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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450화 (521/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450화

메인 던전 - Lv.4151 기계무덤의 캠프(6)

몸이 힘들어도 확신이 생기는 동시에 뭔가 얻을 것이 생긴다면, 어디선가 힘이 솟구친다.

릴리움은 내게 일종의 스킬트리를 제시했다.

물론 말을 진짜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어딜 보아도 그런 기능을 하는 거점 레벨업 도식이었다.

36가지의 테마 중에서는 이런 일을 진행해야하는 곳이 있다.

테마 자체가 디펜스인 곳이다.

거점을 레벨업하고 더 많은 기능을 해금하여 이로운 효과를 늘려나간다.

“어라? 그럼 혹시 디펜스 진짜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도 모르지. 일단 중요한건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야.”

희우가 슬쩍 주변을 보더니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오빠, 확신 없었어요?”

“제길, 나도 이따위 루트는 처음이라고.”

웃으면서 그 말을 할 수 있었다. 해결되었으니까.

파티원들도 내 말에 웃었다. 뭔가 어그러지는 일은 없다.

좋아, 해프닝이다. 잠깐 흔들렸을 뿐이다.

일단 듣고 온 사실을 설명했다.

파티원들은 여전히 요양하고 있는 상태에 가깝지만 내가 한 말을 듣고 꽤 좋은 표정이 되었다.

* * *

* * *

“온천이라. 그것도 홀리쉣한 온천이로군.”

“아서, 그 말은 어디서 배웠어요?”

“제니.”

미아를 안고 있던 제니가 눈을 피했다.

“아니, 왜 그. 영국의 신화 속 인물에게 아메리칸 스타일의 말투를 가르치면 재밌지 않을까 해서.”

좋아. 뭐 농담을 할 만큼 정신적인 기력이 돌아온 모양이다.

한가하게 옷을 벗고 들어갈 처지는 아니었다.

완전 무장한 채로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은 여러 가지 기분이 드는 행위다.

성배 하나를 안치했다.

쥐새끼가 그랬듯 그곳에서 힘이 뻗어나가 기둥을 휘감는다.

그리고 아래에 릴리움의 말에 따르면 창조적 신성이라고 하는 기계신의 힘이 흘러나와 고였다.

사실 물도 아니고 온천도 아니지만 몸을 담그고 있으면 회복된다는 점에서 직관적으로 부를만 하다.

“따뜻하긴 하네요.”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다. 플라시보 효과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그러하겠지. 영혼에 스며든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산달폰이 이 기둥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려나.

“이게 우선 성배 하나로 열 수 있는 기능.”

그 말에 다들 자세를 달리한다.

“이제 다들 이 말만 듣고도 이해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마인드맵과도 비슷한 것이겠군. 효과는 랜덤인가?”

“그렇지는 않아요.”

“그 부분은 다행이군.”

2번째 성배를 안치하면 기둥에서 또 다른 기능을 택할 수 있다.

3번째, 그리고 4번째도 있었다.

물론 릴리움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의미로 그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이런 환경에서 그런 말은 그게 된다는 뜻이다.

“대체로 회복이나 정비에 도움이 되는 기능입니다. 장비 수리 기능은 저도 처음 보는군요.”

에길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가 도끼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몰랐겠어.”

“뭐 어떻습니까.”

“전사에 애병이란 말이지…….”

블랑쉐가 조용히 일어서서 에길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에길은 뚱한 표정으로 말을 멈추었다.

어쨌건 미궁으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편의를 봐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래서 도리어 싸해지는 부분도 분명 있다.

“와, 미궁이 이상한데요. 왜 이렇게 퍼주죠? 우릴 죽여 버릴 셈인가.”

“……그 생각은 나도 해보긴 했는데. 일단은 미궁의 의도대로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건 맞다는 점이 다행이야. 창의적인 플레이 이상을 하는 중이었다면 더 큰 고난이 닥쳐오고 있었겠지.”

미궁에 게임 기획적 일관성이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놓치는 부분이다.

미궁에 의지가 있다는 소리는 다들 은연중에 하면서도 막상 그 의지의 심리를 파악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게이트 내부의 서버 따위에서는 어떻게 편법을 구사하여 창발적 플레이를 하더라도 문제없으나, 메인 던전은 비교적 선형적이며 딱딱한 곳이다.

어느 정도는 정해진 해법을 따라가긴 해야 한다.

이건 게임 기획적으로도 별 수가 없는 일이다.

최종 시련의 난이도가 들쭉날쭉할 수도 없고 난이도가 낮을 수도 없다.

그러니 일정한 난이도로 고정하기 위해 선형적 구성을 취하게 되고, 클리어 하는 방식도 이전보다 좁혀진다.

적어도 메인 던전은 오픈월드가 아니다.

