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49화
메인 던전 - Lv.4151 기계무덤의 캠프(5)
나를 정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으로부터 출발하는가?
다시 눈을 뜬 가브리엘이 그 질문을 떠올린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죽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고위 천사는 죽었다.
그녀는 죽었다.
지금 남은 것은 그 기억과 성격을 계승한 다른 존재다.
그것이 현재의 가브리엘이었다.
“죽었구나.”
그건 아주 기묘한 기분이었다.
사후세계라는 개념은 고위 천사에게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는 개념이었다.
그래도 지식으로는 안다. 그곳에 온 것 같았다.
“죽었어…….”
완전히 낯선 무언가였다.
그리고 새롭게 받아들여야하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살아있을 필요가 있을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진다.
위대함의 편린조차 잃고 추락한 끝에 남은 세피로트의 부작용이다.
아무 가치도 없는 찌꺼기다.
기억으로는 남아있는 긍지와 자존감 모두 흔적조차 없다.
* * *
* * *
그냥 필멸자다.
무시하며 하찮게 여기던 필멸자.
악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다시 세상을 수복한다면 그녀를 위해 세상을 일굴 예정이던 필멸자.
특별히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가브리엘은 조금 시무룩한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몸은 꽉 묶여있다. 날개까지 펼 수 없게 압박당하고 있다.
운신에 자유가 전혀 없다.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임시 감옥 같은 곳에 갇혀있다.
기분만으로는 쉽게 부수고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전히 인간에 비하면 강할지는 몰라도 ‘힘’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전혀 남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무력하다.
그래서 그냥 멍하니 있기로 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영광된 바벨의 자식은 이미 죽었다.
세피로트의 좌에 앉아 인간 놀이를 하던 껍데기만 이곳에 공허하게 앉아있을 뿐이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굉장한 악몽을 꾼 것도 같았지만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떠올리려고 하니 오싹해져 생각을 멈춘다.
하염없이 그러고만 있다.
그대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가브리엘은 얌전하게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고 죽음의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인간의 몸은 약하다.
단순한 신체 능력을 비롯한 스탯 보정의 종족값 자체가 낮다는 식의 문제를 넘어서서 약하다.
감기에 걸려 죽는 천사는 없다. 감기에 걸려 죽는 인간은 있다.
이건 그냥 종족의 차이다.
“으아, 피곤해.”
좀처럼 나아지는 느낌이 없지만 그래도 [용사]덕에 살아 있긴 하다.
인간 모양 드래곤으로 만들어준다는 것도 종족 자체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
천사의 근육은 인간보다 구조적인 내구도가 더 높다.
다른 파티원들이 기껏해야 피로로 고통 받는 동안 나는 생명의 위기를 넘겨야했다.
내부에서 마력을 폭파시키는 형태로 사용된 근육은 파열을 일으켰고 녹아내려 혈관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블랑쉐의 적절한 조치가 없었다면 검은 화면을 보며 눈을 떴을 것이다.
“가브리엘을 가둬뒀다고?”
“깨우니까 파티원들을 보고 도망치려고 애쓰다가 기절하더라고요.”
“우릴 보고 겁에 질려? 왜?”
“그걸 아무도 모르고 있어요.”
희우는 내가 뻗어있는 동안 이것저것 많은 일을 진행했다.
가브리엘의 상태에 대해서 조엘에게 조언을 구한 것도 그 일환이다.
“지금은 인간인척 지내고 있는 분답게 고위 천사 심리에 빠삭하시구먼.”
역지사지하니 쉽긴 하다. 개미에게 잡아먹힌 경험이 있는 인간은 개미를 보면 몸서리를 치겠지.
“혼자 들어갈게.”
“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앞에서 기다릴게요.”
회복력 자체도 다들 인간과는 다르다.
내가 위독한 동안 어찌 활동할 만큼은 회복한 모양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임시 감옥을 살펴본 후에 문을 열었다.
은발의 얌전한 천사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눈을 돌린다.
그리고 난 인간형 생물의 동공이 그렇게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힉.”
큰 소리도 아니었다. 작고 짧은 신음만으로도 감정이 전부 느껴진다.
또 넘어가겠네.
마법을 구성하여 날린다.
눈이 뒤집히기 직전의 가브리엘이 진정 작용이 있는 빛 속성 마법의 효과를 받아 숨을 헐떡이기 시작한다.
과호흡인가?
귀찮은 조치를 모두 한 끝에 가브리엘이 울먹이며 말했다.
“빨리. 빨리 죽여줘.”
“왜?”
“너, 무서워. 싫어. 다시 돌려보내줘. 돌아갈 거야.”
어디 정신적으로 좀 망가진 것 같은데. 이해는 간다.
죽고 나서 눈을 떠보니 개미가 되어 날 물어 죽인 개미들 사이에 있다.
멘탈이 바삭바삭해지겠군.
“좋아. 죽고 싶다면.”
