 회복되면 찾아갈 겁니다.”

“일들 보게나.”

조엘이 떠나고도 눈치를 좀 보던 로스엘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희우에게 말했다.

희우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표정만 봐도 뭔가, 뭔가 좋은 일은 아닐 거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저기, 내가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순순히 털어놓는 로스엘의 수작을 들으며 희우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이 히든 루트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일련의 흐름일까?

이 가브리엘을 살려두는 게 정답이었을까?

돌이켜 보건대, 그런 식으로 후퇴하지 않았다면 로스엘이건 파티원이건 누군가는 잃었을지도 모른다.

라파엘은 분명히 잠깐이나마 혼란을 겪었고 그 틈에 어떻게든 탈출이 진행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로스엘을 꼬리 자르기로 던지고 후퇴할 수도 있었다.

아니, 거의 그랬을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탓할 수는 없지.

애초에 훌륭한 임기응변이 아닌가.

희우는 평범하게 대응했다.

“잘했어요. 그럼 라파엘이 여길 찾아올까요?”

“모르겠어!”

“세계의 구멍 같은 건 찾기 힘든 건가요?”

“세피로트에 앉은 천사에게는 힘들지. 나도 하니엘의 모습일 때는 찾을 수 없었고 말이야.”

오빠가 말한 것과 같다. 멀쩡한 천사는 찾을 수 없다.

쇠락하고 몰락한 존재만이 그와 가까운 심연의 영역을 드나들 수 있다.

그러니 기계무덤은 버려진 땅이다.

“으으음, 알겠어요. 일단 라파엘이 정말로 당장 쳐들어올 가능성은 낮은 거군요.”

진짜 그럴까?

오빠가 제시한 휴식시간은 반나절이다. 그 이후에 계속 연전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란 기분이 든다.

항상 소모가 문제다. 메인 던전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지친 상태로 이어지는 전투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사태에 진척이 있을수록 모든 것이 더 급박하고 빨라진다.

하물며 지금 진행 중인 잘 알 수 없는 이 루트는 훨씬 더 정신없고 난장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희우는 우선 가브리엘을 깨워보기로 했다.

장비, 그러니까 드롭 아이템은 이미 다 회수해 두었다.

이 가브리엘은 평범한 대천사다. 병사조차 아닌 민간천사.

말이 이상하지만, 일대일로 제압하는 것마저도 아주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을 대비해 여러 후유증으로부터 회복된 파티원들이 가브리엘의 곁으로 모였다.

꽁꽁 묶어놓은 것은 물론이다.

“기분 좋게 자고 있는데요.”

“왜 이렇게 행복해 보이는지 모르겠군.”

“어딘가 때려주고 싶은 얼굴인데요.”

파티원들이 다들 불평한다. 그야 조금 전까지 이 천사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단 한 번의 타격도 허용하지 않고 승리했음에도 포션이 없으니 후유증으로 죽을 고비를 다시 넘기는 와중이다.

리더는 아예 쓰러져 치료 중이고.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기 전에 희우는 가브리엘을 깨웠다.

기억이 온전한지 확인하고, 필요한 정보를 알아내 보자.

모든 것이 아니더라도 이대로 묶어둔 채 라파엘에 대한 방패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빠가 아는 정보로도, 로스엘이 아는 정보로도, 라파엘은 가브리엘에게 약한 면이 있다.

은발의 뽀송뽀송한, 희우 본인보다도 조금 어려 보이는 얼굴의 뺨을 마구 때린다.

일어나지 않는다.

“좀 더 세게 때리도록 하지. 내가 할까?”

아서가 너무나도 담담하게 말한다.

옆의 에길도 거든다.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그냥…….”

뺨을 더 가열 차게 치기 시작한다. 희우도 슬슬 짜증이 치밀어 그냥 죽여 버릴까 생각할 무렵 가브리엘이 신음을 냈다.

가브리엘이었던 천사.

가브리엘은 맞되, גַּבְרִיאֵל은 아닌 천사가 눈을 뜬다.

“우에에, 미카엘 때리지 마…….”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뜨고.

“히 히이익.”

겁에 질렸다.

사방에 악몽의 존재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노려보고 있다.

고위 천사였던 것은, 혹은 그 기억과 인격을 가진 찌꺼기는 온몸을 비틀며 자신의 악몽과 멀어지고자 했다.

희우가 한숨을 내쉬며 다가간다.

가브리엘은 온몸을 비틀며 입을 어버버하기 시작했다.

비명조차 아닌 괴성을 내며 버르적거린다.

땅과 몸을 마구 마찰시키기 시작했다. 패닉에 빠져 안간힘을 다해 도망치고자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

다시 뺨을 친다. 맥도 짚어본다.

그리고는 어이없어하며 파티원들을 돌아보았다.

“이 녀석 기절했는데요.”

“겁에 질려서인가?”

“아니, 왜 얘가?”

제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천사라는 거 쉽게 기절하는 거였어요?”

“전혀 아니죠. 지능 스탯 보정 종족값이 몇인데.”

“그렇긴 한데…….”

희우는 가브리엘이 보여준 표정을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한참 고민한 끝에 어디서 보았는지 알 수 있었다.

3층에서 프로방스를 보고 온 오빠가 꼭 그런 표정이었다.

“우릴 무서워하나?”

제니가 눈을 불쾌한 듯 가늘게 뜬다.

“무섭긴 지가 훨씬 무서우면서. 인간도 아닌 게.”

꿈에 가브리엘의 거대한 본체를 다시 보게 되면 방광이 느슨해질 자신이 있다.

제니는 속으로 잔뜩 투덜거리며 생각했다.

천사는 아무것도 배출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진짜로.

다시 떠올리자 또 오금이 저린다.

제니는 다리에 힘이 풀리지 않은 척하면서 주저앉았다.

안 된다. 아직 라파엘도, 악마들도, 어쨌건 많은 적들이 남았다.

다행스럽게도 파티원들은 제니가 쉬기 위해 앉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손을 뒤로 짚고 앉아 가능한 거만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한다.

갑자기 축축하고 따뜻한 것이 손에 닿았다.

“응?”

혀였다.

디스트로이어가 할짝할짝 핥아주고 있다.

그리고 힘내라는 듯 애옹하고 울어준다.

서열 아래의 고양이가 의기소침하자 챙겨주는 것 같은 모양새다.

제니는 피식 웃었다. 진짜 기운이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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