오픈월드처럼 보이는 선형적 던전이다.

완전히 정석 루트로 가도 벅찬 이곳이 미궁의 섭리에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된다면…….

그 순간부터는 진짜로 클리어 하라고 만들어둔 게 아닐 수 있다.

불합리함과 부조리함의 폭격을 맞으리라.

미궁이 의도한 시련의 범주를 스스로 벗어나는 것.

잘 모르는 루트로 메인 던전을 진행하며 조심해야할 문제다.

“사실 전 이게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면 그게 더 좋았을 거라 생각해요.”

제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충분히 불합리하고 부조리하지 않아요?”

“그게 의도된 수준의 내니까 다행이지.”

제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것 같다.

이 메인 던전에 발을 들이고 지금까지 해온 모험이 정규 루트라고?

믿을 수 없겠지.

하지만 언제는 믿을 수 있는 곳이던가.

“대신격들의 메시지 보았잖아. 원래는 이 정도가 아니기도 해.”

“확실히 이토록 어지러운 상황 전개는 이전에는 본 적이 없다.”

유일하게 공략 시도 경험을 가진 아서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에 추가로 대신격들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 없죠?”

모두 고개를 젓는다.

다들 그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보았을 것이다. 여유가 없어서 깊이 생각할 틈은 없었다. 하지만 메시지 내용 자체가 꽤 노골적이었다.

“어쩌면 모든 것이 가짜.”

“맞아요. 그럴지도 몰라요.”

진짜는 없다.

미궁의 클리어 보상이란 것은 진짜로 만들어준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귀가 맞죠. 기억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본게임이 아니었던 겁니다.”

모두가 이미 그렇게 잠정결론을 내렸던 모양이다.

내 말에 놀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말이야. 클리어 한 왕국만 진짜가 된다거나.”

“다른 건 다 사라지려나요.”

뭐, 오순도순한 담소였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더 이상 누구도 고통 받지 않는다. 미궁의 끝에 정답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곧 미아도 깨어났다. 체력과 정신력 그 자체를 회복해준다는 것은 아주 신기한 현상이다.

어린 데몬 마법사가 깨어나자 재미로 하는 MVP 투표가 진행되었다.

본래 그런 것을 했던 건 아니다. 미아가 굉장히 칭찬받고 싶어 한다는 제니의 첩보가 있었다.

말이 투표지 그냥 하나 둘하고 손가락 가리키기였다.

미아는 몰표를 받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작 미아의 손가락은 라리사를 향해있다.

“아니었다면 다 죽었을 테니까요!”

발랄하게 할 수 없는 말을 발랄하게 하는 수양딸을 보며 기분이 이상해졌다.

미궁은 이상한 것이 정상인 곳이지만, 내 인간이고자 하는 마음은 가끔 바깥의 상식을 가져와 들이대기도 한다.

그 위화감을 고개를 흔들어 떨치고 파티원들은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시간은 많이 흐르지 않았다.

5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스포츠 경기도 하루에 두 세 경기씩 하진 않는다.

그러나 목숨이 걸린 메인 던전의 진행은 넉넉한 휴식을 보장해주지 않음이다.

미아는 가브리엘의 지팡이와 완드를 받아들었다.

결국 전문 마법사는 미아뿐이니 이것은 온전히 미아의 것이다.

“뭔가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드는데요.”

“착용 제한은 옛날에 넘긴지 오래니까 곧바로 선택받아서 그래. 게다가 이거 수르트보다 더 급이 높은 보스의 드랍템이니까.”

등급으로 따지면 미궁의 최고등급 되시겠다.

이건 고위 천사인 가브리엘의 일부다. 저쪽에 갇혀있는 껍데기보다 오히려 이 장비가 더 진짜 가브리엘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미아는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신이 났다.

“라파엘은 더 편하게 진행할 수 있겠군요.”

“가브리엘의 권능이 라파엘의 패턴을 효율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을 거야.”

그럼 택틱이 변한다.

첫 사용을 실전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미아가 몸소 지팡이를 휘두르며 시연했다.

물이 차오르고 달이 떠오른다.

“스태프가 달빛, 완드가 고여 있는 물이군요.”

“권능의 결정체니까.”

성능은 아주 쉽다.

가브리엘이 했던 것을 전부 비슷하게 구현할 수 있다.

라파엘의 사막 속에 오아시스를 만들 수 있으리라.

“라파엘의 드롭템까지 챙긴 후에 미카엘을 처리하거나 악마 군단장과 마주치는 게 최선이야. 원래 파밍할수록 강해지는 게 RPG니까.”

이 또한 상성의 문제다. 천사의 무기는 어둠 속성에게 강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어둠의 존재들 또한 빛에게 강하긴 하다. 그러나 우리는 어차피 한두 발이면 죽으니 딜링만 강해지면 땡인 법.