굉장히 악당 같은 기분이군. 로스엘은 실제로 그런 감각에 심취해서 일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내 말대로 해줘야할 거야.”
가브리엘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거 귀중한 소재인데. 혹시 출신이 다른 치천사면 뭐가 또 다른 효과가 있으려나?
습관적으로 눈물을 채취하다가 가브리엘이 다시 기절할 것 같아서 포기했다.
시간을 둘 필요가 있었다. 나도 가브리엘도 말이다.
드러누워 있다가 심문하러 들어가고를 반복한다.
가브리엘은 조금씩 안정되어가며 대화와 사고가 가능한 수준까지 왔다.
“……뭐가 필요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 네가 아는 것.”
가브리엘은 반쯤 울면서도 어떻게든 내 질문에 모두 대답해냈다.
나는 아직 가브리엘을 죽이지 않은 채, 감옥을 나섰다.
안타깝게도 가브리엘이 아는 것이 많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형태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내가 알던 것과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지를 더듬을 수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미카엘은 적극적으로 성배를 수색하기보다는 우선 성지를 확보하려고 움직이고 있었고, 그렇게 하여 우리엘을 확보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쥐새끼의 행방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성배 셋이 모두 모여야 할 테니까.
“거기에 이제 로스엘이 라파엘도 끼얹었군.”
가브리엘과 라파엘은 미카엘의 뜻을 따르긴 하지만 별다른 야망 같은 것은 없는 존재였다.
시키니까 할뿐,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아니었다.
라파엘은 지금부터 아주 능동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어, 그러고 보면 가브리엘이 우릴 상대할 때, 꽤 의욕 없어보였죠?”
“그게요?!”
제니가 화들짝 놀랐지만 블랑쉐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얕보지만 않았을 뿐, 정말로 질 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을걸. 그런데 지금부터는 확실히 아니야.”
제니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진다. 에길이 그 등을 토닥였다.
앞으로 조금 더 힘들어질 것이다.
악마측도 갑자기 끼어든 유배자를 의식하게 될 거다.
릴리움이, 그러니까 라지엘이 나헤마에게 정보를 흘릴게 분명하니까.
“물론 그렇다고 갑자기 달라지진 않을 거야. 가브리엘이 쓰러진 것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겠지만 편린들이 수만 년간 유지해온 생각이 한순간 바뀌진 않을 거니까.”
“그럼 좀 할 만한 게?”
“그렇다고 시간이 넉넉한 건 아냐. 늦게 상대하는 보스일수록 더 의식을 바꾸어가겠지.”
최선은 단숨에 몰아치는 건데 이번 전투의 꼬라지를 보니 정말로 보스러시처럼 생각했다가는 죽을 수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간을 들여 공략하면 점점 더 힘들어만 질 것이다.
“그러니까 최소한의 휴식으로 움직인다. 스킬 쿨다운이나 소모품보다는 오히려 우리 몸이 문제가 되는 경우야.”
나에게도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단순히 파밍겸 레벨링을 위한 노가다는 이미 게임 시절에 뗀 것이다.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다면 뭐든지 장기전이 되지 않고, 그러므로 소모를 걱정할 필요가 줄어든다.
“길게 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어. 내 생각에는 몇 달씩 시간을 줄 수는 없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한 달 남짓인 거 같은데.”
일단 한숨부터 나왔다.
회복의 샘을 탈환한다 치더라도 치명적인 생물학적 부작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뿐이다.
체력이나 기력, 혹은 마력 그 자체를 생각하면 한정된 자원에 가깝다.
제대로 쉬고 만전을 기할 수 있는 것은 게이트를 찾았을 때뿐이다.
파티원들의 안색이 한눈에도 안 좋아지는 것이 보였다.
결속과 희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없는 문제가 있다.
“단기결전이 불가능한 것을 단기결전으로 해내야하는군.”
“생각했던 것보다 보스 난이도가 더 지랄나긴 했습니다. 저도 생각 좀 해봐야겠는데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라파엘을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야 해요. 가능하면 내일이 오기 전까지.”
“그게 가능한가?”
에길조차 약간 질린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해야 합니다. 미카엘은 이제 돌아가는 상황을 모두 파악했고 라파엘과 합류하겠죠. 다시 편린 둘을 동시에 상대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나헤마도 상황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악마군단장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게 분명하다.
“천상의 도시는 이미 끝났습니다. 가브리엘이 죽은 이상 균형이 무너졌죠.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했는데?”
“우리가 라파엘까지 한 번에 처리하고 그 전리품으로 미카엘을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말하다보니까 이게 정규 루트가 과연 맞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내가 뭔가 실수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진행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게 맞는가?
미카엘과 라파엘을 동시에 상대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악마군단장들도 곧 나타날 것이다.
전장에서도 이미 후방의 변고를 알겠지.
다 같이 꼬여가는 기분이다.
방법.