“방어는 일부 케이스 말고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말이야.”

“그 방어는 제 역할이구요!”

마법사의 역할이 바로 그거다. 어차피 맞으면 죽을 공격들을 회피시켜주거나 공간왜곡들의 유틸로 활로를 찾아내는 것.

탱커로 아무리 특화해도 극후반에는 빛이 바랜다.

모든 패링을 성공한다면 모를까 그건 목숨이 하나 뿐인 로그라이크에서는 믿기 힘들다.

리온과 라리사도 미아와는 친한 편이다. 희우의 친화력도 관계도 이슈로 그다지 활약하지 못한 참이다보니 별 수 없다.

귀여운 마법사가 눈을 뜨자 파티에 활기가 돌아온다.

“우선 미카엘과 라파엘의 위치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천상의 도시는 곧 악마들의 공격을 받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그럼 끝이네요.”

“많이 힘들어지지. 그 전장에 우리가 끼어들어서 뭔가 하기는 힘드니까.”

“라파엘과 미카엘은 우리를 찾느라 눈에 불을 켰을 거고요?”

“그럴 가능성이 높아.”

출발한다.

두 천사가 합류하기 전에 처리해야한다.

미카엘은 설마 자기가 자리비운 며칠 동안 본거지가 홀라당 털리고, 가브리엘과 라파엘이 쓰러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이다.

지금 다 해야 한다.

회복되었다곤 해도 뻐근한 몸을 이끌고 모두 움직인다.

다음 리프트를 발견할 때까지 쉴 틈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성배를 가져오면 이런 회복수단이 생기도록 안배하지 않았겠나.

라파엘은 혼란에 빠졌다.

가브리엘을 잃었다.

정말로 완벽하게 잃었다.

그녀의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다.

지난 수만 년간 함께했던 기억이 플래시백 된다.

성배도 잃고 도시도 사실상 끝장났다는 것도 한참이나 더 있다가 알게 되었다.

세피로트는 의미가 없다.

이제 라파엘에게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구하러 와?

자칭 사랑의 천사가 가증스럽게도 지껄인 말이 생각난다.

라파엘은 미칠 것 같았다.

살아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다.

죽었다.

가브리엘은 죽은 것이다. 불멸자가 한낱 필멸자의 손에 말이다.

사랑도 긍지도 모두 불타 스러졌다.

라파엘은 더 이상 자신이 세피로트의 천사로서 본신의 힘을 비축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미카엘의 말을 들어온 것은 단지 그 녀석이 그러고 싶어 해서일 뿐이다.

이젠 그럴 이유도 없다.

세상이 어찌되는지는 알 바가 아니다.

모두 불태우리라.

“오라고 했었지.”

하니엘. 그 가증스러운 얼굴을 떠올린다.

“내 너희들을 찢어 죽여주마.”

세피로트의 좌에서 일어선다.

인간의 형태가 분해되어 사라진다.

라파엘은 이제 확신했다.

이 불길 같은 격정은 인간 놀이를 그만두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바벨의 자식인 רפאל로 돌아가더라도 그는 여전히 이 분노를 간직할 것이다.

한때 인간이었던 것들의 자손, 그리고 그와 가브리엘의 권속이기도 한 천상의 도시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라파엘은 그들을 티끌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태양이 떠오르고 불길이 폭발한다. 천상의 도시 전체가 작렬하는 화염에 휩싸인 다음 순간, 불길의 날개로 휩싸인 거대한 수레바퀴가 떠올랐다.

너무나도 눈부셔 하늘에 떠오른 태양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방이 사막으로 뒤덮이기 시작한다.

강렬한 열풍을 남기고 라파엘은 사라졌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고통스러운 소리가 널리 퍼져나간다.

[어디 있느냐!]

그리고 그렇게 라파엘이 떠나가고 세 시간 정도가 지나간 후, 라파엘의 원수들이 다시 천상의 도시에 나타났다.

“뭐야? 불타버렸잖아?”

“폭주했나본데요?”

사막이 꼬리를 끌고 길게 이어져있다.

권능의 흔적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 흔적만으로도 분노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가야 해!”

“저걸요?”

“여기 있다간 미카엘이랑 마주칠 거야. 돌아오고 있을 수밖에 없잖아.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어!”

제니의 귀가 축 처졌다.

“이젠 시작부터 3페이즈에요?”

로스엘이 그 모습을 보며 다가가서 안아준다.

“사랑스러운 유배자 고양이! 너무 슬퍼하지 마! 이젠 로스엘이 있어!”

“그건 참 위로가 되긴 하네요…….”

제니는 정말로 위로를 받았다.

어쨌든 이쪽에도 시나리오 보스가 있다.

좀 나사가 빠져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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