방법을 찾아야한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
우리가 이길 수 있나?
“잠깐 산책 좀 하고 올게요.”
파티원들이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미아는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했다.
체력이 이렇게 약점으로 작용할 줄이야.
예상 못한 변수가 너무 많다.
나에게는 우선 확신이 필요했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다는 확신.
그게 없다면 무슨 말을 해도 파티원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없을 것이다.
나를 믿는 파티원들을 배신하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부터 확실한 무언가를 찾아내야한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서두르지 말고 악룡처럼 시간을 들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죽지 않게 조심하며 막대한 세월을 들여 어마어마한 스펙을 쌓아올리는 거지.
터덜터덜 걷는데 어떤 천사 소녀가 보였다.
유리였다.
“왜 그렇게 침통한 표정이세요?”
“음…….”
이 네임드 NPC도 굉장히 깊게 엮여있는 문제다.
유리는 우리엘이다. 더 정확히는 아직 우리엘이 되지 못한 존재다.
미카엘이 성배를 모으려는 이유도 유리 때문이다.
고위천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어 악마와의 전쟁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고자 했다.
그렇게 기계신의 힘을 이용하여 하니엘처럼 위대한 존재로 승천할 수 있을만한 천사를 만들어내려고 시도했다.
메타트론은 처음부터 그걸 반대했다.
그에게, 그리고 베데스다 종파에게 기계신은 진짜로 신앙의 대상이었으니까.
일종의 신성모독처럼 받아들여졌으리라.
그래서 미카엘은 메타트론을 거역했고, 메타트론과 라지엘은 실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냥 쫓겨나지는 않았다.
우리엘 만들기의 부산물인 어린 천사들과…….
유일한 성공작인 유리를 데리고 도망쳐 몸을 숨겼다.
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대답이 없자 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우리엘…….
차라리 우리엘을 내가 만들어야 하나? 유리를 아군으로 돌려서?
하지만 그게 될까. 하니엘을 제자리로 돌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생각과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유리를 이용할 생각을 하면서도 말과 동작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별일 아니야.”
“그러고 보니 조엘 할아버지께 가보셨어요?”
“아, 그런 말이 있었지. 무언가 찾아내었다고?”
“네네. 사도님들이 좋아하실 거라고.”
조엘이 뭔가를 도와주는 케이스는 거의 없는데.
힘을 되찾아준다면 미카엘 전에서나 도움을 주는 NPC다. 그건 아예 성지가 털린 지금으로서는 요원한 일이다.
유리를 따라가니 노천사의 모습을 한 메타트론, 조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나?”
“덕분에 문제없습니다.”
“우리는 사도님들에게 도움을 받기만 했지. 성지조차 들켜 밀려나버리지 않았나. 그래서 무언가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을 좀 해보았다네.”
조엘이 먼저 날아간다.
나도 따라가며 대체 이 양반이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 했다.
산달폰이 있던 기둥까지 도달하자 릴리움이 있었다.
“한때 번성했던 이 시대의 유산이자 YHVH의 흔적이지. 그리고 릴리움은 아주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 비록 우리가 성지를 잃었으나 성배는 가지고 있지 않은가.”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다.
설정상으로는 그렇다.
라지엘은 지식의 천사.
그녀의 지식은 대체로 이 세상을 조율하는데 사용되었다.
기계신을 다루는 것에서는 최고의 전문가다.
애초에 그렇기에 그녀는 그 힘에 경외를 가지게 되었고 그 경외는 신앙이 되었다.
본래의 게임에서 그것이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라지엘은 그냥 평범한 선택형 보스 중 하나였으니까.
무언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기둥 하나에 불과하더라도 위대한 YVHV의 힘은 우리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죠.”
그래, 바벨의 주변에 날던 라지엘은 파괴밖에 없는 고위 존재들의 힘에 절망하여 창조를 할 수 있는 저 힘을 경외했지.
그리고 누구보다 그것을 열심히 알고자 했다.
“성배를 안치할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이 기둥에서 힘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샘물만큼은 아니더라도 회복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겠죠.”
조엘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상처를 그리 빨리 낫게 할 수는 없겠지만, 지친 몸을 돌보거나 오래 걸리는 마력 회복을 촉진할 수는 있을 걸세.”
릴리움이 자랑스럽게 덧붙인다.
“안치된 성배가 늘어날 때마다 기능이 확장될 겁니다. 지금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한치 앞도 모를 진행 속에서 흐려졌던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되살아난다.
산달폰을 쓰러트려 이 기둥을 확보했고, 그 덕에 은신처의 천사들이 이곳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
새로운 거점이 된 이곳에서 성배를 사용할 새로운 수단도 준비되어 있다.
아마 이곳이 거점이 된 이유 그 자체일 것이다.
실로 게임적이며 미궁적이다.
불가능한 도전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주 어려울 뿐, 가능한 것을 시킨다.
나는 제대로 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 미궁의 섭리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